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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이든지 두꺼운 양장 책 몇 권은 있기 마련이다. 나도 아주 두껍고 무거운 일곱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데 한 권은 고등학교 동문주소록, 두 권은 대학교 동문주소록 그리고 네 권은 족보이다. 온통 이름뿐인 족보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란 할아버지의 자손들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그 책을 애지중지한다. 일년에 한,두번도 펼쳐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종친회에서는 그런 책을 몇 년에 한번씩 재발간한다. 물론 새로이 태어난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게 발행된 족보는 거의 강매수준이다. 가격도 가격이려니와 구태여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걸 구입한다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다행히 우리아이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나야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에 매번 거절하고 있다. 이런 족보는 가문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다. 공동조상인 시조의 자손들을 모아 그들의 혈통과 행적을 일정한 서식과 도표로 정리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산물로써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조상들의 행적이 기록된 가족사이지만, 과거 조상과 현재 자손 사이의 연계에 있어서는 진실과 거리가 먼 내용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신들의 조상의 어두운 면은 가능하면 감추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족보를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산물로써 이해하고,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 사족이 왜 족보를 필요로 했는지를 통하여 오늘날에 맞는 새로운 가족사 창출의 안목을 기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족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성씨와 본관을 알아야 한다. 원래 성씨는 삼국시대부터 사용기록이 나타나지만 당시에는 일부 왕족과 귀족층에서 사용했다. 그러다 라말여초에 지배층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노비 등의 천민층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백성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고유어로 된 토속적인 이름을 한자식으로 개명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성씨의 기능은 부계혈통을 나타내면서 부계친족집단의 구성원과 그 밖의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관은 시조의 출생지로 그 성씨의 발상지를 말한다. 고려 및 조선시대 호적에 개인의 기본적인 정보로 기재되기도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본관과 거주지가 대체로 일치하였으나, 조선시대 들어서는 여러 이유로 인하여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흔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족보는 15세기 이후 600여년 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결과물이라고 한다. 선대의 계보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족보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그러나 문중 문화가 발달하기 전까지는 성씨 단위의 대규모 족보가 편찬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호구파악의 관행으로 사조(四祖), 즉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기재했으며 조선시대 들어서는 이것이 공적인 영역에서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초기의 가계기록은 개인중심으로, 후대자손에서 시작하여 선대조상을 소급해서 파악하는 상향식으로, 부계 단선이 아니라 남녀구분 없는 다양한 계보선을 망라했다고 한다. 족보가 처음 편찬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초기인 15세기경으로 추정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족보가 가계기록과 다른 특징은 성씨 또는 계파단위의 공동조상을 기념하고 그 자손들간의 결속이나 친목을 추구하는 기능과 목적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초기족보는 부계혈통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남자와 여자로 이어지는 총계적 형태로, 이는 한국고유의 혈연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른 나라 족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로 넘어가면서 유교사상에서 유래한 부계, 동성중심의 친족관념이 이념이나 제도의 측면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족보도 그에 따라 변했다고 한다. 성리학적 친족윤리가 족보에도 파고들었으며, 또한 족보를 성행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초기족보가 동류계층 위주의 교류가 목적이었다면, 후기는 같은 조상을 두고 있는 자손의 집합이라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초기족보의 친속은 나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친족으로 촌수와 동일했기에 내가 죽으면 서로 볼 일 없는 사람들도 포함되지만, 후기족보는 조상을 기준으로 형성되었기에 한 구성원의 생사유무에 관계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족보는 기본적으로 편찬자의 자의가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라도 과거나 관직 진출 사실 이외에는 밝히지 않았으며, 수록대상이 되고 안 되고는 본인의 희망에 따랐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서얼 같은 경우도 족보에 실리기는 했지만 차별적인 기재방식으로 구별하였으며, 그러다 보니 편찬자가 후세에 전하고 싶은 내용만 선별적으로 기록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족보가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평범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력은 물론, 현재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기록되는 현재진행형의 기록이기 때문 일 것이다. 조선후기 문중 문화가 조선사회의 어두운 면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혈연이라는 폐쇄적인 구조로 인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가족사로 놓고 볼 때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부인하긴 어렵다는 생각이다. 물론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 평생가야 얼굴은 고사하고 이름도 들어볼 일 없는 사람들이 단지 성씨와 본관이 같다는 이유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공동의 조상을 기념하고 나의 친속들을 이어주는 매개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그리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