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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작.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욕먹는 페미니트스 작가 전경린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 정작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읽지 않지만, 그래서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내게 뼈저리게 각인시켜준 동화이지만, 그러나 깊게 마음 깊게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 동화.
혹여 전진석 작가의 천일야화 중 '어머니와 나무꾼'을 읽고 마음에 깊이 남은 바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동화는 매우 추천할 만 하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숨겨진 지독한 '현실'. 예전에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그룹이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선녀를 찾아주세요 하는 나무꾼의 어쩌구 하는..
글세. 선녀는 나무꾼을 찾고 싶어했을까.
아주 어릴 때 읽었던 전래동화였지만 나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무서웠다. 자신의 '자유'를 담보로 자신을 강간하고, 아이를 셋 낳을 때 까지 자신의 발을 묶어 둔, 그 후에는 '모성'을 담보로 자신을 묶어 두려 하였을 게 뻔한 그 나무꾼이라는 남자를 과연 선녀는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니, 사랑은 커녕. 죽이고 싶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한 번이라도 그런 의심을 해 본 사람이 있다면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그 사람에게 좋은 동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동화를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울분을 쌓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절대 평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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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아무 기억도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여자에게 남자는 청혼을 한다. 여자는 자신이 가야할 길이 다른곳에 있음을 느끼면서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낯설지 않은 달빛만이 여자의 가슴속에 묻어둔 답을 말해주는 듯 하다. 남자는 늘 불안하다. 여자가 달의 말을 듣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이듬해 여자는 아들을 낳았다. 여자는 언제나 차갑고 어둑한 방에 틀어박혀 바느질만 한다. 여자는 말이 없고 웃는 법이 없고 사람을 사귀지도 않는다. 바느질만 할 뿐 사람 사는 형편에는 관심을 기울이는 법이 없다. 여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런 여자를 남자는 온 힘을 다해 보호한다.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여자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찿고도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두아이, 병든 어머니와 정 깊은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모르며 살아왔던 세상, 버릴것도 가질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삶을 버리고 두아이의 어머니로 며느리로 남편의 아내가 되어 살지만...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본다. 여성으로 살면서 나를 위한 삶을 택하려면 나머지 것들은 버려하 하는가 나머지 것들을 잘 행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삶을 버려야 하는가. 여기서도 말해주듯이 결국 버려야 될 것은 아무것도없다. [인상깊은구절]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오. 사랑이란 하루도 같고 한 달도 같고 일 년도 같은 것이오. 하루라도 충분한 것을 어찌 억지로 붙잡아 두려고만 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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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영 중인 영화 What Women Want를 보았다. 한글로 번역을 하지 않은 채 개봉을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여성이 원하는 것'이라는 제목을 달면 너무 거창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주인공 닉(멜 깁슨 분)의 좌중우돌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려야 할 코메디물에 페미니즘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공주를 구하고 사랑을 얻는 기사의 이야기인 이 코미디 영화에서도 한 번은 진지한 면모를 보인 구석이 있는데, 닉이 아침에 조깅을 하는 여성을 컨셉으로 한 광고물을 제작해서 클라이언트 앞에서 발표를 하는 장면이었다. 옷이나 화장에 신경을 쓰지 않고 새벽길을 달리는 이 여성을 통해 많은 여성들의 내면 속에 '나는 무엇이며, 무엇을 성취했는지'라는 질문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심리를 상품화하는데 성공을 하는 셈이니 우리와는 차이가 나도 많이나는 셈이라고나 할까.
흡사 전래 동화처럼 산골이 나오고 나뭇꾼이 나오는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의 서평을 쓰면서 그다지 연관이 없어보이는 영화 What Women Want 이야기를 먼저 이야기 한 까닭은 여성의 내면에는 실존하는 것에 관한 고민이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갔다는 점 때문이다.
이 동화를 읽고 난 후 한동안 여자의 본성이 과연 배반과 그리움에 술렁이는 야성일까는 생각을 물음표로 달고 다녔다. 내 어머니와 이미 어머니가 된 내 친구들을 보았을 때 그러한 야성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여성을 느끼기는 쉽지 않아서이다. 도대체 그들 가슴에 야성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 숨어있고 삶 속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는 것일까라고 말이다.
여자는 아침에는 토끼, 점심에는 여우, 저녁에는 늑대라는 우스개 말이 있다. 처음의 귀염 떨고 수줍어하는 모습은 점차로 없어지고 내숭만 떨면서 실속을 챙기다가, 나중에는 체면불구하고 필요할 땐 우우거리는 뻔뻔함만이 남는다는 이야기다.
우스개는 그 사회 속의 상식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같이 깔깔거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우스개는 두 가지 상식을 전제로 한다. 하나는, 개개 동물 토끼, 여우, 늑대에게서 받는 느낌의 공유일 것이고, 두 번째는 여성성은 토끼와 같이 작고 얌전한 것이라는 상식의 공유다. 특히 이 우스개 속의 늑대는 사회에서 원하거나 규정하는 여성상에 충실하던 여성들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것과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을 꼬집어내는 흉물인 것이다. 한편으로, 이렇게 꼬집고 웃어 넘기면서 상식 속에서 또 하나의 기정사실을 만들어내는 행위일 수도 있고 말이다. 여자는 그런 것이니 나이가 들면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이 우스개 속에서 볼 수 있는 늑대가 이 동화 속의 야성의 늑대와 같은 늑대인가 생각해보면 그 건 또 아닌 것 같다. 우스개 속의 늑대는 여성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난 후에 (충분히 나이가 든 후에)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나가고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동화 속의 늑대는 본성과 같은 감출 수 없는 야성이 아니었던가?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여성주의, 상식과 관습을 뛰어넘는 강인한 여성상을 암시하는 '야성과 늑대'가 여성이 나고 온 본연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겠다. 아마도 그랬기때문에 며칠을 머리 속에 담아두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가지, 세 개의 묘지, 세 개의 계곡, 세 개의 폭포를 지나면서도 여성은 어디서 나고 왔는지와 같은 실존의 고민을 끝도 없이 하는 존재라는 것, 빨래를 비비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난 후,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새벽길을 홀로 달리면서 스스로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는 순간만큼은 벽에 머리를 짓이기는 것과 같은 무수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알고자 하는 존재라는 것, 그 점에는 전적으로 동감의 탄성을 지른다. 그렇게 내부에서 잠자고 있는 질문을 수면으로 끌어올렸다는 점만으로도 이 동화는 우리 사회에 상식으로 간주되고 있는 천차만별의 여성에 관한 우스개들 속에 담긴 뼈들을 추려내는 셈이라고 할까. [인상깊은구절] 여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느 먼 곳에서 와서 무릎을 꿇었기에 작은 몸 안에 이토록 많은 배반과 그리움이 술렁이는 것일까. 양팔에 감자 같은 아이들을 주렁주렁 쥐고도 늘 굽어진 길의 끝을 바라보는 잠들지 않는 야생. 운명의 얼굴은 다르듯 모두 다르지만, 그러나 여자에게는 손가락 터지며 기워야 할 자신만의 실과 바늘이 있다. 자궁이 세대를 영원하게 하듯, 가죽신은 여성을 근원으로 인도한다. 그대의 가죽신은 무엇인가. 여자는 삶보다 더 숭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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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키보다 훌쩍 커버린 아들들. 그리고 삶의 신산함과 고초들을 함께 버티어주었다는 동지애적 사랑일까. 아니면 금방이라도 땅 속으로 꺼져버리고 말 듯 스스로의 삶에 자신없어 하며 종종 자기만의 생각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하던, 그래서 금방이라도 자신의 품을 떠나서 자신만의 삶의 자리를 찾아 내닫고야 말 것 같아 위태하기만 하던 아내가 중년의 나날까지, 더우기 세상살이에서 성공의 척도라하는 재산도 지위도 다 잃어버린 채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 막막한 여정의 출발점에 다시 선 지금까지 용케도 달아나지 않고 옆에 있어준 것에 대한 기꺼움 때문에서일까. 이즈음 들어서는 부쩍 따뜻한 속 마음을 드러내곤하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여자다.
절반의 선택이 내 몫이었음이 분명한데도 때때로 모든 것을 부정한 채 막무가내 내달리고 싶은 시간들이 있었다. 또한 중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조차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야할지 알 지 못하는 막막함 속에서 내 핏줄기를 타고 내달리며 들끓는 소리들이 늘 내 등을 떼밀어 지금 선 자리, 늘 부딪히는 익숙한 얼굴들조차 처음 보는 듯 생경하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들속에서 모든 것이 혼돈스럽고 진정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고 지금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이 과연 내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가슴이 먹먹해질 때마다- 이 남루한 세상에서 자신을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끝간 데 없이 부풀어 오르는 순간에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을 포박한 질긴 줄이며 훨훨 떠날 수 있을 만큼 세상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은 때로 내 양팔에 매어달린 감자같은 아이들이기도 했고 때로는 나보다 더 외로워진 얼굴로 말없이 건네다 보고만 있던 남편의 얼굴이기도 했고 잛은 인연에도 최대의 선의를 부어주던 많은 이웃들이 있어서였다.
또한 세상에 던져진 생명인 바에야 질기디 질긴 '영혼의 탯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 더우기 자신이 잉태한 생명들을 두고 날개옷을 찾아 입고 훨훨 떠날 수 없었던 선녀처럼 자신이 가족과 현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무섭도록 생생하게 깨달았기에 이 글이 동화라는 것이 차라리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바람처럼, 혹은 끓는 물처럼 나를 들쑤셔놓고 미친 여자처럼 산발하고 들판을 내달리게라도 하고 말 것 같은 격정을 혼자 다스려내느라 피흘리고 절망하던 시간들이 '늑대'혹은 '선녀'의 전설로 반분이나마 설명되어질 수 있다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기에 말이다. 내가 알 지 못하는 먼 시간, 아득한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 야성의 핏줄에서 유전된 생래의 본능이라면, 적어도 스스로도 다스리기 어렵던 그 집요한 자신의 본성 찾기에 대한 절반의 책임은 늑대 혹은 선녀에게 짊어지울 수 도 있으니 말이다.
또 한가지,만일 작자의 다른 소설처럼 잔인하리만치 집요하게 본성의 우물바닥을 뒤져 마침내 파국을 끄집어 내어서는 피빚이 선명한 내장을 보 듯 결말을 짐작키 어려운 파탄을 내 앞에 펼쳐 놓았다면, 결혼한 여자인 내가 정리해 나가야 할 인생의 남은 가닥이 한결 혼란스러워질 듯 싶고,그리고 아직도 자신과 결혼한 여성이 누구인 지 알지 못하는 순진한 남편이 함께 읽기라도 한다면 시간의 저 먼 뒤켠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과 함께 남루한 이 생을 꾸려가고 있는 상대가 정녕 어떤 존재인 지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나는 작가가 그 날카로운 손을 휘둘러 좀 더 깊은 곳을 헤집어 '여자'의 근원을, 그 배반과 그리움을 더 풍성한 묘사로 빚어내주었으면 싶다. 혼자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에 택한 상대와 또한 그 사랑의 결실인 자식들과도 함께하는 인생길에서도 늘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을 풀어줄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 지, 또한 내 안의 불덩이를 다스릴 수 있는, 나만의 손으로 빚어낼 가죽신이 어디에 있는 지 함께 찾아내고 싶기 때문에. [인상깊은구절] 여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느 먼 곳에서 와서 무릎을 꿇었기에 작은 몸안에 이토록 많은 배반과 그리움이 술렁이는 것일까. 양팔에 감자같은 아이들을 주렁주렁 쥐고도 늘 굽어진 길의 끝을 바라보는 잠들지 않는 야생. 운명의 얼굴이 다르듯 모두 다르지만, 그러나 여자에게는 손가락이 터지며 기워야 할 자신만의 실과 바늘이 있다. 자궁이 세대를 영원하게 하듯, 가죽신은 여성을 근원으로 인도한다. 그대의 가죽신은 무엇인가. 여자는 삶보다 더 숭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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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2일>
어른을 위한 동화임을 자처하고 "이 작은 책을 결혼한 모든 여성들에게, 그리고 자신과 결혼한 여성이 누구인지 모르는 모든 남성들에게 바치고 싶다."라고 밝히며 이 책을 시작된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배필을 기다리는 가난한 나무꾼 '정'. 그는 어느날 나무를 해서 숯을 굽고 산을 내려오다 벌거벗은 채 다리에 상처를 입고 풀숲에 쓰러져있는 여자를 발견해 데려오고 치료해서 아내로 맞아 살게 된다.
이 여자의 정체는 하얀색 털을 가진 늑대. 하지만 여자는 기억을 잃었고 오직 보름달이 뜨면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만을 강하게 받지만 정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여자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 방문에 못을 치고 천으로 가려서 여자를 가둬두며 부부의 연을 이어간다.
얼핏 한국 전래동화 같은 느낌도 든다. 어릴때 이불을 뒤집어 쓰고 봤던 전설의 고향 '구미호'도 생각난다. 하지만 내용은 그런 것들과는 많이 다르다.
아이를 두 명을 낳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그저 삯바느질만 하고 시어머니와 남편이 그것 마저 못하게 하자 집을 뛰쳐나가 갓바치에게서 신 만드는 법을 배워오는 여자. 남편의 사랑도 느끼지 못하고, 아이들에게도 사랑을 주지 못하고 그저 헛헛하게 살아가는 그 여자의 애타고 공허한 마음이 책 전반에 안개처럼 짙게 깔려있다.
결국에는 자신이 늑대였음을 알게 되지만 여자는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느끼고 늑대의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뒤 평범한 아낙네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사랑도 느끼고 사랑도 주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너무 행복해서 불안하다고 느끼는 순간 두 아이를 잃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다시 늑대로 돌아간다.
이 책을 결혼한 모든 여성들에게 바치고 싶다는 작가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다. 이 땅의 모든 기혼여성들, 우리가 아줌마라고 부르는 그들의 억척스러운 삶 뒤안에는 언제나 가족들만을 위해 살아왔던 삶이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느끼고 순종하며 살아오다 어느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삶이란 것은 없었던 것인지를 느끼게 되면서 우울증과 공허함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게 된다. 남편도 아이들도 귀찮고 안정된 삶마저도 지겹다. 이 책에 나오는 정의 아내와 같이 삶이 헛헛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 책은 결혼은 했으되 자신의 아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남성들에게 특히 바쳐져야 하겠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 책의 의미를 알 수는 있을까.. 안다한들 깨달을 수는 있을까 싶은 헛헛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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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전경린은 어떤 작가일까.... 전경린씨가 쓴 책을 탐독하진 않았지만, 나름으로 읽어 보았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전경린씨의 머릿 속은 무엇으로 차 있는지 잘 모르겠다.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약간은 도발적인 제목과 배수아씨의 도서평에 끌려서 선택한 책인데.. 다 읽고나선 뭐랄까.. 결혼한 모든 여성들과 자신이 결혼한 여성이 누구인지 모르는 모든 남성에게 바치는 책이여서 그런지 미혼인 나는 그다지 공감할 수 없었다. 여성의 삶이 온전히 자기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무엇인 역할에 관한 삶이 경우, 그 빈 자리의 공허함이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공감하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비약이 심하지 않나 싶다. 지금 50대 초반인 내 어머니는 자신의 삶에서 자식을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당신이 사는 세계에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치부되지만 나는 그녀의 삶이 맥빠지며 바보 같다는 생각을 드문드문한다. 그런 그녀가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 화를 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와 빈둥우리 시기를 거치는 자신에 대해 돌아볼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결혼한 여성이 읽어보면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반추해 볼 것 같지만 미혼인 여성이 읽기엔 아직은 감이 오지 않은 책인 듯 하다. |
|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다소 철학적인 제목이 눈에 띄었다. '과연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라는 호기심에서 책을 펼쳐들게 되었다. 장수도 적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이 책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황당한 것이었다. 이차저차하여 결론에서 여자는 늑대가 되어 늑대무리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여자는 늑대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게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라는 생각이 뇌리를 휩싸고 있었다. 다소 불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사이트에 들어와서 전경린의 작품을 치고, 다른 독자들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으로 옮아갈까 싶어 대게 리뷰쓰기 전에는 다른이들의 글을 읽지 않는 편이지만,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가 너무나 궁금하여 견딜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역시나 세상에는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나 보다. 다른 사람들의 리뷰에는 늑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은채, 한 가정에 귀속되어 살아가는 한 여자의 모습... 그리고 가죽신에 대한 의미에 대한 나열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마다 생각의 깊이 차이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한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마도 더 심오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소 깨름직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아마도 내 생각의 깊이가 지극히 얕은 까닭일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