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도미닉 크로산이 지은 <예수-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속의 예수는 내가 알고 있던 얕은 지식들과는 그 차원이 매우 다르다. 크로산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신격화(神格化)된 예수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존재로서의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새로이 조명해 보고자 했다. 그는 여기에서 교차 문화적인 인류학(cross-cultural anthropology)적 방법을 도입하여 유대의 역사(Jewish history)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펴보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복음서 속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보다 객관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기 위해 문학적, 혹은 본문적인 (literary or textual) 방향축까지 동원하는 열의를 보이고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비롯한 많은 복음서들이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보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지 않은가 싶을 만큼, 성서 안에서 예수는 지극히 신(神)적인,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예수의 일생은 출생에서부터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실의 왜곡된 해석에서 창작에 가까운 기록에 이르기까지, 상당 부분 신화(神話)화 되었다. 그러나 사실, 예수는 교차-문화적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역사적 인물로 파악하였을 때, 유대인 목수였다. 이는 곧 그가 하층계급에 속하였으며, 문맹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피와 살을 가진 보통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은 한마디로 실천적인 혁명가이다.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무수한 무신론자들이 비판하는 기독교의 모습 중에 하나가 바로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개혁하려 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문제를 도외시한 채, 내세에만 의존하여 현실 개혁의 의지를 꺾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드러난 예수의 모습은 그러한 비판이 무색할 정도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후대의 기독교 내부의 필요에 의해 신격화되었을 뿐이지 역사 속에서 실제의 그의 모습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세례요한과 같은 묵시종말적인 예언자가 아니었으며, 허황된 말만으로 민중을 호도하는 자칭 메시아는 더욱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예수는 무수히 많은 이적을 행한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지만, 실제로 그가 행했던 질병치유와 귀신추방과 같은 행위는 실제적 의미의 의술적 치료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고통의 치유였던 것이다. 예수는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나누는 평등주의를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예수는 치유프로그램을 통해서 후견인과 의뢰인이라는 과정을 부인하였고, 공동식사 프로그램을 통하여 명예와 수치라는 가치의 대조를 부정하였다. 이렇게 예수는 질병과 극빈으로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였으며, 그의 공동식탁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하였다. 후에 예수의 제자들에 의한 선교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수의 치유능력을 받은 그들은 세상을 돌며, 민중의 고통을 치유하면서 그들 안에서 선교를 해 나갔던 것이다. 예수는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관해 논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그것을 다양하고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이를 보여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전하였던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남은 예수는 한 사람의 실천적 지도자의 모습이다. 그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위대한 인물이었다. 비록 전지전능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지라도, 우리를 구원하러 오는 메시아가 아닐지라도, 예수는 역사적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위인이라 이를 만하다. 오히려 후대에 신격화를 통해 왜곡되어 버린 그의 모습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 듯 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신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한사람의 실천적 영웅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오히려 더욱 필요할지도 모르겠다예수-사회적> |
| 오강남 박사가 <예수는 없다="">에서 역설한 것처럼, 단군신화나 흥부전과 같은 은유적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문자근본주의라는 오류이다. 또한 그런 신화들이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근대적 사실근본주의라는 오류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신자들처럼 문자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있거나, 오늘날 대부분의 비기독교인들처럼 사실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 <예수는 없다="">. 그러나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신화의 문자적 사실성이 아니라, 그 신화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신화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신화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크로산의 이 책은 복음서들 속의 신화적 이야기들, 즉 동정녀 탄생이나 기적 이야기들, 부활현현 이야기들이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를 규명함으로써, 그런 신화적 이야기들의 역사적 진실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당시 로마제국의 착취구조와 세계화 전략에 대항하여 식민지 약소민족의 농부였던 예수가 어떻게 그 패거리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전략을 펼쳐나갔는지를 규명함으로써, 당시의 정치군사적 혁명가들, 자칭 메시아들과 반란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사회적 혁명을 전개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독특한 학제간 연구방법론을 통해 현재의 다양한 예수상들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기독교의 초석이 불트만의 <공관복음 전승사="">였다면, 이 책은 21세기 기독교의 초석이 될 책"이라는 조태연 박사의 지적에 찬동한다.공관복음>예수는>예수는> |
| 크로산이 이책전에 지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책이있다. 이책은 그책과 비교해 볼때.. 기독교를 어느정도 알고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것이라 생각된다. '예수는 누구인가'는 질문에 대답형식으로 알기쉽게 만들어져있는 반면 이책은 기독교에 관한 어려운 단어나 개념이 많이 있기때문이다. 크로산은 역사 속에서 실재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복원하고자 한다. 크로산은 예수의 어린 시절부터 차례차례 나아가며 성경에 나와있는 복음서와 도마복음, 그리고 비 기독교인들에 의한 자료를 인용하며 신적 예수의 모습을 벗겨 내고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영웅적인 인물로의 부각을 위한 창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예수의 초월적인 이미지를 그의 임신과 출생에까지 덮어씌우고자 했던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근거를 들어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처녀 출생이나 천사의 등장같은 주변상황이 아니라 예수가 태어난 것이 무엇을, 누구를 위함인가와 관련된 근본적인 고찰이라고 단서를 붙이고 있다. 예수의 등장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예수는 인간으로서 장인에 속하는 하층계급,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유대민족은 로마 식민지로 불평등과 불의가 팽배했고, 당시 하층계급들은 상당한 억압 속에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와 같이 묵시종말적 전통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요한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입장을 취한 반면 예수는 그 반대의 입장으로 하나님나라를 외치며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갔다. 본문에서 크로산은 Q복음의 인용을 통해 '금식하는 요한'과 '잔치하는 예수'를 대조 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을 향해 두 가지를 행한다고 크로산은 얘기한다. 첫째로 예수는 누구나 와서 먹고 마실 수 있는 열린 공동식사를 한다. 이는 식탁을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해 볼 때 예수는 누구나 동등하고 아무차별 없는 그러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급진적 평등주의를 주장했던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는 그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리기도 했다. 둘째로 예수는 무상 치유를 행했다. 성경에는 예수가 나병환자, 앉은뱅이, 장님 같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다고 써있다. 크로산은 이것을 예수는 병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그 병자들을 만지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함으로써 그들을 무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정신 적인 치유를 베풀었다고 해석한다. 예수 당시는 후견인과 의뢰인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계급체제가 있었다고 한다. 예수가 만약 한 장소에서 치유를 행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면 이는 또 하나의 후견인과 의뢰인의 관계가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찾아다녔으며,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는 그 당시의 후견인, 의뢰인 체제의 과정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그의 인격으로 좌우되는 하나님 독점 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의 차원에서 시작해서 식사와 치유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물질적 자원과 영적 자원을 모두가 차별, 구분 없이 계층구조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동체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생활의 한 방식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하나님 나라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줄 수가 있다. 이것은 말과 행동의 조화로써 하나의 생활 방식을 이루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 선교 활동에 있어서 견유학파와 비슷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견유학파나 예수의 선교활동 모두 생각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며 그들의 메시지를 상징화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의복과 장비를 착용했다는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견유학파는 도시에서 개인적인 철학을 따르는 반면, 예수의 선교활동은 그 가르침대로 공동체 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크로산은 책의 마지막 두 개의 장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적 예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가설들이 등장한다. 예수는 왜 죽어야만 했나? 그 당시 지중해 지역은 혈통과 성에 기초한 집단주의를 강조했으며 중추적인 도덕가치들은 후견인과 의뢰인 체제뿐만 아니라 명예와 수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공동식사와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지중해 지역의 중추 도덕가치, 즉 계급구조와 구분과 차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여러 불평등과 억압적인 풍경들을 바라보고 성전에서 분개하여 폭발했다. 이로써 그는 당시 지배층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게 만들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작가는 그 당시 십자가형 받은 사람들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예수도 그들과 같이 매장되지 않고 동물들에 의해 시체가 없어져 버렸을 가능성을 얘기한다. 부활의 기적은 '기억된 역사'가 아니라 '역사화된 예언'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에 의해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예언이나 기록들에 힌트를 얻어 예수의 이야기가 새롭게 기록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 크로산의 해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가 죽고 부활한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는 '살아 있는 예수'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서 지금도 그의 주장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크로산은 더 이상 신적인 존재가 아닌 사회를 변혁시켜보고자 죽음까지 무릅쓰고 실천의 삶을 산 한 인간에 대해서 쓰고자 했다. 그의 책 안에서 예수는 자기에 대한 모든 과장의 옷을 벗어버리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식민지 사회 속에서의 불평등과 부조리, 권력의 계층사회에 공동체적 삶의 실천을 통해 모두가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주장함으로써 사회를 바꾸어 보고자 노력했다. 크로산에게 있어서 예수는 한 시대를 바꾸고자 했던 선구자요 사회적 혁명가인 것이다. 예수는 이책속에서.. 실천하고 먼저 나아갔다. 크로산은 그 예수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