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소재의 독창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곤한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능력있는 젊은 인문학자들을 새로이 발굴해내는 기능 또한 이 시리즈의 무시못할 장점이기는 하지만, 이 문고본의 가장 큰 의의는 역시 그 짧은 분량상의 한계를 독창성으로 커버해 낸다는 점에 있는 듯 싶다. 아리스토텔레스 관련 서적들을 검색하다보면 대부분은 철학과 정치학 관련된 것들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제목부터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사실 책의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이라고만 국한해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외려 본서는 '경제학의 계보학'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맑스가 '자본'을 쓸때만해도 '경제학'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단지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만 있었을 뿐.(때문에 '자본'의 부제는 '경제학 비판'이 아닌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그 이전에도 경제학은 경제학 그 스스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과거 아테네의 폴리스 운운하던 시절까지 내려갈 것도 없이 산업화 초기단계까지만해도 경제학을 다룸에 있어,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옳은 삶인지에 대한 논의를 경제학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았다. 그거 아는가? 오늘날 경제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물론 당대에는 그나마도 '경제학자'가 아닌 '정치경제학자'로 불리웠다)이기 이전에 윤리학자였음을. 경제학을 사회, 정치 및 가정으로부터 독립시키고, 희소성(사실, 희소한 물건은 '없다' 단지 그것을 독점해낼 수 있는 권력이 희소할 뿐이다.)과 시장가격이란 개념을 우상화 시키는 행태는 유구한 인간 역사속의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경제 관료들과 경제학자들에서부터 오늘도 여기저기서 찌질한 댓글달고 앉아있는 키보드 워리어들까지 경제가 우리 삶의 가장 우선된 무엇이라는 가정하에 세상만사를 논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이 '경제'라면 '경제학'을 인간이 배제된 '순수한'경제학으로 다루는 것은 경제학 자신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박탈하는 일일게다. 실제로도 그런 '순수한'경제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파레토 최적이니 이런게 실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은, 모든걸 시장에 맡겨야 하기에 노동시장도 '완전개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임은, 다른 누구보다 경제학자들과 관료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경제학은 수익성이 맞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을 실업의 구덩이로 몰아놓고, 혹은 제3세계 어린이들을 저임금과 장시간의 중노동 속에서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해놓고, 그것이 시장의 뜻입네 하는 식의, 그저 가진자의 좋은 핑계꺼리가 되고 말았다.(그런면에서 오늘의 고상한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도덕적 판단 기준조차 시장에 맡기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알고보면 불쌍한 영혼들인지도 모르겠다.)그럼, 시장이 신인가? 이것이 신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극복해 내어야할 신이 아닐까? 안되면 되게하라는 식의 구호는 사회적 약자를 탄압하는 곳이 아닌 이런 곳에 써먹으라고 있는 멘트이다.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기 보다는 오늘의 삶이 피폐해진 이유를 변명하는 데에나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러한 오늘의 경제학 속에서는, 사실상 어떤 한 순간에라도 '경제가 좋아졌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저 한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경제학을 극복해 내고 새로운 경제학에 대한 논의를 해 나아가는 것은 기존 경제학의 '신화'가 너무도 강고하기에 쉬운 일은 아닐게다. 아마 저자가 오래전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경제학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한 것은 그 새로운 논의를 위한 시작지점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 시작지점을 만들기 위한 저자의 이러한 '희생타'는 매우 멋졌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제 문제는, 저자의 그 멋진 희생타를 기초로 삼아 새로이 경제를 이야기 해 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노력 아닐까? |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본질적인 의미나 깊은 생각없이 무조건적 암기식 교육 덕택에 기억나는 한 문장이다. 그 한 문장을 빼고 나면, 솔직히 내가 지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책은 올 여름 '새사연'의 휴가철 추천서 5권 중의 하나로 선정되어 접하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금융경제 연구소 연구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저자 홍기빈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학부에서 경제학을, 대학원에서 외교학을,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인 2001년에는 토론토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자신의 박사논문과는 관계없는 분야,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전적인 철학자를 통해 경제학을 조명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지만,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이라고 한다면 뭐랄까...경제와 경제학이라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떼어낼 수 없는 주요한 테마에 대해 누구나 보편,타당하다고 여기며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수많은 인식들이 어쩌면 전혀 다른 본질적 의미를 지닌, 따라서 새로운 접근과 패러다임을 통해 역시 새롭게 '경제'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와 실천을 모색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책은 말미의 맺음말과 주석을 빼면 약 160여 페이지 밖에 되지 않으며 일반 독자를 배려한 저자의 쉬운 문체는 읽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없으나, 짧은 내용과 쉬운 문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만만하게 읽히지 않은 탓에 그 분량의 적음을 핑계로 실은 두번 읽어 보았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2001년, 그러니까 우리 나라가 IMF 구제금융으로 급속한 경제적 질서가 뒤바뀌고 있던 시점에 쓰여진 것으로,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그동안 무슨 불변의 법칙처럼 여겨져 왔던 경제학이 그토록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한다면 '엄밀한 과학'으로의 재정립을 위해 철학적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 하나와, 우리 나라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모두 미국 유학에서 배운 형식적 틀과 분석 기법에만 의존하여 인접 사회과학이나 인문학과는 유리되고, 경제학이란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 채 도매금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과학'이라고 믿는 맹신 풍조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자신의 박사논문 시간을 쪼개어 집필하게 된 이 책의 본문에는 '경제'라는 용어 자체도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에 그가 지닌 경제사상을 토대로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경제'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라는 사회의 역사적, 사상적 맥락 속에서 그의 경제사상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있다. 또한 현대의 경제상식은 얼마나 그의 사상과 동떨어져 있는가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지니고 있는 불변의 법칙처럼 믿고 있는 사실들이 전혀 합목적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현대의 경제사상까지 커다란 흐름으로 설명하며 반증하고 있다.
저자는 특별히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년, 전통적인 경제사조에 반대한 헝가리 지식인, 서구 시장체계를 분석한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 으로 유명하다._위키백과)에게 이 책을 헌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출하고 있고, 또 그만큼 그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나는 무식하게도 '칼 폴라니' 그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많은 부분 공감을 느꼈기에 저자가 칭송하는 칼 폴라니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두번이나 연거푸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사항을 똘망하게 정리하고 있지 못하는 내가 왜이리 바보같은지...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내 하찮은 리뷰로 인해 다른 독자들에게 혹시라도 책 선택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솔직히 걱정이 된다. 하지만, 비록 내가 구체적인 핵심사항은 글로써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지만, 책을 통해 느껴지는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희열은 그야말로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부족한 글 솜씨로 더이상의 횡설수설은 그만 하고자 한다. 대신에 저자 홍기빈이 책의 말미에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인식과 사고에 대하여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본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오로지 선택된 소수만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 패러다임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절제와 자립을 이상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경제사상에 가장 반대되는 모델이 있다면, 바로 우리가 추구해온 '수출 주도형 정치경제'일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수출과 고도 성장이라는 것을 위해 희생시키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겨레의 통일이나 민주주의 같은 이상은 파괴되고, 고도의 인간성 완성을 목표로 해야 할 교육제도는 일등에서 꼴찌까지 줄을 세워서 일 시킬 사람과 일할 사람을 나누는 모욕적인 제도가 되지 않았는가? 윤리적 가치와 인간존종의 마음씨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그러한 가치를 밝히고 고민해야 할 학문과 문화는 돈벌이와 자랑의 수단으로 타락하지 않았는가? 누구나 즐겨 입에 담는 우리 사회의 천민성이라는 것은 그 한국형 수출 주도 정치경제의 귀결이 아닌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온 경제적 패러다임이 이렇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미래의 전망 역시 불확실한 것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아주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중략) 자연적인 격변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지며 선악이나 미추와 같은 가치판단의 대상도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격변은 우리들이 의식적으로 벌이는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발전이냐 퇴보냐 하는 선악과 미추의 가치를 판단하는 영역이며, 오로지 우리의 의식적 노력과 행동에 의해 그러한 가치를 지향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러한 차이를 무시하는 데에서 생기는 모든 수동적 패배주의, 허무주의, 냉소주의를 버릴 때도 된 것이다."
※ 책을 읽다보니 지난번에 읽었던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얇은 경제학 책이라 반가웠다. 그래서 손에 들었지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
|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내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를 처음 접한 것은 탁석산 이 지은 [한국의 정체성]이었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는 약 150페이지 내외의 얇은 책이다. 어찌보면 논문을 살짝 편집하여 책으로 낸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논문보다는 비전공자인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그러나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없다. 하긴 150페이지 안팎의 지면에 군더더기가 붙을 여백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탁석산의 책에서 재미를 붙인 나는 그 이후 뭔가 영양가 있는 내용을 그 분야의 전공자에게 '쪽집게 과외'를 받고 싶을 때면 '책세상 우리시대' 시리즈를 찾았다. '경제' 정말 나와는 촌수(寸數)가 멀다. 그래서 신문을 볼 때도 경제면은 '소 닭쳐다 보듯' 한다. 그러한 경제 문외한이 이번에는 경제라는 난제에 도전하였다. 무식한 나 같은 사람도 어깨 너머로 들은 것은 있어서 '경제란 희소성의 상황 아래서의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알고 있다. 여기서 희소성이라는 상황은 욕망은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술도 먹고 싶고, 짜장면도 먹고 싶고, 책도 사야하는데 돈은 딱 만원 밖에 없는 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여 살때 가장 나의 만족감이 최고가 될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라는 것이다. (알고보니 별것도 아니구먼~) 그런데 이 책의 저자 홍기빈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경제의 관념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그리스시대에서 부터 경제에 대한 정의를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목적과 수단이라는 두 측면으로 분석하였다. 의술의 목적은 환자의 건강을 추구하는 것이다. 환자의 건강이 목적이기 때문에 목적은 무제한으로 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에게 '지나치게 많은 건강'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의 활동에는 어떤 활동은 다른 활동을 목적으로 하여 수단으로 종속되는 등의 위계질서가 있는데, 바로 마취술이라는 활동은 좀더 상위의 목표인 의료 행위라는 활동에 종속되는 하위의 활동이다. 이 때 정해진 시간동안 안전하게 환자를 마취하는 것은 마취 활동에서는 목적이 되지만 수술이라는 상위 활동에서는 목적한 부위의 절제나 치료라는 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취과 의사가 마취의 더 궁극적인 목적을 망각하고 마취약을 '지나치게 많이' 투여한다면 효과적인 수술을 하지 못하고 환자는 혼수상태내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목적은'행복한 삶'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 적당한 재산과 부가 필요하다. 마치 수술에서 적당한 마취약이 필요한 것처럼.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목적과 수단이 역전되어 '한없이 많은 재산과 부'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저자는 우리가 추구해온 수출 주도형 정치경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수출과 고도성장이라는 것을 위해 겨레의 통일이나 민주주의 같은 이상은 파괴되고, 고도의 인간성 완성을 목표로 해야 할 교육제도는 일등에서 꼴찌까지 줄을 세워서 일 시킬 사람과 일할 사람을 나누는 모욕적인 제도가 되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온 경제적 패러다임이 잘못되었음을 알게되었다면 이제는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경제에 대한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 오다가다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현대의 주류 경제학이 아닌, 정치 경제학적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사적 위치를 살핀 책인데 어떤 학문적 성취를 기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입니다(그리고 그것이 책세상 문고의 한계입니다만). 일간지, 주간지, 또는 그 밖의 매체들에서 이미 경제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고 일상의 담론 속에서도 경제라는 화두는 보편적이면서도 정서적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실-대응물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어딜 가나 "경제가 어려워서 큰일이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 말은 여러가지 거시적 경제 지표등을 분석해서 얻어낸 객관적 결론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 공간내에서 표출된 불안한 심리에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다가온 어려운 현실들은 분명 각 개인에 속하는 개별적인 양태이지만, 그것을 "경제가 어렵다"라는 자조적인 말투로써 경제라는 보편적 개념을 통해 개인의 어려움을 표현했을 때 우리는 종종 개인의 경험과 보편의 언어 사이의 간극이 쉽게 메워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발화자의 어떤 심리적인 동기가 존재하고 있고 청자는 이미 그것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성립하는 유대감에 대한 신뢰이며 최소한, 경제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우리네 공동체적 삶에 대한 신념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주요 매체에서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경제와 서민들이 사용하는 경제의 용법적 차이는, 다시 말해서 전자는 자본주의적 시스템 내에서 합목적성을 갖는 것이고 후자는 경제 이전의 공동체적 관념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서민이 말하는 경제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경제는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 |
|
아리스토텔레스... 대단하네요. 정치학, 철학, 물리학, 윤리학, 수사학, 논리학 그리고 경제학까지... 아마도 이 책에서 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학도 그 사상의 일면에 불과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경제 자체가 어려운 학문인데 시대를 거스르는 그의 학문적 체계 앞에서 이미 작아진 저는 문장의 판독에만 급급합니다. 그렇기에 이번 리뷰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겉핥기에 불과한 잡설에 그치게 됩니다.
경제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됩니다. 단순한 돈벌이인가 물질적 부를 생산하는 활동인가에서 희소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 선택으로 잠정적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합리성이란 '협소한 합리성이 아니라 포괄적인 이성적 존재로서 행동의 동기, 신념, 사회적 제도 등을 다 보는 것을 의미'(33쪽)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경제=희소성에서의 선택이라는 합리성은 목적 합리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가치 합리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33쪽)는 점을 지적합니다. 결국 합리적 선택에서의 가치 부분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2장에서는 경제라는 말의 역사적 고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기 경제는 '단지 가정의 살림살이'(40쪽)를 가리키는 의미였습니다. 혈연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었기에 윤리,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고 당시 사람들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 이후 18c까지도 경제는 '국가라는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 포섭'(43쪽)되어 있었습니다. 여전히 독립적인 영역 혹은 학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1890년, 마셜에 의해 최초로 경제학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경제는 비로소 정치, 사회와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 현상은 계급 관계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언급이 되었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부를 노동가치나 물질적 부가 아닌 희소성하에서의 선택을 통한 만족의 극대화'(46쪽)로 보는 현대의 경제 관념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3장에서는 그리스의 시장의 변천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활단위로서의 가정경제'가 초기 그리스 사회가 호혜성에 기반한 선물 주고받기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발전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폴리스가 성장하고 가정 경제 단위의 주고받기가 불가능해지면서 기원전 6c 그리스 전역에서 화폐경제가 출현하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 발전하게 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폴리스로 이주한 사람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국가 재산의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그것은 화폐를 매개로한 시장의 발전으로 귀결됩니다. 이 과정에서 키몬과 페리클레스 간의 정치적 경쟁이 사뭇 재미있게 다뤄집니다. 그러나 가정경제와 폴리스, 호혜적 선물 주고받기가 시장과 민주주의, 제국주의로 변모되면서 이제 그리스인들은 '국가를 한시적 이해를 위해 교역 관계에서 맺어지는 동업자 관계'(73쪽)로 보게 됩니다. 혈연적, 불가역적 관계가 계약적 관계로 변모됩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인간의 덕(arete)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플라톤은행복한 삶의 정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과 사람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으로서의 철인(철학자) 정치를 제시합니다. 다시 폴리스는 '시민에게 잘 사는 법을 훈련하는 훈육의 장이자 좋은 생활을 펼쳐낼 실현의 장'(78쪽)으로 돌아옵니다.
4장에서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가 등장합니다. 플라톤이 추상적인 인간활동과 경제를 언급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과 수단의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인간 활동에서 목적의 추구는 무한하지만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되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폴리스의 운영기술과 가정관리 기술을 상위로 삼고 거기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획득의 기술을 하위로 삼아야 한다'(97쪽)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인 프락시스(praxis)와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인 포이에시스(poiesis)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라고 단언합니다.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풍부하게 계발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기본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5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관과 대비되는 '로빈슨 크루소'로 상징되는 개인 중심의 경제관이 소개됩니다. 가정경제와 폴리스 중심의 경제관이 '낱난의 개인들을 유일한 현실적 기본 단위'(131쪽)로 보고 '인간의 탐욕을 이성 실현이라는 세계사의 목적이 달성되는 원동력'(134쪽)으로 보는 근대 경제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원의 희소성에 기반한 근대적 경제관은 '인간세상의 부동의 진리'(139쪽)로 자리잡아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경제사상가를 소개합니다. 애덤스미스, 독일의 역사학파, 칼 마르크스, 베블린, 폴라니, 케인스가 그들입니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경제발전, 대량 소비, 자본 축적을 신봉하는 현대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그 전환의 바탕이 되는 것은 개인이 아닌 가정경제와 폴리스(사회)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관이겠지요. 물론 그 토대는 바람직한 사회변화, 경제관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 노력과 행동입니다. 숨가쁘게 정점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더이상의 사회(국가)의 개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도 해서는 안되며, 설사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수사학에 더이상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패배주의, 허무주의를 벗어날 때 진정한 인간 중심의 경제로의 전환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워낙 경제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다만 거대한 사상가의 등 너머에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일면을, 그 탁월한 통찰을 흘깃 바라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책읽기가 아닌가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작금의 경제 상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 경제에 대한 개념과 변천의 과정을 피상적으로나마 인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
짧지만 알찬 내용의 책이다. 책세상의 문고판 시리즈는 가격과 내용면에서 단연 추천 1순위라 권하고 싶다. 우선 내용이 길지 않아서 쉽게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가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쓴 글을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리스토테레스와 경제학에는 전혀 문외한인 내게는 인상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다가왔다. 물론, 이것은 내가 잘 이해했다고 나 스스로 혼자 하는 생각이므로 실제 내가 저자의 주장을 잘 이해했는지는 알 길을 없을 것이다. 저자 홍기빈은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라는 저서로 먼저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저서에는 경제학자답지 않은 인간의 살냄새가 진하게 진동한다는 매력이 있다. 아무래도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탓인지 메마른 경제학적 견해만을 제시하지 않고 정치와 철학적 목소리를 기반으로 두고 있어서 읽는 내내 생각에 잠길 수 있고, 곰곰히 따져보게 되어 좋다. 그 중에서도 어쩌면 내 나름대로 정리한 이 책의 핵심이라 할 내용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프락시스 praxis와 포이에시스 poiesis 로 구별한다. 후자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이고 전자는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111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활동을 두가지로 구분하였다. 하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 예를 들어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 것 - 일하는 것과 활동 자체가 좋거나 즐거워서 하는 것 - 춤추는 게 즐겁기 때문에 춤추는 것 - 이 인간이 활동하는 두가지 주된 행위이다. 이렇게 두가지 행위를 구분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112 이 두 문장을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확실히 플라톤의 제자이고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영향력 안에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소크라테스가 누구인가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를 즐거워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도 돈 한푼 받지 않았다. 프락시스의 삶,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목적인 삶이었다. 반면에 소피스테스는 가르치면서 돈을 받았다. 수강생들을 모으기 위한 목적에서만 무료 공개 강좌를 하였고, 일단 학생들이 모이고 나면 그들이 정치계에서 말빨을 세울 수 있도록 쟁론술을 가르친 후 적지 않은 과외비를 챙겼다. 이들의 삶은 말그대로 포이에시스 였다. 행위 자체가 목적인 삶은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이다. 일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만족하고 자기 실현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른 목적 때문에 일하는 삶은 보상에 대한 강한 욕망 때문에 지치고 피곤하며 지나치게 경쟁적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걸 경계했던 것이다. 욕망이란 목적을 추구할 때 인간이 겪게 되는 소외를 직시한 셈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주는 만족감을 아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무리하지 않고 현재를 만족하게 만든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프락시스한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냥, 지난 10년만 생각해보자. 그토록 열심히 살자, 부자가 되자는 슬로건을 따라서 살아왔는데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욕망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영혼아닐까? 찬찬히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홍기빈의 책을 읽으면서 이래서 철학을 하고 고전을 읽는구나, 싶었다. |
|
여기서 영리적 상업이나 고리대라는 행위는 행복한 삶과는 전혀 무관한 ‘돈벌이’라는 자체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들을 ‘돈벌이 기술로서의 획득의 기술’이라고 따로 다루었던 것이다.…돈벌이의 기술이 목적으로 추구하는 이윤에도 한계가 있을 리 없다. 결국 그에 따르면 사실 무한한 것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화폐에 대한 욕망일 뿐이긴 하지만, p.107 목이 마르다고 해서 대동강 물을 다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을 축인다는 목적에 의해 마실 물은 제한된다. 그러나 봉이 김선달에게 돈벌이가 목적인 대동강 물은 전체를 다 가져도 만족스러울 리 없다. 씨를 뿌려 올라온 곡식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으로서의 땅은 한 가족이 1년을 살 만큼의 넓이면 충분하지만, 몇 곱절의 이윤과 교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대한민국 땅을 다 가져도 만족스러울 리 없다. 흔히 고전경제학의 근본 공리는 재화 혹은 자원의 희소성이다. 그러나 목마른 사람에게 대동강 물이 희소할리 없듯이 밥 한 끼 먹기 위해 땅 한 뙤기가 절실한 사람에게 땅이 희소할리 없다. 실제로 희소한 것은 권력이지 재화 그 자체가 아니다. p.27 기실 고전경제학은 권력의 문제를 표백시키면서 과학의 외투를 입고 재화의 희소성과 그것을 향한 인간들의 경쟁을 기정사실화한다. 고대 소규모의 인간사회에는 이처럼 돈 자체가 목적이 되는 ‘돈벌이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물론이거니와 ‘오래된 미래’로 불리는 라다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들은 돈벌이 기술에 현혹되는가?’ <오래된 미래>의 저자였던 호지와 마찬가지로 천재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같은 궁금증을 갖는다. 라다크를 경험한 호지는 그것을 ‘정보의 부족’이라는 이상한 이유로 설명하려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를 찾는다. 스스로는 행복한 삶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벌이 기술에 전력을 다하는 자들이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들은 행복한 삶의 올바른 의미를 잘 깨우치지 못하고 ‘육체적 향락’과 혼동하고 있는 자들이다. p.114 즉, 이들에게는 행복한 삶에 대한 지혜가 없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당대 최고의 요리사들을 거느릴 기회가 있었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리기와 다른 운동으로 땀을 낸 후 몸을 씻어 입맛을 돋운다. 그러면 이 세상 어떤 음식도 산해진미가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특급 요리사들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돈벌이 기술과 행복한 삶의 혼동이 인류의 지혜를 간직했던 라다크 사람들의 변절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행복한 삶이고 뭐고 당장 먹고 사는 것 자체가 불안한 경우이다. …“(돈벌이에 몰두하는) 성향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좋은 삶이 아닌 생존 수단에 대해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생존에 대한 욕망은 무한하므로 생존을 가져다줄 수 있는 물건들에 대한 욕망도 무한하다.”p.115,116 평화롭고 지혜로운 도시 라다크에 스며든 자본주의는 라다크인들의 ‘불안’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 불안은 공동체적 신뢰와 질서가 무너지고 개인으로 고립되면서 나타난 불안이다. 주변에서 자신의 아이만 빼고 다 학원을 다닌다고 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를 동네 학원에 보내면, 이번엔 강남에 학원을 보내는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강남 학원에 진출하면 또, 더 나아가 ‘특목고 학원’에 보내는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이 불안의 정체는 ‘생존에 대한 욕망’이며 더 나아가 ‘지극히 희소한’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불안은 사회 곳곳에 편재해 있다. 노후 자금에 대한 불안, 집값이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 주식이나 펀드에서 망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래서 재테크라는 말이 횡횡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대로 ‘돈벌이 기술’이 ‘행복한 삶’이라는 착각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돈벌이 기술’에 집착한다고 한들, 만인이 돈벌이를 통해 이윤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처럼 만인이 ‘돈벌이 기술’에만 집착한다면 ‘수익 체증의 원리’에 따라 먼저 선점한 자, 즉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 뿐이다. 경제학자인 저자가 대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끌고 들어온 것은 1차적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경제학의 논리가 그릇된 기초에 기반해 있음을 보여주고, 나아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현 경제활동이 ‘병리적 현상’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철학자들이 “인간 사회에 관철되는 보편적 원리와 규범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던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우리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되돌아가곤 하는 고전적인 준거”로 본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가 어떤 도시였기에? 호혜성에 기반한 선물 주고받기가 이 가정경제에서 물자 유통에 더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조건이다. 이웃과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어놓는 것이야말로 그런 불확실성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면서 직접적인 인간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p.61 놀랍게도 이는 <이타적 유전자 The origins of virtue>를 쓴 매트 리들리의 제안과 흡사하다. 매트 리들리는 희망의 실마리로 여전히 존재하는 공동체적 신뢰와 호혜성을 기반으로 하는 소규모 공동체를 찾아낸다. 이 마을에서는 복권에 당첨되고 시치미를 뚝 떼고 살아갈 수가 없다. 밤에 몰래 나가 합의를 위반하는 양의 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그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고소득층 20%가 전체 부의 80%를 가지며, 소득이 낮을수록 소유하는 부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여 결국 하위 20%는 전체 부의 2%만을 갖는다는 법칙이 파레토의 법칙이다. 정재승은 <과학콘서트>에서 파레토의 법칙과 같은 power law가 사회나 자연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power law에 따라 나타나는 불평등은 당연하며 부익부 빈익빈은 숙명인가? 그러나 power law는 자연에서도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환경의 변화가 적고 매우 안정적이 되면 power law는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고대 폴리스가 그랬듯, 라다크가 그랬듯 공동체적 신뢰와 호혜성에 기반하여 안정된 시기가 지속된다면 특정 기득권층에 부가 몰리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돈벌이 기술’ 자체를 추구하는 자들은 경멸당하고 조롱받을 것이다. 여기에는 개개인의 ‘철학적’ 노력과 아울러 제도적 차원의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 시장에서의 자유방임은 개인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시장 자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지극히 불안정한 국면에서 시장은 스스로 power law를 구현해내는 것이다. 케인스는 흥미롭게도 지속적인 저금리 정책을 제안했는데, 궁극적인 목적은 금리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박멸’이었다고 한다. 그 역시 불안정한 시장을 틈타 기생하는 '돈벌이 권력'을 정책적으로 박멸하려 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상담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그려내는 진로는 대개 ‘돈벌이’와 연관이 있다. 그 진로는 불안에 기초해 있다. 돈을 벌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불안,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지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불안, 물론 아직 돈벌이를 하기 전이니만큼 그 불안은 현재 사회의 현실이 내면화된 결과일 것이다. 그 내면화된 불안은 너무도 자명하고 강력한 것이어서, 정말 행복한 삶이 무엇이냐고 끈질기게 묻는 내 처지가 곤궁해지기 일쑤다. 결국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폴리스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적 자각과 통찰이 거대한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이것이 되든 안되든 내가 그들에게, 주변에게, 또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행복한 삶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
| 이해찬 총리가 손학규 경기지사를 정치는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 말했다. 그럼 손지사도 반격할 것 아닌가? "이총리는 경제는 빵점"이라고. 정치인들은 정말 재미있다. 홍기빈이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를 쓸 때, 우리는 생각도 하기 싫은 아이엠에프를 겨우 넘기고 있었다. 사실 궁금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와 관련이 있다는 홍기빈의 주장에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로 이총리가 당한 경제에 빵점인 결과가 아닌가? '아리스'는 정말 오래 전 사람이다. 철학은 조금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경제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 아리스 이후 모든 철학자는 그가 말한 것을 주석하는 정도로 밖에 놀림을 당할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경제는 빵점이 아닐까? 하지만 홍기빈은 아리스가 경제를 말할 수 있는 여건과 상황 속에 살았다고 말한다. 그리스인들은 가정 경제를 중심이었다. 자급자족의 경제란 말이다. 이 가정경제가 지리적 환경 탓으로 '폴리스'라는 독특한 국가형태를 형성하게 하였다. 이들은 민주정치를 이루었고, 모임의 장인 아고라에서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게하였다. 이 환경에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덕이란 무엇인?" 인간의 아레테 곧 잘산다는 것, 어떻게해야 그 답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도록 교육시킬 것인가. 아리스는 폴리스라는 장치를 통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아리스는 추상적 접근보다는 구체적인 답을 찾고자 했다. '최상의 좋음' 이를 위하여 규제될 것이 있다. 행복한 삶, 곧 사람다운 삶, 그리고 집단적 좋음,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모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가정경제가 아니라 폴리스라 말한다. 그렇다 지극히 개인적인 돈벌이에 혈안이 된 오늘의 경제이념이 아리스를 본 받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리스의 후예들-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베블린, 폴라니, 케인스. 그리고 홍기빈. 과연 우리는 아리스를 얼마나 알고, 그가 말한 경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그들보다 훨씬 못한 경제이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지식의 진보를 이룬 것이 아니라 퇴보를 이룬 자들이 경제가 발전되었다고 우기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닌지 반성할 때가 된 것 같다. |
|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처음 시장이 형성된 배경과 시장의 기능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또 정치적으로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그리스 폴리스 국가의 흥망성쇠를 통해 설명한다. 시장이 아테네 폴리스 국가에서 처음 발생했다는 것. 이로인해 상업이 활성화되고 정치 경제가 도입되는 점. 이것은 그전까지 경제라는 개념이 가정관리(부의 축적과 가정예법의 관한 것)의 의미로 사용됐고, 단편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좀더 발전한 개념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당시 지도자(혹 왕)들도 경제의 개념은 없었다. 아테네는 이후 페르시아 전쟁과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시민을 통해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했고 이를 통해 시민의 목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경제를 그리스 시대로부터 원류를 찾고 있다. 또 서구 경제학의 흐름도 간략히 설명해 놓고 있다. 이와 중에도 지은이는 머리말을 통해 철학, 교양, 윤리을 배제한 무분별한 계량 경제를 도입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경제학에 대해서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는다. 다만 그가 책을 펼쳐낸 의도가 책 전체적으로 녹아들었는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선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