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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는 저항의 도시인 것 같애. 라는 말에 그녀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전쟁 이후에도 이념전쟁이 지속되었고 그 속에서 많은 가족들이 남과 북으로 흩어지기도 했잖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는데도 종교적 신념을 이어왔고. 그 이전엔 동학혁명의 시작도 이곳 전주였고. 전주가? 동학은 그렇다 해도 전쟁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나 한 역사 하는데 그런 얘기를 어디서도 읽은 적이 없는데... 그랬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였으나 누군가는 경험한 역사였다. 전쟁에 진 사람들의 역사거나 핍박받은 사람들의 역사거나 비참한 가족사를 지닌 평범한 범부들의 역사였다. 스스로 자신은 학자라 말하는 똘똘이같은 이미지의 그녀도 읽어본 적 없어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 역사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역사는 교과서가 아닌 경험한 사람들의 몸과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직접 경험은 공포와 비애로 각인되나 대를 이어 흐를수록 공포와 비애는 불안으로 죄책감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정서로 각인된다. 불안은 전승될수록 위험한 각인이 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의 이유는 옅어지고 그래서 실체없는 불안의 크기는 더 커지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전라도는 그런 이야기다.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그래서 누군가의 몸에 문신처럼 기록된 역사. 삼대를 흐르며 그 역사가 각각의 개인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조부모의 역사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역사가 소년에게, 소년의 역사가 그의 연인에게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왜 그런지 절대 이유를 모르겠어라고 부모에게, 또는 연인에게 울부짖을 때 그 ‘이유’는 정말 존재하고, 그 이유는 교과서의 역사, 즉 눈에 보이는 역사로부터는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울부짖고 이별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모든 관계망의 기저에 ‘오늘’로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고 그 이야기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의 나와 나의 관계를 이해하는 길인 것이다. 오윤을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오윤이 등장했다. 오윤의 행동들 밑에 그의 불안과 죄책감, 두려움이 존재했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 정서들이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참과 비애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의 등에 켜켜이 축적되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개인과 시대들의 고통이 보였다. 그러고 나니 거리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의 등에 화석처럼 굳은 가족의 역사와 비애를 거북이처럼 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윤을 연민하는 동시에 화석을 이고 있으면서도 등 뒤의 무게감을 알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연민이 일었다. 미시사는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그 나라 전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역사책에 담기지 않았지만 오윤들의 이야기가 많아져야 과거를 현재에 불러올 수 있고, 그래야 오윤들은 오늘의 자신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과거를 만날 수 있다. 살아있는 역사는 개인의 삶에 침투할 수 있는 역사여야 한다. 국가가 기록한 역사, 사이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개인의 서사가 많아질수록 역사는 삶의 길잡이가 되기보다는 박물관의 화석으로 관람될 뿐이다. ‘오윤들’의 이야기는 이찬갑이 말하듯 그래서 위대한 평민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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