들뢰즈가 칸트를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독자로서 본서는 칸트의 독창성을 인정하는 들뢰즈를 바라보는데는 유익하지만, 칸트를 제대로 알기는
힘들다. '니체의 철학'에 비해 감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의 니체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은 사실, 칸트를 이해하고 나서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은 근세철학의 시발점이었다. '신'이 아닌 이제 인간의 사고가 언명되는 순간이다. '신'이 완전히
'인간'으로 대체 된 것은 아니지만,(카톨릭 영향권에 있는 프랑스 철학자가 신을 지우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인간의 존재론적인 측면이 훨씬
강화된 것이다. 칸트는 이제 인간의 존엄성을 한층 더 끌어 올린다. '선험성'이라 말이 독특하면서도 그래도 기존 역사의 흔적을 모두 지운 것은
아닌데, 인간을 충분히 목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신의 도구이다. 신이
목적이라면, 인간은 그저 도구이자 과정일 뿐 이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인간을 목적으로 승화 시킨다. 그렇기때문에 복잡하다. 오성, 이성,
감성이 본서에서는 이성, 지성, 상상력으로 번역되었다. 이 세 가지의 능력들이 종합적으로 이해되고 작용되는 과정이 쉽지 않다. 그렇기때문에
도식화 되고 기준이 마련된다. 범주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칸트의 인위적인 범주화와 도식화다. 이것이 선험적이라고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
이제 외부로부터 주어진 원인이 이제 내가 된다.
즉, 목적으로써의 신이,
목적으로써의 인간이 된것이다. 이러한 칸트를 거치지 않고 니체가 나올 수 없다. 칸트는 어쨌든 인과관계를 따졌던 철학자로서 기존 역사의 흐름을
바꾸진 못한다. 주체로서 인간을 철학사에 안치시켰던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들뢰즈는 이 부분을 강조한다. 물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책은 칸트의 철학을 들뢰즈의 이해를 바탕으로 쓰여졌기에 들뢰즈의 것이기도 하지만, 칸트적인 뉘앙스가 전적으로 느껴져야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라는
유명한 칸트의 명제는 신에서 인간,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지는 확실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혁명은 여전히 인과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차원에서 니체에 의해 다시 부정된다. 니체에 의해 노동자로 구분되었던 칸트지만, 이러한 칸트의 단계 없이 니체가 그의 철학을 발전 시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역자가 말한 들뢰즈의 칸트 중용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용은 곧 니체를 등장 시키기 위한 하나의
단계라고 봤을 때 우리가 이해하는 칸트는 아닐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타당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역시 들뢰즈의 것이다. 물론, 들뢰즈만의 것은
아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