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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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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인생에서 당신의 해는 무엇입니까?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소음의 시대는 상투어에 가깝지만 시대의 소음은 남다른 느낌이다. 소설에서 ‘시대’는 스탈린 정권을 가리킬 테고 주인공 작곡가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묻는다. 시대의 소음을 넘어서도록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요 예술이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사라지고도 남을 “역사의 속삭임”으로 음악을 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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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인생에서

당신의 해는 무엇입니까?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소음의 시대는 상투어에 가깝지만 시대의 소음은 남다른 느낌이다. 소설에서 시대는 스탈린 정권을 가리킬 테고 주인공 작곡가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묻는다. 시대의 소음을 넘어서도록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요 예술이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사라지고도 남을 역사의 속삭임으로 음악을 지목한다.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소설화한다는 것 자체가 줄리언 반스에게는 자칫 모험일 수 있다. 웬만한 자신감과 명분 없이는 시도할 수 없는 작업이다

 

  내 생각에 젊은 작가들과 달리 노작가는 펜을 들고 꼭 말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신체와 정신적 여력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가 깊이 들여다본 주제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지혜롭고 감각적인 할아버지의 증언 혹은 구술이랄까, 덤덤한 진술 가운데 저자의 가치관이 새어 들어가고 반드시 말해야 할 정수만 담아놓은 듯하다. 그런 이유로 왜 작가는 굳이 많은 작곡가 중에서 쇼스타코비치에 주목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진다.

 

  소설은 듣는 자, 기억하는 자, 마시는 자를 언급하며 시작해 고서나 양피지를 펼치는 듯하다. 그리고 혼미하게 기차역 풍경을 포착한다(이 짧은 묘사는 마지막뿐 아니라 소설에 여러 번 언급된다). 전쟁 판타지를 목에 힘주지 않고 절단된 거지의 몸으로 강렬하게 못 박는다. 전쟁이 남긴 잔혹한 현장을,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반복되는 폭압의 역사를 한 컷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쇼스타코비치는 12년 단위로 윤년을 겪는데(우리식으로는 삼재가 낀 해인 듯) 1부 층계참에서는 1936년이, 2부 비행기에서는 1948년을, 마지막 3부 자동차에서는 1960년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핵심 년도의 구분이 있지만 기억들이 뒤섞여 파트를 횡단하여 퍼즐을 맞추듯 읽어 나가게 된다. 우리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1984>로 접한 디스토피아와 독재 정권을 그는 실제로 겪는다. 아무리 설명해도 늑대는 양의 처지(공포)를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상상을 토대로 접근 가능한 시간이 그들에게는 현실인 것이다. 각종 동물들의 소음과 언어 말살과 숙청이 자행되는 공간은 참혹 그자체이다.

 

  세 번의 윤년을 겪은 주인공(66세 추정)은 이제 그만 죽고 싶다. 젊은 날 가장 경멸하던 모습으로 늙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힘겹다. 정권의 낙관과 반대로 네 번의 윤년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 제발 오지 않기를 바란다. 세 파트로 구성된 이야기는 노인의 기억과 구술을 토대로 다소 모호하게 회상된다. 앞에서 그려놓은 스케치에 차츰 선명하게 색을 입히는 구도이다. 잠언집을 연상시키는 기술(記述)은 오랜 시간 삶을 부여잡은 사람의 손을 풀어 손바닥에 놓인 것을 하나씩 보여준다. 피아니스트의 목덜미를 거머쥐는 손아귀와 대조적으로 작은 작곡가의 손은 소심한 저항을 상징한다. 그런 거대한 손을 운명이라 칭하고 누구든 그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강조한다. 제 마음 상태 하나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라고.

 

 작곡가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희곡은 음악적일뿐더러 극작가를 음악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자로 등극시킨다.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인물론부터 모든 것에 공감하지만 단 한 가지 다른 것이 극중 괴물이나 악인은 적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데 반해, 현실의 독재자나 부역자들은 인간적인 흔들림조차 없다.

 

  그의 작곡가로서의 시간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사건은 한 잡지의 음악 비평에서 비롯된다. 대단한 작품으로 호평 받던 므첸스키의 맥베스 부인이 스탈린 사상과 이념에 맞지 않는 불순한 음악, 아니 음악 아닌 혼돈으로 치부 받기에 이른다. 정권이 요구하는 틀에 맞지 않는 음악은 모두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숙청의 대상이 된다. 하루아침에 거장의 음악이 꽥꽥 툴툴 으르렁거리는 동물농장과 굴착기 소음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는다.

 

  시대의 칙령은 가혹하고 거침이 없다. 난해하고 아방가르드적인 음악은 부르주아, 자본주의, 좌파, 형식주의로 배척한다. 인민을 위한 멜로디를 갖춘(요즘의 후크송처럼) 단순하고 선동적인 음악만을 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군가와 노동가로 쓰일 음악이 필요한 것이다. 비관주의나 단조, 애매함은 불허한다. 개인적인 희생을 찬양하는 애국적이고 힘찬 노래만 불려진다. 휘파람이나 허밍으로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음악만 음악인 것이다. 이런 규정과 집행은 대체로 듣는 귀가 막힌,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사람의 총지휘에 맡겨진다. 더 절망적인 것은 권력의 맛을 아는 음악가들이 나서서 동료의 뒤통수에 총을 들이댄다는 것이다. 권력의 피 냄새에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여 앞잡이 노릇을 한다. 이런 불운한 시대를 작곡가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낭만적인 기억이 남아있다. 자유연애 선봉가로서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격렬한 사랑을 꿈꾼 시절도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에게 사랑, 음악, 가족은 반드시 사수해야할 얼개 끈이다. 이 세 가지를 지키기 위해 배신자라는 비난도 감수한다. 정권의 손에 편집되고 구겨질 자신의 이야기와 음악이 못내 싫었던 작곡가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쪽을 택한다.

 

  매일 밤 승강기 앞에 여행 가방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 상황이, 죄다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는 광경이 공포정치를 암시한다. 그토록 삶을 놓지 않으려던 그의 말년에는 술과 담배만이 남는다. 목가적 시로 남아 있는 첫사랑도, 두 자녀를 안겨준 아내도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죽고 끝날 관계인 것이다. 제때 오는 죽음이 없듯이 모든 게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게 온다.

 

  다행히 그에게는 언어적 빈정거림을 넘어선 아이러니라는 보호막이 있다.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가 되길 요구하는 공장 같은 사회에서 예술가로서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되어준다. 스탈린 정권은 그에게 낙관주의를 맹렬히 요구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아이러니로 진실을 위장할 줄 안다. 그중 최고는 겁쟁이에 비해 영웅이 오히려 쉽다고 우긴다. 이외에도 인생은 산책하는 들판이 아니다, 영혼을 긁는 고양이 발톱, 고양이 손에 끌려 계단에 머리를 박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앵무새, 비극도 멀리서 보면 소극에 지나지 않는다 등의 문장들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깊은 울림을 왕왕 울려댄다.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어조로 삶의 진액을 짜낸다. 인위적이거나 과하지 않은 어조로.

 

  무엇보다 쇼스타코비치의 남성적이지 못한 천성에 마음이 끌렸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던 그가 어머니와 벌이는 신경전이나 연인을 위협하는 방식이 소심한 반항을 암시한다. 음악에 있어서는 어떤 결정도 강단 있게 내릴 수 있지만 연애나 결혼, 정치에 있어서 그는 순진하고 우유부단하다.

 

  처음 시대의 소음을 읽을 때는 사랑할 기회를 잃고 진정한 자신이 되어보지 못하는 게 참으로 슬펐는데, 다시 읽자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요구하는 시대의 무자비함에 마음이 쓸렸다. 정작 그가 주고 싶은 것은 받으려들지 않는 닫힌 외부세계가 자꾸 목에 걸렸다. 짜진 각본대로 읊고 답이 정해진 문서에 기계적으로 서명하면서 그는 통제권 없이 저당 잡힌 삶을 확 뒤집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질서와 정의를 원하는 그의 갈증은 스포츠 심판을 보는 낙에서 드러난다. 국가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지만 그는 몰고 싶은 차를 가져보지 못한다. 누군가 모는 차에 몸을 싣는 그는 정치적으로 꼭두각시에 비유될 만큼 부자유스럽다.

 

  자유연애를 호기롭게 외치며 추구하지만 아내의 무덤에는 다른 이가 가져다놓은 꽃이 있다. 가정적이면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아내를 마지막에 얻지만 이미 너무 늙은 뒤이다. 사랑보다는 비서나 친밀한 수행원에 가깝다. 시베리아 고아원에 자식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소원은 이루어지나 주인공의 아버지와 달리 너무 오래 살아 민망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음악 시험에서 아버지를 공개 비판해야 했고, 동의를 얻지 못한 재혼을 하고, 결국 공산당 가입을 하면서 그는 그가 생각하는 무난한/좋은/평범한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하나 남은 음악은 그가 오래 산 이유가 되어줄까. 그러지 않았던 듯싶다. 이 대목에는 작곡가의 생각보다는 소설가의 입김이 작용한다. 그의 시선에는 사라지고 놓친 것만 들어오지만 타인의 눈에는 그에게 남은 것들이 반짝이니까. 그가 오래 살았기에 가능해진 이야기(회술)와 원해서 만든 진짜 음악, 그의 분신이자 생명의 일부가 역사를 이어간다. 허망하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삶 같지만 그 모래는 흘러내러 탑을 이룬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했던 예술가의 소신과 말도 안 되는 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조롱한 흔적이 소설의 행간과 악보의 음표 사이에 겹겹이 맺힌다. 시대의 햄릿이 어른거린다. 음악은 듣는 귀만 있다면 언제든 소생하고 부활한다는 것을, 작곡가의 운명 넘어 제 길을 알아서 터나갈 거라는 믿음이 진동한다.

 

  그러니 소설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삶을 산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으며 노작가의 아포리즘을 곱씹어볼 일이다. 개인적으로, 예술적으로 정직함을 추구하고 싶었으나 운명의 방해로 죽은 거나 진배없는 삶을 살았지만 시간을 초월해 죽어서도 살아있는 그를 한번쯤 만나보면 좋겠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각자가 선호하는 양식으로. 왜 사는지 좀체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죽지 않고 견뎌보는 일의 숭고함을 시대의 소음을 통해 되새기며 기운을 내보는 건 어떨지.

 

● 비극을 긍정해야 가능한 삶   http://blog.yes24.com/document/9733165  

s********d 2017.08.1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