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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사람의 마음이 눈동자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는 『맹자』이루 상 제15장에서 “사람됨을 살피는 데는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눈동자는 그 사람의 악을 감추지 못한다.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속마음을 감출 길이 있겠는가?”라고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눈(目)은 사람의 진심을 감추지 못한다는 믿음은 굳이 맹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눈은 그 사람의 마음을 닮는다’와 ‘눈은 마음의 거울’이란 속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눈(目)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 있다. 어린 시절 눈에 관한 두려움을 갖고 성인이 된 사람이 파멸로 이르는 기괴하고 음울한 과정을 그린 호프만의 단편집 《모래 사나이(2001.09.30. 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 「모래 사나이」에 등장하는 ‘나타나엘’이 바로 그다.
어릴 적 그의 어머니는 밤 9시만 되면 “이제 자러 가거라. 모래 사나이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p.15)”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면 실제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고 그는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무서움을 느꼈다. 엄마, 아빠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도깨비가 잡아간다고 말하는 겁주기 훈육의 일종으로 보였지만 어린 ‘나타나엘’에게는 극복하지 못할 두려움으로 각인되는데, 호기심에 늙은 유모에게 모래 사나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 결정적 원인이다.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인데 자러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와서 눈에 모래를 한줌 뿌린단다.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오면 모래 사나이는 그 눈알을 자루에 넣어 자기 아이들에게 먹이려고 달나라로 돌아가지. 그의 아이들은 둥지에서 사는데 올빼미처럼 끝이 구부러진 부리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의 눈을 쪼아 먹는단다.(p.16)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타나엘은 어린아이답게 결국 호기심에 굴복하고 아버지 방 안에 몰래 숨어들어 모래 사나이를 기다린다. 그런데 모래 사나이는 유모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라 늙은 변호사 ‘코펠리우스’였다. 하지만 코펠리우스의 얼굴에서 눈이 있어야 할 곳에 눈이 없고 끔찍하게 움푹 파인 검은 구멍(p.22)을 발견하고 그가 자신의 눈을 빼앗으려하자 혼절하고 만다. 코펠리우스가 다시 그의 집을 찾은 건 일 년쯤 후였는데 폭발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코펠리우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찾을 수 없었고 나타나엘은 그와 대결하여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를 하기로 결심(p.26)한다.
모래 사나이(코펠리우스)에서 시작된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는 청우계 장수 ‘주세페 코폴라’를 만나면서 봉인이 해제되고 정상적인 삶을 방해받는다. 클라라의 눈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순수한 파란색과 숲과 꽃이 만발한 들판, 온갖 다채롭고 밝은 삶의 풍부한 풍경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루이스델의 호수와 비교(p.37)할 만큼 진실했으며 밝고 솔직하고 천진한 어린아이의 생기 넘치는 환상과 심오하면서도 여성적인 부드러운 심성과 매우 밝고 예리하게 사물을 분별하는 이성(p.38)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타나엘은 클라라의 눈을 통해 (...) 죽음(p.43)을 볼 뿐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눈동자에서 꿈과 희망이 아닌 죽음을 본 나타나엘, 어둡고 침울한 내면에 침잠하는 나타나엘은 이성적인 약혼자 클라라와 점점 멀어진다.
클라라에게서 멀어진 나타나엘이 마음의 안정을 찾은 대상은 물리학 교수 ‘스팔란차니’의 딸 ‘올림피아’다. 나타나엘이 처음 본 올림피아는 눈동자가 도무지 움직이지 않아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마치 눈을 뜬 채 자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려(p.33)움을 느꼈지만 청우계 장수 코폴라에게서 구입한 휴대용 작은 망원경을 통해 올림피아를 본 이후 클라라를 마음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린다.
나타나엘은 처음으로 올림피아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단지 두 눈만은 이상하게도 움직이지 않고 생기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가 망원경으로 더 자세히 보니 올림피아의 눈에 젖은 달빛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시력이 생긴 것 같았다. 그녀의 눈길은 점점 더 생생하게 불타올랐다.(p.50) 그는 올림피아의 매혹적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p.51)
호프만의 단편집 《모래 사나이》의 표제작 「모래 사나이」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나타나엘이 현실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는 진실한 눈을 거부하고 영혼 없는 가짜, 속임수에 매혹당하여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다. 유년시절 정신적 충격으로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되었어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극복할 가능성은 열려있지만 나타나엘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한다. 나타나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광기에 불붙이는 역할을 ‘코펠리우스’와 유사한 이름을 가진 ‘코펠라’라는 인물에게 맡긴 것부터 나타나엘이 절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게 짜여 진 플롯이라고 이해했다. 내면이 분열되어 비극을 맞게 되는 나타나엘의 모습은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상 세계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와 겹쳐서 읽혔고, 나타나엘은 인간보다 생명이 없는 존재를 통해 위안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인물로 보였다. 결국 어두운 내면의 터널에서 탈출하지 못한 나타나엘의 불행이 안쓰럽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끝나 내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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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작가의 얼굴이 조금은 이상스럽게 묘사된 표지의 책, <모래 사나이> 최근 들어 수준 이하의 작품들만을 접하게 되 독서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었었는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 마음이 모래가 흩뿌려지듯 시원하게 날아가고 말았다. 어쩌면 이다지도 섬세한 표현력과 굉장한 상상력으로 글을 쓸 수 있을 지 의문이 들 정도로 문장 하나하나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우리 안에 내재된 내밀한 공포의 존재를 스멀스멀 기어나오게 만들며 그러나 절대 그 과정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또 주인공 당사자들이 당면하게 된 괴기스런 현상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떻게 다음 액션을 취하게 되는지 또 어떻게 자신 속의 두려움과 괴기에 맞대응하게 되는지 너무도 자연스러운 서사구조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 책에 대한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책은 단순한 귀신 이야기가 아니라 초현실적인 현상들이 어떻게 그 시공간적 근거를 가지고 시의적절하게 출현하게 되는지에 대해 매우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으며 한시라도 눈을 떼지 못하지 만드는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고밖엔 말할 수 없다. 탄탄한 구성,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더 빛을 발하는 작가의 문장력, 너무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묘사 등으로 정말 후회없이 읽은 책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번역이 약간 미흡하다는 점, 처음 부분에서는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몇 문장 때문에 쉬이 읽히지 못했지만 번역의 미숙함마저 커버할 정도로 이 작품은 매력있다. 간만에 접한 수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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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대학생 나타나엘은 약혼녀의 오빠 로타르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어릴 적 ‘모래 사나이’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심어졌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나타나엘의 집은 9시만 되면 아버지가 누군가를 맞이하러 방으로 들어가고 어머니는 슬퍼하며 아이들에게 모래 사나이가 잡으러 오니까 얼른 자라고 말한다. 그러다 어느 날, 나타나엘은 유모에게 모래 사나이가 도대체 누구냐 묻게 되고 유모는 이렇게 말한다.
"자러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와서 눈에 모래를 한줌 뿌린단다.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오면 모래 사나이는 그 눈알을 자루에 넣어 자기 아이들에게 먹이려고 달나라로 돌아가지. 그의 아이들은 둥지에 사는데 올빼미처럼 끝이 구부러진 부리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의 눈을 쪼아먹는단다."
그 뒤로 나타나엘의 공포는 더욱 심해졌고 호기심도 더해갔다. 그래서 아버지의 방에 몰래 들어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다가 변호사 코펠리우스와 아버지의 수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그들은 연금술을 하듯 방안에서 무언가 만들고 있었는데, 나타나엘은 눈이 없는 사람 인형을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고 아버지와 코펠리우스에게 들킨다. - 이 소설의 특징이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현실인지 구분하기가 모호하다는 점인데, 나는 ‘모래 사나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나타나엘의 환상이 더 부각되었다고 본다. - 그는 아버지와 코펠리우스에게 틀키자 코펠리우스가 자기를 붙잡고 눈을 뽑아버린다는 말을 듣고 기절한다.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자 그는 코펠리우스가 모래 사나이이며, 그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확신한다.
어린 아이에게 유모의 이야기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모래 사나이 생각에 사로잡혀 현실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상에 사로잡히고 ‘눈’을 뺏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G로 떠났고 편지를 썼을 때는 유명한 물리학 교수 스팔란차니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코펠리우스와 닮은 청우계(기압계) 장수 코폴라가 나타나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그는 코폴라가 코펠리우스라고 생각하여 흥분하며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로타르에게 썼던 편지를 그의 약혼자 클라라가 보게 되고,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코폴라는 코펠리우스가 아니며, 당신의 어릴 적 이야기가 내면에서 두려움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말해준다. 클라라는 밝고 예리하게 사물을 분간하는 이성적인 여성이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적인 클라라에게 코펠리우스가 그의 사랑의 행복을 파괴하리라는 어두운 예감을 주제로 쓴 시를 읽어주었다. ‘그러자 이러한 생각이 불의 동그라미 속으로 세차게 뚫고 들어간 듯, 갑자기 불길이 사그라지고 그 모든 소란은 캄캄한 심연 속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나타나엘은 클라라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클라라의 눈을 통해 그를 다정하게 바라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클라라는 질겁했고, 그의 어두운 예감은 적중한다.
그러다 나타나엘은 물리학 교수가 코폴라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며 지금은 그곳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하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교수의 딸 올림피아를 보게 되는데, 올림피아는 완벽하게 아름다웠으나 마치 눈을 뜬 채 자는 것처럼 생명력이라곤 없었다. 우연히도 나타나엘의 집에서 잘 보이는 앞집에 올림피아가 살고 있었으며, 그는 청우계 장수 코폴라에 의해 망원경을 구입하게 되고 마치 예견된 운명인 듯, 그 망원경으로 올림피아를 훔쳐보며 사랑에 빠진다. 그는 교수의 파티에 초대되어 올림피아를 만날 수 있었고 그녀와 춤도 추며 점점 사랑에 빠졌다. 자신이 그녀의 눈을 바라볼 때면 그녀가 살아난다고 느꼈다.
‘그녀의 눈은 사랑과 동경으로 가득 차 그를 마주 보며 빛났다. 그 순간 차가운 손에서도 맥박이 뛰고 생명의 피가 뜨겁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타나엘의 가슴에서 사랑의 욕망이 더 높이 불탔고 그는 아름다운 올림피아를 감싸안고 날 듯이 춤추며 돌았다.’
이성적인 클라라와 달리 올림피아는 자신의 말을 있는 그대로 경청해주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은 올림피아뿐이며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의 집으로 찾아간 나타나엘은 어릴 적 아버지와 코펠리우스를 목격한 것처럼, 스팔란차니 교수와 코폴라가 왠 여자를 가지고 내놓으라며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 여자가 올림피아란 것을 알고 구하려고 하지만 코폴라가 어깨에 짊어지고 데려가 버린다. 나타나엘은 코폴라의 어깨에 축 늘어진 ‘자동인형’ 올림피아를 보았고, 교수가 땅에 떨어진 올림피아의 피투성이 눈을 자신에게 던지자 발작을 일으킨다. 어디서부터 그의 망상인걸까. 아마도 자동인형을 가져간 것은 현실이고 눈을 던지는 장면은 그의 망상이 시작되는 지점일 것이다. 그는 교수의 목을 조르며 미쳐 날뛰었고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정신을 차려 다시 클라라와 행복한 일상을 꾸려가려 했다. 그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가기 전 클라라와 장터에 갔다가 높은 탑에 올라가게 된다. 그는 무심결에 주머니에 있던 망원경을 꺼냈고 망원경으로 클라라를 보자 발작을 일으키며 그녀를 죽이려 한다. 놀란 로타르가 그녀를 구해 내려갔고 탑에 혼자 남겨져 미쳐 날뛰던 나타나엘은 탑 아래에 자신을 지켜보는 코펠리우스를 발견하고 “그래, 아름다운 눈이야. 아름다운 눈이야.” 하고 외치며 투신 한다.
작가&작품에 관하여
호프만이 독일 낭만주의 시기에 쓴 <모래 사나이>는 후기 낭만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성과 합리성을 내세웠던 계몽주의 시기에 금기시되고 배척되었던 인간의 어두운 내적 요소들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을 낭만주의 문학이라고 한다. 즉 낭만주의 문학에서는 환상적인 세계가 일상의 세계와 통합되며, 인간의 무의식적이고 비합리적인 경험들이 중요한 소재가 된다. <모래 사나이>는 '광기'라는 주제로 계몽주의와 반대되는 비이성적이고 공포스럽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리뷰
<모래 사나이>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모래 사나이, 눈, 자동인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래 사나이'는 어린 아이들에게 심한 공포를 조성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눈'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서 안구 상실에 대한 공포는 작품 전체에 존재한다. 서양에서 눈의 의미는 플라톤 이후 외부세계가 비치는 거울, 즉 '마음의 창' 또는 '영혼의 거울'로써 기능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므로 안구 상실에 대한 공포는 내면과 외부가 정상적으로 소통하기 어려움을 나타낸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마음, 영혼의 상태에 따라 눈으로 비치는 것들도 왜곡되거나 잘못될 수 있다. 나타나엘은 트라우마로 인해 눈의 왜곡 현상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코폴라의 망원경을 산 뒤로 그의 눈은 더욱 왜곡된 세계를 향하고, 올림피아 때문에 내면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만다. 또한 올림피아가 사람이 아니라 '자동인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아예 내면세계까지 무너져 미쳐 날뛰게 된다.
모래 사나이는 이성적으로 현실을 살아가려는 나타나엘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존재다. 클라라와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혼생활은 계몽주의를 닮았다. 올림피아가 나타나엘의 어둡거나 괴상한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도 경청하고 수용해주는 모습은 낭만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나타나엘은 내면의 트라우마(내적요소를 인정하는 낭만주의)를 가진 채 클라라와 평범한 결혼생활(밝고 이성적인 계몽주의 혹은 고전주의)을 하려 하지만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른다. 나타나엘의 투신 자살은 고전주의에 반하는 낭만주의 소설을 완성하는 멋진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내면에 어떤 치유되지 않은 부정적인 요소, 공포나 두려움을 가진 존재가 밝고 이성적인 세상에 부합할 리 없다.
심리학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모래 사나이>가 강렬하게 남을 것이다. 광기, 망상, 트라우마 그리고 성숙되지 않은 어릴 적에 겪은 일들이 일생 전반에 걸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게끔 한다.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즐겨본다면 이 소설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취향에 맞게 선택해서 읽어보시길. 어쨌든 내게는 짧고 강렬한,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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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결말에, 나타나엘은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 비극적인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나타나엘 자신에서 가장 크게 기인한다. 그가 죽음을 택하게 된 두 가지 원인이 있다. 감상적인 천성에서 비롯한 어린 시절 공포의 과도한 해석, 그리고 ‘대학생’이라는, 성인이지만 사회에는 진출하지 못한 애매한 사회적 위치로 인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다. 그의 죽음은 이 원인들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가 얽히어 일어난 결과이다.
나타나엘의 유년 시절 공포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트라우마’ 가 존재하듯 모래 사나이에 대한 공포는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는 모래 사나이라는 실체가 없는 대상을 실체가 있는 코펠리우스와 결부시켜 스스로 공포를 구체화시켰다는 점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우연한 죽음을 공포의 대상인 코펠리우스의 책임으로 돌려 공포와 복수의 감정을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고정시켰고 그것에 스스로 얽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나타나엘에게는 이것이 큰 공포의 기억이고 그로 인해 받는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인정하고 풀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유감스럽게도, 나타나엘은 사회에서 공식적인 자리가 없는 대학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주변에서 존재를 인정받기를 원하며, 나타나엘의 경우 이것이 시와 문학을 의논하고 창작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현실적인 주변 인물들은 그의 과도한 공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로, 클라라는 매우 이성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나타나엘을 사랑하고, 그에게 현실 감각을 일깨워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나타나엘은 그 창을 봉쇄해버린다. 스스로도 모든 공포의 감정을 담은 시를 통해 왜 클라라의 정서에 영향을 주고 싶은지 모른다. 그저 자신의 격한 감정을 공감 받고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추측된다. 나타나엘은 감성적 천성으로 인해 신비하고 환상적인 것을 좇으며, 사회를 제대로 모르기에 현실인식이 부족함에도 자신의 문학적 성향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올림피아는 그의 공포와 감성을 인정해주는 여인이며 그의 모든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아름답고 조용한 낭만의 대상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타나엘은 있는 그대로의 그녀가 아닌 망원경이라는 매개로 그녀를 보며, 올림피아의 눈이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눈에 자신의 생각과 감성, 욕망이 모두 투영되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 낭만적인 존재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현실감각이 뛰어난 나타나엘의 친구 지그문트는 처음부터 눈치채고 그에게 현실로 돌아올 것을 충고한다. 하지만 나타나엘은 시적인 감정은 오직 동일한 감성체계를 가진 사람에게만 펼쳐지는 것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화를 낸다. 그는 성인이고 자신이 시적이며 감성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 깎이지 못한 학생인지라 자신의 수준이 높다고 착각하는 오만함 또한 보인다. 자신의 문학적 소양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성과 논리가 수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이를 받아주는 올림피아에게 사랑을 쏟은 것인데, 막상 그 올림피아조차도 진짜 사람이 아닌, 그토록 혐오하는 ‘생명이 없는’ 기계라는 것을 알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는다. 대학생은 젊고 창조적이기에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으며 그 강렬한 열정은 사회를 움직일 정도의 힘이 있다. 나타나엘의 힘은 감성과 낭만의 열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힘을 사회를 위해 긍정적으로 쓰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가두어버렸다. 자신이 자부심을 가진 과도한 열정을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자 내면으로 힘을 이끌어 도리어 정신을 스스로 불태워버렸고 결국 그것이 나타나엘을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조금만 덜 감상적이었다면, 혹은 사회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가진 감성에 대한 자부심과 능력이 사회에서 다듬어져서 인정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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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기괴하고 몽상적인 내용의 소설이다. 친구는 이 책을 읽고 매일 악몽을 꿀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고 하는데 나는 뭐 그렇지는 않았다.
<모래사나이>,<적막한 집>,<장자상속> 이렇게 세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알수 없는 공포로 부터 시작되고, 한 아름다운 여인에게 주인공이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공통점이있다.
나는 번역체 말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에서 잘 쓰지 않는 형용사라든가 너무 긴 수식 구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
| 낭만주의에는 거부반응이 있어서 구어체라든지 닭스러운 말투의 유럽고시는 절대 사절이었다.교과서에서 배웠음직한 독일 낭만주의 호프만의 시를 기억하고는 있으나 이 책이 그것과 관계있을줄을 몰랐다..이 책은 호프만이 쓴 단편선인데 꿈이나 환상 광기같은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인간 정신의 다른 일면을 심도있게 다룬 그의 작품들은 당시에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낭만주의작가라는 편견을 버리고 본다면 그의 작품은 SF적 요소와 정신분석학적 요소를 두루갖춘 현대소설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정도이다.특히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본다면 꽤 흥미롭게 볼수 있을정도이다.짧은 내용에 비해서 생각한것이 많은 책이었다. |
| 오펜 바하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바로 그 '호프만'일 줄은 전혀 몰랐다. 처음 접한 호프만 작품은 충격적이었다. 이 책에 실려있는 3편의 단편의 사건은 지극히 단순하다. 어릴 적 공포의 대상이었던 사람을 성장해서 다시 만난다거나(「모래 사나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낡은 집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방문한 일(「적막한 집」) 혹은 어떤 외딴 성에서 유령을 만난 것(「장자상속」)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 여운이 남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 때문이다. 항상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느낌, 나를 주시하고 있는 눈동자는 계속해서 인물을 쫓아다닌다. 이런 공포와 광기 속에서 독자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작품 속 '나'를 둘러싼 인물들의 애매함도 이를 부추긴다. 여름밤 으스스함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특히 「모래인간」의 뒷부분을 놓치지 말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