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여름, 느닷없이 내게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에 놀라 허둥댈 때, 인터넷서점에서 "죽음"이란 단어로 책을 검색했었다. 죽음으로 시작되는 제목의 수많은 책들, 혹은 죽음이 들어가는 제목을 가진 책들... 그 중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의 동문회에 간 것처럼 낯설게 이 책이 있었다. 눈을 씻고 봐도 죽음이란 말은 없을 뿐더러 소설이다. 죽음에 대한 에세이도 아니고, 죽음이란 주제를 논한 철학서도 아닌... 책을 읽은 건 그 후로 한참 시간이 지나서다. 내게 다가왔던 그 "죽음의 그림자"가 실제의 "죽음"으로 확정되어 버린 후, 더 이상 내 곁에 그가 없는 2005년. 그 빈 자리로 아무 생각없이 허허로운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는 여전히 백수였고 집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4가지 죽음이 있다. 모두 살만큼 산(?) 노년의 죽음이다. 각각 다른 삶을 산 네 사람의 각각 다른 죽음.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병원에서 점점 생명의 끈이 가늘어지는 그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그 때, 어쩌면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그에게 좀 더 잘 해 줄 수도 있었을텐데... 좀 더 참고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죽음이란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리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좋았을텐데. 이미 지난 일이다. 대개가 그렇지만 죽음이야말로 닥치지 않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문제다. 늘 주위에 있지만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내 앞에 그것이 나타나면 멍해지거나 허둥대고 놀라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간혹 산다는 것에 겸허하기 위해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죽음에 대한 간접경험을 얻을 수 있는 소설이다. 생의 마감을 앞 둔 노년에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는 모습과 다가올 죽음을 바라보는 자세는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삶에 대한 고민과 삶의 경건함을 느끼게 해 준다. |
| 노년의 성생활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를 보는 젊은 세대들의 시각은 조금 복잡하다. 그 나이에 무슨 성?,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고, 자신들의 부부생활을 너무나 적라하게 털어놓고도 당당한 부부를 보고 부러움 비슷함 감정이 교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작가 김원일의 소설, <마당깊은 집="">이 한 방송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전후의 생활상에 대해 리얼하게 그려낸 그 책을 책꽂이 중앙에 꽂아놓고 늘 즐겨 되새김질하곤 했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서 마당 깊은집의 길남이가 이 책에 나오는 노인들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 소년인가 깨달았다. 비록 끼니를 이어가는 것 조차 힘들어 밥을 훔쳐 먹을지언정, 그에게는 엄한 어머니와 누이, 동생이 있었고, 가난한 현실을 딛고 올라설 가능성과 건강이 있었다. 하지만 [슬픈 시간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모든 희망과 도전이 멈춘, 흙으로 돌아갈 시간만을 기다리는 씁쓸함으로 가득하다.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된 노년 세대들에게 젊은 세대들은 좀 더 따뜻한 시선을 보냈으면 하고, 다가오는 미래에는 당당하고 깨끗하게 죽음을 대할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마당깊은> |
| 이 리뷰의 제목은 몇 년 전에 레포트에 붙였던 것이다. 열번도 넘게 텍스트를 거듭 읽으면서 끙끙 앓고 머리에 쥐 나도록 파고들어 A4 용지 대여섯장 분량으로 작품론을 썼다. 밤잠 설친 초췌한 모습으로 발표하던 날까지 사람 잡는 발표 수업의 고비를 넘어간다는 긴장감과 안도감에 비로소 숨을 돌리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노년기와 죽음의 그림자가 아직도 무섭다. 그때 나의 텍스트는 오정희의 <동경>이었다. 평론가들도 손을 대길 꺼려한다는 어렵고 복잡하고 대단한 소설. 그 소설을 읽고 변변찮은 안목으로 분석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인간의 노년기란 어떤 시절인가 궁금해졌고 두려워졌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시간은 과거를 향해 흐르다가 문득 미래에 닥칠 죽음의 문턱까지 치닫기도 했다. 이 책 <슬픈 시간의="" 기억="">에 등장하는 노인들의 시간도 그러했다. 방금 전에 한 일도 잊어버리고 날짜 감각도 떨어지는 사람들이 수십년 전에 겪은 일들은 사진으로 뽑아내듯 기억하고 또한 말로 풀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죽음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몸으로 질긴 삶을 끌고 온 사람들의 회한과 골깊은 상처는 그야말로 슬픈 시간의 기억이며 이 책이 그 슬픈 시간의 기록이었다. 저마다 다른 어린 시절, 젊은 시절, 그리고 사랑과 이별을 간직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전쟁과 분단, 고통스러운 한국 현대사를 거치면서 살 수밖에 없었고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버타운 '기로원'에 모여 사는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파란만장했던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잊고 싶지만 갈수록 또렷이 떠오르는 괴로운 기억에 더욱 아파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아침에 깨어나지 못 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거나 말문이 막혀버리거나 몸의 어느 부분이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다.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지만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을 치열하게 형상화시킨, 역시 대단한 소설이다. 누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 근처에 서 있게 된다면 돌아보는 기억이 슬프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느닷없이 찾아오든, 의식하지 못한 채 잠으로 스며들든, 혹 기다리든지 간에 말이다. 소설 한편이 단 한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중간중간 여러번 책을 덮거나 숨을 고르고 새삼스럽게 눈을 부릅떠야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다가올 죽음의 정체를 훔쳐봐야했고, 그들의 슬픈 시간에 끼여들고 싶었으므로.슬픈>동경> |
| 사람은 죽기 직전이 되면 자신의 전 인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시간의 순서에 관계없이 즐거운 일, 슬픈 일, 깊숙이 숨겨놓은 비밀과 회한들, 고통스러운 이별과 후회, 죄책감. 혹 죽음의 문턱에서 질문을 받는다면 이런 거 아닐까. '인생을 살아보니 그 의미를 알겠더냐.' 순간 저승의 문을 열려다 어안이 벙벙해져 혼돈과 절망의 구덩이로 떨어진다. 이미 전 인생을 다 살아버렸는데 변변한 대답거리를 얻지 못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헛살은 것인가. 허송세월한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두려워요,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책은 실존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존재의 무상함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철학적이다. 그리고 또 대단히 무섭고 고통스럽고 슬프다. 책표지에 등장한 노인의 눈과 입을 틀어막고 우는 심정을 통절히 느낄 정도로. 문단을 나누지 않고 문장부호도 생략하고 줄줄 써 내려갔는데 그것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푹 빠지게 만든다. 치매 직전 두서없이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 하는 기분으로, 슬픔의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가슴을 틀어막아 '어버버, 버버~' 말이 되지 못하고 말이 말을 걸고넘어지는 주인공의 심정으로 그의 고통의 주름을 하나하나 만지게 된다. 통곡도 되지 못하고 쌓아온 슬픔은 얼마나 고통스럽게 삶을 끊어놓는지. 한맥기로원이라는 양로원의 네 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에 등장하는 한여사는 공주병이 있는 할머니지만 그 이유가 현실을 직시하기 싫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가면이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이력을 거짓말하다, 반치매 상태에 이르러서야 과거사를 토해낸다. 정신대에 끌려갔었고 양공주로 혼혈아를 낳았으며 자식을 외국으로 입양 보내기도 했다. 기구하게 살아온 인생사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외모 가꾸기와 거짓말과 환상으로 자신의 성벽을 쌓아왔던 그녀는 결국 자아를 잃어버리고 만다. 평생 세상에 휘둘려 타자로서 살아온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가혹한 질문이 죽음 직전 반치매상태의 그녀 앞에 떨어진다. 너는 누구인지. 그렇다면 현실이라는 적과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두 번째 등장하는 초정댁은 자신의 처지와 한계를 잘 간파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을 이용하며 더 나아가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은 단칼에 잘라버리는 여자이다. 그녀는 세상을 요리한다. 씨다른 아들까지 만들며 가족과 세상을 속인다. 자식에게도 절대 자신의 몫을 내주지 않는다. 죽음 직전까지 자신의 재산을 손에 쥐고 있던 그녀는 죽음이라는 무의 세계로 빈손으로 떠났다. 그녀는 겉핡기식으로 자신의 수준만큼 세상을 보며 세상을 빼먹으며 살다 갔다. 세 번째 등장하는 윤여사는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다. 주님을 섬기며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왔으나 죽음에 이르자 고뇌의 맨 얼굴이 자꾸만 드러난다. 자신의 전 인생을 받쳤던 믿음에 대한 의구심, 그 믿음을 전파할 적당한 종자인가에 대한 회의가 격렬하게 주인공을 괴롭힌다. 그것이 결국 죽음 직전의 극심한 고통과 맞닥뜨리자 주님을 만나기조차 두렵다는 절망의 극한까지 나아간다. 평생 가르침을 실천했지만 그녀는 편안한 임종을 맞이하지 못했다. 마음의 참 평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믿음을 가지고 충실히 살아온 사람도 산산조각이 난 마음으로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맞이한다. 속물인 초정댁이 자연사한 것에 비해 윤여사는 아주 고통스럽게 임종을 맞이한다. 인생의 깊이는 바로 고통의 깊이인지도 모르겠다. 윤여사는 더 깊이 인생을 체현하다 갔다. 네 번째 인물은 북에 가족을 두고 온 노인이다. 남에서 그는 뿌리없는 삶을 살아간다. 주인공은 체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책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 사람들을 기피하고 세상에 대한 욕망도 없다. 그는 역사적인 혼돈과 선택의 상황에서도 도망치고 정신적으로 도피해버렸다. 66권이나 되는 기록노트를 남겼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이 사라지듯이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단지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슬픔의 철학을 깨닫는다. 해결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다 끝내 인내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슬픔을 먹고 죽음의 나무가 자란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 누구나 슬픔을 참으며 가고 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 생명이 다하면 소멸로 제 성질을 완수해내는, 죽음으로 몸과 의식에 쌓였던 슬픔의 끈을 놓는 존재. 사라짐에 의미가 더 큰 존재. 허무와 슬픔이 인생을 흐르는 강물이 되어 그를 죽음의 강둑으로 인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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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사회의 노년층 비율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노년층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여전히 좁기만 하다. 노인에 대한 우리 일반의 시선은 이미 변화해야할 시기를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 노년기와의 사이에는 큰 거리를 두려하고, 노인은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치부하려한다. 김원일은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 노인의 가치와 지위를 꼼꼼히 밝혀내어 우리 눈앞에 들이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노인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는 한국의 근·현대를 대변하는 노인의 삶으로써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이야기하고, 육체의 노쇠와 정신의 쇠퇴는 분리하여 탐구한다. 이러한 김원일의 노인에 대한 탐구는 바람직한 시도이다. 그는 노인의 정신 속에서의 진지한 탐구로 노인의 지위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됐어. 일백 살 생일상 받을 때까진 청정하게 살 거야. 두고 기다려봐. 내 말이 어디 틀리는가. 그렇게 말해주고 싶지만, 그네는 며느리한테 대차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김씨가 잘 짚었듯, 떠듬거리며 말하는 꼴을 자식과 며느리 앞에서 보이기 싫다. (1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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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말 문학서적을 안읽는 사람입니다.그러나, `읽지 않으면서도 강박관념으론 언젠가 꼭 읽기는 읽어야할텐데.`하며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작년 말 직업상 어쩔 수 없이 김원일 선생님의 책을 추천받고 읽게되었데 한가지 깨달음을 얻게되었습니다.저의 강박관념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슬픈 시간의 기억』을 읽으면서 존재에 대한 사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기억을 갖게될까?`이 소설 덕분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절실한 체험을 할 수 있었죠.덕분에 어느날 저녁 야근을 하고 새벽녁에 집에 들어갔을 때 잠자는 집사람의 숨소리에도 왠지모를 행복감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왜 좋은 문학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우리의 존재를 자각하게 해주는 힘이 바로 좋은 책에 있음을 느꼈습니다.그리고 우리 집사람도 이 소설을 읽고 좋은 느낌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인상깊은구절] 나의 존재는 필연적이 아닌 우연의 소산이고 삶은 늘 부조리의 연속이다.나의 운명은 신의 섭리나 타인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나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내가 결단을 내려야 하며, 그렇게 주어진 자유는 내가 처한 한계상황속에서 오히려 괴롭고 불안하다.나는 늘 절망을 껴안고 산다. |
| '김원일'이라는 작가는 '황순원 문학상 수상집'책에 실려있는 그의 작품으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무지했을 뿐이지,이 작가분은 꽤 유명하신 분이더군요^-^ 느낌표에서 선정한 적이 있는 '마당깊은 집'도 김원일씨의 작품이었습니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집에서는 이 소설집 안의 '나는 두려워요'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또 다른 그의 소설들이 궁금해져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다른 평범한 소설집에 비해 굉장히 독특합니다. 평범한 소재에서 벗어나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소재로 등장하고 있거든요. 노인당 비슷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몇몇 노인들이 죽음으로까지 가는 과정을 이 책은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죽음'이라는 데에 깊이 생각해본적도 없을 뿐더러 아예 다른 세상 얘기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또래의 다른 학생들도 딱히 삶이나 죽음이라는 소재를 생각해보지는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노인들은 결코 나에게서 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우리할아버지,옆집 고약해보이는 할머니,시내에서 보면 정말 곱게 보이는 노인들까지... 그들은 나와 가까워보이고 죽음과는 멀어보이면서도,어김없이 서서히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죽기싫어하고 정정하고자 하는 노인들도 결국 평안하게,혹은 괴롭게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초라하고 별볼일 없을것같은 노인의 삶을 이렇게까지 아름답고 경이롭게 표현해낸 작가 '김원일'씨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읽어봐도 좋을 것같은 책이었습니다.^-^ 많은 걸 느낄 수 있을거에요! |
| 배달되어 온 김원일의 <슬픈 시간의="" 기억="">을 받아서 손에 들고 책장을 후르륵 넘겨보고는 으으으윽, 이 책을 떼려면 수월치 않겠군, 미리 겁을 집어먹었다. 소설이라는 게 줄바꿈도 있고 단락도 나뉘고 대화체도 좀 있어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련만 어째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리도 빽빽히, 이리도 답답하게 엉겨있는공. 더구나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들 얘기라니 매가리도 없겠군.....허나 미리 결론부터 앞질러 말하자면 '아마도 지루할 것이 분명함'이라는 첫인상을 상쾌하게 배반한 책읽기였다. 표지를 열면 책 날개에 흰 머리칼의, 무뚝뚝해 보이는 작가 김원일 선생의 사진이 실려있다. 1942년 생이니 갑년을 막 넘긴 선생, 생물학적 나이로는 이제 노인이로되 그 무뚝뚝한 첫 인상에 개의치 않고 이 소설집을 읽어내려 가다보면 거장의 생기 넘치는 필력을 느낄 수 있다. <슬픈 시간의="" 기억="">은 '기로원'이라는 사설 양로원에 말년을 의탁했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60대부터 80대에 이르는 네 노인의 이야기를 돌아가며 담은 연작 소설이다. 각각 네 편의 주인공들은 다른 제목의 소설에서 배경과 조연으로 얽혀있어서 마치 레고 장난감처럼 앞뒤로 서로 물고 물리고 있는 형국이다. <나는 누구인가="">의 주인공은 한마디로 '왕비병'에 걸린 한女史다. 한점아가 한경자로, 게이코로, 한안나로 이름이 바뀌는 동안의 파란만장한 삶이 아릿하게 요약되는데 김지미 주연의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에서 보았던, 역사의 악의에 희생당한 영혼이 안간힘을 다해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처럼 한女史의 마지막은 처연하다. 특히 이 중편에서는 주인공이 화장을 하고 가발을 공들여 쓰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 매우 정밀하게 그려져 있어 作家의 관찰력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시금 주목했다. <나는 나를="" 안다="">의 주인공은 초정댁. 서로 반목하고 있는 산파댁과 시시콜콜 얽혀서 다투는 장면은 정말 김수현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에 버금갈 정도로 현란하다. 유쾌 발랄한 노인들의 수다를 듣는 재미가 유별라서 이거 <늘 푸른="" 소나무="">작가 김원일의 글 맞아? 하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젊은 시절 色을 밝히다가 살인까지 했던 어두운 과거가 접혀져 있으면서 팔십이 다된 나이에도 포르노 비디오에 관심을 보이고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얻어내려고 영악하게 구는 이 할머니 초정댁도 끝내는 체머리를 흔들며 이승에서의 지난한 삶을 마감한다. 관능적이면서도 섬세한, 내면적 독백이 숨가쁘게 전개되어 냉수 마시듯 수월하게 읽히는, 썩 재미난 중편. <나는 두려워요="">의 주인공 윤先生은 평생 독신으로 교직을 천직 삼아 살아온 강고한 신앙인이지만 그녀 또한 젊은 날 한 남학생을 열차에서 실족사하게 했다는 내밀한 아픔을 감추고 있다. 그 사이사이 그녀는 뒤틀린 형태로 한국전쟁이 터지는 걸 보았고 한 마을 사람들이 좌와 우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이 중편의 분위기는 황석영의 <손님>을 얼핏 연상케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카가 경영하는 양로원의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팔십 나이에 이른 주인공 김중호 노인은 식민지와 전쟁 체험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독서와 지적 사유 덕분에 죽음을 담담하고도 의연하게 맞이하려 한다. 네 편 가운데 유일하게 話者가 남자인 이 소설은 현실에서 도망쳐 책을 벗삼아 지내는 김老人이 탈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일제 치하, 전쟁 그리고 박정희 維新이 기승을 부릴 때도 현실에 눈 감아버리고 책으로만 숨어들었다는 회한이 그득한 채로. <슬픈 시간의="" 기억="">은 이렇게 불행한 세대를 겪은 노인들의 지난한 삶을 돌아보며 우리 역사는 참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는 것을 한숨처럼 내뱉게 만든다. '파란만장', '격동의 시대'라는 표현에 보태고 빼고 할 것도 없이.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일제치하, 전쟁, 분단 그리고 박씨 독재 같은 게 없었더라면 영화나 미술, 문학 등의 예술 전반이 지금보다 훨씬 빈약했을 것이다. 특히 소설 분야는 더더욱. 퍼뜩 머릿속에 떠올려봐도 이 작가 말고도 조정래, 김주영, 김성동, 이문구, 황석영 같은 작가는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의 가시밭길 현대사를 계속 우려먹으며 작품들을 내놓고 있지 않은가. 소설가가 겪은 격변의 시절은 소설의 소재가 되고 글감이 된다. 지금 나오는 젊은 작가들은 역사의 중압으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와 보인다. 그들은 판타지를 만들고 꿈을 만든다. 그들의 글에는 자폐적 감수성이 그득하고 다 읽고 나서도 뒤끝없이 '쿨'한 소설이 많다. 전쟁과 전후를 직접 체험한 세대들이 모두 자연사하고 나면 우리 역사는 김원일 선생 같은 소설가들의 소설로나마 만나게 될까. 예전 작품들처럼 여전히 높은 수준과 균질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 느티나무 같은 소설가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며 <슬픈 시간의="" 기억="">을 여러분께 권한다. 스포츠는 젊을수록 좋지만 문학은 절대 아니다. 김원일의 소설을 읽으며 내내 든 생각이다.슬픈>슬픈>나는>손님>나는>늘>나는>명자>나는>슬픈>슬픈> |
| 삶이라는 게 무엇일까? 죽고 나면 그만인 게 아닐까..? 오랫만에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져본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주욱- 빠지는 것이, 생각할 것이 많아진 듯 하다. 조금 더 삶에 대해 진지해진다고 할까나.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죽음'과 '소외'에 대한 너무도 많은 질문속에서 혼자 헤매였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에게 드리워지는 과거의 아련한 추억들이 기억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슬프게 느껴진다. 차라리 모든 것이 기억에서 지워졌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을... 정신대에서의 경험, 한 남학생을 기차에서 밀어 추락사하게 만든 사건 등.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것들을,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만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의 독특한 구성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갑자기 등자하는 과거 회상은,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 치매걸린 한여사의 현실이었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그저 이제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 정신이 나갔다는 평가만을 들을 수 없는 그녀만의 세계를 혼자 엿볼 수 있는 독특한 기회이자 특권이 나에게만 주어진 것 같아 기분이 우쭐해졌다. 하나님을 믿는 윤여은 마저도 죽음의 고통 앞에서는 무기력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전 수많은 제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지만, 정작 죽음의 순간에는 단 한명의 제자만이 그녀의 임종을 지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죽음의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기로원에서의 통제되고 단절된 세상. 늘 보는 것은 자신과 같은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노인들, 때로는 죽어 나가는 이들의 모습. 많은 돈을 내고 그곳에 들어갔지만, 물론 동년배로부터 느끼는 정이라는게 존재하겠지만, 젊은 세대와의 어떠한 커뮤니케이션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의 생활은 너무도 따분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제대로 찾아와주지도 않는 자식을 생각하고, 그 자식이 꿈꾸고 있는 물려받을 재산에 대한 환상을 알면서도 결국엔 자식에게 그 모든 것을 물려주는 초정댁의 모습을 통해 부모의 자식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차츰 기력을 잃어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도 깊이가 있어 보인다. 그저 막연하게 죽음은 이런 것일 거야 라는 예상만을 가지고는 나올 수 없는, 오랜 고찰과 진통 끝에 완성된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순히 '죽음은 이런 것이다'가 아닌, '한국인의 죽음은 이럴 것이다.'는 느낌이 묻어난다고 해야 될까. 나이든 할머니의 구성진 사투리 말투 역시도 그렇게 여겨진다. -전수정(quartz2@netian.com) |
| 이 소설은 따옴표나 화자에 대한 설명 없이 그대로 내용으로 뛰어들고 있다. 그저 독자는 숨가쁘게 그네들의 독백과 대화, 사고 속으로 이리저리 내둘린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을 연상케하기도 하나 그것보다 더욱 속도감 있고 여인들의 삶에 녹아있는 단어들은 실제감을 더한다. 우리네 근세 여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한이 가득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역사가 혼란스럽지 않더라도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성경 말씀도 생각났다. 모른 척, 잊은 척, 바쁜 삶의 바퀴에 돌아가느라고 잠시 잊었다. 하지만 피말리는 슬픔, 후회, 양심의 가책, 뼈아픈 자책, 잊고 싶은 죄악 등 이런 것에서 사람은 벗어날 수 없는 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바란다. 이런 책도 필요하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많은 인생도 그려주었으면 좋겠다. 윤여은 선생은 예외일까 했지만 그도 죽음 앞에선 여지없이 흐려지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신앙은 특히 죽음을 설명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윤선생의 신앙은 맹목적이고 자신마저도 구원할 수 없는 희미한 것이었다. 이 책은 무척 들을 것과 읽을 것이 많은 가치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여인네 삶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세밀한 묘사는 재미를 더해주고 죽음에 이르는 무의식 세계에 대한 처리도 실제감이 넘친다. 작가의 또 다른 스타일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