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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롯해 꽤 많은 80년대 학번들에게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거의 신화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였다. 마르크스의 어록 하나하나에 감격했으며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사람은 무조건 반동으로 몰아 붙였다. 그리고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일컫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자부심 마저 느꼈었다. 그러나 386 세대 모두에게 결여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실존적 대답이 아니었을까?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멋모르던 1학년때 선배들이 반 강제로 가입시킨 각종 학회에서 하던 세미나를 통해 박사과정에 있는 지금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원전들의 조각들을 스탈린적으로 해석한 교과서를 통해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80년대의 운동권들은 사실 한번쯤 왜 마르크스인가를 잔잔히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지 못했고 따라서 쉽게 받아들인 마르크스를 90년대가 지나면서 쉽게 저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나를 포함한 80년대 출신들의 아픈 과거이고 역사이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우리의 청춘을 앗아갔었고, 이번에는 우리로 부터 버림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살아온 노 학자의 이 진솔하고 잔잔한 고백록을 읽은 뒤 다시 마르크스 저작선을 펼쳐 읽기 시작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수 있었다. 해방을 위한 노력이 실패했을 뿐 억압 자체는 전혀 변화가 없는데, 아니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는데 그 동안 너무 섵불리 마르크스를 죽은 개 취급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던 것이다. 부끄럽게도 자본론 조차 완독한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았던 마르크스는 화석화된 교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속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애정, 자유에의 열망을 느끼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 자유, 이것이야 말로 마르크스의 평생의 화두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더구나 이 책의 최대 매력은 뻐기지 않는 다는 것이다. 뻐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뛰세르나 들뢰즈 등의 저서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 이 책과 함께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에 대해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게 될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굳어진 모든것은 사라진다. |
| 사회주의 혁명시도의 실패이후, 계속적으로 맑시즘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일부는 맑시즘 안에서의 대안들을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현실사회가 너무도 많이 변화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 적용시킬 수 없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맑스의 논의가 우리 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함을, 계급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다지 필요치 않다는 식의 논쟁도 일어났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여전히 맑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맑스에 대해, 그의 사상에 대해 손을 뻗힌다. 그것은 단순히 예전에 사회를 이끌던 하나의 이론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고찰할 만큼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많은 변천에도 불구하고 100여년전에 맑스가 이야기한 것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한 틀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 아버지의 불행했던 삶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한 서점에서 구했던 맑스의 초기 저작에서 저자는 맑스주의 휴머니즘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맑시즘에 대한 경험들과 함께 어우러져, 그로 하여금 평생에 걸쳐 맑시즘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지난 날의 사회주의 혁명에서 보여준, 민중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의 수탈과 착취. 사람들은 그러한 겉모습이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뛰어난 이유로 꼽았고, 맑시즘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본연의 내적 모순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맑스가 이야기 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지난 날의 그릇된 사회 모습에 어떠한 질문도 던지지 못한체, 그저 맑스의 사상을 부정하기에 바뻤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맑스의 사상은 죽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자행되는 자본에 의한 노동자 수탈이 끝날 때 까지 죽을 수 없다. 여전히 그의 사상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팔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지속되어야만 한다. 비록 노동의 유형이 직접적인 몸을 파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사무실에 앉아 무언가를 관리하는 행위로 나타나 혹자는 그것을 '신쁘띠부르조아지'라고 부를지라도.... 자본은 자애로울 수 없었다. 기계를 놀게 하면 그마만큼의 손해가 나고 공장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을 들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그리고 지난 날 그 '노동자'라 불리우는 범주 안에는 희망의 덤불 안에서 끝없이 웃고 뛰놀아야 할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에겐, 그러한 부당함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못한 죄가 있다. 아니, 우리는 그러한 일자리가 있음에 감사하고, 그러한 노동을 함을 행복해 하는 일종의 '허위의식'마저도 있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은 맑시즘의 등장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은, 맑스주의를 필요로 하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
| 내가 이 책을 아는 이로 부터 추천받아 읽기 시작했을 때, 남편은 '미국인이 과연 맑스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라고 중얼거렸다. 나도 약간은 그런 의문을 갖고 독서를 시작했다. 네온사인 번쩍이다에서 자유와 물신숭배까지, 몇개의 챕터를 지나는 동안은 '흐음' 했다. 또 다른 기차를 기다리며에서부터 '오호?'했고, 게오르그 루카치의 거대한 뻔뻔스러움에서는 '와하하' 했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버먼이 묘사한 루카치라는 한 인간의 생생한 모습에 대한 감탄과, 그 비극성에 대한 탄성이었다. 그러니까, 속으로는 조금 찡했던 것이다. 책을 덮을 때, 나는 조금 추위를 느꼈다. 모더니즘의 옷을 입힌 맑스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사회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