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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지 못한 장정일의 ‘공부’ -다독과 현학을 뽐내는 지적놀음의 독서일기에 다름 아닌 얼마 전부터 막연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슨 큰 공부를 꿈꾸거나 어떤 꺼리를 체계적으로 뚫어지게 들고 파야겠다는 중뿔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꼴에 어디 한군데 막대기 꽂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막하고 답답한 심정의 발로랄까, 그래서 제일 만만해 보이는 ‘공부’라도 기웃거려봐야 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 중에 눈에 들어온 책이름이 ‘공부’였다 일찍이 글쓴이의 독서일기를 통하여 나름대로 일가(一家)를 이룬 그의 이력을 조금은 아는 터라 선뜻 책을 들쳐보게 되었는데 그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2002년 대선 이후 우리사회의 궁금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자신의 무지를 참을 수 없어서, 어설픈 중용이 아니라 확실히 편들기 위해서 자발적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시작한 공부라고 하였으니 나에게도 맞춤한 꺼리가 될 성 싶었다. 책은 나름대로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박노자와 고미숙을 빌어 한국적 근대를 읽고 송시열에서 이광수, 이승만, 박정희, 조봉암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당정치의 뿌리에서부터 레드 콤플렉스와 대중독재, 그리고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까지 두루 보여주고 있다. 또 프랑스의 마르크 블로크와 중국의 이종오를 불러오기도 하고 모차르트를 거쳐 바그너와 하이데거 더하여 나치와 히틀러의 파시즘 읽기에다 일본 천황제 문제와 오리엔탈리즘 비판,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알기까지, 게다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교양특강에다 갑자기 배틀로열 일본영화이야기에다 난데없는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로 건너뛰면서 그야말로 역사의 종횡을 열심히 헤집으며 거의 전방위적인 주제와 이에 따른 다방면의 독서편력과 박물적 지식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책은 거기까지이다. 앞에서 열거하였듯이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그렇지만 인문학적 성격상 어떻게든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지기도 하고 또 억지로라도 연결을 시도하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주제와 책들은 그냥 이의 나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장정일의 공부’는 별로 성공한 듯 보이지 않는다. 나름대로 오늘 여기 우리 현실에 뿌리를 댄 절박한 고민과 해법을 찾는 치열한 공부라기보다 그냥 2002년 이 후 읽은 그의 독서일기의 연장에 다름 아니며 그의 다독과 현학을 뽐내는 자기 만족의 지적놀음이라는 인상이 짙다. 그렇다고 놀이를 오해는 하지 마시라. 글쓴이의 책읽기와 책말하기를 낮추어보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그가 말했듯이 우표수집이나 난키우기처럼 좋은 취미생활이거나 그 이상이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일이 ‘놀이’ 또는 ‘즐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오래도록 지속되는 법이니까.
그러면서 이 책을 소개하는 출판사의 글귀를 다시 보니 알맹이 없는 현란한 수사로 일관하고 있었다. ‘기존의 인문교양서와 다르다’면서 그것이 글쓴이 특유의 ‘관점이 있는 사유길라잡이’ 라는 것인데 어느 책이 특히 인문교양서가 저자의 독특한 관점이나 생각을 품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으며 ‘사유체계에 대한 비판적 도전’이라고 했지만 특별한 비판의식이 눈에 띄기보다 약간의 독특한 관점을 소개하면서 지적경험의 확대 또는 짜릿할 수 있는 지적 비판(독후감의 가장 큰 즐거움이겠지만) 그 이상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사유를 잃어버린 세대’에게 새로운 사유체계와 인식의 틀을 가져다 주기에는 그의 잡학다식의 나열에 그쳐 보이며 ‘진정한 공부의 길’이라 여기기에는 공부가 가지는 체계성이나 깊이 특히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적 과제에 뿌리내리기와는 꽤 거리가 있어보인다. (텍스트적 한계로 여겨지기보다 그의 독서취향인 듯하다) 다시 실망스러운 것은 글 중의 많은 부분이 이미 다른 곳에 기고한 재탕글임에도 전혀 공식적인 언급없이 그야말로 작심하고 ‘공부’에 매진한 결과물인양 포장하고 있다 (그의 독후감 스타일로 보이는 본문 가운데 어느 책 몇 쪽을 읽어보라는 주를 다는 친절함이라면 최소한 언제 어디에 기고한 글인가를 밝혀줄 법도 한데) 그리고 재탕묶음한 글이라도 ((사실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이를 책으로 낸다했을 때는 주제별 묶음이나 나름대로 글의 체계를 잡는 건 기본이거니와 그가 자주 둘러대는 대로 지면관계상 기고글에 써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면 이를 보완 하고 다듬을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공부는 내가 조금 하고 다음에 당신이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에 조금하고 다시 뒤에 더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러면서 ‘과거사 청산, 정조, 링컨, 네오콘, 개혁과 혁명 등 훨씬 더 많은 주제’가 계획되었다는 둥, 그 원고파일을 날려버렸다는 둥 (기왕의 글에 좀 더 신경을 써야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그렇지 않으면 주제를 더하여 책을 내든지) 사족에 불과한, 그것도 현실적 문제와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런 푸념은 자신의 공부의 스케일이나 지적 스펙트럼(또는 잡학다식)을 뽐내는 것일 수는 있지만 그가 말하는 공부의 자세는 아닐 듯 싶다.(각각의 소제목 역시 문학적 수사로 치장하고 있으나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히거나 해도 그만 안써도 그만인 겉멋에 치우친 경우가 많다) 장정일의 ‘공부’에 대한 느낌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각각의 글들을 흥미 위주로 읽는다 해도 그냥 넘어가기 힘든 문제들이 보였다, 그래서 각각의 소제목별로 한 번 씹어보려고 마음먹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사회과학적 이해나 역사적 인식은 상당 부분 모호하거나 천박하거나 편향되어 있다. 굳이 사상적이거나 이념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면 그 토대의 허약성에서 비롯되는, 그래서 박학과 다식이 곧 사회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겠다. 그런데 왜 씹느냐고, 나도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이런 것 아닐까. 우선 인문학적 꺼리를 씹는 일은 상당히 까다롭다. 옳고 그름이 구분되는 경우가 드물고 관점이나 시각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나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씹기를 위한 씹기가 될 수 도 있다. 그럼에도 이 까다롭고 귀찮은 일을 한번 해보자는 용심이나 오기가 이는 것인데 이는 그동안의 내 인문학적 소양이나 역사인식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에 대한 나름대로의 점검을 하고 싶은 거다 (이런 과정은 내가 가진 생각의 줄거리에 체계를 잡아주는데 확실히 효과가 크다) 다음에는 장정일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랄까 뭔가 독서로 일가를 이룬 그의 독서버릇에 일침을 놓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내 역량 밖일 수도 있으며 설사 올바른 지적이라 하더라도 이를 깨닫거나 고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버릇 아닌가 여든까지 간다는. 다음은 씹기처럼 즐거운 지적 놀음이 어디 있겠는가. (놀이도 처음에 놀이지 360여쪽의 글을 해체한다는 게 버거운 놀이임을 알겠다. 그래서 장정일씨의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 후 계속>
[앞에서 장정일의 <공부>에 대한 비판의 글을 실었다. 하지만 그냥 한 독서가의 한가한 지적놀음으로 보기에는 내용의 부정확함이나 오류가 너무 많아 보인다. 앞글에서 그의 책내용을 씹어보겠노라 했고 늦게나마 꼭지별로 비판의 글을 올린다. 비아냥이 없지 않으나 악의는 없다] 책소개 글에는 23개의 화두를 만난다고 쓰여있다. 신선놀음을 하고 싶은 건가 치열한 공부를 하려는 이의 모습도 아니지만 제발 아무데나 화두 쓰지마라. 이제 글쓴이의 23꼭지를 따라가보자. 1 잠못 이룬 그 밤과 잠 못 이룬 사람 박노자를 이름이다. 러시아인으로 우리나라에 공부하러 와서 우리나라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귀화하여 한국인이 된 사람. 지금은 노르웨이의 대학에 가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역사학자이며 인문학자.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참 흥미로운 사람인데 그가 줄곧 주장하는 한국적 근대의 내용, 즉 구한말과 일제 강점 무렵 우리 선각자들의 모습 속에 일본 제국주의식 근대화를 따르려는 모습과 현재의 세계화 모습이 꼴사나운 제국주의의 판박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박노자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소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얘기를 언급하며 에피소드 위주의 흥밋거리로 흐른 느낌이다 2. 상한선을 찾아서 조선최대의 당쟁가이며 3백년 신화 속의 인물 송시열의 가면 벗기기이다. 뒤에 송시열의 북벌론을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연결시키며 그 허구성과 사기극의 계보로 엮는다. 이는 인조반정 이 후 권력을 장악한 서인의 뿌리가 일제시대를 거쳐 그 척족들이 일부기업의 대주주가 되었다는 반동의 계보로까지 엄청난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 여기서 상한선이라는 말은 한국주류의 기원을 송시열까지 올라가보는 일인데 다소 엉뚱하고 재밌는 시도로 보인다. 3 교양, 지식의 최전선 다치바나 다카시의 교육위기론은 거의 우리나라 교육문제로 봐도 되겠다. (원조인 셈인가) 대학생들의 지적 능력저하와 교양의 부족, 창의성 부재가 입시위주의 교육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며 뒤에 따로 설명하듯이 국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중앙집권식의 실용[실사(實事)] 지식위주의 대학관이 천박한 교양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양반의 현대교양론으로 들어가더니 현대교양(지식)이 자연과학에 집적되어 있으며 그 방향으로 확대되어 간다고 한다 이른바 그리스와 라틴의 고전지식을 의미하는 전통의 교양은 ‘현대사회의 정체성’이 변화하면서 교양의 내용이 바뀌었다고 한다. 현대 사회에서 교양의 특징은 그 내용 대부분이 과학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인데 뇌과학, 물리학적 세계질서 등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혼란스러운 것은 일본 대학생들의 교양부족을 언급할 때 주로 인문학적 교양 또는 전통적 교양의 의미를 말하는 것 같은데 뒤이어 소개되는 현대 교양론은 자연과학 중심으로 교양의 내용이 바뀌었으며 거기다 과학적 기능 습득의 중요성( 자료조사, 문서작성, 인류학, 영어와 컴퓨터 습득 등)까지 강조한다 그렇다면 교양교육의 부재가 일본 대학의 ‘형이하학적인 기술학 중심’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앞의 주장과는 엇갈리지 않는가 오히려 ‘기초과학은 물론이고 산업현장에서 이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 진흥이 국가적 사업으로 육성된 일본이라면 현대의 교양이라는 자연과학적 지식 습득이나 과학교양에는 유리한 점으로 작용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를 수습하기 위함인지 학제간 연구나 또 스페셜과 제네럴이라는 용어를 들어 전문성을 뛰어넘는 높은 수준의 지식(제네럴한)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애매하게 얼버무리고 있다. 이러한 혼란과 더불어 인문학적 교양이 과학교양(말이 된다면)으로 대체될 것인가 또는 이 글의 제목대로 교양이 지식의 최전선으로 복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4 어느 역사가의 유작 마르크 블로크가 전하는 이야기다 2차대전 초기 대독전에서 맥없이 무너진 프랑스의 패전원인을 살피면서(그는 53세의 나이로 참전하였다) 이른바 ‘마지노선’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과 당시 부르조아와 노동자계급이 서로 반목한 분열의 양상, 시험과 점수로 아이들의 자유로운 호기심과 지적 자발성을 묶어놓은 교육정책의 문제도 지적한다 글쓴이는 이처럼 비효율적이고 경직된 군부의 군사전략이 외교를 망쳐놓았다며 이같은 교훈대로 오늘날 한반도의 정세에서 군부의 영향력을 경계하고 있다 그 예로 ‘한반도에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남한과 중국의 정상적 외교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군사전략’이 한나라의 정책에 간섭하는 꼴‘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 예는 한 나라 안에서 군부가 외교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이며 미국의 군사전략(결국 외교정책과 하나겠지만)이 남한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이걸 간섭이라 하는 건 웬 자주적(?) 발언인가, 엄밀히 말해서 한나라의 군사정책과 외교정책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일방적으로 군사전략이 외교를 망쳐놓았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문제는 그러한 군사정책과 외교정책을 수립할 때 우선순위나 수립과정에서 군부의 과도한 영향력, 또는 남한처럼 아예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경우를 경계함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전복과 역설의 ‘뻔뻔함과 음흉함’ 중국인 이종오(1879-1944)의 이야기다. 통치와 통치자의 근본은 면후(面厚)흑심(黑心)으로 즉 그가 주장하는 뻔뻔함과 음흉함이란 공맹(孔孟)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유교적 교조주의로부터 정치를 해방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치켜세운다 곧 후흑(厚黑)은 사리를 도모할 경우 비루한 인격이 되지만 공리를 도모할 경우 (인민을 만족시키기 위한 ) 인격은 고매해진다고 하면서 당시 열강에 침탈되는 중국의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당시 이러한 이론은 개화주의자나 부국강병을 외치는 개혁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이론으로 보이는데 특별히 이종오의 이론이 아주 신선하고 독특한 것으로 자리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 글쓴이는 이를 마키아벨리와 견주고 있는데(물로 그 차이성에 대한 설명도 보이지 않는다) 굳이 서양까지 건너갈 것 없이 춘추전국시대 법가의 오랜 전통(글쓴이는 이미 송시열에서 계보긋기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에 기대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뒤이어 그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면서 다윈의 자연계의 상쟁(相爭)은 오히려 변칙이며 생물계는 상양(相讓)이 상례라는 것인데 그 예가 아주 생뚱맞다 ‘호랑이와 표범이 인간보다 힘이 강했기 때문에 자취를 감추었다’든지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제국이 가장 막강했지만 오히려 힘이 셌기 때문에 주위의 약한 것들이 힘을 합쳐 이를 무찔렀다는 것이다. 가장 힘센 자가 도태되며 그러니까 약한 것이 힘을 합친 일이 상양이라는 얘기인데 이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보다 힘세지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 아닌가. 고대 중국의 그 유명한 합종연횡이 그러면 상양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또 글쓴이는 당시 ‘약육강식(弱肉强食)’과 무한경쟁의 제국주의적 논리를 통찰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오히려 상양은 유교적 인의론에 가깝다고 볼 때 그의 냉정하고 합리적인 후흑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종오 생애 최고의 역설이라면서 세계역사를 세시기로 나눈 것을 소개하고 있다 이종오의 3기론을 살펴보자. 제1기 요순시대같은(뻔뻔함과 음흉함이 없는) 천진난만한 상고시대. (언제 이런 시기가 있었나. 그의 글 속에서도 성인으로 떠받드는 요순우탕 등이 인의로 위장한 뻔뻔하고 잔혹했던 사람이라고 쓰고 있으면서) 제2기 조조 유비같은 인물이 판치는 공맹이 안 먹히는 면후흑심시대. (기왕의 애써 설명한 면후흑심의 (인민을 위한다는) 진정한 의미는 어디로 가고 그야말로 면후흑심으로 인의가 땅에 떨어진 상쟁의 시대가 되어버렸는가) 제3기 조조 유비가 널려있는 시대로 면후흑심이 안통하면서 진정한 위인(진품을 파는 사람)이 나타나는 시대. (여전히 흑심을 가짜라고 구박하면서 진짜배기가 나타날 것이라는데 이 때 홀로 진짜인 사람이 나타나면 인민들이 알아서 긴다는 뜻인가. ‘힘의 논리’를 대신한 무엇으로 이를 이루겠다는 것인가.) 다시 공자로 돌아가자고? 여태껏 공맹에 ‘마무리펀치’까지 날렸다고 추켜세우던 이가 돌아가는 곳이 겨우 공자란 말인가. 그것이 중화를 꿈꾸는 중국인다운 주장이란 말인가 결국 공자를 떨쳐버리지 못한 관념의 세계에 머무는 또 하나의 찻잔 아닌가 (태풍은 커녕 비바람도 못돼 보이는) 제목처럼 역설은 역설이다. 그런데 전복은 뭐지 ,배가 뒤집어지게 웃긴다는 뜻인가 6. 문신 새긴 기억 고미숙의 글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이 텍스트다 ‘한국적 근대’, 즉 근대 민족주의가 가지는 사유의 밑바닥을 들춰냄으로써 그것이 결국 제국주의 또는 팽창주의에 다름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은 혈통과 정신주의에 경도됨으로써 배타적이고 자기만족적이며 또한 기독교적 교리와 결합하여 민족이라는 표상을 초월자로 끌어올림으로써 이른바 단일민족이라는 내부적 모순이나 갈등을 얼버무리는 상징적 기제로 대체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보건이나 여성문제에서도 국가적 차원의 (민족 또는 그것으로 상징되는 완전함) 통치도구로 간주된 것으로 보는데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우민화 기계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이토오 히로부미가 조선침략의 원흉이 된 것은 안중근의 의거를 통해서 그 상징성을 획득한 때문이라는 것인데 제국주이 일본에 대한 합리적이고 깊이있는 고찰 대신에 감정적이고 표피적인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태생적으로 제국주의를 지향한 일본에 의해서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후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 등 제국죽의 길로 달려갔다는 식의. 이에 고미숙은 중요한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구에 의해 강제 개항되고 피압박상태로 시작한 일본이 대체 어떤 힘의 배치, 어떤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근대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가동시켰는가 그리고 이 후 어떻게(어떤 국면의 전환 속에서) 제국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나를 살피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고미숙의 글 괜찮다. 역시 공부의 글쓰기는 텍스트의 문제인가. 그런데 글쓴이의 오버랄까 겉멋은 여전하다. ‘민족이라는 문신의 기억은 여유도 이성적 비판도 원천봉쇄한 채 끝없는 경배만을 바란다’고 쓰고있는데 ’문신새긴 기억‘이라니. 문신을 새기면 그 문신이 남아있든지 아니면 문신을 억지로 지운 뒤 그 기억이 남아있다는 말일 터인데 여전히 경배를 바라는 걸 보아 민족은 아직도 불에 데인 듯 선명한 아픔과 상처의 실체이지 무슨 기억이란 말인가 그러면서 ‘근대의 신화를 전복하고 근대의 바깥에서 사유’하잔다. 요즘 유행처럼 얘기되는 노마디즘(유목주의)과 경계인을 갖다 쓰고 싶었나 보다. 7. 이광수를 위한 변명 일본 근대 초창기 문학. 이름하여 일본의 사소설(私小說)을 지루하게 중복,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일본의 사소설이지? 개인적인 관심이고 취향이겠지만 당시의 시대상황과 배경을 설명하면서 생활과 그 생활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는 한계에 따른 그 작가들의 존재적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러더니 끄트머리에 ‘소설가’ 이광수를 데려온다 ‘소설가’로서의 이광수에 대한 공부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으나 ‘젊어서 읽고 배운 일본문학의 독소는 깊었으되 그의 문학은 끝내 사소설의 유혹을 이겨냈다’고 대변하며 이를 근대화 일본의 현실에 안주한 일본 작가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이광수의 처지의 차이에서 찾는다 그러면 이러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처지가 끝내 변절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혹시 ‘사소설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변절했다’는 식이 되는가. 그리고 일본의 작가들은 현실에 안주한 사소설만 쓰고 앉았다는 말인가. 그냥 쉽게 일본의 근대 소설 초창기에 사소설의 영역이 있었고 나름대로 흥미와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았다고 하면 안되나 8. 이것이 법이다 - 배틀로열 갑자기 웬 ‘배틀로열’, 그냥 일본의 어린 학생들을 극한의 폭력구조로 몰고가 즐기는 잔혹폭력물 아닌가. 그래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가 별로 영화를 좋아히지 않는다는 글쓴이가 굳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언가 법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도 아닌 것같고, ‘법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만이 법을 바꾼다’는 메시지? 그래서 잔혹 폭력 살인을 휘둘러 새롭게 법을 바꾸었나 (한 명 살리기에서 두 명 살리기로?) 글쓴이는 배틀로열법의 저의가 서로 간에 불신을 조장함으로써 반체제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함이란다. 거기다 일본 학생운동과 적군파의 이념을 새겨 넣었다는데 내가 잘 모르는 일이니 그냥 끄덕거려야 하나 그러면서 끄트머리에 글쓴이는 한국의 지체와 일본의 선진화가 오히려 중국의 한류열풍을 낳았다고 한다. 중국이 일본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앞서 있어서 조금 앞선 한국의 문화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물어보자. 일본에서의 한류바람은 과거에 대한 진한 향수인가 9. 모차르트를 둘러싼 모험 모차르트에 관한 독서 동기가 16대 대선 때 젊잖은 음악동호회에서 그가 혁명가냐 아니냐는 편가르기를 보고 제대로 알고 싶어서라는데 음악이나 예술이 정치나 세태에 초연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 아닌가 (뒤에 글쓴이는 새로 꼭지를 두어 나찌와 관련하여 바그너를 해설하고 있다) 모차르트에 관한 의문은 3가지인데 굳이 수수께끼라고 하면서 스핑크스의 예까지 드는 건 무슨 이유인가. (곧이어 이같은 의문을 수수께끼화하는 것이 수학적 신비주의라고 꼬리를 내리면서) 어쨌든 그가 제시한 3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에 토를 달아보자 첫째 신동이냐. 아버지의 희생과 뒷바라지 속에 가혹한 개인교습과 국제적 유학과정이 모차르트를 낳았다며 한마디로 영재교육의 산물이란다. 그렇다면 무수한 기러기 가족을 양산 하면서 아이교육에 올인하는 한국이라면 곧 모차르트가 떼거리로 나올건가 둘째 혁명적이냐, 그의 삶은 ‘시대의 전통과 관습, 구속을 뛰어넘으려 했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예술적 세계를 쌓고 키워나가는데 으레 부딪치는 문제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의 예술사조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선보이는 예술은 죄다 글쓴이가 노래처럼 불러대듯이 혁명 또는 혁명적인 것인가 혁명적이라 했을 때 과연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체제나 계급적 관점을 예술로 전화(승화)시키며 사회변혁에 복무한 모습이나 애쓴 흔적이 보이는가, 이러한 잣대로 접근해야 하지 않나 셋째 암살이냐, 글쓴이가 주장하듯이 사회적 공모에 의한 타살이라고 하자, 하지만 이는 시대와 의 불화 속에 불우한 삶과 비극적 죽음을 맞은 숱한 이들 누구에게 갖다 붙여도 가능한 말 아닌가 그리고 웬 마광수, 시대를 대표할 만한 파괴력있는 에세이스트로 우리 시대의 모차르트로 칭송되어지는 건 무슨 일인가. 쾨헬 ‘넘버 3’쯤 되나.(마침 오래전 제자시 도용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던데 죽을 죄를 졌지만 제자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는 그 양반?) 끝으로 글쓴이는 ‘듣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덧붙여 ‘이미지가 우상이 되는 세상’에서 ‘미친 소리’로 여겨질 것이라고도 하는데. 하지만 소음을 거부하는 ‘눈’으로 본다는 말의 의미가 직접 이미지를 보는 눈의 의미는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고 요즘 시대에 클래식의 위기를 말하려는 의도도 아닌 것 같고. 10. 미국의 극우파에 대한 명상 미국의 극우파와 명상이라, 금이 잘 안그어지는데. 얼핏 거창하고 사유적인 느낌이지만 곧바로 드러나는 날림과 튀는 느낌, 뭐랄까 코스프레 덮어씌운 느낌이랄까 (하여튼 하나같이 제목이 이런 식이다) 글쓴이는 우선 1933년 뉴딜정책 이 후 68년까지 진보주의 권력층과 문화적 좌파인 뉴레프트와 결합 등을 예로 들며 일관되게 미국내 정치에 있어 좌파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50년대 초 극우적인 매카시 선풍과 냉전체제, 베트남전쟁 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것이 이른바 진보적 권력층의 작품인가 더하여 이러한 진보주의 이데올로기가 60년대 이 후 경제영역에서 새 영역으로 백인남성위주에서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다문화사회로 이어진다고 말하는데 이게 그동안 억압받던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열의 저항과 정치세력화의 결과이지. 진보적 이데올로기의 은혜를 입은 때문인가. 결론적으로 언제 미국내 진보주의가 득세한 적이 있었나 그리고 글쓴이의 개념도 모호한 숱한 주의 주의, 살펴보자 미국에 좌파 민중주의는 없다는 전제하에서 보수주의와 대중 민중주의(포퓰리즘)를 얘기하는데 이를 미국의 우파 민중주의라 하면서 제3세계의 좌파민중주의와 가르고 있다. 도대체 좌파와 민중은 어떻게 다른 말인지 우파나 대중에 민중주의를 붙이는 건 무슨 경우인지, 그냥 미국 대중들의 보수화 또는 우경화 경향이나 이념적 계급적 알맹이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보면 되는가, 무슨 주의만 붙이면 다 주의인가. 주의의 범람, 이데올로기의 홍수를 보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9·11 이 후 미국이 저지른 이라크 침공을 중심으로 미국내 이른바 네오콘으로 지칭되는 신보수주의 세력들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자본제적 구조로 접근하는 시각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내 신우파와 극우파를 나누는 걸 보면 제목대로 상상을 넘어 명상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극우파를 자체무력을 가진 조직이라 하면서 민병대나 케이케이케이를 들고 있다 (어릴 적 환호하면서 보았던 ‘람보’를 뒤에 보니 베트남전에서 산전수전 다겪은 특수부대 엘리트 요원이 상대하는 이들이 시골 마을 보안관과 거의 예비군수준의 주 방위군?이어서 실망한 기억이 있다. 민병대라 하면 이런 조직 말하는가) 또 무장봉기의 내용이란 것이 데이비드 지파라는 어느 종파의 집단 자살극과 오클라호마 시청 폭파한 테러분자를 들고 있다. 이를 우리나라로 잇대면서 박근혜를 보수로, 최병렬을 극우로 나누어 박근혜한테 최병렬을 혼내주란다. 끝에는 미국의 하층인민들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소개하면서 한국의 창궐하는 뉴라이트와 서민층의 보수화를 두고 ‘한국은 미국을 따라하나’하고 묻는다 어찌보면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될 법한, 보다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로 보이는데 왜 그럴까에 대한 답을 구하기보다 그냥 ‘따라하네’하고 맺고 있다. 글쓴이의 말대로 ‘독자들이나 저자들에게 두루 께름칙한 글’임에 분명해 보인다 11. 과두정이 온다 글의 요지는 이제 미국에 소수의 부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왠 과두정? 과두정이 사전적 의미인 소수의 사회구성원들에게 권력이 집중된 형태라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러면 이전 시기는 어떤 형태였는가 하는 문제다. 부유한 소수자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국가의 본질이며 어떤 형태든 모든 정부는 과두정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20세기 말과 21세기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세계는 셰게적인 자본의 집중과 질서의 재편을 통하여 과두정(이런 말을 쓸 수 있다면)의 세계화 과정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굳이 미국의 내부문제로 끌어내려 오케이 목장식의 촌발을 날려야 할까. 일단 글 속으로 들어가보자 글쓴이는 텍스트를 소개하면서 ‘<제국의 몰락> 엠마뉘엘 토드의 이 책은 유럽지성의 방대한 직업적 훈련을 보여주는 증거물이자 유렵 지식인들이 미국의 지식인들을 얼마나 가볍게 희롱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리물’이라고 한다. 엠마뉘엘 토드의 시각도 문제지만 뒤에 글쓴이도 소개하고 있는 촘스키나 진 하워드같은 이들의 글을 보면 자기나라임에도 불량, 미친개라는 극한적 언사를 사용하며 집요하고 날카롭게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데 도대체 미국의 어떤 지식인들을 희롱한다는 것인지. 혹 유럽의 식자를 내세워 유럽지성의 적통(嫡統)이고 싶은 한갓진 지식인의 줄대기는 아닌지. 다음에 ‘아테네가 그랫듯이 미국은 모든 시민이 평등한 기회를 가졌던 민주적 국가에서 소수의 부자들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과두적 국가로 바뀌었다’는데 ‘일국적- 민주적, 제국적- 과두적’이라는 해괴한 도식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과두정이란 용어를 왜 갔다 썼는지는 알겠다) 노예로부터 출발한 훅인 민권운동이나 미국 노동운동사 또는 여성들의 선거권 쟁취과정에 대하여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 보았는지, 또 초기 제국주의(식민지 무력침탈과 강제수탈의 원시적 자본축적기) 이래 세계의 역사는 오늘날 미국을 축으로 하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세계화로 나아가는 제국주의의 변화된 모습이라고 볼 때 대체 일국적이라는 또 한 나라 안에서의 과두정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더하여 이전 미소의 냉전시대를 보편주의(이런 주의가 있는지 모르겠으나)라 칭하는데 그 이유가 ‘경쟁적 제국의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또 무슨 망측한 주장인지. 냉전의 가장 큰 폐해는 이른바 적대국과의 준전시상태라는 위기감을 앞세워 안으로 민권을 억압하고 밖으로 반공 친미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숱한 전쟁과 쿠데타 지원, 내정간섭을 통한 독재 체제의 유지와 존속 등을 들 수 있을텐데 이러한 숱한 반민주적 행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면서 ‘민주주의가 없던 지역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민주주의가 설치된 곳에서는 현대의 귀족(부자)들에 의해 과두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대목은 그 유럽양반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는 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어떤 나라든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자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둘러싼 주변국들과 강대국들 특히 미국과의 역학관계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니 괜히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떠들고 있겠나, 한편 미국내의 극빈곤층이 전체가구수의 11%라며 히틀러가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하였는데 앞의 장에서 블루아메리카를 언급하며 빈민층의 보수화 경향을 우려한 일은 벌써 잊었나, 혹 부시를 히틀러로 보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이러한 양극화에 따른 소수의 지배체제는 세계적인 (그야말로 제국적인) 관점에서 봐야하며 에프티에이 문제에서 보듯이 자국 내의 농민이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3세계에 더 큰 부담을 떠안기는 현실은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우리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하고 절실한 꺼리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고민이나 공부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12. 부서진 손잡이를 움켜쥐고 이제 거의 신파다. 글을 요약하면 나찌 집권 이전의 독일 상황을 들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사회민주주의의 기치가 어떻게 변질되어 갔으며 대중은 왜 등을 돌리고 나찌를 지지하게 되었나를 보여주는데 아마도 ‘부서진 손잡이’는 스러져간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애가(哀歌)로 보인다. 글쓴이도 진보진영의 패배나 몰락은 현재 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며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사회주의 이념과 노동운동은 ‘부서진 손잡이를 움켜쥐고’ ‘문을 열려’는 모습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 제도정당의 계보를 들먹이며 ‘그 나물에 그 밥’식의 비판을 늘어놓더니 이게 ‘부서진 손잡이’란다. 부서진 손잡이를 열면 민자당이 나오고 신한국당이 나오고, 열린 우리당이 나오고 어쩌구 하면서. 글쓴이의 이념적 토대를 묻기 전에 기본적인 논리도 갖추지 못한 글이 되고 만 느낌이다 그러면서 ‘웬 불새’, 유행가 가사를 2절씩이나 공을 들여 신파로 흐르면서 무슨 노랫말을 공자어록처럼 보듬고 열심히 주석을 다는 건 또 무언가 그리고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지만’ 이런 말 좀 제발 쓰지 마라, 가정법이 없으면 가정을 하지 말든지 또 가정을 할 수도 있고 실제로 가정하면서 이런 말 할 필요 없지 않은가 또 심심하면 불러내서 조리돌리는 박정희(또는 다카기 마사오),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결정적일 때 개발주의자로 뒷통수를 치는 인물로 나오는데 민족주의와 개발주의가 서로 부딪는 개념인가, 글쓴이가 예로 드는 박정희가 세종이나 이순신을 끌어들인 것은 민족주의자라기보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나 애국적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 아닌가. 앞에서 박노자나 고미숙이 주장하는 얘기 금새 잊어버렸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적 모습에 다름 아니며 누구보다도 부국강병을 주장하였음을. 13. ‘정형화된 기억’으러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들 이 글은 일제하 식민지 지배상황에서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회색지대’ 즉 일제에 협력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나름대로 저항 또는 비순응이나 거부의 몸짓을 보인 부분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협력과 저항의 교차지점을 회색지대라 보면 이를 식민지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계급운동이나 학생운동같은 거대부문운동에 귀속시킬 때(‘정형화된 기억’이 되겠다) 그 고유한 운동성은 제대로 해명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미시사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윤해동의 ‘식민지의 회색지대’가 텍스트이다) 친일 청산과 과거사 정리라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이고 보면 특히 친일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현실적이고 시급한 일임에 틀림없는데 일반 친일부역자와 전범을 구분하자는 글의 논리는 생각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그런데 이런 구분 역시 초기 식민지 지배체제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의 문제라든지, 직접 전쟁에 참여한 이들 중에서(20만명이나 된다는) 전범을 구분하는 일이나 고문같은 인간의 기본권을 파괴한 범죄를 가려서 처벌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꼭 민족주의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행적과 관련한 자료나 흔적을 찾기 힘든 오늘의 상황에서 객관적 기준으로 되기에는 여전히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말 그야말로 폭압적인 정치상황에서 살기위한 친일은 가능하였겠지만 이른바 공공의 영역에서 비순응이나 거부 또는 항의같은 회색의 삶이 가능했겠는가도 따져볼 문제 아닐까 그런데 이와 공통된 문제틀을 가진다며 앞부분에 장황하게 쓰고 있는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관점이 달라 보인다. 이를 살펴보자 나찌하 독일에서 ‘유태인. 집시, 재즈’ 등은 비정상적인 일탈, 혼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극악한 탄압을 받았다. 그런데 이처럼 규범화, 계량화, 획일화를 위한 나찌의 모습을 현대를 규정짓는 근대성이라는 역사선상에서 보려는 시도는 전후 ‘표준화된 개인’을 공급하며 역설적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낳은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또 사회적 일탈자(부적응자. 부적격자, 소수집단)들에 대한 질시, 경멸, 폭력의 욕구 등을 보이면서 특히 나찌세대들에게 전체주의시대에 대한 향수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화론자들(개혁론자를 포함한)이 교육과 사회개혁 등 이른바 도구적 이성으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칫 권위주의나 전체주의적 속성으로 빠져들 위험을 견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체주의에 대하여 ‘특수한 악마성이라는 부당한’ 관점 대신에 역사적 흐름을 관철하는 ‘좋았던 시절’로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공권력에 의한 사회질서 유지에 대한 예찬은 곧바로 박정희 시대의 향수와 구국의 지도자라는 표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식민지적 공공성을 살펴보는 미시사적 연구와 어떤 공통된 틀을 가지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류’가 주장하는 일제의 근대화 기여론이나 그 때도 살만한 세상 아니었겠느냐는 논리가 아니라면 말이다 14. 영광의 탈출 잊어버리기 할리우드 영화 ‘영광의 탈출’을 끄집어 내면서 이스라엘의 건국과정과 시오니즘 얘기를 하고 있다. 영화가 프로파간다의 주요한 수단임은 주지의 사실인데 굳이 어떤 이(파리 어느 대학의 교수로 반세계화론자라는 이력까지 들먹이면서)를 들어 ‘소리없는 프로파간다’라고 친절히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왜 지금 시오니즘인가. 아랍권에 대한 관심의 폭이 넓어진 데는 9·11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지는 급박한 국제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슬람이나 아랍에 대한 공부가 시급한게 아닐까 그리고 이 후 이슬람 관련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음에도 이를 모아 읽는 즐거움을 뒤로 하고 어쨌든 글쓴이는 느긋하게 이스라엘 공부를 하잔다 글은 시오니즘의 탄생배경과 성립과정, 실질적인 원주민인 팔레스타인과의 관계 속에 시오니즘의 인종주의적 모습과 이스라엘 국가건설과 관련한 추악한 이면과 역사왜곡 더하여 피압박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이스라엘을 편드는)의 인식론적 폭력까지 다루고 있다. 15. 오래되지 않았다 주겸지라는 중국인이 쓴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와 일본계 미국인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가 텍스트다 글은 유럽이 문명의 중심으로 패권을 잡은 것이 오래되지 않았‘으며 이것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천황제가 메이지유신 때 급조된 ‘오래되지 않은’ 신화라고 설명한다. 살펴보자 중국이 발명한 나침반, 화약, 인쇄술, 주판 등이 유럽의 근대를 만드는 물질적 기초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13세기 몽골의 유럽정복 이래 중국문명이 끊임없이 서양으로 유입되어 문예부흥의 기반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여는 이미 ‘역사서 이면’에서 대서특필감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중국문명의 상대적 우월성과 유럽에 끼친 영향은 역사서 이면이 아니라 정설화되어 역사의 정면으로 나온 것 아닌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겸지의 문화유형 나누기다.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종교형 문화인 인도, 철학형 문화인 중국 (철학적 종교, 철학적 과학, 철학적 예술로 설명한다) 과학형 문화인 유럽 (과학적 종교, 과학적 철학, 과학적 예술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문화는 종교시대 - 철학시대- 과학시대- 예술시대로 발전한다고 한다 종교나 철학, 과학, 예술 등에 ‘철학적’이라든지 ‘과학적’이라는 수식어가 가능한지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문화가 종교, 철학, 과학, 예술에 시대를 붙인 이런 발전과정을 거친다는 건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문화란 앞에서 말한 이러한 것의 총합이라고 할 때 그야말로 ‘~적(的)’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도배를 하면 그게 그 시대를 대표하는 것인가 맨 뒤에 나오는 예술시대에 대한 언급은 따로 보이질 않는데 사무엘 헌팅턴(이 사람 자주 씹힌다)의 문명의 충돌이 틀렸으며 문명은 교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앞의 것들을 짬뽕한 것인가 보다. 충돌이든 교호든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러한 영향을 굳이 교호라고 하는 것은 이전 꼭지에서 이종오가 말하는 ‘문명은 상쟁(相爭)이 아니라 상양(相讓)’과 같은 과(科)로 여겨지는데 여전히 그 근거는 빈약해 보인다 그러면서 일본의 ‘화려한 군주(천황)’도 오래지 않았다면서 천황만들기를 들여다 본다. 텍스트의 저자는 일본인들이 일본의 정체성과 일본 문화 전체를 ‘천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1868년 메이지유신때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천황을 내세운 국가 전통은 다양한 계급, 지역, 성별 등으로 나누어진 ‘개개인이 시공을 넘어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서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경험을 얻게 했으며 그런 가상의 통합에 의해서 일본의 국가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조작을 통해서 국가와 국민적 정체성을 자연적인 것 또는 초월한 영원불멸의 것으로 세뇌하는 일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근대국가의 모든 문화 기구가 대중을 계몽시키기 위한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일본 근대사에서 천황제가 일본의 근대성을 창출하는 데 중심적이었다는 (파격적인) 견해 텍스트의 저자는 천황제의 ‘근대적 발명’을 꼼꼼히 추적하여 일본의 국가적 정체성과 신화를 전복하고 만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둘 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앞의 것이 오리엔탈리즘(중국까지 포함한)이나 옥시덴탈리즘 비판이라면 뒤의 것은 천황제 뿌리의 허구를 말하기 위함인가. 왜? 오히려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국가 만들기(천황만들기가 아닌)가 성공한 이유가 더욱 중요한 것 아닐까.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성공했으며 우리와의 차이는 무언가 그러니까 저들이 급조한 천황제를 통하여 근대적 민족국가 또는 제국주의로 나갈 수 있었던 이유와 이를 추진한 세력들의 형성과 성장, 또 천황제를 토착화시킨 성공요인들을 짚어보는 것이 필요한 일 아닐까. 글쓴이가 앞에서 공들여 인용한 고미숙의 글에도 나오듯이 당시 조선이나 일본이나 외세의 급격한 침공 속에서 왜 일본은 제국주의로 발전하였으며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였는지 그게 궁금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16. 조봉암, 우리 현대사가 걸어보지 못했던 길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보고 진보정당 자체에 무지한 스스로의 공부를 위해서 ‘조봉암’을 텍스트로 삼았다고 한다.(실제 텍스트는 1995년에 씌여진 박태균의 <조봉암 연구>이다) 이는 조봉암의 일대기가 해방공간에서부터 5·16직전까지의 한국 진보정당을 폭넓게 안내하기 때문인데 글은 주로 13세때 군쳥의 사환으로 출발하여 해방을 맞기까지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그의 일제하 행장(行狀)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글쓴이도 멋쩍었던지 텍스트의 지루하고 재미없는 부분의 독서를 독자에게 생략하게 해주는 이점이 있음을 내세운다. 이런 친절함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조봉암을 보고 싶은 독자는 그를 찾아갈 것이고 우리는 진보정당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은 거 아닌가. 그렇다면 현재의 민주노동당을 앞에 두고 당시 진보당의 결성과정과 활동, 와해과정 등을 통하여 당시 진보정당이나 혁신세력의 활동과 한계 또는 좌절의 원인이나 배경을 현재의 민노당과 연결시키는 고민의 흔적이 보여야 하지 않겠나. 민노당을 찍지는 못했지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노라는 고백식의 표현, 어차피 공부는 뒤에 또 하는 것이니까, 그런 건가. 17. 철학의 오만 다시 나찌 이야기다 하이데거를 통하여 철학자의 현실참여가 어떤 해악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사유해볼 기회를 얻고자 한다는데. 보편을 가장하고 불편부당을 강조하는 명망높은 철학자의 사유체계와 정치적 발언들이 실제로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시대의 영향을 반영하는 극히 특수한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중요한 철학적 비밀을 누설한다 모든 ‘철학적 견해는 당파성을 갖는다’는 상식 아닌가. 거기에 철학적 비밀에다 누설식이나. 그것도 스스로 ‘우리는 현상황에 대하여 개입해야만 한다’며 ‘조국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국가의 철저한 재조직을 요구하는 철학‘을 강조하는 이에 대하여. 그럼에도 한 철학자의 맹목과 변명을 소환해야 하는가. 그 이의 철학의 내용을 이루는 당파성이나 현실(국가)에 복무해야 한다는 자체는 (누구든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정신적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주는 철학의 중요성이라면 결코 맹목과 변명일 수는 없지 않은가. 까. 문제는 그것이 나찌의 철학적 근거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음과 자발적인 나치 지지자로서의 하이데거의 철학이 나치의 이념을 보충해주었음에 있는 것 아닌가 철학을 다룬 글이라서 그런지 어려워 보이는데 어쨌든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텍스트는 박찬국의 <하이데거와 나치즘>이다) 모든 철학적 개념은 하나씩의 토포스(정신적 고향, 사상적 발원지)를 갖게 된다. 이 때 ‘보편적 이성의 소유자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 안에서 태어난 역사적 현 존재로서의 인간’을 중요시하는 하이데거에 있어서 실제 고향에 대한 집착이나 회귀가 두드러진다는 것이며 고향과 조국의 철학이 고향과 조국을 내세우는 나치에 대해서 동질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 텍스트의 ‘도발적인’ 주장이다. 재미있는 주장이기는 하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가 현실에 적극 참여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기꺼이 (정신적 )도구로 사용하려했다는 것 아닐까 (고향과 조국에 대한 애착이 다 나찌즘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나찌에 저항한 예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또 하이데거의 철학용어로 소개되는 ‘세계-내- 존재’가 그의 작은 고향마을인 메스키르히에서 독일로 다시 그리스(존재본연의 세계로서의)로 확장되는데 이는 궁극적인 존재를 찾아나서는 서양철학의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오리엔탈리즘의 확대과정(처음에 중동에서 동양일반으로 나아가 지배-피지배관계에 따른 인식론적 왜곡으로 확대)과 동일한 선상에 보는 것은 토포스에 대한 오해와 인문학에 대하 몰이해의 결과라 해야 하나, 우선 그의 고향인 시골마을에서 출발한 존재의 개념이 그리스로 확장되는 과정이 고유의 토포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내는 귀결인 것이지 이리저리 굴러 다나면선 세탁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부풀려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그렇다면 고향 또는 기원이라는 토포스의 의미를 어느 짝에 쓸 것인가. 물론 그의 고향마을을 찍어서 토포스로 들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다음 오리엔탈리즘이 차츰 그 의미를 확대해가는 것은 인문학(또는 사회과학)에 있어 개념의 확대 또는 전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텐데 마치 무슨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용어(피를 토하는 심정이라고 했나)를 함부로 훼손하고 확대해석한 것처럼 야단인가. 오히려 그 개념이 확대 해석된다면 지은이에게 영광이지 누가 될 게 뭐있는가. 거기다 고유의 토포스는 또 무언가. 이런 인문학적 용어 하나하나에도 그 귀하다는 철학적 토포스가 들어가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상한 결말, 하지만 꼭 나오는 결말, 하이데거의 “‘세계-내 - 존재’로서가 ‘지금- 여기’의 한국인에게 왜 한국인의 철학과 사유가 필요한가를 웅변해준다” 무슨 말인가. 우리도 이처럼 조국이나 고향에 대한 집착으로 민족과 국가에 복무하는 도구로서의 철학을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거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말도 안되는. 18. 피해대중과 ‘레드콤플렉스’의 기원 다시 서중석의 <조봉암과 1950년대>를 텍스트로 한다. 해방 이 후 또 한국전을 전후한 시기, 이 후 50년대 조봉암의 진보당이 와해될 때까지 빨간 색으로 칠해진 이 땅의 숱한 양민학살과 무자비한 테러를 고발한다. 이는 평화통일론과 함께 ‘피해대중이여 단결하라’는 조봉암의 선거 슬로건화 되어 이승만을 위협하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레드컴플렉스는 더욱 공고화되고 이 후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져 극성기를 맞게 된다. 그런데 1950년대 이야기 그것도 조봉암을 들어서 두 꼭지씩이나 나누어 쓸 일인가. 아니면 (극성기라는) 박정희 때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든지. 우려먹는 느낌이다. 19. 바그너의 경우 나찌이야기, 네 꼭지째다. 안인희의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가 텍스트다 글쓴이는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를 잇는 텍스트의 이해가 도식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사건’으로 높이 평가한 이를 소개하면서(이름 안 썼다고 모르나) ‘그로테스크한 스캔들을 좋아하는 속설의 산물’일 뿐이라고 한다. 글쓴이는 히틀러를 냉정한 정치가로 보면서 게르만 신화를 가져와 바그너를 이용하여 나찌를 옹호하는 기획된 금긋기로 봐야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분석을 포기함으로써 역사를 신화화하고 범죄를 판타지화하는 잘못된 용례로 지목한다. 나찌의 부역과 아무 상관없는 바그너를 구해내고자 하는 글쓴이는 아울러 친일부역자와 관련하여 ‘잘못된 역사에 부역한 예술가들을 어떤 기준으로 단죄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기준은 적극성, 자발성, 연속성과 더불어 부역 당시 환경(강압도)와 부역 이후의 반성도가 함께 참작되어야 한다는 답과 함께. 공감한다. 그런데 히틀러의 집권 20년 전에 죽은 이를 불러 그래서 직접적인 부역과는 전혀 상관없는 예를 들어 무엇을 따져보자는 것인가. 초점이 전혀 맞지 않는다. 거기다 박정희가 불러온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을 들어 적어도 나치의 토양을 마련하는데 공을 세운 바그너와 비교하는 일은 더욱 생뚱맞지 않은가. 글쓴이의 ‘금긋기(우리 상황과 연결짓기) 콤플렉스’가 딱해 보이는 장면이다. 20. 촘스키와의 대화 이제 촘스키다. 유럽지성이 갖고 논다는 미국인 식자인 셈인데 촘스키의 미국비판은 ‘불량국가’니 ‘미친 개’니 하면서 거의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신랄하다. 텍스트는 세권을 들고 있는데 두 권은 9·11을 주제로 다룬 것이고 하나는 9·11이전의 대담기록이다. (글쓴이는 촘스키의 사상적 원초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 한 권을 텍스트로 삼는다.) 촘스키에 있어 세계화는 ‘미국식 모델을 전 지구에 심는 것이며 이것이 세계화의 목표이고 결론’에 다름 아니며 미국은 전 세계를 과점으로 지배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 또는 초국적 기업의 뒷배를 봐주는 서비스기관이며 개발 국가나 주변부 국가의 정부는 이들을 위한 합법화된 무장력 또는 용역(깡패)회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또한 언론과 지식인을 가리켜 ‘조작된 동의’를 배달하는 선전원이라 칭하며 매스미디어를 통한 여론조작이나 여론 통제술은 대중을 참여자에서 방관자나 구경꾼으로 만들면서 소극적이고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다분히 무정부주의적인 색깔을 보이는 촘스키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구조와 계급구조에 대하여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한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다음에 인터넷을 보자. 대중은 인터넷, 전자민주주의라는 우군을 얻어 대중의 정치적 각성과 체제 밖의 정보를 구하는 등 정치의제 발언 등을 계속하면서 소중한 도구로 쓰고 있다 한다. 그러면 인터넷이 정보와 참여의 장이기보다 비쥬얼과 표피적이고 지엽적인 (선정적이고 말초적인) 흥미와 관심 위주의 가십거리 연예종합판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정치나 사회문제도 가십화하거나 흥미위주의 볼거리로 전락되어버린 문제는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요사이 이성과 합리에 의한 토론문화는 간 곳이 없고 ‘빨갱이’와 ‘수구꼴통‘간의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배설의 장으로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지경에 이른 전자대중매체를 어찌 봐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또한 글쓴이가 잠시 언급한 촛불시위문화같은 대중정치참여의 장도 보다 큰 하나로 집결되거나 집중되지 못한 채 일회성의 이벤트나 산발적이고 일상적인 해프닝으로 변질된 건 아닌가 아울러 촘스키는 때때로 국민은 세상사를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있지만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며 이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결집된 힘, 조직화된 노동계급만이 답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조직된 민중에 의해 ‘전투적 시민운동’이 이루어진다면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 그럴 것이다 문제는 무엇으로 민중을 조직할 것이며 어떻게 시민운동을 ‘전투적’으로 이끌 것인가 인데 이에 대한 해법이나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앞 꼭지에서 소개한 미국의 ‘과두정’ 얘기와 사뭇 다른 이 글에 대해서 글쓴이의 의견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당면한 관심사라고 한다면 촘스키의 세계를 읽는 눈도 필요하겠지만 특별히 9·11 이 후 이를 어떻게 볼 것이며 향후 세계화의 모습과 이에 관련한 미국의 드라이브가 어떻게 전개되고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면을 다 써버렸으니 나머지 두 권은 독자가 직접 읽어보란다. 그게 공부란다. 정해진 지면 14쪽 중에서 무려 4쪽에 걸쳐 나찌의 프로파간다 이야기를 풀어대면서 웬 지면 타령, 그리고 혹 우려먹은 내용이라도 책으로 낼 때는 수정 보완하고 첨삭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고 또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 아니겠는가. 끝으로 글쓴이는 ‘진실은 쉽게 읽힌다’며 그 이유를 의자 위에 있는 책을 ‘의자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라는 촘스키의 말로써 설명을 대신한다. 진실된 말은 꾸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혹 글쓴이의 글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그런가, 진실은 과연 그런가. 이 책이 ‘왜’ 의자위에 있는 건지 묻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 많은 독서와 철학적 사고로 훈련된 엘리트와 매스미디어의 교묘하고 집요한 그리고 집중적인 여론 조작과 통제를 비판하고 통찰할 수 있는 눈이 그리 쉬운가 다른 예로 미국 다수 국민들이 이라크전 파병에 찬성하거나 미국 농민과 우리 농민의 이해관계가 다를 때 또 진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면 진실의 파벌성이나 반쪽만으로의 진실에 머물게 될 가능성은 없는가 흔히 이런 식의 끝맺음은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매끄러워보이기도 하지만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속알맹이 없는 겉멋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1. 우리들은 모두 오이디푸스의 가족이다 이번에는 박정희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은데 텍스트는 신용구의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이다. 그러니까 정면에서 치고 들어가기보다 안에서부터 파헤칠 모양이다. 텍스트는 박정희의 극단적인 궤적이 ‘외형적으로는 정치적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철저히 심리적인 것’이라며 박정희의 심리상태(주로 소아기와 성장기의)를 따라잡는다. 텍스트는 크게 자기를 버릴 지도 모른다는 ‘유기불안’과 ‘자기애’와 아버지가 견제인물로 등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이루어져 있다. 글쓴이는 절대적 가부장의 권위를 갖고 있는 동양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맞지 않는다며 오히려 자기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심리적 고아의식’과 ‘동굴 속 황제’로 키워진 유아독존적 자기애가 문제라고 한다. 박정희의 심리적 고아의식에 대하여 훗날 박정희가 보여준 국가주의 정치사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텍스트를 꺼내어 소개하는데 그 페이지까지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아예 박정희 평전을 읽어보라고 하지.) 거기다 또 히틀러 이야기가 나온다 아직도 히틀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가 그 많은 꼭지를 나누어 주고도 지면이 없어서 줄인단다. 한편 글쓴이는 이런 정치지도자들의 행동이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심리적 접근이 정치적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왜곡시키고 역사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며 가부장적이고 부르주아 가치지향적인 프로이트의 정치심리학을 정치 지도자나 그들의 행동에 잘못 적용하면 중립적인 학문(정신분석)을 가장한 교묘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되기 십상이다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어떤 이에 대한 특히 그 이가 공인이거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의 경우 이에 대한 심리적 접근은 아주 흥미롭고 관심있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글쓴이가 앞에서 말한대로 분석 잣대의 부정확이나 일정한 결론으로 유도되는 악의적 의도를 감수하고서라도 박정희의 심리에 가닿으려는 노력은 의미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아직까지도 우리 현실의 한복판에 우뚝한 사람이므로. 그런데 왠지 한가해 보이지 않는가. 책이 좋다는 건지, 정치심리학의 접근이 이래서는 안된다는 건지, 그럼에도 책을 읽어볼만하다는 얘기인지, 그래서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것(편들기 위한 공부)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거기다 ‘박정희가 암살되지 않았다면’이라는 상상력이나 타인의 눈에는 티끌같지만 스스로에게는 산더미같은 큰 정신적 장애가 된다며 우리 모두 ‘오이디푸스의 가족’임을 부인할 수 없겠다는 글쓴이의 맺음말은 황량함을 지나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22. 엘리자베스1세, 영국사의 한 장면 16세기 말 영국의 상황과 독신인 여왕의 애정편력 이야기다. 극도로 혼미한 국내외정세 속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나라을 일으킨 여왕의 치세 정책 이야기 같지도 않고, 그의 젊은 정부인 에섹스 백작의 행적을 통하여 어떻게 군왕의 철퇴를 피해 갈 것인지 그 처세술을 일러주려는 의도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신체적 핸디캡이나 대외적으로 왜소한 입지 속에 살아남은 정치인들의 지략과 행적을 보여주는 열전도 아니고 대체 여기서 영국사의 한 장면이 왜 필요한지. (텍스트의 제목도 <엘리자베스와 에섹스>인데 ‘공부’제목으로 적당해보이지 않는다) 텍스트의 저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성적인 면’이 그녀를 구했을 뿐 아니라 영국을 안정된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엘리자베스는 겁쟁이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언질을 주지 않는 것,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 결정을 미루는 것, 주저하며 연기하는 것, 그리고 인색함’을 버리지 않았다. 극도의 교할함과 얼버무림으로 살아남았던 그녀에게 ‘영웅적인 요소가 있다면 차라리 그녀가 그토록 비영웅적인 일을 그렇게도 오랜 기간 동안 지속해 온 것’라고 평한다. 결국 당시 왕의 업적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특성, 특히 여성으로서의 좋지 못한 특성 때문이라고 귀결짓는데 몰역사적이며 선정적이고 표피적인 해석에 머물고 있다. 한편 글쓴이는 텍스트를 들어 에섹스에 대한 인물을 평하면서 <칼의 노래>의 이순신까지 끌어들여 권력가진 자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하고 있다. 어쨌든 글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 늙은 여인네와 권력을 갖고자 하는 젊은 정부의 사랑놀음과 자극적 결말(부주의로 중간에 흘려버린)이 전부다. 거기까지 즐기면 된다. 글쓴이의 사족만 없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카기 마사오를 ‘아비로 우러르는 광신도들은 (텍스트)저자의 다음말을 음미하기 바란다 ‘런던탑의 축축한 감방이 없었으며, 고통 속에 내지르는 비명 사이로 영리한 취조관이 조용히 취조서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광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도대체 무얼 음미하라는 말인지, 혹시 텍스트로 쓰라는 말? 23. 2007년 아마겟돈 이제 마지막 꼭지다. 박정희와 박정희 현상에 늘 주목해온 글쓴이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주제인 <대중독재>에 관한 글로 텍스트는 임지현, 김용우가 엮은 같은 이름의 책이다. 대중독재는 대중이 독재적 권력에 동의하고 그 과정에 적극 참여했음을 지적한다. 이는 대중을 늘 독재권력이나 기성 정치권력의 대상으로 보고 그 희생자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정치적 과정에 적극 동의하는 과정주체로서 행세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글쓴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사회부터 대중적 동의(자발적 복종)를 얻는 정치적 기술은 있어왔으며 그럼에도 그 근간은 강제와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는 전체주의 정권이 선전과 헤게모니 공작을 동원해 동의와 조작을 만들어내는 것과 동시에 암묵적인 위협과 폭력을 통해 복종을 강제하게 되는데 대중독재는 대중의 자발성에 지나친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현대사 교육의 부재’를 들어 올바른 교육으로 이를 시정할 수 있다고 보는 듯 하다. 이어서 글쓴이는 지배층과 대중 사이의 암묵적 합의나 협상마저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예를 들어 ‘프라하의 야채장수’에 대한 해석이나 김수영의 시에 나오는 ‘이승만의 사진’을 두고 이를 자발적인 순응과 타협의 여지로 보지 않고 전체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이 앓는 동일한 정신병리증상, 자아분열증세로 보면서 이미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체제와의 ‘무언의 협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쓴이의 주장은 대중독재론이 비판하듯 여전히 현실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적 현상적 측면에 대한 이해가 대중독재론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도 보듯이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박정희의 후광을 업은 박근혜의 특수 덕을 톡톡히 보았다든지, 또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과 관련하여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힌 일 등은 어떻게 볼 것인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07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 후보가 될 경우 친박과 반박의 무리들이 벌이는 아마겟돈이 될 것이라는 글쓴이의 예견은 현실세력으로서의 박정희의 영향력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마겟돈’이라는 표현이다. 대중독재든 개발독재든 박정희의 후광을 업은 현실적 세력이 존재하고 나아가 ‘빨갱이’ 대 ‘수구꼴통’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현실임을 감안하더라도 (글쓴이도 언급하고 있듯이) 현실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한, 다시 말해서 친박도 반박도 아닌 금긋기 힘든 중간지대가 훨씬 많은 상황이라고 본다면 아마겟돈 운운하는 건 전혀 현실과 맞지 않다, 아마겟돈이라면 이제 끝장을 보는 싸움이 터진다는 얘기아닌가. 거기다 프레 아마겟돈은 또 무슨 말장난인가. 지금이 전초전이든 아니든 아마겟돈식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다분히 자극적이고 무책임한 것으로 공부하는 이의 자세는 더욱 아니지 않을까 이제 23꼭지를 살펴보는 긴 글을 마쳤다. 참고로 현재 우리에게 중요하고 시급한 공부의 꺼리들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았다. 글쓴이의 글에는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도 있고 억지로 관련을 맺어보려 한 것도 있다. 이래나 저래나 그의 관점은 구체적이지 않으며 앞에서 말했듯이 절박하거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나 문제의식이 엿보이지 않는 한가한 지적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부정확하고 오류투성이의. *9·11 이후 미국의 정치외교와 군사정책의 추이와 관련하여 -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전망과 미국의 대외정책 방향 - 미국의 이라크침공과 관련 중동지역(이슬람)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이해 - 미국의 군사정책과 한반도 내에서의 변화와 이의 대응문제. (전략적 유연성이나 미군기지 이전-평택 대추리 문제, 이라크 파병 등) *한국적 자본제의 발전 전망과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관계 - 새롭게 조명받는 (우익적) 민족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관련 - 아이엠에프 체제 이후 세계금융자본주의에 편입된 한국 자본제의 진로 - 에프티에이 문제에 대한 접근, (어떻게 볼 것인가와 대안의 문제) *북한 핵실험과 한반도의 전쟁위협과 통일방안 - 현안으로서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모색과 전망 - 중일미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와 우리의 대처방안 *최근 수구보수세력들의 새로운 대두와 우경화 경향에 대한 분석과 전망 - 수구세력의 인문학 분야의 약진과 정치세력화 - 진보세력의 침체와 활로모색, 진보정당의 현실과 한계, 대안마련 - 차기 대선과 관련된 선거정국과 전망 *대중의 우경화 경향과 과거사 청산, 여론조작의 문제 - 한국적 근대화 과정과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전개 과정과 한계 -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날조 문제 등 역사에 대한 인식 - 친일 반공의 뿌리와 현안으로서의 레드컴플렉스 대처문제 - 대중과 인터넷, 그 명암(새로운 대중정치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인터넷문제) *인문학적 위기와 지식인 사회의 현실과 대응 - 쳘학적 토대로서의 인문학의 활로와 지식인의 역할 또는 의무 - 인문학적 바탕으로서 앞으로 책은 읽혀질 것인가 *과학주의(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사회 읽기)의 대두와 필요성 - 학제간 연구와 통섭, 한계와 전망 - 황우석 문제 (이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떠나서 또는 그 의미에서) [이는 인문학적 꺼리이면서 사회과학적 꺼리이기도 한데다 또 최근 이슈가 된 문제들도 있어서 그의 공부가 따라잡기에는 어려움이 있음도 인정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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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말하기 전에 선무당 같은 나의 예언 한마디를 먼저 말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복채를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정도면 저로서는 과분한 선심을 쓰는 셈이지만 뭐 추석 선물을 미리 돌린다 생각하면 억울할 것도 없겠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무당이나 예언가라고 단정하지는 말아주세요. 물론 제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자리 펴시지요' 하는 말을 종종 듣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가 말한 예언의 정확도에서 기인한 것일 뿐, 현재 제가 갖고 있는 직업을 버리고 그쪽으로 완전히 전업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사설이 길다구요? 성질도 급하시긴... 암튼 제가 하는 예언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정치 및 경제 체제가 유지되는 한 주요 선진국 및 그를 추종하는 신흥 개발도상국 대부분의 국가에서 앞으로는 극좌파의 정치 지도자가 득세할 거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보수 우파로 지칭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완전히 실패했고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부의 쏠림 현상은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우편향의 진보 세력, 중도 좌파에게서는 희망이 없는가? 일반 대중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이고, 그들에게서 대안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영국이나 미국의 정치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5월에 있었던 스페인 지방선거에서도 좌파 정당연합 포데모스 후보들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시장 자리를 차지한 바 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던 듯합니다. '설마~'하는 마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영국 노동당에서 만년 비주류였던 제러미 코빈이 당권을 거머쥐고 미국에서는 좌파정치인 버니 샌더스가 내년 대선 판도를 뒤흔들자 사람들의 생각은 '설마'에서 '어쩌면'으로 빠르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빈부격차와 분배의 불공정성에 맞선 ‘99%’의 반란, 허울뿐인 진보에 대한 반란이 좌파 바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앞으론 반드시 고려하겠다. 나는 <불새>를 좀 더 오랫동안 흥얼거리게 될 것 같다. "내 안에 내 몸 안에" 있는 '붉은 공포'를 깊이 직면해야겠다." (p.197)
사실 이 책은 정치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음악, 역사, 철학 등 우리가 사유하는, 혹은 사유할 필요가 있는 인문학적 생각의 '거리'들을 작가가 읽었던 책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모아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변혁의 시점에서 과연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이며,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자신의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곧 닥칠 미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설마 없겠지요. 작가는 책의 머리말에서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고 말합니다. 중립을 지키기만 하면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공부의 필요성은 거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이책에 실린 글들과 선택된 주제들은 2002년 대선 이후로, 한국 사회가 내게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해 보고자 했던 작은 결과물이다." (p.6)
저는 이 책을 읽는 데 근 한 달이 걸렸던 듯합니다. 370여 쪽의 두껍지도 않은 책인데 말입니다. 제가 이 한 권의 책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잡아 먹은 까닭은 작가가 읽었던 다양한 책들을 도서관 서가에서 간간이 꺼내 읽느라 그리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많은 책을 모두 정독 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작가가 인용했던 일부분, 그곳을 중심으로 앞뒤쪽 어림하여 이십여 쪽 정도를 읽었을 뿐입니다.
"국가를 사유화한 지도자에겐 당연하게도 후광과도 같은 카리스마가 생기기 마련인데, 거기에는 동의 구조와는 다른, 메시아의 재림과 같은 종교성이 대중을 압도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영적인 지도자와 대중만 남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질서는 모조리 공동화(空洞化)되어 버린다." (p.370)
사회의 변혁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전조를 눈치채는 사람도 적을 뿐더러 확실히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데서 우리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자살자가 급증하고 묻지마 범죄가 만연했건만 그 시기에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했던 경제학자는 아주 적었습니다. 그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욱 적었구요. 글로벌 금융위기 때 세계를 휩쓴 월가 점령과 ‘분노하라’ 같은 대중시위가 오늘날 기성 정치권의 변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반발일 뿐이라고 애써 자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행은 언제나 급작스러웠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계대전의 발발을 그 전날에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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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문학을 논할때 장정일이라는 인물을 빼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어머니의 종교 영향하에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고, 19세때 폭력사건으로 소년원에 1년 6개월을 살았으며, 소년원에 갔다 나와서 스스로 아버지와 흡사해지고 있다는 자각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합의하에 결혼을 했고 (그의 와이프는 "숨어있기 좋은 방"을 쓴 작가 신이현 임), 그의 성의식과 관련 "내가 동정을 그토록 오래 지켰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왠지 성교를 하고 나면 눈이 멀 것이라는 공포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책을 읽고 싶었던 나에게 눈이 머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는 발언을 보거나,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이 음란성 시비로 출간되자마자 출판사측에서 자진 수거하고 구속·수감된 어처구니 없는 사실의 주인공이라는 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구속한다.
난 개인적으로 장정일을 참 좋아한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꽤 글 잘쓰는 소설가이며,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발전을 이루어 왔다는 점,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과단성 혹은 과격성, 그가 대구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동향의식, 비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등에 도전하는 무(모)한 도전의식, 《너에게 나를 보낸다》라는 뛰어난 소설의 저자인점 등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가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해 꾸준히 독서일기를 쓰고 이를 정기적으로 출간해 왔던 "독서일기" 시리즈 독자로서 호감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장정일의 공부"는 사실 독서일기에 포함될 내용이지만, 저자가 생각하기에 그동안에 주로 읽던 소설 나부랑이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한 영역이었기에 별도의 저작물로 탄생하게 된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 공부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로서 소위 "인문학"에 연관된 저작물을 공부하듯이 "독서일기"를 써 낸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러한 접근자체가 이 책의 장점이자 한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저작물은 대부분 "두꺼우면서 어렵게 보이는 책"들인데 결론적으로 "장정일의 공부"을 읽다보면 다양한 시각의 "지식"들을 섭렵할 수 있다. 이 책이 그간의 독서일기와는 달리 해당 저작물을 상세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여렵고 두꺼운 책들을 읽지 않더라도 그 요점들을 파악할 수 있는 친절을 제공해 준다. 랄프 쇤만의 "잔인한 이스라엘" (미세기, 2003)이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인 시오니즘(Zionism)의 추악한 과거와 시오니스트들의 무서운 중동지배 전략 등등 꽤 재밌는 저작들을 간접 경험할 수 있지만, 이 책을가만히 읽다보면 결국 장정일의 인문학에 대한 막역한 "피해의식" 혹은 "열등감" 등을 읽을 수 있다.
그가 못 배웠고, 이 사회에 대한 뭔가 객관적인 분석적인 시각들을 가지고 싶지만 많은 공부를 통해 그러한 역량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 책을 만들게 된 기본적인 생각으로 비추어 져서 어찌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시, 소설 등을 통해 장정일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 사회를 만들어 가는 충실한 구심점이 되어 있는데, 본인이 그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영역에서의 "무지"를 그리 안타까워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구열과 도전의식은 칭찬해 줘야겠다. 그의 찬란한 과거 이력으로 인해 단순한 "또라이"로 인식되는 것을 벗어나는 건 좋지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리치고, 저항하고, 욕하고 뭔가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에 더 호감을 가진다는 사실 또한 그가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장정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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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는 네 사람으로 시작됬다. 이문열에게서 이념에 대한 생각(지금의 이문열로 오해는 말라, 그 당시 이문열은 상큼했다), 이외수에게서 낭만을( 지금 이사람은 들개처럼 치열하지 않고 너무 말랑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는 로망을(아~~! 요트파커), 그리고 이 책의 장정일에게서는 시대를 보는 시각을 각각 배웠다. (도대체 저 네 사람의 생각이 합쳐지면 어떤 사고 방식의 사람될까?) 앞의 두 이씨는 그 후 상당히 변해서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바다 건너 하루키는 아직도 건재하며 더 커져버렸다. 이 책의 저자 장정일.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굴레와 소년원 시절의 경험 이 두 가지가 그에게는 세상의 보는 시선이었다. 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람이지만 어째서 그 사람의 세상 바라보기가 나와 같다고 20대 때에 느껴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 한줄 이었나 보다. 어느 책에선가 자신의 꿈이 동사무소 9급 공무원이라고 했다. 칼퇴근해서 집에서 편안히 책을 볼 수 있도록말이다. 지금은 세상이 변해서 동사무소 9급 공무원이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겟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다. 이 사람 뭔가 통하는 구나. 하지만 장정일 이 사람은 어느 순간 부터 게을러졌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길 안에서 택시잡기', '아담이 눈뜰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너희가 재즈를 믿는냐','거짓말' 이후로 도대체 책을 쓰지 않았다. 물론 책은 썼다. 거짓말은 판금 회수 당하고, 수많은 독서일기를 썼으니 쓰기는 썼다. 하지만 독서일기라는 책은 왠지 그에게 예속 당하는 기분이 들어 고의로 회피하게 되니 그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너무 나와 닮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 그가 읽는 책까지 따라 읽게 되는 지식의 식민지가 될 것 같아서 겁을 먹었는지 독서일기는 한권도 읽어 본적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날 황석영의 '심청'에 호기심을 느껴 살펴보다가 장정일이 그 책에 대해, 그리고 평단에 대해서 독설을 퍼부었다는 오래된 기사를 검색하게 되었다.하~ 이 사람 오랜만이네라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장정일이 쓴 책을 검색해보니 그후 책 몇 권을 쓰기는 했는데 느낌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책 "장정일의 공부"를 보게 되었다. 나는 아직 장정일의 그늘에 있구나. 내가 나이를 먹지 않고' 별처럼 빛나는 청년의 삶'을 산 것인가? 그와 함께 나도 나이를 먹으며 변한 것인가? 그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 장정일이 한마디 던진다. 원래 공부란 한 사람이 '조금'하고, 그 사람이 지치거나 힘이 달리면, 선행자가 조금 공부해 놓았던 것을 맛본 사람이 이어서 계속 달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공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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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표지는 독자의 눈을 이끈다. 하얀색 “공부”글꼴은 호객꾼 노릇을 하기에 충분히 멋스러웠고, 책 전반을 관통하는 흐름에는 반가운 부분이 많았다. 장정일은 머리말에서 충격적인 한 마디를 지르며 책을 시작한다. ‘중용’이라는 우리 사회의 최고 미덕에 대한 반발.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 ‘비중용’적인 인간은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 받는 인물”이었다. 중용이라는 이름표가 진정으로 저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견출지일까.
장정일의 고백은 많은 사람들 마음속 호수에 파문을 일으킬 만하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 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머리말 p.5)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도 비판 없이 ‘중용의 사람’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이 눈떴다. 정의의 여신이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기에, 사정(私情)에 치우치지 않기 위한 방비일 테다.
‘알기’를 회피하기 위해 눈을 감는 건 위험하다. 그러기에 세상은 너무 까칠하다. 모르는 상태로 ‘그러려니’하고 말면, 칼을 들고 날뛰는 망나니에게 다칠 위험이 있다. 전문가도 확신 없이 말하는 부분이 있고, 교사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 “공부”는 자신의 확신을 찾기 위해 걸어가는 길이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그 길을 마흔 넘어 찾았다며 고백한다.
#1. 관통하는 흐름―중도 좌파
평소 내가 지지하는 입장과 비슷한 언덕에 서서 말하는 장정일이 반가웠다. 기존 질서에 대해 반항에 가까운 내용은 소화 가능-소화 불가의 두 가지 상황으로 나타날 것 같다. 보수로 가득한 우리나라에서는 소화 불가한 사람이 한 줌 정도 많을 것 같다.
#2. 매끄럽지 않은 문체와 오타
장정일의 문체는 맛있게 읽히지 않는다. 탄산음료처럼 톡톡 튀는 생각에 비해, 문체는 굉장히 답답하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글쓰기는 간결하고 명료하게 써야한다. 그것이 미덕이다. 깨끗한 문장으로 독자에게 정확한 개념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 쓰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각의 흐름대로 인문․사회 글쓰기를 한다면, 굉장히 긴 문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불만사항은 오타. 이 녀석은 언제나 눈에 거슬리는 부분 중에 하나다.
#3. 다방면에 걸친 책 읽기
장정일의 독서 편력은 나를 움츠리게 하기도 하고, 새로운 갈피를 잡게 도와주기도 한다. <과두정이 온다>편에서 소개한 엠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도 내 마음을 동하게 했다. <오래되지 않았다>편의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도 상당히 삼삼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책은 그대로 읽고 버리기엔 아깝다. 독서를 통한 정보 수집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서적이 사회과학에 가깝다. 지식은 하나의 그물망을 이루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지금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책부터 시작해서, 현대사를 지나 근대 중세 고대로까지 소급할 수 있는 동력이 독자들에겐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의 가치는 독자의 활용에 달려 있다. [인상깊은구절] 신라 건국기에 다듬어진 호국 불교라는 높은 뜻은 본디 불국토를 만든다는 말이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에 가서 적군을 살생해도 용납된다는 식의 국가주의 해석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것이다. -p.21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와 서열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에 미만(彌滿)한 일상적인 폭력이 모두 군대로부터 기인한다. -p.22 니체는 ‘오로지 피로 쓰라고 했다지만, 정열적으로 쓴 책만이 정열적으로 읽힌다. -p.28 지식이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여 주는 지적 작용의 집적과 방향이 끊임없이 확대되어 가는 곳에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 -p.49 (도쿄대의 바보들은) ‘교육의 목적은 현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라는 관점에서 볼 때의 바보다. -p.58 블로크는 “시험과 등수”에 연연하는 초․중․고등학교의 교육이 학생들을 개로 만든다면서 “서커스에서 재주를 부리는 개는 많은 것을 아는 개가 아니라 미리 선택된 연습을 통해서 알고 있는 듯한 환상을 주도록 훈련된 개다.”라고 말한다. -p.72 비행기의 1등석에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국경이 없지만 3등석밖에 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국경의 벽은 높다. -p.179 ‘기원의 기억상실’ 과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이 객관주의는 일반적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믿어 버리는 대중적 편의주의와도 통한다. -p.240 철학자의 아주 구체적인 경험과 거주 공간으로부터 탄생한 철학 개념이, 그것을 처음 고안한 학자의 손을 떠나 학문의 장 속에서 여러 차례 의미가 세탁되고, 또 시간에 따라 변화하면서 어마어마하게 추상적인 개념으로 부풀려지는 것을 우리는 간파해야 한다. -p.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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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였으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짜는 5월 23일, 즉,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었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날짜는 5월 29일 밤, 즉, 그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 우리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적지 않은 생각을 하는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 나는 인문학이란 것이 사회과학적 인식과 실천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의미가 반감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굳이 마르크스가 말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들먹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기존의 [독서일기] 시리즈를 이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7]이 되지 않은 이유도, 굳이 “공부”라는 제목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읽기로부터 얻어진 지식과 사색의 결과물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과 만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의 칼날로 빛날 때에 인문학은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미국 사회의 ‘과두정’을 말하고 있는 <과두정이 온다> 부분이었다. 왜 작가는 민주주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는 시대에 철지난 ‘과두정’을 이야기하는가? 그는 미국의 예를 든다. 미국이 지금과 같은 세계의 “깡패국가”가 된 원인에 대해서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한다. “미국의 부는 생산 활동에서 나온게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결과로 이룩됐다” 그래서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미국화한 세기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20세기 이후 미국의 정치지형을 관통하고 있는 흐름은 ‘과두정’이라고 지적한다. 과두정이란 소수 엘리트들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제가 아닌가. 미국의 과두정을 이끄는 소수 엘리트들은 SWAP이란 인종적 방패와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도덕적‧종교적 경직성을 보호막으로 삼고, 그 속에서 ‘군산복합체’로 표현되는 초국가적인 거대자본과 군사력의 힘에 기대어 있는 집단이라 하겠다. 이들에게 전세계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존속하기 위한 자기들의 앞마당일 따름이며,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시킨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계 어디라도 개입할 준비를 갖춘다. 문제는 이런 미국에서의 과두정이 21세기가 되면서 ‘미국화’하여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장례 과정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inner circle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입만 열면 반복하곤 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와는 별 상관없는, 그래서 미국화하고 있는 과두정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는 거리가 멀고 자신들의 지배계급적 이익에 충실한 사람들, 무엇이 그리 자신이 없는지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아예 그 비판이 나오지 못하도록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봉쇄해야 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경제적, 교육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심리적 우월감으로 발전시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낙인을 찍는 사람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이윤을 얻어 ‘아류제국주의’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미 공고화될대로 공고화된 이들 집단을 어떻게 해체시킬 수 있는가 과두정화되어 미국화하는 지배체제에 대항해 어떻게 민주주의의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가진자의 대통령이 아니라 서민대통령으로 일컬어지며 영면에 들어간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본다. 같은 맥락에서 <촘스키와의 대화>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촘스키가 누구인지는 여기서 길게 반복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장정일 작가가 왜 촘스키를 자신의 책에 ‘모셔오게’ 되었는지는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좀 길더라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소위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계급은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거나 온갖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소외시키기 위해 선전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까다롭고 막중한 선전 사업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들이 학식을 쌓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다. 다국적기업과 국가가 야합하고 있는 오늘과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을 통해 체제 선전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체제에 의해 저명한 지식인 혹은 책임있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체제의 나팔수가 된 지식인들이 민중을 프로그램화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중을 민주주의의 참여자에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통치 계급과 거기에 기식하는 지식인들은 대중이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결국 지배계급의 영구적인 자리보전을 위한 전략은 첫째, 대중들을 방관자로 만들 것, 둘째,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대중들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들 것 등 두 가지로 요약된다. 촘스키가 미국 사회를 보면서 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서 쓴 글이 아닐까 할 정도로 지금 우리사회의 모습과 합쳐진다. 방관자로서의 대중, 구경꾼으로서의 대중..... 가슴 한 구석을 아프게 찌르는 뜨끔한 말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참여정부의 가장 큰 공은 탈권위적 정치개혁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권위의 해체는 대중들로 하여금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대중들이 서로 소통하며 발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다. 물론 이런 현상을 본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을 거다. ‘무식한 대중이 뭘 아나?’, ‘배우지도 못한 것들이 건방지게시리...’ [공부]에는 귀에 익숙한 사람, 생판 처음 듣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들 중 마르크 블로흐와 하이데거를 비교해 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마르크 블로흐는 현대 역사학의 큰 족적을 남긴 역사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당시 안전한 생활과 풍요로운 노후를 보장받는 망명의 길을 버리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역사학의 중요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현상학적 측면에서 존재란 자신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유명한 테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치 부역자’라는 평생 씻을 수 없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으며, 존재를 억압하는 기술문명과 싸운다는 명분 하에 나치에 협력하여 프라이부르크 총장을 지내면서 독일 대학 내의 ‘학문적 자율성’을 빼앗아 간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과정과 생애를 돌아보면서 블로흐와 하이데거의 삶,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
| 무척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어디서부터 서두를 이야기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들이 아는 대부분의 진실이라 여겨지는 사실들이 그러한 범류에서 벗어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면 스스로의 지식은 새삼스럽게 무지에 대한 갈망을 원하게 된다. 아는 게 없어서 말을 못한다면 배우겠다고 작심하면 되지만 알고 있으면서 두꺼운 얼굴 속에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은 지식에 대한 편견이기보다도 다른 목적이 마음 한 가득 채워져 있음을 본인만이 알 것이다. 장정일의 공부는 이미 삭아 없어진 뼈에 엉뚱한 살을 붙이는 역사와 그릇된 해석들에 현혹됨이 없이 세상의 이치를 파악함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자신이 더하고 내가 더해 우리 삶의 지식을 보다 폭 넓게 익히고 잊혀져 가는 인문학에 대한 재발견에 있다고 하겠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읽기만 하는 것 보다 많은 도움을 준다. 장정일의 공부는 한 주제를 정해 그에 관한 책과 내용을 소개하고 스스로가 물어 깊이를 더해가는 진실한 인문학 공부를 보여준다. 세상의 이치를 따져보는 인문학이 쉬운 현상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 알지 못했고 보이지 않았던 사실에의 접근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자의적인 비판의식을 가능하게 만든다. 공부를 강요 받는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물며 어른들에게 세상의 올바른 이치를 알아보라고 공부를 하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 눈앞의 이익에 길들여진 타성은 아마도 펌프질 치며 이것 저것을 저울질 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거의 보내고 말 것이다. 역사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서들의 내용이 과연 진실일까? 터무니 없는 소리 같지만 역사는 항상 발견 중이고 재해석 중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지금까지의 기록된 문서와 일부 사학자들의 주관적인 해석이 대부분이었다. 12년이 넘게 배웠던 한국사, 세계사의 기록들이 당시의 권세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숱한 유혹을 느끼는 인문학 공부는 재미있고 솔직한 세상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진정한 공부를 하게끔 만든다. 책의 내용 중 면후흑심이란 이란 문구가 눈에 띈다.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마음, 근세 중국의 이종오라는 철학가가 삼국지의 유비, 조조, 손권의 책략과 행동들에서 어떻게 그들이 군웅이 되었는가를 고심하다 깨달은 철학이다. 후흑 이론은 무척 자극적이지만 위정자들의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보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우리시대 정치인들도 후흑이론에 꽤나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백성들은 이기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에 민감하다. 위정자들은 너무도 극렬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꽤 차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백성들을 우민화 하려는 수 많은 방법들을 만들게 된다. 민족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국채보상운동, 금 모으기 운동은 모든 단단한 것은 민족 앞에서 흔적 없이 옥아 사라진다는 민족주의의 절정을 보여준다. 모짜르트는 진정한 혁명가였는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냐는 문제라면 할말이 없지만 모짜르트에 관해 조금 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세의 계급사회를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서 모짜르트가 자신의 인생을 받쳤던 음악을 통한 의식의 발견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는 계급사회에 반항한 진정한 혁명가였다. 대한민국의 보수당의 정치를 알려면? 해마다 선거철이면 공화당이니 민주당이니 그게 그것 같은 미국 대통령, 상하원 선거가 뭐 그리 우리에게 중요하냐고 생각한다면 우린 정말 무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주식을 하면서 왜 내 주식은 외국인이 사질 않나 하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이념을 중심으로 한 신우파는 현재의 공화당이다. 그들은 문화, 사회, 보수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부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백인 우월주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미국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지 않는다. 공부를 읽으면서 꼭 읽고 싶은 책은 조봉암 연구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라는 책이다. 특히 당쟁의 중심이 되며 조선 시대를 피로 물들인 송시열의 북벌론의 허구와 서인들에 관한 조선의 패망함은 사대부 나라 조선의 맥락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모른 것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실은 그러한 모순성에 시간을 더하면서 왜곡되거나 변질된다. 바위가 계란에 깨질까?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물방울은 바위를 깰 수 있다. 사고의 연유를 통한 현재의 발견, 상대적인 것에 대한 공통점의 발견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데 인문학은 꼭 필요한 충분 조건이라 생각한다. 조그만 물방울이지만 언젠간 바위를 깨뜨릴 생각이라면 그 의지는 지금부터 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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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건 '아. 이렇게 해야하는구나' 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독후감은 이렇게 써야하는구나라는 폭넓은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란 책을 보면 책읽기에 대해서 겹쳐읽기, 깊이읽기를 강조한다. <장정일의 공부>는 저자가 그동안 생각해보았던 문제에 대해 겹쳐읽기, 깊이읽기를 토대로 해서 독후감을 쓴 내용들의 나열이라고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각각의 주제가 따로따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유기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사회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큰주제안에 저자가 다시금 환기해보아야 될 문제에 대해 소주제로 나눈 흔적이 보였다.
필력도 물론이거니와 독자에게 이책 저책을 읽게 만들고 싶은 그의 능력이 일단 감탄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을 온당 다 받아들일 수도 없는데 저자가 읽은책을 내가 읽어보지 못했고 책을 읽은 사람의 느낌이 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제 역할을 충분히 다 한듯 보인다. 다음으로 읽은 책이 책세상의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인데 독자의 공부를 이끌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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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띠지에 실린 장정일의 '뚱한' 표정에 끌려서 사고 말았다. 참 오랜만이다. 장정일. 그의 초기 소설들, [아담이 눈뜰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읽으며, "꽤 독특한 캐릭터야" 감탄하고, 그 시절 함께 읽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묘하게 닮아있던 그의 눈빛을 부러워하고, 그의 [독서일기]를 읽으며 "어휴 뭔 책을 이렇게 많이 지독하고 철저하게 읽어대는 인간이 있담"하며 '질투'에 불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아니 세월이 그 사이 훌쩍 흘렀다.
책의 부제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고? 이젠 아예 '죽음'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시작해보겠다는 건가 보다. 대체 인문학이 풍성했던 시절이 한국에 있기는 했었나 모르겠다. 대학 정원에서 문과가 이과보다 많았던 시절이 있기는 했고 아마도 요즘에는 '이공대 기피 현상' 때문에 여전히 더 많을 것 같은데... 졸업 후의 직업적 전망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학과들이 정원만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인문학의 위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얘기하는 이유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다. 소수의 학자나 연구자들을 배출하기 위해 같은 학과의 나머지들(?)은 꼭 그렇게 학점 피라미드의 기층을 깔아줘야 하는지 의문이다. '인문학의 위기'라기 보다는 '인문학자들의 위기'라고 해야 좀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리 사회가 너무도 급격하게 천민 자본주의의 행로를 질주하다 보니,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인문적 교양 따위를 비용 효율적 관점에서만 취급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문학'이 사람들을 매혹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컨텐츠'의 내용과 생산방식, 그리고 생산자인 '인문학자'들의 문제이다.
이 책으로 해서 죽어가는 혹은 죽어버린 인문학이 찬란하게 부활(?)할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들이 살아있는 한 어떠한 형태로든 '인문학'이 어처구니 없이 죽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인간이 제기하는 긴급하고 절박한 문제들을 탐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은 이제껏 한번도 멈춰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장정일은 /머리말/에서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있던 '중용'의 틀을 깨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 역시 고백하자면, 장정일보다도 더 무지하게 살고 있었고, 여전히 그러하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은 의지적으로(?) 계속 그러할 예정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독서광으로 이름을 올렸던 장정일의 진면목을 얼핏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다. 대체로 작가의 개인 신상에 관한 일들에는 시컨둥하고 별 관심이 없지만, 공식 교육의 이력이 중학교 중퇴에서 멈춰있는 장정일은 예전부터 이따금씩 궁금했었다. 집안이 몹시 가난했나? 그런데 생업에 내몰린 흔적은 별로 없었다. 독특한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제도 교육의 딱딱한 틀을 견뎌낼 수 없었나 보다,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노자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를 소개하고 해설하는 대목에서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 신도여서 당시 고등학교에서 치러지고 있던 군사훈련(교련) 때문에 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길 하고 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바쳐진 위의 두 권의 책은 그래서 장정일 개인에게도 새삼스런 충격이었던 듯 싶다. 헌법에는 쓰여 있다는 '양심의 자유' 위에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군사문화/권위주의/서열주의/국가주의의 뿌리는 깊고 강하다. 우리는 여전히 험하게 살고 있다.
장정일이 "지긋지긋"해 하는 "'양비론의 천사들'"이 웅크리고 있는 무지의 동굴을 예의 그 안광으로 비춰가는 과정은 저자의 필력 덕분에 술술 읽히지만 그 무게마저 가볍지는 않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에서 국가주의의 전횡에 너무도 쉽게 굴복하고 침묵하는 한국 사회를 읽어내고, 인조반정과 송시열 분석을 통해 남한 보수 꼴통의 역사적 상한선을 추적해보기도 하고, 일본 도쿄대 비판을 통해 대학 교육을 잠깐 훑어보기도 한다. 제 2차 대전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을 되짚으며 군사적 부문에 눈을 주더니, 중국의 근현대사와 오리엔탈리즘을 비판적으로 섭렵하고, 근대화와 식민주의에 따른 논란과 함께 친일 청산 문제, 절대왕정, 독재자와 대중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전진해간다. 날조된 이스라엘 신화와 천황 만들기를 비판하고, 미국 정치 지형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을 탐사하더니, '미친 개'라는 이미지로 인식되기를 원하는 미국의 실체를 촘스키를 통해 폭로한다.
이 책을 통해 장정일은 대체로 '좌파'적 시각과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일이 좌우의 시각만으로 깔끔하게 갈라서지는 않겠지만, 사실 한국 근현대사에는 '좌파'가 울컥할만한 사건 사고들이 너무 촘촘히 박혀있다. 멀게는 인조반정과 송시열로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보수꼴통'의 계보와 일제하 식민시대와 해방공간, 내전, 독재체제를 거쳐오며 참 신산하게들 살아왔다. 여전히 길은 멀고 험한데, 도대체가 엉망이다. 그래서, 더 많은 '공부'들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장정일 역시, 뭔가 깔끔하고 명쾌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가도 아니고 정치학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가 여기까지 공부했으니, 그 다음은 당신들이 조금 더 하기를 바란다고, '여기서부터는 내가 더 해 봐야지'하고 발심해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러면서, '뚱한 표정'으로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양'에 대한 압박이 좀 심하다. 따로, 장정일의 독서목록을 정리해봤는데, 꽤 길다. 돈 좀 벌었을 것 같은 그조차도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을 만큼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