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내편(莊子內篇)> 제1화 소요유(逍遙遊)
‘소요(逍遙)’는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뜻한다. 유(遊)가 즐거이 노닌다는 뜻이니 ‘소요유’는 마음 가는 대로 노니는 경지를 나타낸다. 어떻게 하면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마음대로 살 수 있을까? 장자는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인 곤(鯤)과 커다란 새인 붕(鵬)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곤과 붕은 우리네 상상을 뛰어넘는 곳에 있다. 크기가 몇 천리인지 모르는 곤이 변해 붕이 되는데, 붕의 등덜미 또한 몇 천리가 되는지 헤아릴 수 없다. 붕이 한번 기운을 떨쳐 날면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처럼 펼쳐진다. 하늘의 구름이 날개라면 붕이라는 새는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장자는 하늘을 뒤덮은 커다란 새를 상상한다. 괴상한 일을 기록한 <제해(齊諧)>라는 책을 보면, 북쪽 바다에 있는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가려 할 때에는 물결을 치면서 삼천 리를 난 다음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서 여섯 달 만에야 쉰다고 나와 있다.
물결을 치며 삼천 리를 난 붕새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 여섯 달 만에 쉬는 과정만 따져도 우리는 드넓고도 드넓은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붕새는 지금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려고 준비하는 중이다. 여섯 달을 날아 남쪽 바다에 이른 게 아니라는 얘기다. 장자는 구만 리를 올라간 붕새가 내려다보는 이 지상은 그저 푸르고도 푸를 뿐이라고 단언한다. 하늘은 너무 멀고멀어 끝이 없다. 수천 마리의 붕새가 한꺼번에 날개를 펴도 푸르고 푸른 하늘을 가리지 못한다. 요컨대 붕새가 노는 세상은 끝이 없는 우주, 곧 천지(天地)이다. 하늘 아래 사는 인간은 기껏해야 천하(天下)를 호령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마치 천지가 내보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장자 입장에서 보면 웃기고도 웃긴 일이다. 구만 리 하늘 위를 여섯 달 난 붕새도 천지의 끝자리에 서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그 모든 걸 안다고 떠든단 말인가.
장자는 자기 생각에 빠져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들을 다양한 대상에 빗대어 표현한다. 우선 매미와 산까치가 있다. 그들은 구만 리를 올라가 남쪽으로 간다는 붕새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훌쩍 솟아 날아야 나무덤불에 부딪히거나 때로는 그것도 잘 되지 않아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마는데”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매매와 산까치는 나무덤불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무덤불에 갇힌 존재는 나무덤불 너머를 보지 못한다. 당연히 그 너머를 보기 위해 준비(공부라고 해도 좋다)를 하지도 않는다. 장자는 십리 쯤 들판을 들러볼 사람은 세 끼만 먹어도 배가 든든하지만, 천 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석 달 동안의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알지 못한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하루살이가 어떻게 일 년 후를 예비할 수 있을까?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 대춘(大椿)이라는 나무에 비한다면, 팔백 년을 살았다는 팽조(요임금의 신하)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인간은 그런 팽조를 부러워한다. 그러면서 대춘이라는 나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트집을 잡는다. 매미와 산까치나 인간이나 무엇이 다른가. 매미와 산까치의 또 다른 변주 대상인 뱁새도 마찬가지다. 뱁새는 자기가 보는 세상으로 붕새가 나는 하늘을 상상하려고 한다. 붕새의 말에 귀를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뱁새는 눈과 귀를 닫고 풀밭 속에서만 이리저리 노닐 뿐이다. 장자는 “크고 작음의 차이”로 붕새와 뱁새를 구분한다. 붕새는 뱁새의 삶을 볼 수 있지만, 뱁새는 붕새의 삶을 볼 수 없다. 붕새는 뱁새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데, 뱁새는 붕새의 말을 거짓이라 치부한다. 뱁새나 붕새나 자기가 보고 들은 것으로 세상살이를 판단한다. 문제는 붕새는 뱁새의 바깥에 있지만, 뱁새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구름을 타고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손오공의 허풍을 매미와 산까치와 뱁새는 그대로 이어받았다. 손오공은 구름을 부리는 능력이라도 있었지만, 뱁새와 같은 인간은 그만한 능력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아는 듯 천지자연 앞에서 허풍을 떤다.
송영자(宋榮子)는 안팎의 분별을 정하고 영욕의 경계를 분명히 한 사람이다. 그는 온 세상이 칭찬해도 더 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온 세상이 그르다 해도 그만두지 않았다. 스스로 분별을 하고, 스스로 경계를 세워 어리석은 이들에 맞선 송영자였지만, 장자는 이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람을 타고 다니는 열자(列子) 또한 여전히 의지하는 바가 있다고 하여 지인(至人)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송영자와 열자는 분명 매미와 산까치와 뱁새의 수준을 넘어선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의지할 바 없이 스스로 노니는 지인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장자는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신인(神人)은 공적이 없고 성인(聖人)은 이름이 없다”는 말로 그 이유를 제시한다. 자기가 없다는 건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공적이 없다는 건 공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름이 없다는 건 이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얽매이는 순간 지인으로 가는 길은 한없이 멀어진다.
천하를 맡아달라는 요임금의 요청을 허유는 단칼에 거절한다. 겉으로는 요임금이 천하를 잘 다스리고 있다는 이유를 달고 있지만, 천하를 가져다가 쓸 데가 없다는 점이 왕위를 거부하는 실제 이유로 나타난다. 허유는 음식을 만드는 포인(?人)이 음식을 잘 만들지 못한다고 시축(尸祝, 신주)이 그 일을 대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이름은 실상이 아니다. 주인과 손님으로 따지면 이름은 손님에 해당되는 손〔賓〕일 뿐이다. 왕(王)이라는 허명을 얻기 위해 실상을 내버릴 수는 없다는 게 허유의 생각이다. 깊은 숲에 깃든 뱁새는 한 나뭇가지에 몸을 두고, 강물을 마시는 생쥐는 제 배를 채울 따름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 경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헛된 이름을 얻고 실상을 놓친 이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실상을 놓치고 허명에 빠진 이들은 실상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여 타박한다. 견오(肩吾)라는 이가 그렇다. 그는 연숙(連叔)에게 접여(接輿)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떠벌린다고 고한다. 접여는 막고야산에 사는 신인(神人)을 말했는데, 견오에게는 그 이야기가 참 황당했나 보다. 신인의 살결은 얼음이나 눈처럼 희고, 부드럽고 곱기는 처녀와 같다. 곡식을 먹지 않고 바람이나 이슬을 마시며 산다. 구름을 타고 나는 용을 몰아 사해(四海)의 바깥을 노닌단다. 접여를 이해하려면 사해의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견오는 사해의 바깥으로 나가기는커녕 어떻게든 접여를 자신이 만든 좁은 울타리에 가두려고 한다. 연숙의 입을 빌린 장자는 장님과 귀머거리 우화로 이런 견오를 비판한다. 견오는 정신적인 장님이고 귀머거리이다. 천지(天地)를 노니는 신인을 견오는 자꾸만 천하(天下)에 가두려고 한다.
천하의 어떤 것도 신인을 해치지 못할 걸세. 큰물이 나서 하늘에 닿아도 그는 빠지지 않을 것이요, 큰 가뭄에 쇠와 돌이 녹고 흙이나 산이 타더라도 그는 뜨거워하지 않을 것일세. 신인은 그 몸의 남은 찌꺼기나 티끌이나 때를 가지고라도 요임금, 순임금쯤은 만들어낼 것이니 어찌 그가 천하 따위를 위해 일거리삼기를 즐겨 하겠는가? (17~18쪽)
천하를 다스린 요임금은 정치를 고르게 한 다음 분수(汾水)의 북쪽에 있는 막고야산에서 네 신선을 만났는데, 그만 멍하니 천하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천하 너머에 천지가 있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천하를 고르게 했지만, 천지 앞에서는 그저 멍해져서 천하대사를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유위(有爲)이고, 천지를 노니는 것은 무위(無爲)이다. 유위에 빠진 사람은 천지를 노니는 소요유(逍遙遊)를 즐길 수 없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왕은 언제나 쓸모를 따지지만, 무위에 빠져 천지를 노니는 지인(至人)은 쓸모로 세상사를 판단하지 않는다. 혜자(惠子)와 장자의 대화 부분에 나타나는 대로, 장자는 쓸모를 부정하지 않는다. 쓸모에도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 혜자는 큰 박을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했다. 그는 박 속을 파내고 장을 담갔지만 너무 무거워 박을 들 수 없었고, 두 짝으로 쪼개어 만든 바가지도 너무 넓어 쓸 수가 없었다. 작은 쓸모에 빠져 정작 큰 쓸모를 생각하지 않은 셈이다.
장자는 혜자의 말에 대해 손 트는 데 쓰는 약을 잘 만드는 송나라 사람 이야기로 먼저 말을 튼다. 대대로 빨래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그는 손 트는 약을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했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백금을 주고 그 약방문을 산다. 손님은 오나라 임금을 찾아가 약방문을 내밀었고, 이로 인해 오나라는 월나라와 벌인 수전(水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오나라 임금은 손님을 제후로 봉했다. 약을 만든 사람은 빨래하는 일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약을 산 손님은 그것을 널리 써서 제후가 되었다. 장자는 쓰는 법이 달라 이런 차이가 벌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작은 쓸모를 큰 쓸모로 바꾼 손님에 빗대어 장자는 혜자에게 닷 섬들이 박으로 커다란 배를 만들어 강호에 띄우라고 충고한다. 뱁새가 있는 곳에 붕새는 있을 수 없다. 뱁새가 보는 관점으로 붕새를 보면 좁고도 좁은 세상만이 보이는 법이다.
혜자의 속 좁은 이야기를 또 하나 하는 걸 보면 장자는 혜자를 참 못마땅하게 생각했나 보다. 혜자는 자기 집에 있는 큰 나무가 줄기는 울퉁불퉁해서 먹줄에 맞지 않고, 잔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잣대에 맞지 않다고 투덜댄다. 네거리에 내다놓아도 목수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단다. 크기만 하고 쓸 데가 없는 게 자네(장자)의 말과 같다는 비난까지 서슴지 않는다. 장자가 어찌 대답했을까? 살쾡이와 이우(?牛, 소의 일종)에 빗댄다. 살쾡이는 몸을 땅에 착 엎디어 이리저리 대중없이 날뛰다가 혹 덫에 치이고 혹 그물에도 걸린다. 이우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쥐 한 마리 잡지 못하지만, 덫에 치이지도 그물에 걸리지도 않는다. 무애(无涯)다. 장자는 쓸모가 없는 큰 나무를 무하유향(無何有鄕)의 광막한 들판에 심어놓고 유유히 그 옆을 거닐며, 편안히 그늘에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혜자가 살쾡이처럼 자기 이익에 얽매인다면, 장자는 이우처럼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무하유향에 있는 큰 나무를 그 누가 도끼날로 찍을까? 큰 나무는 아무 데도 쓰일 바가 없지만, 그 까닭으로 오래 사는 행운을 얻는다. 아무 데도 쓰일 바가 없는 큰 나무는 사실 유용성을 개인의 이익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광막한 들판에 서 있는 큰 나무는 드넓은 그늘로 온갖 생명들을 감싸는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혜자는 자기 생각에 멈춘다면, 장자는 혜자가 멈춘 그 자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한 발 더 나아갔는데도 장자와 혜자의 생각은 엄청나게 멀어진다. 혜자는 큰 박과 큰 나무를 쓸모가 없다고 하여 버렸지만, 장자는 쓸모없음에서 쓸모를 찾아 그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사물로 만들었다. 장자는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작은 이익에 집착하면 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사해의 바깥으로 나가야 사해가 비로소 보인다는 걸 그는 거듭해서 강조한다. 자기 생각에 빠지지 않아야 자기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장자는 여러 우화를 넘나들며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
혼돈의 죽음 : <장자> 「응제왕(應帝王)」편
<장자(莊子)> 제7편인 「응제왕(應帝王)」 끝부분에는 중앙의 신인 ‘혼돈(混沌)’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남해의 신인 숙( )과 북해의 신인 홀(忽)이 어느 날 혼돈의 땅에서 혼돈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두 신은 혼돈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다. 마침 혼돈의 몸에 구멍이 하나도 없다는 걸 그들은 알아챘다. 사람들은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만은 이 구멍들이 없으니 엄청 힘들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숙과 홀은 날마다 하나씩 혼돈의 몸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기로 결정했다. 정성을 들여 구멍을 내다보니 어느덧 이레째가 되었다. 혼돈에게도 다른 이들처럼 일곱 구멍이 생겼다. 혼돈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레째가 되는 바로 그날, 그러니까 몸에 일곱 번째 구멍이 뚫린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는 숙과 홀이 한 행동을 혼돈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와 있지 않다. 숙과 홀이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만 나와 있다. 혼돈은 구멍이 없는 존재이지만, 구멍이 없어도 그는 지금까지 무리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숙과 홀이 이러한 혼돈의 몸에 일곱 구멍을 뚫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구멍들로 여러 가지 이익을 얻는데 혼돈은 그렇지 않은 게 그들에게는 한없이 불쌍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혼돈을 다른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마음 또한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말로는 혼돈을 살린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혼돈을 죽이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혼돈을 혼돈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돈을 혼돈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춰 혼돈을 개조하려고 했다. 지금까지 큰 병 없이 잘 살아온 존재의 몸에 일곱 구멍을 뚫었으니 건강한 혼돈이라고 해도 어떻게 제 명대로 살 수 있었겠는가
장자는 열자(列子)의 스승인 호자(壺子)의 말을 빌려 “스스로 마음을 텅 비워 사물의 변화에 그대로 따랐으므로, 누가 누군지의 분별을 잊고 풀이 바람에 쓰러지듯, 물결의 흐름인 듯하였다.”라고 이야기한다. 혼돈은 구멍이 없었어도 호자처럼 누가 누군지를 분병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혼돈의 몸에 구멍이 생긴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별이 생긴다는 것 아닌가. 먹었으니 싸야 하고, 보고 들었으니 그것을 담아야 한다. 분별하지 않고 세상을 산 존재에게 분별심이 생겼으니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혼돈은 혼돈 상태일 때가 가장 좋다.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숙과 홀은 이러한 자연(自然)을 거부하고 혼돈의 몸에 인위적으로 구멍을 냈다. 일곱 구멍이 몸에 나면서 혼돈은 그가 살아온 자연을 잃어버린 셈이다.
분별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사는 게 과연 가능할까? 분별하지 않는다는 건 욕망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바로 욕심이다. 먹고 사는 건 자연이지만, 지나치게 먹는 건 욕심이다. 마음을 텅 비워 사물의 변화를 따르는 건 자연이지만, 인위적으로 사물을 조작하는 건 욕심이다. 문명사회를 사는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먹고, 인위적으로 사물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했다는 얼토당토한 말을 자신 있게 떠벌리기도 한다. 모두 욕심이다. 특히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과욕일 뿐이다. 인간이 과학의 힘으로 자연의 힘을 억누를수록 인간 사회를 향한 자연의 복수가 더욱 강해지는 걸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분명히 보고, 느끼고 있다.
자연은 혼돈과 같다. 자연에 일곱 구멍을 뚫으면 자연은 혼돈처럼 죽어버린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아니, 둘러가지 말고 곧바로 진실을 말하자. 숙과 홀로 인해 혼돈은 제 생을 마쳤지만, 자연은 품속에 있는 다른 생명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인간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과학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가? 인간의 지나친 욕심이 자연을 한계 지점으로 내모는 순간 자연은 인간 종(種)을 말살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과학의 힘으로 자연의 무지막지한 힘을 견제하면 된다고? 자연과 인간이 벌이는 거대한 싸움이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더 큰 피해로 다가올지 생각해 봐야 한다. 숙과 홀이 욕심을 부리다가 혼돈을 죽었다. 죽은 혼돈이 다시 살아날 리는 없으니 숙과 홀은 아마도 여생을 혼돈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을 것이다. 혼돈이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밝은 세상일까? 아니면 어두운 세상일까? 어떤 세상인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숙과 홀이 이전보다 훨씬 더 악화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지금 숙과 홀이 혼돈의 몸에 일곱 구멍을 뚫던 그 마음으로 우리 시대를 꾸리고 있다. 혼돈을 혼돈으로 내버려두면 되는데 억지로 자기 틀=관점에 맞추려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왜 자신의 관점이 이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가? 무한경쟁에서 이기는 자리에 서 있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이기는 자리에 서는 사람은 하나인데,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무지 많다. 당연히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한병철이라는 철학자가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언급한 대로 이 시대를 사는 주체들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삶을 견디지 못한다.
무한경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성과를 내는 것이다. 남이 걸으면 나는 뛰어야 하고, 남이 뛰면 나는 날아야 한다. “스스로 마음을 비워 사물의 변화에 그대로 따”르는 마음이 이들에게는 있을 수 없다. 쉬지 않고 달렸으니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겠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의 몸이 소진될 때까지 그들은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그리고는 무엇이 남게 될까? 죽음이다. 혼돈에 일곱 구멍을 낸 사람들은 결국 무한경쟁의 분별심에 취해 스스로 죽음에 이른다. 혼돈도 죽고, 성과에 목말라하는 사람들도 죽었다. 이제 남은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때이다. 풍요로운 물질을 제공하는 문명에 취해 우리가 경쟁적으로 달려가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인문학이 여전히 찬밥인 우리 사회에서 철학적 사고는 밥 빌어먹기 좋아하는 못난이들에게나 어울릴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제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삶을 들여다볼 여유가 있기나 할까? 혼돈을 죽인 숙과 홀처럼 우리는 혼돈이라는 타자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내 말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말은 그르다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으로 우리는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자연의 이치란 게 무어 그리 큰 게 아니다. 혼돈을 혼돈으로 인정해 주면 그것이 자연의 이치를 지키는 것이 된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 급식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막말을 하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일을 하는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지방의 한 도의원은 최악의 물난리를 겪은 지역구는 돌아보지 않고 외유(外遊)를 떠난 도의원들을 국민들이 비난하자, 국민들을 레밍(쥐)에 비유하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피리 부는 사내를 따라 절벽을 뛰어내리는 쥐떼라면, 그 쥐떼가 뽑은 그 사람은 무엇이 되는가? 혼돈의 죽음이 숙과 홀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듯, 국민들을 향해 의원들이 내뱉은 막말 역시 그대로 그들을 향해 부메랑처럼 날아간다. 우리 반대편에 타자가 있는 게 아니다. 우리와 더불어 타자가 있다. 무한경쟁을 조장하고, 국민을 하대하는 사회는 타자를 향한 이러한 윤리가 부재하다.
사물의 변화를 따라 스스로 마음을 비우는 단계까지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못되더라도, 그런 마음이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많아져야 우리 사회가 변할 수 있다. 응제왕(應帝王) 의 다른 부분에서 노담(老聃)은 명왕(明王)의 다스림을 묻는 양자거의 질문에 “명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이 자기한테서 나오지 않는 것인 양하고, 그 교화가 만물에 베풀어져도 백성들이 그것에 힘입지 않은 양하는 것이다. 베풀어지고는 있지만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 없고, 모든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자기 것이 아닌 양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은 물론 범인(凡人)인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노담이 말하는 이야기에 담긴 진실만은 우리도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혼돈과 같은 타자들이 죽는 어이없는 일이 최소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장자>에 실린 내용은 김달진(<장자>, 문학동네, 1999)이 번역한 책을 참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