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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고 형형색색의 요트가 바람결에 흐르고 “요트”라는 글씨까지 멋을 한껏 부린 표지라서 내심 밝고 유쾌한 이야기를 기대하며 작은 책을 펼쳤다. 그런데 자잘하고 섬세한 필치로 일상을 그려내긴 했지만 밝은 얘기들만은 아니었다.
<요트> <비망록, 비망록> <농담> <꿈> <퍼즐> <시간이 흘러가도> 등 여섯 편이 묶인 단편집이다. 특이한 점은 한편을 빼곤 모두 부부의 관계를 그렸다는 점이다. 한 그릇 안의 다른 두 밀가루 덩어리처럼, 소통부재가 가져올 수 있는 부부간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 믿음에 대한 배신, 다른 사람을 만나 문제가 생겨 해결 과정에서 의외의 결정을 내리는 남편, 변한 남편이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야 하는가의 고민 등... 정답은 없다. 하지만 지금 당신 곁의 그 사람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여전히’ 그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볼만 하겠다. 그래서 계속 또는 영원히 함께 살 것인가, 아닌가... 그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모두 일상을 어느 정도는 무덤덤하게 또 어느 한편으론 꿀꿀하게 그리고 있지만 서하진은 일상의 환상보다는 현실을 일깨워준다. 자신의 상처의 흔적들을 소설로 엮으면서 독자들에게 위로를 받으라니... 이런 어폐가 없다. 하지만 다 읽고 가만히 책을 쓰다듬으며, 접었던 대목을 다시 펼치며 작가가 내게 바란 위로가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건 어쩌면 인생에 선물은 없다는 것, 일상에 환상은 없다는 것, 우리가 꿀꿀하게 살아가는 것, 그 사실을 일깨우려 했던 것이 바로 작가가 말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찌 됐든 상처는 끊임없이 생길 것이고 그 상처 또한 시간이 흐르면 일상 속에서 치유되고 또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또 다른 상처에 맞설 수 있지 않겠는가.
<요트>에서는 집값이 오르자 집을 팔아 작은 데로 옮기고 나머지 돈으로 요트를 사서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남편, 그 남편을 포기시키려는 아내. 그러다 집을 나간 아이를 구슬리는 방편이 되는 요트. 남편을 꼬드기지 말라고 요트 여행을 부추기는 남편 친구를 만난 아내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꿈에 사로잡힌 한때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저의 꿈이란, 종이작업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작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제법 문청 소리를 들었거든요. (...) 왜 포기했는가. (...) 매일 단어가 그 많은 책들이 담고 있는 언어가, 단지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들이 내 나날 속으로 전혀, 한치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 스스로 돌연한 영감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헛된 언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나날이 낡아가는 상상력처럼 그 깨달음도 서서히 왔습니다. (...) 요트 여행, 그 오랜 꿈이 좌절된다면 남편도 허무해지겠지요. 그렇지만 곧 잊고 살아갈 것입니다. 꿈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요.”
<비망록, 비망록>에서는 어머니의 둑음, 집을 나간 아버지의 불륜 연애사가 적혀있는 수첩을 읽는 아들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그 어머니의 지옥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했다. 진실이 고통임을, 정직하다는 것이 씻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보다 그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였다.”
<농담>은 사랑이나 공감 등보다는 현실적인 조건이나 이해관계를 따져 그럭저럭 결혼을 하고 결혼생활을 마치 계획뿐인 일상처럼 하던 커플에게 일을 그만두고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아내의 작은 반란이 일으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그 전개과정과 남자의 행동에 따라 여자가 하는 생각, 의문 등의 심리변화가 흥미롭다.
<퍼즐>에서도 상대를 얕잡아봤던 여자의 생각이 재밌다. “지은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로서는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자신이, 안이하고 미지근하게 대처했던 그 모든 순간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책을 찾을 것이나, 그 대책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너무도 막막한 것이므로 남편이 결국은 회사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판단, 늘 그랬듯 무리수를 두지 않으리라 여겼던 그 치명적 실수. 언제, 어떻게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던 것일까. 이 일이 자신의 인생 최대의 실수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밀려들었다.”
<시간이 흘러가도>에서도 비슷하다. “언제쯤이었을까. 남편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나는 이제 지쳤어, 라고 말했을 때 그건 중대한 신호였지만 나는 깨닫지 못했다. 나는 고래 심줄이 아니야, 라고 했을 때는 내 안의 뭔가가 움찔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무시했다. 나는 두려웠다. 모든 일은 서서히, 내가 방심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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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6편의 단편이 실린 책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작가에게서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분위기가 느껴져 무언가 일본스러우면서도 한국적인 느낌이 담긴 단편들이라고 해야 할까. 중간 중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일본스럽다는 건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글 분위기가 나서 그렇다는 것이고, 한국스럽다는 것은 우리나라 가족들 속의 아픔이나 상처가 담겨져 있어서였다. 총 6편의 단편들은 상처를 안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특히 가족.
가장 마음에 끄는 단편이 제목인 <요트>였다. 부부는 젊었을 때부터 저축보다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 부부는 세계 각국을 가곤 했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이 점점 커가면서 그 여행을 하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지만, 남편의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는 것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 불쑥 말을 꺼낸다. 집을 팔아서 요트를 사자고. 아내는 그런 남편의 말에 어의없어 하지만, 요트를 사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던 어느날, 고등학생인 아이가 가출을 하고, 몇일씩 무소식이된다. 공부잘하고 말썽한번 일으키지 않았던 아들이 말이다. 부부는 아이를 찾아나서고, 몇일째나 되던 날 외진곳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잠에서 깬 아이에게 아내는 말한다. "요트 탈래?" 라고. 육 개월 동안...
공부만 알고 지내는 아이에게 요트라는 말은 정말 바다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엄마가 내뱉는 요트를 타러 가자는 말. 왠지 이런 엄마가 너무도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생 아이에게 6개월만 한국을 떠나 요트를 타러 가자고 말하는 엄마. 나도 먼 훗날 내 아이에게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미소지었다.
바람난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읽는 아들의 상처.. 아내의 사표와 공부를 시작한다는 말에 못마땅한 남편이 집을 나가고, 다른 여자가 생긴듯한 행동을 하며, 집을 판다고 내 놨을때 아내는 남편에게 끌려가고 있었지만, 어느 날 그 집을 나오는데, 남편과 만난 그 카페에서 로또에 당첨된다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남편의 표정. 그 통쾌함의 이야기. 죽은 오빠를 위해 동생과 아픈 엄마를 위해 집의 가장이 된 그녀. 난자를 팔며 돈을 버는 그녀의 상처 이야기.. 옛 사랑에게 돈을 빌려주고 떼이고, 몇달간 고민하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아내. 그런데 백수가 된 남편은 그녀의 말에 아무런 이유를 묻지 않고, 돈을 갚아준다고 말하는 이야기.. 이런 저런 가족사 안에서의 상처와 개인의 상처가 함께 묻어 있는 단편집이었다. 그 상처안에서 통쾌한 이야기도, 흐뭇한 이야기도.. 또 가슴아픈 이야기도 골고루 담긴 단편집. 괜찮았다..
나는 변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남편과 아이가 죽었다. 불행이 사람을 달라지게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불행은 열린 문을 닫게 한다. 열고 싶지 않을 뿐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종래에 그 문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닫히고 마는 것이다. 여자처럼, 그토록 큰 외형의 변화를 겪은 사람을 나는 알지 못했다. (p.62)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러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다고.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는 행복했던가. 그랬었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절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행복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던 날들. 어느 때인가 내게도 안온한 날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직은, 아직은 아니지 않은가 믿던 어느 날 문득 그 일은 일어났다. (p.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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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일상은 발견되지 않는 균열들로 가득한 살얼음판과도 같다. 때때로 우리는 균열을 발견하여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기도 하고, 균열을 발견하지 못하여 바보스럽게 꽝꽝거리며 걷기도 한다. 물론 균열을 발견하고 부러 못본 척, 온 신경을 곤두세워 조심스레 걸으면서도 과장스러울만치 자신만만하게 걷기도 한다. 그래도 변치 않는 것은 우리들 삶에는 끊임없이 균열들이 생기고 사라지면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잡아 챌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 아닐까. 서하진은 이처럼 우리들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는 일상, 그 안의 균열을 발견하고 그 모양을 그려내는 데에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
「비망록(備忘錄), 비망록(悲忘錄)」.
「농담」.
「꿈」.
「시간이 흘러가도」.
오래전 「제부도」에서부터 작가는 일상의 그늘진 부분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 한 여름에도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이번 소설집에서 그 서늘함은 많은 부분 남과 여, 부부의 연으로 맺어져 있는 이들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서로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부부들은 어느 순간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배신에 가까운 이해할 수 없음의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그 거리감은 무한에 가깝게 증폭되거나, 소리없이 소멸해 버린다. 어쩌면 모든 부부가 수시로 겪고 있을 이러한 몰이해와 거리감이 서하진의 손을 빌림으로써 서늘하게 묘사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