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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방사능으로 빛나는, 빛의 산
"꿈의 방사능으로 빛나는, 빛의 산" 내용보기
무식하면 용감하다. 문제가 닥쳐도 그게 문제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행복하려면 무식해져야 하는 것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5분 뒤 우주에서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이 지구를 파멸로 몰고 간다고 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낮잠을 자고 책을 읽고, 친구와 수다를 떨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띤 채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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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식하면 용감하다. 문제가 닥쳐도 그게 문제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행복하려면 무식해져야 하는 것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5분 뒤 우주에서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이 지구를 파멸로 몰고 간다고 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낮잠을 자고 책을 읽고, 친구와 수다를 떨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띤 채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느끼게 될 공포와 슬픔, 초조함 등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주인공들, 특히 방사능과 함께 살아야 하는 후쿠시마 근방 주민들은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데에 열심이다. 진실로부터 눈과 귀를 닫는 편이 더 용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의 산》은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직접 겪은 이들이 등장하는 단편집이다. 모두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며, 지진 및 쓰나미,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방사능에 연루된 이들이 주인공이다. 처음 실린 단편 <당신의 그림자를 끌고서>에서부터 마지막 단편인 <빛의 산>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이야기들이 구성되어 있다. 뒤로 갈수록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횟수는 줄어든다. 물론 그렇다고 그 괴로운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평온한 가운데 맞는 죽음도 가슴저미고 심장이 내려앉는 경험일 텐데 그들은 온 천지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늘 그 자리에 서 있을 것 같았던 온갖 것들이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이고 미친듯 몰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무너지고 부서지며 파묻혔다. 어제 반갑게 인사했던 사랑하는 가족과 친절했던 이웃들이 또 다른 쓰레기인 양 엎어진 채 물살에 떠내려왔다. 이 경험은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상처의 오목하게 패인 부분에는 뭉그러진 인연들의 시신이 차곡차곡 쌓인다. 죽음은 어느 것이나 가슴 아프지만 이처럼 잔혹한 상처를 남기는 죽음이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피가 배어나오는 상처를 동여매고서라도 인간은 계속 살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귀뚜라미>와 <고타로의 의분>에서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애달픈 마음이 묻어나온다. 임시로 살고 있는 가설주택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가족을 한둘씩 잃었다. 쓰나미 당시의 무시무시한 일을 겪은 뒤 아내를 잃은 스님의 아버지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따금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부모와 남동생을 한꺼번에 잃은 20대 여자는 사발에 담긴 된장국이나 물을 두려워한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이 맞닥뜨린 재난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그 분위기를 짐작하고는 어쩔 수 없이 어른스러워진다. 시간이 흘렀고, 주변의 모두들 누군가를 잃었으니 겉으로는 다들 담담해진 척하지만 누구도 담담할 수 없다.



회사를 비판하지 않는다. 동료를 배반하지 않는다. 다수의 이익을 우선한다. 그것은 모두 자기가 아들에게 가르쳐 온 것이 아닌가. 아들은 번듯하게 잘 자라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두 번이나 우는 소리도 안 하고 잠자코 회사로 돌아간 거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식당 문 앞에서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랑은 어떻게 됐니?"

딴에는 신경 써 준다고 웃으며 나지막이 물었더니, 아들은 아버지를 쏘아보며 말한다.

"만나 줄 리가 없잖아. …이렇게 잔뜩 피폭 당했는데." (p. 12)



  <당신의 그림자를 끌고서>에서는 사고 이후 사람들의 모습을 짤막짤막하게 보여준다. 여기 등장한 한 집안에서는 아들이 대지진 이전 도쿄전력에 취직한 바 있다. 그래서 사고 이후에도 방사능 위험 지역으로 들어가 일을 하고 있다. 아마도 방사능 제거 작업일 듯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두 마디 할 뿐이고, 아버지는 위의 인용 부분처럼 이야기할 뿐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쳤다는 세 가지 원칙이 과연 옳은 것인지 어떤 논의나 후회도 없다. 오히려 그것을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회사를 비판하지 않고, 동료를 배반하지 않고, 다수의 이익을 우선한다니. 그냥 무조건?

  이 편파적인 데다 확고한 명제는 소름이 끼친다. 회사가 어떤 그릇된 일을 하건 간에 비판하지 않으며, 동료가 어떤 짓을 하던 배반하지 않고, 소수의 이익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 일본적인 사고방식인 것인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일본이란 나라를 더욱 국수주의로 몰아간다는 것을 모르는지, 건설적인 비판은 그 대상이 누구건 간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중요한 것은 다수냐 소수냐가 아니라 그 판가름의 정의가 올바르게 작동하는지 따지는 것인가를 모르는지? 무식하면 용감할 수밖에 없다. 자기들이 무작정 좇아 내달리는 대상이 정의와 명예라고 착각하고 혼심을 다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이들은 그것을 숭고한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데, 미안하지만 그러다가 죽으면 그건 그냥 개죽음이다. 방사능을 현재 기술로 제거할 방법은 없다. 일본에서 하고 있는 제거란 그저 <기도하는 사마귀>에 나왔듯이 건물들 면면을 물걸레와 약품으로 닦아내고 지표의 흙을 자루에 퍼담아 다른 어딘가에 묻어버리는 것뿐이다. 아무리 그렇게 작업한다고 해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1986년 버려진 도시가 된 프리피야트에서는 아직도 사람이 살 수 없고 앞으로도 1천년 가까이 불가능하다. 이런데 방사능 제거 작업이 무슨 효용이 있는 건지. 어차피 그렇게 제거된 방사능은 또 다른 곳에 옮겨지게 될 뿐인 걸.


  뒤의 세 편 <소금쟁이>, <기도하는 사마귀>, <빛의 산>은 읽으면서 조금씩 답답해져갔다. 먼저 <소금쟁이>에서는 사고 직후 아이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가 오본 명절 동안만 잠시 돌아온 치하루가 등장한다. 그녀는 고향에 돌아와 친구 사유리의 가족과, 자신의 남편 나오키와 어울린다. 여기서 치하루는 배신자이자 방사능에 유별나게 구는 여자로 그려진다. 사유리의 남편 겐타는 '보이지 않는 것에 신경을 쓰면서 어떻게 사냐'고 하면서 손님맞이 음식은 '반드시 스키야키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남자다. 사유리는 혼돈의 시대에 '한 번 정하면 바꿀 줄 모르는 겐타의 그런 완고함이야말로 지금 사유리의 견고한 궤도가 되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자신을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주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장난끼 넘치고 유쾌한 사유리와 겐타, 유스케 가족은 방사능을 피해 남편과도 헤어져 따로 사는 터라 서로 서먹한 치하루의 가족과 대비되어 그려진다.


  <기도하는 사마귀>의 주인공은 이미 암에 걸려 있던 상태라 방사능 제거 작업을 자원한다. 아내와 함께 예식장을 운영했으나 쓰나미로 아내를 잃고 일터인 예식장은 통행 제한 구역에 있어 다가갈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그런 그에게 한 커플이 예식을 부탁한다. 가설주택 거리에서 열리는 첫 결혼식. 몸도 힘들고 자원도 없지만 주인공은 선뜻 받아들인다. '결혼이야말로 역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제어 불가능한 세찬 물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봉사'이기도 할 테고.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것 같은 가설주택 주민들에게 이 커플의 결혼이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불씨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하는 탓이다. 그런데 이 커플이 가설 주택에서 결혼하려는 의도는 그 외에도 또 있다. 언론에서 '특별한' 케이스만 보도하고 문외한의 책들이 출판되는 통에 불안감이 조장되어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설주택에서 결혼한 이 커플은 통제구역 안의 벚꽃 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을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주인공은 암으로 인한 통증으로 결혼식 도중에 잠시 기절했다가 구급차에 실려간다. 그런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이윽고 깨달았어. 해가 뉘엿거리면서도 쉬 지지 않는 주위의 공기가 왠지 투명하고 깊은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올려다보니 그 산이 연보랏빛 형광색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 가끔씩 불꽃이 보이고 연기도 올라왔지만 그 전체를 싸고 있는 보라색 영기가 언제까지나 어둠을 제압하며 빛나고 있었어. 마치 아미타여래님이 탄 구름이 눈앞에 내려앉은 것 같았어. (p. 195)


도쿄에서 살고 있던 나는 솔직히 고향이 엄청나게 무서운 일을 당한 것에 대해 그저 벌벌 떨고 있었지. 당시의 나도 슈퍼에서 포장해서 파는 야채 같은 게 방사선으로 살균되어 있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으니까. '오염'이라는 말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기는 했지. 병원에서 CT 한 번만 찍어도 한꺼번에 6.9밀리시버트의 피폭인데, 그건 오염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때는 불안감을 부추기는 학자들이 아주 극성인지라, 나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지. 방사능 제거 작업 자체가 피폭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 행동도 못하고 그저 도쿄에서 수수방관하고 있었지. (p. 179)



  <빛의 산>은 그야말로 판타지로, 동일본대지진이 몇 십 년 전의 일이 된 미래에 주인공이 들려주는 당시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남의 일거리를 해주고 나온 흙이나 나뭇가지, 뽑은 잡초 등을 죄다 자기 소유의 넓은 땅 한가운데다 쌓아놓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마을 주민들도 방사능에 오염된 자연 부산물들을 갖다 쌓았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그저 괜찮다고 말하며 웃을 뿐이다. 방사능이 겁이 나서 부모님의 집에 삼 년 간 들르지 않던 주인공이 찾아가서 방사능 측정기로 측정해본 결과 매시 10마이크로시버트라는 양이 측정된다. 주인공은 벨라루스 수준이라며 기겁하는데, 그 아버지가 말한다. '체르노빌 사고 나고 이십팔 년이 지나서야 벨라루스는 그 정도로 내려갔다지. 그래도 죽 사람들이 살고 있었잖냐? 그런데 삼 년 전 같은 방사선량이 나온 이이타테무라는 마을이 통째로 피난을 갔잖냐.' 겁난 아들은 어머니도 보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내빼버린다. 이후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95세까지 아주 건강하게 잘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남들이 무서워하던 방사능에 오염된 쓰레기들을 모조리 받아댄 덕에 성인처럼 존경을 받는다. 주인공은 그 방사능 산에서 아버지의 화장을 하는데, 장례를 마친 뒤 그 산은 연보랏빛 형광색 영기를 뿜어내며 '어둠을 제압하며 빛나고 있었'다.


  뒤로 갈수록 저자의 시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방사능은 별 것 아닌 일이다. 그가 아는 방사능이라곤 오로지 세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감기 운운하는 걸 보니 아마 세슘134나 되는 듯하다. CT촬영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면 외부 피폭이나 내부 피폭에 대한 구분조차 없다. 그저 재난 이전의 시간에 대한 향수만 잔뜩 그려내고 있을 따름이다. 큰 재앙을 겪어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이전의 시절을 그리워할 것이다.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이 행복인지 알지 못했던 데 대한 반성도 있을 것이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 재앙을 겪으면서 가지게 된 정신적인 상처 등.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재난은 이미 벌어진 일이고 그들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따라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현실이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무시하고 사느냐, 아니면 거기에 대처하고 사느냐.

  물론 모두가 고향을 떠나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위험한 장소에서 사는 인물들이 있을 수 있고, 작가는 그 인물들의 환경과 내면과 사건을 그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사건일수록 객관적인 눈으로 풀어내야 한다. 어떤 이의 반응은 상식적이고 어떤 이의 반응은 비상식적인 것으로 몰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위 고전이 된 문학작품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그런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적군도 아군도 모두가 인간적인 고뇌에 휩싸여 있었고 많은 작가들이 그 둘 모두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즉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인간애가 묻어났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야기 얼개나 대상이 된 인물들의 언행을 보면 작가의 왜곡된 시선이 드러난다. 방사능을 피해 고향을 떠난 치하루를 배신자를 보듯이 바라보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이이타테무라 마을 사람들을 조소한다. (실제 이이타테무라에서는 30~100 매시 마이크로시버트가 측정됐다고 한다) 방사능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언론과 학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근거 없이 불안을 조장한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편협한 시선이 안타깝다.


  후쿠시마 현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갑상샘 암의 발병률은 300배 증가했다. 아마 조사되지 않은 다른 암이나 백혈병 등의 발병률도 늘어났을 것이다. 이제 세대가 바뀌면 DNA가 손상되어 태어날 아이들은 또 어떠할지 벌써부터 끔찍하다. 남편의 완고함이 자신의 견고한 궤도가 되어 준다고 믿고 있는 사유리의 아들 유스케가 암에 걸리거나 백혈병에 걸렸을 때, 그때도 사유리는 자기 남편의 완고함을 듬직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딸을 데리고 떠났던 치하루를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본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방사능의 피해는 금세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무신경하다. 마치 절대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를 그리는 SF 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답답해진 나머지 그 다음 읽을 책으로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꼽았다. 집어들고 스르륵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곳에서 멈추었다. 367페이지.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5년 후, 어린이 갑상샘암 발병이 30배 증가했다. 선천성 기형, 신장과 신장 질환, 소아 당뇨도 많이 늘었다. 10년 후, 벨라루스인의 평균 수명이 55세로 줄었다."라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빛의 산>에서 화자의 아버지는 벨라루스 사람들은 떠나지도 않고 죽 살아오고 있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가 생각하는 삶이란 평균 55세의 수명 동안 이런저런 질병을 주렁주렁 달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삶인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그런 삶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참, 85페이지 아홉째 줄 오타가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사유리의 귀향은 오본 지내는 동안만이겠다는 걸 퍼뜩 알아차렸다." 사유리가 아니라 치하루다.

 

l*******c 2015.10.21.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