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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책을 대하면 산림욕을 경험한 것처럼 기분이 맑아진다. 오랜 세월 수행을 통해 쌓은 스님의 청결한 영혼을 소음과 공해에 물든 속세에 찌들어 사는 내가 어찌 닮을 수 있겠냐만은 잠시라도 스님의 깨끗한 글을 통해 내 오염된 눈과 마음의 피로를 풀 수 있음으로 만족한다. 책을 읽는 내내 두메산골 오두막에서 자연을 벗삼아 홀로 살아가시는 스님의 삶이 떠올랐다. 속세의 사람인 내가 만일 인적드문 산골 기슭에서 혼사 산다면 우선은 외롭고 무섭다는 생각부터 들 것이나, 한편으론 평상에 누워 별밤을 바라보고 개울가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빨래를 하는 자연친화적 삶이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왠지 스님의 삶에선 외로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스님의 글은 눈과 마음의 피로회복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잊고 사는 진실앞에 스스로를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이 엄숙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기 때문에 감화받기가 쉽다. 스님앞에서 서슴없이 '지배하기 위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시생이나, 고가의 사슴 피 먹은 일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중년의 아주머니의 일화는 같은 속세인인 내 낯을 뜨겁게 만들기도 했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만드는 귀중한 시간이다.』,『진정한 자유는 정신적인 데에 있다.』,『깨어 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못한다.』,『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마음에 따르지 않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이 중요하다.』,『닦지 않으면 오염되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종교의 의미는 죽은 뒤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 있다.』,『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말수가 적고, 자신의 허물만을 고쳐갈 뿐이다.』,『신앙이나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겪어서 체험하는 것이다.』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만이 보석이 아니다. 참 종교인의 진언이야말로 진짜 빛나는 보석이 아닌지..형체로 존재하는 돌덩어리는 육체에 아름다움을 더할지는 모르지만, 좋은 책 속에 존재하는 글귀는 그보다 중요한 정신을 아름답게 가꿔준다. 중요한 것은 전자의 보석은 가치가 정해져 있지만, 후자의 보석은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가치도 천지차이가 난다는 것. 스님의 소중한 글귀들 중에서 특히 '깨어있는 영혼'이란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우리의 육체가 살아있다고 해서 그 육체 속에 담긴 영혼까지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 중엔 육체는 살아 숨쉬지만 눈먼 영혼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예 죽은 영혼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영혼도 아둔한 소경일 뿐,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몸의 청결에는 매우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정신의 청결에는 무심해지곤 한다. 정신의 청결을 위해서는 읽다가 자꾸 덮히며 나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양서를 골라 읽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인상깊은구절] 다른 종교는 몰라도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상이고 미신이다. 불타 석가모니 자신 최후의 유훈을 통해서도, 저마다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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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 옛것을 읽는 즐거움. 여기에 초판본을 읽는 새로운 즐거움이 더한 하루였습니다. 책 제본 상태가 수명을 다해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느라 좀 더디게 읽힌 책, 버리고 떠나기. 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살라하는데 저는 그렇게 살고 있는 않은 이유입니다. 스님 표현으로라면 저는 실천은 없고 말만 뻔지르르한 사람인 것입니다. 제 인생 멘트인 분의 책을 그저 그렇게 쓸 수 없기에 생각하고 돌아볼 것이 많은 하루였습니다. 종교의 본질 모든 종교는 표현과 방식의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엔 사랑과 자비를 내세웁니다. 사랑이 곧 신이고 진리이며, 자비의 실현이 종교의 본질이겠지요. 사랑이란 이웃으로 향한 부드러운 눈길이요, 따뜻한 손길이며 이해와 보살핌이며 염려다. 자비와 사랑의 실천없이 깨달음이 어떻고 견성이 무어라고 지껄이는 것은 빈 골짜기를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사랑과 자비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겪어서 마음이 동하여 움직일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불교는 단순히 부처님을 믿는 종교는 아닙니다. 불교는 우주의신비와 생명의 실상을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래적인 자아와 우주 질서와 그 도리를 믿고 그것을 몸소 실현하는 종교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나 신앙심은 절이나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과 하나님이 법당이나 교회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상이건 십자가.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이나 교회에 가는 것은 그런 곳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 깨달음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님으로부터 전하여 듣고 일상생활에 적응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절에 나가고 계를 받고 시주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절에 나가지 않지만 부처님말씀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살계를 받고 절에 나가야만 신자일까요, 절에 다니지 않으면 진실한 신자가 아닐까요. 법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방생의 뜻도 모르면서 소원을 이룬다하니까 그저 누군가 잡아 온 물고기를 다시 바다에 놓아줍니다. 가족을 위해 추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지만 그래도 새끼만큼은 그물에서 꺼내 바다에 놓아줍니다. 과연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맹목적이고 반이성적인 신앙의 맹렬성을 버리고 맑고 평온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바르게 살자. 관념적이고 개념화된 부처님과 하나님이란 이름에 얽매이지 말자. 이 우주의 진리가 굳이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가르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간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 속에서 있으니 바른길로 가는 실천이 진정한 신자이고 살아있는 현자賢者일 것입니다. 머리의 종교는 공허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약동하는 가슴의 종교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부처님과 신은 마음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자. 마음 밖에 있는 것은 허상이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종교나 기도가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고 기도하면 원을 들어준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종교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 안에서 티끌만치 너무 작은 존재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불안으로부터 갈구로부터 욕심으로부터 나를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종교와 기도는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줍니다. 깨달음과 정진 어디까지 깨달아야 진정한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개인마다 상황과 정도가 다르니 깨달음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얕고 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꺼번에 닦고, 단박 닦는다. 혹은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삶의 진실에서 벗어나 있다. 깨달음은 개인적인 체험을 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닦아 이를 유지하는 것이라 볼 때, 깨달음과 정진을 지키려는 사람만이 진실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깨닫고 정진하는 것은 어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출가 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어야 한다. 그 내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는가. 우리같이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이 꼭 출가 수행자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늘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수행하며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가끔 경전공부니, 봉사니, 울력이니 하며 바쁘게 돌아다녔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신앙생활에 열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실은 불사니 신앙이니 핑계를 대며 여기저기 분주하게 돌아다닐 뿐이었습니다. 가족을 우선하고 집안일부터 안정이 되어야 신앙생활도 의미가 있습니다. 밖으로만 겉돌지 말고 안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밖으로 팔았던 시선이나 관심을 안으로 돌이켜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선지식을 마음 밖에서 찾지 말고 그대 안에서 찾으라. 선지식이란 말뜻은 원래 좋은 벗, 착한 벗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또 나를 잘 알고 이해해 주는 마음의 벗입니다, 나에게 깨우침을 주는 선지식을 우리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찾고 있습니다. 선지식은 경전이나 어록, 성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일상의 어디나 언제나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허물이 있다. 하나는 선지식을 바로 내 코앞에 두고도 엉뚱한 데서만 찾으려는 탓에서이고, 또 하나는 선지식을 맞을 만한 내 준비가 아직 없어서이다. 우리에게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깨우침을 주는 선지식이 위대한 사람만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일 수도, 이웃일수도, 바람과 별일 수도, 산이나 바다일 있습니다. 활짝 피어 향기를 뿜고 있는 연꽃일 수도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수행하여 바른 길을 가고자 실천할 때 내 곁에 선지식은 머물 것이고 우리는 그 선지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선지식은 찾고자 하는 자에게 보일 것입니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 내가 만약 시끄러운 세상에 살면서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면 청소차를 몰거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청소차를 몰고 다니면서 묵묵히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으면 절이나 교회에서 행하는 그 어떤 종교의식보다도 훨씬 신성하고 건강하고 또한 거룩하게 느껴진다. 그랬더라면 스님은 청소하는 선지식인이 되었을 겁니다. 제가 법정 스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삶의 간소함과 실천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고집이 세다고 표현할 정도로 당신의 의지나 견해를 스스럼없이 내놓았습니다. 물론 강직한 자기절제와 나눔으로 말의 힘을 실으셨습니다. 저는 매번 정리정돈을 하고 삶을 간소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무소유를 변형하여 유소유를 합니다. 차고 넘치는데도 이 정도면 무소유적인 삶을 산다고 위로까지 하고 있습니다. 나눔으로 무소유를 실천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이 아직은 제 귀에 박히지 못하나 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경쟁하듯, 자랑하듯 무엇을 사들입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하지 않고 구매욕을 참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야할 때를 놓치면 후회하고 원통해합니다. 자꾸만 채우려고 하는데 비우려 하지는 않습니다. 항상 차고 넘치지만 만족할 줄 모르고 또 채웁니다. 사는 속도는 빠르고 거침없습니다. 그러나 버리는 속도는 참 늦고 망설이다가 다시 되가져옵니다. 사람들은 얻는 것은 좋아하지만 잃는 것은 싫어합니다. 어떤 것을 수집할 때는 그 숫자를 헤아려야 하지만 버릴 때는 미련을 두지 말고 한꺼번에 몽땅 버려라. 인생이란 얻는 것과 잃는 것으로 얽혀져있다. 세상이란 지금 당장의 일만 가지고 손익을 따져서는 안 된다.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하여 어떤 선택과 결단이 참으로 얻는 것이 되고 잃는 것이 되는지,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무無가 있어야 한다. 크게 버릴 줄 알아야 크게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또 그것이 나와 타인에게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봐야합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합니다. 많이 비워야 많이 채울 수 있습니다. 비우지 않고는 더 이상 채울 수 없습니다. 지난달에도 나는 책을 열 두 상자나 치워버렸다. 책의 더미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다. 일상적인 내 삶이 성에 차지 않거나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나는 내가 가진 소유물을 미련없이 정리 정돈한다. 스님에게 소유물이라는 게 주로 책일 것입니다. 그 책으로부터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어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겁니다. 그리고 묵은 짐이 된 책들을 치워버리시고, 그러면 다시 개운하고 홀가분해서 새로운 책을 만나 삶의 탄력과 생기가 얻을 테지요. 저게 이렇게 큰 스님과 같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저도 복잡한 일이 생기거나 해결되지 않은 일이 생겨 고민이라도 할라치면, 혹은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면 정리를 합니다. 즉흥적일 때도 있고 미리 계획해서 정리정돈을 합니다. 묵은 것을 버린다는 것, 먼지를 털어낸다는 것, 그래서 깨끗이 비워둔다는 것은 정신을 맑게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효과적입니다.
절에 가면 스님들 방이 궁금합니다. 가끔 들르는 방도 있습니다. 법정스님에게도 들르는 방이 있었습니다. 다른 스님이 기거하시는 곳인데 그 방에 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방이 좋아서랍니다. 그 방에는 어디나 있음직한 달력도 없고 휴지통도 없습니다. 방 가운데 오직 방석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입니다. 절에 가면 법당보다는 스님들이 계신 방에 차를 마시거나 말씀을 들으러 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텅 비어있는 그래서 고요하고 성스러운 그 느낌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요즘은 스님 방에도 옷장과 냉장고에 테이블과 컴퓨터가 있고 이런저런 짐들이 많아진 듯 합니다. 예전에 비해 고요 속에서 텅 빈 충만을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비우고 버리는 것은 비단 사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마음, 지위까지도 관여합니다. 지난해부터 나는 치수에 맞지 않은 옷을 한 꺼풀씩 벗어 제치고 있다. 협회나 기관에서 손을 떼고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행사에는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채울 곳이 없으면 물건을 버리고 그 공간을 비웁니다. 할 것이 많은데 바쁘면 중요도를 따져서 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는 가지 않고, 갈 필요가 없는 곳은 가지 않으면 시간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좀 더 중요한 일을 하면 됩니다. 이를 이해서는 끝없는 탈출과 출발이 있어야 한다. 자연은 사계를 통하여 항상 새롭게 태어난다, 여름동안 푸르고 무성했던 잎들을 미련없이 떨쳐버린다. 이는 가을의 열매를 통해 다시 태어나기 이해서다. 그리고 겨울이며 앙상한 가지만 남아 봄을 기다립니다. 새롭게 싹을 틔우기 위해 비우는 것이겠지요. 행복의 조건은 단순하고 소박한 삶과 고양된 영혼이다. 당신 자신을 안팎으로 살피라.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당신 스스로 만들어라, 자연과 우주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면서고 조화와 질서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이겨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홀로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맹목적인 삶에 편승해서 허우적거리지 말기 바랍니다. 홀로 있어야만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반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스스로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 성장할 것입니다.
스님이 여러 번 인용한 크리슈나무르티 말 속에는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조용히 지켜보라. 자신의 걸음걸이, 먹는 태도, 말씨, 잡담, 미움과 시새움 등을 자세히 살펴보라, 어는 것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깨우친 다면 그것이 명상의 한 몫이 될 것이다.” 저는 ‘명상’이란 단어를 ‘홀로 있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바꾸고 싶습니다.
저도 법정 스님처럼 어느 겨울에 내 삶을 다시 살아보고자 했습니다. 보다 간소하게 살고 싶고 보다 단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묶은 생각과 물건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에 차지 않는 내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소유와 관계를 정리 정돈하는 작업은 저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시간 속에서 곁가지들이 잘려나가 본질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일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차지하고 채우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침체된 늪에서 멀리 볼 수 없게 된다. 차지하고 채우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나아가는 “만약 나뭇가지에 묵은 잎이 달린 채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계절이 와도 새잎은 돋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 나무는 성장이 중단되었거나 시들어 버릴 병든 나무 일 것이다.”우리가 막힌 벽만 보고 달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공기가 없는 곳에서 벽만 보고 달린다는 것은 의미없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공간과 여백을 찾아가며 달리는 것이 진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내 일생이...지금 현재가 내 삶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전체는 다시 하루의 시작점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삶이란 이러하니 윤회설을 믿는 저는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들이 많다는 생각에 남은 삶에 대해 가치있는 것으로 좀 더 보충하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끔 제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서 그래도 너 답다,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먼저 상황을 생각해서 너 답다는 말이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생각합니다. 제가 다행히도 잘하는 것은 내 삶과 타인의 삶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와 이웃의 처지를 비교하는 것은 기가 죽고 불쌍해 질 수도 있습니다. 자칫 자신감이 넘쳐 오만해지고 타인으로부터 시기심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내 그릇은 이것뿐이데 남의 그릇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비교로 인해 스스로 상처받고 그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후에 조금씩 알게 된 것이지요. 비교는 좌절감을 가져오고 시기심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두려움을 키우고 이것대신 저것이라도 하는 차선책으로 소비를 키웁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그릇이 있습니다. 그 깜냥을 잘 알고 나게 주어진 몫을 지켜나갔으면 합니다. 내 몫을 남의 몫과 비교하여 불행해져서는 안 됩니다. ‘지난 밤에는 자다가 깨어 바깥바람을 쏘이고 싶어서 나왔다가, 밤하늘에 무수히 돋아난 별들을 바라보며 황홀한 시간을 가졌었다. 별들을 쳐다보고 있으며 무변광재한 우주와 그 신비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밤하늘에 이런 별이 없다면 얼마나 막막하고 아득할까. 우리 마음속에도 저마다 은밀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 삶 또한 막막하고 황량할 것이다.‘ 스님, 요즘은 별이 그렇게 많지 않네요. 그래서 마음에 별 하나씩 그려 넣으라고 ✩남겨두셨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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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갈 수가 없다. 부와 명예, 그 밖에 소중한 것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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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기울고 있다. 올 한 해를, 내 삶의 몫으로 주어진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본다. 즐거웠던 일과 언짢았던 일들이, 무변광대한 우주공간에서 보면 모두가 아무것도 아닌 먼지 같은 일들이다. - 법정의《버리고 떠나기》중에서 - * 올해도 이젠 달랑 며칠 남았습니다. 지나간 올 한해가 보람된 한 해였었는지, 헛되이 아까운 세월만 보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만일 아쉬운 한 해였다면 내년에는 더 노력해서 더욱 알찬 계획으로 보람된 한 해가 되기를 다짐해 봅니다. 남은 며칠 올 한 해 마무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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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일상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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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산에는 꽃이 피네>, <서있는 사람들>, <무소유>에 이어 여덟 번째 법정스님의 저서를 읽었다. 이 책은 1992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법정스님이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1992년은 스님이 홀연히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오두막에 기거하시기 시작한 때이다.
이 책에는 눈을 뜰 때마다 새롭게 다가서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비롯해 명예와 편안함을 버리고 혼자서 살아가는 구도자의 청빈한 삶이 잘 드러나 있다. 시종일관 욕심을 버리고 떠나라는 가르침과 사람은 혼자일 때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진실되게 만날 수 있다는 스님의 참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강원도 오두막에서 나무, 새, 바람, 달, 들짐승을 벗삼아 사는 구도자의 속깊은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스님의 생애는 책의 제목처럼 몇 차례의 [버리고 떠나기]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출가(出家)다.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은 1954년 싸락눈이 내리던 날 홀연히 집을 나서 머리를 깎았다. 평소 흠모했던 등대지기의 꿈을 접고 ‘진리의 빛’을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세속적 욕망을 버리는 대신 그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1975년 10월 1일 서울 봉은사 다래헌(茶來軒)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불일암(佛日庵)으로 들어간 일이다. 글 잘 쓰고 의식 있는 40대 초반의 촉망받는 중진 스님이었던 그는 “시국 비판이나 하며 글재주만 부리다가는 중노릇 제대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 칸 암자에서 혼자 밥 짓고 밭을 매며 17년을 지내면서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텅 빈 충만> 등 10여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승속(僧俗)의 명예를 과감히 떨쳐 버린 덕분에 사색의 자유와 자연과의 교감을 얻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1992년 4월 19일 강원도 산골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오두막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일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산중 암자에 방문객이 늘어나고 글 빚도 지게 되면서 수행에 지장을 받게 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지인들은 물론 몇 안 되는 상좌조차 아직 스님의 거처를 몰랐다. 스님이 “누군가 내 거처를 알게 되면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큰스님’으로 불리며 절 집의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자신만의 수행 공간과 절대 고독의 희열을 얻게 된 것이다. 네 번째는 2003년 12월 21일 한 여신도가 오랜 간청 끝에 스님에게 시주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창건 6주년 기념 법회에서 회주(會主·절의 원로 스님) 자리를 미련 없이 내놓은 일이다. 주지 한 번 맡지 않았던 스님이 떠밀리다시피 맡았던 자리였다. 하지만 차츰 틀이 잡혀 가자 “수행에는 정년이 없으나 직위에는 반드시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주저 없이 실천한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워했지만 스님은 큰 짐을 벗어던진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스님은 이날 법회 후 차 한 잔을 따라 주며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법정 스님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이후 봄가을 두 차례만 길상사에서 공식 법회를 열 뿐이었다. 이 책 속에는 중생들의 삶과 애환을 달래지 못하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이 몇 가지 들어있다.
[화전민의 오두막에서]는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병'에 걸리지 않은 부드럽고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나의 휴식 시간]에서는 어려서부터 책벌레였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휴식 시간은 좋은 책을 읽는 시간임을 이야기한다. 그 중에는 다이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 <닥터 노먼 베쑨>,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 리처드 바크의 <소울 메이트>,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등을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괴테의 <파우스트>의 주인공 메피스토텔레스의 말을 통해 책의 함정을 경계한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그리고, [개울가에서]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가 창조적인 노력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오고가며 만나는 친구관계에 대해 충고한다.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쓰레기더미에 내던져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입시에 낙방당한 부모님들에게]는 교육히 참으로 해야 할 일은 그럴듯한 직업을 얻도록 준비싴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과정을 이해하도록 도와 무엇인 진리이고 삶의 진실인지 스스로 찾아내도록 거드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무엇이 전쟁을 일으키는가]에서는 1991년 걸프전쟁을 바라보면서 종교간의 갈등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들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것이다. (중략) 종교가 생기고 나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있고 나서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문화현상 중의 하나가 종교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통일을 생각하며]에서는 조금 의외의 이야기도 나와 있다. 1989년 평양을 방문한 전대협 임수경씨가 평양에서 개최한 기자회견 석상에서 "김일성 1인 독재의 우상화와 남조선 해방의 허구적 논리를 위대한 주체사상이라고 떠받"들었다는 것. 생소한 이야기라 인터넷을 한참 뒤져보았는데도 평양에서 진행된 2차례의 기자회견 관련 기사에서는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정부측 인사나 보수 언론 등에서 확대 포장한 내용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관련 내용을 못찾은 것인지...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에서는 1975년 인혁당 사건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은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자가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사형은 선고한 다음 날에 죽여버린 사건이 반정부 인사들이 인혁당 사건을 정치적인 조작극이라고 몰아붙인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자책하셨다고... 스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출가 수행자가 마음 속에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는 것에 대해 되돌아보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출가하였는지 다시 헤아리기 위해 불일암에 들어가셨다.
* 책 속의 문장 :
- 세상에 거저 되는 일도 없지만 공것 또한 절대로 없다. 그만한 보상을 치르지 않고는 그 어떤 결과도 가져올 수 없다. 안이한 직업적인 중 노릇이 편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곰팡이균처럼 부패와 타락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니 편하고 한가함을 즐길 게 아니라 독사를 피하듯 멀리 해야 한다. 특히 수행자를 병들게 하는 것은 이 편하고 한가한 안일임을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
-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열리는 통로다
[ 2011년 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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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의 책으로서는 무소유 이후 두번째 읽는 책이다. 비록 법정스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물론 책과 매체를 통해서 약간은 알고 있지만- 스님의 글을 읽으면, 푸른 가을하늘을 보면서 책을 읽는 느낌을 받는다. 세속적이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을 글들을 통해 우리를 일깨우는 것 같다. 스님의 삶 또한 책과 다를 바 없다. 깊은 산속,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스님의 모습을 책을 통해서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책을 통해서 삶의 여유를 느끼기를 바라며, 또한 자연을 느끼기를 원한다.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전쟁터와 같은 사회 속에서 이 책이 독자들에게 한 순간의 여유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청량제와 같은 스님의 글들을 통해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게 되었으며, 이 책을 읽는 동안 여유를 가지면서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
| '무소유'와는 다른 느낌의 책이다. '무소유'가 순수함에 빠져 들게 했다면 '버리고 떠나기'는 인생의 깊이에 빠져 들게 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불교의 냄새가 많이 난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게 또는 색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소유'가 쓰여진지 거의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에 이 책이 쓰여졌다.그래서 책의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하지만 그래도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법정 스님의 올바른 가치관 때문이다. 법정 스님은 인간에게 신물이 난듯하다. 본래 인간이란 간사하기 그지 없지 않은가. 법정스님도 불교계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속에서 많이도 힘드셨나 보다. 그래서 다시 산속으로 스님만의 공간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계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산속의 사계가 머리에 그려진다.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지나 가을 그리고 겨울... 법정스님은 자연에서 삶의 운치와 여유와 지혜를 깨닫지만 자연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는 법정 스님의 책이 그런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자연을 찾게 만든다.그래서 좋은 것들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물들이는 것 같다, 또 하나의 좋은 것으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소중히 해야하며 가치있게 느껴야 하는지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향기를 뿜어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들고 나를 돌아보게 한다. '행복의 조건은 우리들 일상의 여기저기에 무수히 널려 있다. 그걸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된다." 이 책에 나오는 글귀이다.우리가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 보내다가는 그 널려 있는 행복 다 가질 수 없지만 우리가 찾게 되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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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글들은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 찌든 나에게 항상 맑고 차가운 샘물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세상사의 수많은 정보와 글들에 뭍혀지내다보면 어느덧 그 물결에 휩쓸려 부유하고 있는 내 자신을,법정스님은 조용히 꾸짖고 계시는것 같다 하루에 조금씩 아껴가면서,그리고 책장을 덮고나면 다시 첫페이지부터...그렇게 이 책을 읽었다. 소비가 미덕인 이 세상에,그리고 무언가를 소유하기위해 너무나 바쁜 일상을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스님은 나직히 이야기하고 계신다 양손가득 무언가를 가득쥐고 있어서는 새로운,그리고 더 소중한 무언가를 담을 수 없다고...버리고 비운 그 빈자리가 있을때,그때가 되어야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계신다. 산사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그리고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시다가도 준엄한 목소리로 깨어있는 지성이 되길 이야기하시는 법정스님을 만나보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인상깊은구절] 낮과 밤은 겉으로는 적이지만 같은 목적에 이바지하고있다 서로의 일을 완성하기 위해 밤과 낮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밤이 없으면 인간의 본성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따라서 낮에 소비할 것도 없으리라 |
| 버리고 떠나기. 내가 귀하게 여기던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써는 스스로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를 잔뜩 짊어진 채 그 무게에 눌려 힘겹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무슨 도를 닦는 사람들처럼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산속이나 강가로 홀연히 사라지라"던가 흔한 명상책들처럼 당장 오르 저녁부터 요가를 시작해 보라"던가 하는 먼 얘기를 법정 스님은 결코 하시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렇게 살고, 이것을 보았고, 이런 것들을 생각했소.. 하면서 술술 풀어내는 스님의 얘기에 빠져들다 보면 내 모든 소유를 무소유화"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해도 그저 복잡하기만 했던 머릿속을 싹 비우고 차가운 새벽 샘물을 머릿 속 가득 받아 내는 느낌이 든다.. 몸도 마음도 쉬이면서 손에 잡을 만한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