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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과학적 무신론자의 신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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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긍정의 배신>으로 이미 국내에 잘 알려진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자서전이자 과학에 경도된 무신론자로서 신을 찾아온 저자의 역경담이다. 칼 융은 <심리학과 종교>에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사실 가운데서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이 신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심리적 사실 가운데서 항상 압도적인 것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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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긍정의 배신>으로 이미 국내에 잘 알려진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자서전이자 과학에 경도된 무신론자로서 신을 찾아온 저자의 역경담이다. 칼 융은 <심리학과 종교>에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사실 가운데서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이 신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심리적 사실 가운데서 항상 압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을 믿는 것은 지적인 굴복"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철저한 과학적 인식을 지닌 21세기 무신론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저자의 어린 시절, 특히 10대 중반이다. 무신론의 전통이 강한 집안에서 뛰어난 과학적 두뇌와 의지력을 겸비하고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저자의 어린 시절 영웅이다. 저자가 과학에 심취한 것은 타고난 천성과 무신론적 집안 내력의 복합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 신자가 우세한 마을에서 자라면서도 무신론자로서 당당하게 살았던 그녀는 항상 신의 존재 여부를 탐구하는 생활 자세를 지녔다. 어린 시절부터 체질적으로 해리 증상을 자주 경험하고 세계의 실체성에 의심을 하게 되었으며, 16세와 17세에 경험한 '신비 체험'은 그녀에게 불가해한 초월적인 무엇, 즉 '신'이라고 할 만한 '현존'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대학에 진학해 화학과 생물학, 이론물리학을 공부하며 과학자로서의 길을 가려고 했지만 때마침 사회, 정치적 문제로 어지럽던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앞장서면서 여성과 소수자, 빈곤층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사회와 대중에 대한 소속감과 깊은 연대의식을 느끼며 활동가이자 저자, 칼럼니스트로서 살아왔다. 그 후 중년이 지나 유방암 판정을 받고 자신의 옛 일기장을 꺼내 읽으며 한때 자신이 집착해왔던 신의 문제를 다시 탐구하며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한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쓴 버틀런드 러셀 등 기독교적인 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저자는 선한 신의 개념에 강한 의심을 갖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선함만이 신의 특징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일'이나 '우주적 의식' 등 신비체험을 한 성인과 일반인들의 체험담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들이 겪은 신의 체험은 기독교적인 신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이론물리학을 비롯해 과학적으로 바라본 우주와 세계를 인식의 기반으로 하고, 종교의 역사를 더듬어 탐독하면서 오늘날의 유일신이 생겨나기 오래 전에 존재했던 애니미즘에서 살아있는 과학적 세계관과 동질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지금도 간간이 황홀경에 압도당한다는 저자는 "이 세상의 모든 혼란과 수수께끼를 응축시켜 감지 가능한 타자 내지 타자들로 요약하는 것"이 자신의 정신의 목표라고 여기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의식 혁명>과 <나의 눈>에서 자신의 신비 체험을 서술하며 신의 현존을 느끼고 참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인간의 의식의 지도를 만드는 등 영성의 발견과 보급에 심혈을 기울인 박사의 활동은 인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에 희망을 갖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하지만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이 책에서는 왜 그런 따스한 희망이 느껴지지 않을까. 나는 줄곧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냉정한 이성과 과학으로 분해된 중립적인 신에게는 더 이상 따스함이란 없기 때문일까. 아무리 우리가 신을 잘 안다 해도 희망을 주지 않는 냉철한 과학적 신이라면 인류가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다.

 

 

a*******5 2015.10.22. 신고 공감 5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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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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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는 일직선의 양 끝에 서있어서 과학에 접근한다는 것은 종교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신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과학과는 별개의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을 증명하겠다는 책은 지금까지 대부분 종교인의 입장에서 쓰여졌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오히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신을 찾아보겠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책은 누가 썼는가에 따라 그 기대치가 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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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는 일직선의 양 끝에 서있어서 과학에 접근한다는 것은 종교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신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과학과는 별개의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을 증명하겠다는 책은 지금까지 대부분 종교인의 입장에서 쓰여졌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오히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신을 찾아보겠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책은 누가 썼는가에 따라 그 기대치가 달라지기 마련인데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크게 기대를 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노동의 현장에서 밑바닥을 기면서 쓴 '노동의 배신', 유방암에 걸려 무조건적 긍정주주의의 폐해를 응시한 '긍정의 배신'만 봐도 그녀의 성향을 알 수 있다. 뭐든 그냥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은 스타일, 어설픈 단서는 채택하지 않을 것 같은 성향이 그녀의 책에 큰 믿음을 갖게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어린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집안에는 합리적인 정신과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것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녀에게는 모든것을 처음부터 원칙에 입각해서 탐구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점은 탄광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가르쳐 준 원칙이 크게 작용했다. 첫째, 사실 이외의 것을 모두 배제할 것. 그 뒤에 사실들을 검토해 패턴과 연관을 찾아낼 것. 예상을 하고 예상대로 되지 않았을 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 그런 그녀에게 수학의 허수 같은 개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현실이었다. 제곱해서 -1이 되는 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된다는 것인가. 그녀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뭘 목구멍에 집어 넣어도 그대로 삼키고 살 것이라며 경고하고 싶어했다. 그녀의 성장과정과 가정환경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이러한 의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녀의 성장 배경을 적었던 것은 신에 대한 비판적 생각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는 신에 대한 자의반 타의반 거리를 두고 살아갔는데, 14살 무렵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물체가 사라지는 것 뿐만 아니라 완전한 '無'가 된다는 것의 의미였다. 그것은 사물이나 현상 뿐만 아니라 개념과 의미, 추론, 연계까지도 사라지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것이 사라진 후에도 무언가 남아 있었다는 확신이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만약 신을 믿고 있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신을 만나는 기회라거나 신에 가깝게 간 특별한 체험이 되겠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쉬운 길이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모든 지식을 직접 체험하고 모든 종교에 심취하며 진리를 찾아가고자 했다. 종교와 철학, 그 밖에 답을 찾을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서적을 섭렵하며 답을 찾고자 했던 그녀의 과정이 담겨 있다. 


답을 '신'으로 놓지 않는다면 그 답을 찾는 길은 영원히 끝이 없을 지도 모른다. 사실 신비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지만 과연 그것이 무언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저자 또한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여전히 답은 명확하지 못하다. 전에 한 과학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우주를 움직이는 거대한 하나의 원칙과 힘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중력'에 대고 기도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이나 현상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모두 신으로 귀결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은 '신'에 대한 궁금증보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내용이 너무 주를 이뤄 다소 지루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녀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나름의 흥미를 갖고 볼만 하다. 

YES마니아 : 로얄 c****o 2015.10.29.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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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찾는 길’에서 ‘하느님(신)’을 본다 (신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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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7내가 ‘나를 찾는 길’에서 ‘하느님(신)’을 본다― 신을 찾아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글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2015.10.16. 14800원  내 어릴 적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나는 어릴 적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늘 보았습니다. 도깨비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허옇거나 속이 다 비치는 무언가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엇인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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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7



내가 ‘나를 찾는 길’에서 ‘하느님(신)’을 본다

― 신을 찾아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글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2015.10.16. 14800원



  내 어릴 적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나는 어릴 적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늘 보았습니다. 도깨비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허옇거나 속이 다 비치는 무언가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만한 어른이 둘레에 없었고, 이러한 것을 보는 내 눈이 무엇인가를 밝힐 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아침이고 밤이고 가위에 눌린 몸짓이었습니다.


  귀울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귀울음이라기보다는 어떤 소리가 늘 들리곤 했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적에 이 소리는 한결 크게 들립니다. 이 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아닙니다. 달리기를 해도, 뜀박질을 해도, 수다를 떨어도, 늘 내 귀로 듣는 이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만한 책이나 지식이 곁에 없는 채 어린 나날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쩐 종말을 향해 가는가? (17쪽)


백화점에는 내 관심을 끌 만한 것들이 없었다. 내 옷은 어머니가 손수 지은 것 아니면 통신판매사 시어스의 카탈로그에서 주문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인공적인 환경은, 막 형성되기 시작한 교외의 모습이라 해도, 게나예나 한 가지라 지루할 뿐이었다. 어딜 가나 벽돌 한 장, 지붕 판자 하나까지도 판박이였다. 그러나 자연은 차원이 다르다. 나뭇가지 하나, 구름 한 덩이, 바다의 파도 하나도 같은 게 없어 제각각 눈길을 끈다. (32쪽)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이 쓴 《신을 찾아서》(부키,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도 어릴 적에 ‘무엇인가’를 늘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녁이 본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예배당에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많고, 성경을 가르치려는 학교는 있어도,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에 들리는 소리를 제대로 밝혀 주는 길잡이나 어른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신을 찾아서》를 쓴 분은, 또 이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신(神)’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한국말에는 ‘님’이 있습니다. ‘지기’라든지 ‘지킴이’도 있고, ‘하느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한겨레 발자취를 돌아보면, 이 땅에 서양 종교가 들어오기 앞서부터 ‘하느님’을 늘 말했습니다. 그리고, 해님·달님·별님·꽃님·숲님처럼, 모든 목숨이나 숨결한테 ‘님’을 붙였지요.


  개님이나 고양이님이나 닭님이나 범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목숨붙이가 어떤 넋인가를 헤아리면서 ‘님’이라는 말을 붙여요. 그래서, 풀님이나 나무님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말은 풀과 나무를 고이 아끼는 몸짓이 됩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밥님’이라 말하고, 가문 땅을 적시는 비를 바라보며 ‘비님’이 오신다고 외치지요.



학습 친구들은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허수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남들이 무엇을 목구멍에 쑤셔넣든 그대로 삼키게 될 거라고. (52쪽)


생명의 목적은 죽음일까, 아니면 계속 살아 있는 것일까? (64쪽)


우리는 지상에서 짧은 삶을 살다 죽지만, 대신에 의미라는 영예로운 보상을 받는다는 것. 이때 의미는, 찾으려고만 들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고, 죽음의 순간에 저 높은 하늘에서 북극광처럼 빛나면서 그간의 모든 하찮음과 고통을 상쇄해 준다는 것. (76∼77쪽)



  사람은 살려고 태어납니다. 사람은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려고 태어나기에, 살면서 할 일을 할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사는 동안 죽음만 걱정하다 보면, 정작 스스로 할 일을 놓치거나 멀리하고 말지요. 돈을 버는 까닭이 오로지 돈벌이를 하려는 뜻이라면 죽는 날까지 돈은 실컷 벌 만하리라 느껴요. 돈벌이에만 뜻을 두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오직 돈벌이만 뜻이라면 말이지요.


  학교를 오래 다닌다든지 책을 많이 읽는 일도 이와 같아요. 왜 학교를 오래 다녀야 할까요. 왜 대학교나 대학원을 가야 할까요. 책은 몇 권이나 읽어야 할까요.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얼마나 보아야 할까요. 사랑하는 짝은 몇 사람이나 사귀어야 할까요. 밥은 하루에 몇 그릇을 먹어야 배부르거나 넉넉할까요. 자동차는 얼마나 몰아야 하고, 잠은 얼마쯤 자야 할까요.


  얼핏 보기에 너무 마땅할 수 있지만, 곰곰이 따지면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늘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새롭게 바라볼 때에 비로소 삶이 새롭게 열리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숨을 쉬지 않으면 누구나 죽지만, 숨쉬기를 생각하며 숨을 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숨을 쉴 적마다 ‘아, 난 숨을 쉬지’ 하고 생각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마시는 숨이 얼마나 달콤하거나 고마운가를 문득 생각할 만해요. 맑거나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고 싶다는 꿈을 품을 만해요. 오늘은 매캐한 배기가스가 가득한 도시에서 살지만, 언젠가는 따스하고 시원한 바람이 사랑스러운 숲집에서 살겠노라는 꿈을 품을 수 있어요.



동생들은 일기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앞에만 붙어 있었으므로 내 시야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텔레비전 앞으로 끌려간 동생들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90쪽)


나는 무엇에 반기를 들었던가? 내가 맞선 건 고등학교의 집단주의적 기획이었다. (103쪽)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집단주의가 끔찍하게 괴로웠습니다. 끔찍하게 괴롭다 보니 못마땅했습니다. 군대에 가서도 집단주의가 모질게 고달팠습니다. 모질게 고달프다 보니 싫음을 넘어 미움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집단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군대도 없어질 낌새가 아직 없으며, 회사나 공공기관 얼거리는 군대하고 닮습니다.


  평등을 말하려면 평등은 어디에서 이루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척척 갈리는 얼거리가 있는데 평등을 말할 수 없겠지요. 직책에 따라 시키는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이 갈리는 곳에서 평화를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대통령은 가장 위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라는 소리요, 으뜸 심부름꾼이 대통령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집단주의란 무엇일까요? 집단주의는 집단에 따르라고 하는 주의입니다. 집단에 따르려면 ‘스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스스로 움직이면 ‘집단이 안 되’거든요. 나는 이쪽으로 가고 싶어서 이쪽으로 가면 집단이 깨지지요. 그래서 집단에서는 ‘전체주의’로 흐르기 마련이고, 어떤 지도자 한 사람 뜻에 따라 한꺼번에 움직이는 흐름이 됩니다.


  함께 움직이면서 슬기롭게 힘을 쓸 수도 있어요. 이른바 두레와 품앗이가 있어요. 이때에는 함께 뜻을 세워서 어떤 일을 합니다. 다만, 두레와 품앗이는 어느 일을 할 적에는 함께 움직이되, 여느 때에는 늘 저마다 제 삶을 지어요. 그리고, 두레와 품앗이에서도 저마다 몫이 다릅니다.



아메바에게도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산소 원자는 수소 원자에게 실제로 욕망을 느낀다고 과학이 시인했다면, 나는 아마도 덜 외로웠으리라. (119쪽)


나는 동생에게 솜사탕을 안기고 앉힌 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뭐든지. 자기에게 그럴 힘이 있다는 것만 알면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다고. (178쪽)



  《신을 찾아서》라고 하는 책은 무엇을 말하려 할까요? 이 책은 ‘신’이나 ‘님’이나 ‘하느님’을 말하는 책일까요? 어느 모로 보면 이 책은 신이나 님을 말하지 않으려는 책이면서, 다른 모로 보면 이 책은 신이나 님은 하늘 꼭대기나 땅 깊은 곳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있다는 이야기를 말하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보라’고 이야기하려는 책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속에서 싱그럽게 살아서 춤추고 꿈꾸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삶을 즐겁게 지어서 아름다운 길을 가자고 하는 책이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평생 싸웠던 대상은 가난도, 실패도, 종교도, 지적 퇴행도 아니었다. 그것은 따분함이었다. (239쪽)


나는 과거의 나에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고. 배우는 것 근처에도 못 갔다고. (314쪽)



  요즈음도 나는 맨눈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맨귀로 무엇인가를 듣습니다. 이 모습과 소리가 무엇인가를 똑똑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허깨비를 본다고는 느끼지 않고 헛소리를 듣는다고도 느끼지 않아요. 아마 나는 마음에 있는 눈으로 무엇인가를 볼는지 모르고, 마음에 있는 귀로 무엇인가를 들을는지 몰라요. 그리고, 나뿐 아니라 우리들 누구나 마음에 있는 눈으로 서로 사귀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고 느껴요. 우리들 누구나 마음에 있는 귀로 서로 아끼고 보듬는 꿈을 나눌 수 있다고 느껴요.


  삶으로 사랑을 짓고, 삶으로 꿈을 노래합니다. 삶으로 사랑을 들려주고, 삶으로 꿈을 주고받습니다. 《신을 찾아서》는 바로 이 대목을 느즈막한 나이에 비로소 찾은 발자국을 들려주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암 선고를 받고, 이제 죽음 문턱에 선 나이라고 느끼는 글쓴이가 그동안 수수께끼처럼 가슴에 품었던 실마리를 풀려고 하는 기나긴 삶길을 보여주는 책이로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신을 찾아서”란 “나를 찾아서”입니다. “나를 찾아서”란 “삶을 찾아서”입니다. “삶을 찾아서”란 “꿈을 찾아서”이고, “꿈을 찾아서”란 “사랑을 찾아서”이지 싶어요. 나를 찾으면서 삶을 찾고, 바야흐로 꿈과 사랑을 찾으면서, 오늘 하루도 아침부터 노래하는 웃음꽃을 피우는 이야기가 바로 ‘하느님’ 이야기이지 싶습니다. 4348.11.11.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h*******e 2015.11.1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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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삶으로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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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유 모를 중압감을 느꼈다. 같은 조건에 만일 내가 놓였더라면 숨이 막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름 잘 버텼고 이겨냈다. 시간이 다 해결해줬다는 우리말처럼 버티다 보니 어느 순간 해결이 됐던 것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롯이 담긴 책이었다. 특히 몸과 마음이 부쩍 성장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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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유 모를 중압감을 느꼈다. 같은 조건에 만일 내가 놓였더라면 숨이 막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름 잘 버텼고 이겨냈다. 시간이 다 해결해줬다는 우리말처럼 버티다 보니 어느 순간 해결이 됐던 것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롯이 담긴 책이었다. 특히 몸과 마음이 부쩍 성장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와 닿았다. 많은 게 달라졌으므로 1941년생인 그의 삶을 내가 전적으로 이해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이라 하는 건 그리 어렵잖게 형성됐다. 

그의 시대는 여러모로 현재보다 막힌 시대였다. 우선 여성에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대놓고 교육을 금지하지야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만큼 혹은 남성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거라는 기대를 품지 않았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뛰어난 여성은 기가 세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 아닌 것에 그는 열광했다. 알게 모르게 그는 아버지의 꿈을 실현시켜줄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여성이 아니었으면 아버지의 인생을 대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과 싸웠다. 그건 독립을 향한 힘겨운 여정이었다. 여성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 위한 싸움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걸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과는 다른 유형의 전투였다. 중간에 반유대인적인 사고로 인해 겪은 일이 등장했다. 다른 곳도 아닌 미국이다. 미국이 꿈의 나라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유대인의 피부색은 검지 않다. 선택 사항이 아닌 인종이 평가의 잣대로 활용되는 곳이어서 그는 차별을 경험했다. 대놓고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쏟는 이들 앞에서 꿋꿋하게 굴었지만 상처는 분명 존재했다. 훗날 결혼을 단념했던 상대방이 큰 사건에 휘말렸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는데 기분이 묘했다. 현명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선택 가능 항목이 아닌 것으로 비춰졌다. 오래 전 일이므로 지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필히 달라졌어야만 한다. 

아이에게 부모는 거대한 우주와도 같다. 일정 연령 이상이 되기 전까지 부모가 제공하는 게 아이에겐 전부다. 기록 속 그는 불안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살갑지 않았다. 어머니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을 때, 어머니 곁에 없었다는 이유로 그는 비난을 받았다. 그가 어머니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부모는 떠나기 마련이나, 다만 그 방법이 이상적이지 못했을 따름이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쪽이 그에게는 보다 큰 영향을 미친 듯했다. 알츠하이머병은 암처럼 치명적이진 않지만, 한 인간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명석하던 이가 발을 질질 끌며 걷기 시작하고, 어떠한 말조차 건네지 않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무척이나 컸을 게다. 한 때 과학에 심취했던 인물답게 저자는 모든 걸 일종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듯 굴었다. 감정은 쌓였고, 배출이 전혀 없었다. 그는 우울증을 앓았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그가 힌두교에 살짝 심취했던 것도 이해 가능했다. 다른 종교와 달리 힌두교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내면의 평온을 찾는다. 유일신을 강조하는 폭력적(?)인 성향으로부터도 약간은 자유롭다. 안타깝게도 이 또한 완벽한 종교는 아니었다. 선택은 그의 몫이었고, 그는 특정 종교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름 성공적이었지만 마냥 꽃길을 걸은 건 아니었다. 되돌아가라면 어느 한 시기를 선택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이 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할 것만 같았다. 나이가 충분히 들었고, 강박적으로 굴지 않았음에도 인생의 숙제처럼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외면 않고 이행했다. 그의 저서 일명 ‘배신’ 시리즈는 나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책이다. 신, 아니, 그 어떠한 것에 기대지 않아도 인생을 풍요롭게 일구는데 그는 성공했다. 그럼 된 것이다. 충분히 훌륭하다. 


q*****2 2020.06.2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신을 찾아 떠나는 고행같은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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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셨다. 92세의 나이셨고, 노환이 있으셔서 더 이상은 힘드셨을 때였기에 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앙상한 손으로 병상 위에서 내 손을 잡고, "어서 애기를 가져야지." 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 할머니의 죽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3일장을 치루고 난 뒤, 우연히 이 책을 출간 소식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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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셨다.

92세의 나이셨고, 노환이 있으셔서 더 이상은 힘드셨을 때였기에 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앙상한 손으로 병상 위에서 내 손을 잡고,

"어서 애기를 가져야지." 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

할머니의 죽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3일장을 치루고 난 뒤, 우연히 이 책을 출간 소식을 접했다.

제목 그 자체에서부터, 신이라는 단어가 있어 3일 동안 장례식장을 지키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을 정리해줄 책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받아 조금씩 읽어가며, 이 책에 대해서 내가 짐작한 바가 조금은 달랐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조금은 더 과학적으로(?), 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이런 계통의 책을 아주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보통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처음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여 조금씩 그 범위를 옮겨간다.

그런데 '신을 찾아서'의 경우는, 처음에는 똑같이 아주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데,

그 이야기가 책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개인적인 과거를 바탕으로 그 위에 글을 쌓았다.

 

녹록지 않은 어린 시설을 보내며, 너무 일찍 철이 든(것 같은) 작가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만나는 세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종교와 만났을 때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이 한 권의 책이 아닐까 싶다.(물론, 이 책은 이 작가가 아니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은 든다)

 

작가의 개인적이 삶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나, 그저 개인적인 감회만 가득한 '에세이'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두고 깊고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간다. 철학자들을 데려오고, 여러 작가들과 그들의 저작을 가져와 자신의 이야기에 살을 붙인다.

 

그런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다.ㅎㅎ

허나 겨우겨우 읽어내며, 이 작가에게 존경심과 연민을 품게 되었다.

박학다식한 이 저자의 이야기는 실로 대단했으며, 이 삶을 여지껏 견뎌내온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c********g 2015.10.29.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신을 찾아서
"신을 찾아서" 내용보기
르네상스 이후 이성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에게 신을 이해하고 믿기까지는 참 많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과연 신이 있나? 있다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모순되어 있는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이나 고통 속에 버려져 있나?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어 신에게 기도하고 매달려 보았지만 왜 현실은 변하는게 없는가? 계속되는 질문과 현실 배반적인 모습들 속에 결국 신은 없다는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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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 이성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에게 신을 이해하고 믿기까지는 참 많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과연 신이 있나? 있다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모순되어 있는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이나 고통 속에 버려져 있나?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어 신에게 기도하고 매달려 보았지만 왜 현실은 변하는게 없는가?

계속되는 질문과 현실 배반적인 모습들 속에 결국 신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이 있다. 신을 믿어라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로 보입니다.

 무신론자인 작가는 어떻게 신을 찾게 되었을까요?

작가가 신을 찾게 된 계기는 "죽음" 외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죽음이란 공허하고 흉할 뿐 순식간에 닥친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건 내가 없는 세상을 믿는다는 뜻이다.

작가는 신을 찾아가는 출발점에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것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안다고, 심지어 그런 진실이 존재한다고 나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하늘이 열려 내게로 쏟아져 들어왔고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극도로 피곤한 상태의 저혈당증이라는 우연한 생리학적 해리상태에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작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느겼다. 이때 대면한 힘 또는 에너지를 "신"이라 정의하였다.

​그때 무언가를 보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작가는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신을 알고 있으니까.

 책을 읽고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지 저혈당 쇼크 상태에서 느낀 해리상태를 신을 만났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진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을 만나 소통하고 의미있는 무언가를 얻고 깨닫았다는 이야기도 없이 그저 신을 알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는 더욱 이상하다.

조금은 개인적인 내용과 뭔가 해결책이 없는 이야기 스토리. 조금은 실망스럽다. ​

j******i 2015.10.2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