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전후의 우리 사회는 기성의 권위와 체제의 혼란 등이 지식인을 비롯한 수많은 민중들에게 말 그대로 고통과 회의와 절망을 안겨 주던 암울한 시대였다. 당시 이러한 사회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하려 하던 것들 중에 1980년대의 저항시들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저항시의 대표격으로써 '황지우'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접하게 되었다. 이 시집의 시들 역시 혼란의 현실을 부정하고 저항함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이를 좀 더 높은 차원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현실 초원의 의지까지도 보여 주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 초월의 의지'를 그 주제로 앞세워 연역적 접근이라는 방식으로 시들을 대할 수 있다. 먼저, 여기의 시들-'그들은 결혼한 지 7년이 되며' , '오늘 오후 5시 30분 일제히 쥐(붉은 글씨)를 잡읍시다' , '無等' -을 한 줄 한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정해진 형태와 형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 시의 단어들은 그들의 제자리를 잃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때로는 하나같이 붙어 있고, 존재하지 않을 법한 단어들에, 마침표를 잃은 문장들, 하지만 넘쳐나리 만큼 무수한 단어들의 행렬과 세속적이고 과격하기까지 한. 이렇듯 부정형의 혼란스런 단어들의 구성과 조합으로 이루어진 시들을 우리는 '해체시'라는 말로 일축함으로써 조금이나마 혼란에서 빠져 나와 우리가 찾고자 하는 주제 접근의 실마리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위의 예들만 보아도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떠한 정형화된 틀도 발견할 수 없다. 해체시는 파괴한다. 틀을 파괴하며, 우리가 불만스럽게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파괴는 기존의 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생성의 기반을 닦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며 의지이다. 이러한 해체의 형식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 초월의 의지를 찾고자 한 작자의 의도를 은연중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이 시들의 내용이나 형식은- '벽3' ,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 '아내의 편지' - 때로 회상 일기를 읽은 것 같기도 하고, 때로 신문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 뉴스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편지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을 여과 없이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 형식은 작가의 개입이 없는 객관적 시실을 그대로 보여 줌으로써 독자가 우리 현실의 부정함에 스스로 분노하고 저항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 여과 없는 일상이란 작가의 '체'로 걸러진 '선택된 일상'으로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미 작가의 의도대로 이끌려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계획되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택된 일상' 즉,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하도록 하는 일상에 구체성을 더해보자. 앞에서 말한 '아내의 편지' 와 더불어 '1960년 4월 19일 20일 21일 , 광주' 에서는 독재 정권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싸운 우리의 학생들과 시민들의 모습을 당시 4.19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희생의 안타까움을 안겨 주고 있고, '버라이어티쇼, 1984'에서도 4.19와 함께 독재 정권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져 있으며, '밤병원'에서는 독재 정권의 강제와 무참함을 그대로 드러내 우리에게 당시 정권에 대한 혐오감마저 불러 일으키고 있다. 또 그는 다른 시집 [어느날 흐린 주막에 앉아 있을 거다]의 '우울한 거울2'에서 소비에트의 해체-이데올로기의 붕괴-를 두고 "내가 이 삶을 통째로 배신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고나 할까?"라는 말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그의 시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로 돌아와 '그들은 결혼한 지 7년이 되며'에서 "서울대 정치과 졸업생들은 동창회를 미국에서 한 대."와 '근황'에서 "우리는 다시 레이건 치하에서 산다"와 더불어 '닭장.' 등에서 반 이데올로기와 함께 작가는 반미주의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미국에 대해 빠져있는 사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로 앞에서 말한 '벽3' ,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14시 30분 현재'에서는 분단의 현실 아래 가상의 적-북한-을 상대로 한 민방위 훈련에 대해 '늑대와 양치기소년'의 이야기를 빌어 사회생활과 국민윤리에 대해 회의적 역설을 통한 비판하고 있다. '꽃피는, 삼천리 금수 강산' 에서도 우리나라 사회 현실 전반을 훑지만 북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으로 분단의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제 다시 글의 처음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위의 시들을 통해 우리가 작가가 사회 전반의 다양한 현실들을 부정과 비판으로 저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시는 저항에서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 말 또한 상기해야한다. 작가의 이렇듯 부정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는 - '논' , '나의 누두' -살아있음을 재확인함으로써 삶의 의지를 찾는 작업을 통해 국건히 다지게 됨을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잠언의 바다위를 나는' 에서와 같이 마지막으로 '희망'의 여지를 마련함으로써 우리 의지는 '승화'로 그 결말을 짓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구체적인 시들의 예로써 제시된 두가지 질문에 대한 대한 대답은 결과적으로 문두에서 언급한 '현실 초월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이해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도 분명 부정적 현실이 존재하다. 이를 직시하고 꼬집을 수 있는 통찰력을 갖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시집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만큼 현실에 안주하여 부정이 부정으로 남고 부당함이 부당함으로 남는 사회를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사실만은 명백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거창한 운동 같은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옳지 못한 사회를 바로 잡는 방법은 다름이 아닌 우리가 나아가 임하게 되는 사회의 일선에서 바른 비판의식을 가지고 스스로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현대의 현실을 극복하는 20xx.4.19.가 이닐까 생각된다. |
| 시를 읽으면서 우울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반대되는 감정들인가? 나는 이 시를 분석할 능력도 없고, 이 시를 비평할 능력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해야하나...? 그러나 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 감정에 대해서 할 수 있는 한 솔직하게 얘기하고자 한다. 황지우 시인의 '잠든 식구들을 보며'를 대면하여 계속되는 우울함, 그리고 계속되는 멍멍한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삶을 살면서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사실 시에서 보면 사실 아주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군인장정 15명의 죽음과 정신대 할머니의 40년만의 출현 등등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시는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역필을 한다. 일어난 일들이 많아서 틀린 말 같지만 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사는 물질적 세계에서는 오늘도 수많은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나는, 나만은 아무 일도 없다. 아마 오늘도 그럴 것이다. 많은 뉴스가 있겠지만 나의 일상을 볼 때는 아무 일도 없다. 그래서 나의 하루하루는 예상되는 하루하루들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삶과 일과들... 그 와중에 물론 새로운 일들이 생기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내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하나씩 튀어 오르는 하나의 반동의 세력들일뿐이다. 내 일상의 예상 경로를 흔들지 못한다. 갑자기 '매트릭스'란 영화가 생각난다. 여기서는 반동의 세력이 일상의 경로를 완전히 뒤흔들어 버렸다.^^ 다시 본 내용으로 돌아가서... 아마 시인의 반동세력도 일상의 경로를 흔들지 못한 것 같다. 집에 잘 귀가해서 뉴스보도 24시를 본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역시 오늘 하루는 그저 일상의 반복과 예상되는 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비록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서 시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것을 죽음과 연계시킨다. "너는 이 세상에 자고 있는, 그러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다." 아무 일 없는 삶과 죽음.. 이 둘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죽은 것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나의 일상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 나는 시에서 나는 죽음의 애틋한 사랑을 느꼈다. 그가 아버지로서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가 남편으로서 자신의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무덤 밖에는 "양자강 바람"이 불고 있다. 자신이 느낀 힘듦과 고통, 인생고를 내 아이들도 느낄 것이다. 시간이라는 세상이 가진 강력한 무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다. 피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잠든 어린것들을 한밤중에 내려다 보고있으면 눈물이 난다"라고 얘기한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숙희야, 이 세상은 어느 날, 우리가 그랬듯이 네가 안고 있는 이 아이들을 소환할 것이다. 역사는 이 미감아들을 또한 분노와 슬픔, 격정과 사랑으로 감염시킬 것이다" 그래서 더 맘이 아픈 것 같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환란의 날들"을 힘들게 견뎌 내야하기 때문에..그리고 이것이 사실임으로.. 황지우 시인은 80년대와 2000년대를 살아가고 계신 분이다. 시대적으로 봐도 80년대는 이리 저리로 힘든 시간의 시대였다. 결국 97년 IMF를 오게 하신 근본적인 원류의 시간이기도 하고, 2000대에 와서는 정경유착과 대기업 개혁이라는 힘든 구조조정을 하도록 만든 원류의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IMF와 연계되지만... 그 당시의 힘든 상황들이 한층 더 맘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시인은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반면 그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유한하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랑한다. 그러나 계속 함께 할 수는 없다.' 시인은 이 사실을 아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너와 나, 누구든 하나가 먼저 가겠지만 어느 날 네가 죽으면, 내 가슴 지하 수천 M에 너를 묻으리." 하마도 먼저 아내가 세상에서 떠나길 원하는 듯했다. 그러면 가슴 수천 M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터니 말이다. 사람에게 감정이 없다면 사람은 아마도 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아니겠지...사람에게 죽음이 없다면 인생이 유한하지 않으면 소중함도 모르겠지... 한편에서 생각하면 죽음이란 것은 아주 나쁜 녀석이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 이 녀석은 사랑의 근본이 되고 인생의 근본이 되는 것 같다. 이런 짧은 몇 자로 이 시를 읽었던 내 느낌을 적어봤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 시 때문에 많은 것들을 새롭게 봤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해도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에서 자신의 시집이 많이 팔린 것에 대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들을 포함해서 내 시를 진정으로 이해해줄 사람은 한 2,000명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집이 이렇게 많이 팔리니… 허탈합니다. 이래도 되나 싶네요…"라고 말한 분이기에..> 개의치 않으리라.^^ 이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했다. 그래서 나에겐 고마운 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죽음이란 것은 신이 내려준 가장 고마운 선물이란 생각을 하면서 글을 이제 그만 줄인다. |
| 황지우. 그는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의 시단에서 1980-90년대를 넘어오는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키워드가 아닐까한다. 물론, 그의 시는 때로는 너무 아름답고 간결해서 매력적이지만, 때로는 또 너무나 힘이 많이 들어가 알아듣기가 어렵다. 속칭 난해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가 그랬었지. 시는 질그릇과 같아 깨지기 쉽다고. 그런데, 그의 시는 도대체 깨지지 않는 질그릇인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시를 두번 세번 다시 읽었던 경우도 많았고. 깨어지지 않는 질그릇일 필요는 없는데, 굳이 그의 표현법은 그랬었다. 그러나 표현법은 시인 고유의 영역이다. 나는 그가 말하는 속내가 맘에 든다. 그는 적어도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의 질그릇으로서 시는 그것이 깨지면서 세상을 울리고, 우리의 정신을 울리고, 또한 엉겨붙은 저속함들을 울린다. 깨지면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그 당찬 목소리로서, 혹은 봄이 오면서 소리없이 녹아버리는 얼어붙은 강가의 얼음장처럼, 그런 소리를 그의 시에서 더 많이 듣고 싶다. 개인적으로 황지우의 근황이 다시 궁금해진다. 아,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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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두 권 있다. 누렇게 색바랜 1985년 판 1,500원이었던 아버지의 책,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새로 장만한 책이 있다.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이 시집을 처음 접한 고등학생은 이렇게 혼자 뇌까렸다. "뭐야, 이건 시도 아닌데." <무등>이라는 제목아래 산의 형태로 시행을 배열한 시, <1960년 4월 19일·20일·21일, 光州>라는 수필처럼 느껴지는 시, #1, #2라고 장면번호가 붙은 시, 편지형식의 시, 게다가 난해하기는 어찌나 난해했던지. 생경한 시형식에 질려 제대로 읽지도 않고 그냥 덮어버렸던 그 중학생은 지금 황지우 시인을 좋아하는 국어 전공자가 되어 있다. 아직도 이 시집의 시형식들이 낯선 것이 사실이고, 시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60년, 80년대 역사의 단상들과 내 고향 광주의 지나간 삶의 형상화를 읽기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황지우 시인의 근래 시집을 읽고 매료된 사람이라면 이 시집을 꼭 읽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의 시 밑바닥에 깔린 (이제는 많이 변화 되었겠지만) 기본 정서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삶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 추측가능케 하는 이 시들로부터의 연장선에 그의 근래 작품들이 놓여 있다. [인상깊은구절]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는 몸으로,벌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