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3)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10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8.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동서양의 신비적 엑스터시!
"동서양의 신비적 엑스터시!" 내용보기
서양 신비주의에 대해서라고는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통해 처음 접한 오컬트화학이나 <<카발라>>가 고작인 나로서는 저자분이 직접 답변을 남긴 어느 분의 리뷰와는 달리 이 책에서 신비주의의 다양성을 읽기보다 동서양 신비주의의 합일점이 느껴졌다. 성찰을 통한 一者Hen와의 합일을 의미하는 고대의 에노시스enosis나, 자신으로 돌아가 신과 만나는 길(티쿤)을 추구하는
"동서양의 신비적 엑스터시!" 내용보기
 서양 신비주의에 대해서라고는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통해 처음 접한 오컬트화학이나 <<카발라>>가 고작인 나로서는 저자분이 직접 답변을 남긴 어느 분의 리뷰와는 달리 이 책에서 신비주의의 다양성을 읽기보다 동서양 신비주의의 합일점이 느껴졌다. 


성찰을 통한 一者Hen와의 합일을 의미하는 고대의 에노시스enosis나, 자신으로 돌아가 신과 만나는 길(티쿤)을 추구하는 샤시디즘, 신이 인간이 되는 과정을 뜻하는 러시아 신비주의의 테오시스를 비롯 기독교의 신비적 죽음이라는 자아의 전적인 포기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신앙적 목표성취등을보라. 자아의 전적인 포기를 통해 절대자와 하나되려는 인도철학적 전통이나 비로자나부처의 여러 모습의 현현이 바로 우리라는 밀교전승, 我相 人相 壽者相 등 자신을 한정짓고 세계를 한정짓는 상을 초월하여 깨달음을 이루려는 불교의 가르침과 무엇 다른가? 
자신으로 돌아가 신과 만난다는 개념이나 인간이 신이 된다는 개념은,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신이라는 측면으로 비약해보자면 동학의 인내천사상과 결코 다른 바를 찾을 수 없으며 진실성을 말한다는 면에서는 불가의 불성론이나 여래장사상과 다름이 아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환희의 절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은 중생들을 두고 차마 열반에 들 수 없어 결코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으신다는 법화경의 부처님 말씀과 전혀 다르지 않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리행을 말하는 것이지 않은가!

금욕적 수행을 통해 자신을 변모 시키려하고 ‘情念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 했다는 것도 요가의 금욕과 권계의 실천을 중시하는 부분이나 ‘브라흐마차리아’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불가나 중국과 한국의 선도仙道 또한 금욕과 계율의 철저한 실천을 필수 사항으로 함은 우리문화에서는 누구에게나 상식이다.

문자와 영혼이 내밀한 상호 관련성이 있다며 성서의 탐구를 통해 하나님께 다가서기를 기도하던 오리게네스의 노력은 지성을 갈고 닦으며 학문의 길을 통해 깨달음내지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한 갸나요가( Jnana Yoga )나 불가의 성문승과 한맥락이다. 
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박티요가와 같고, 침묵과 평정을 중시하는 면은 선불교와 동일하다. 또한 선도에서도 주천보다는 性(심성,본성,불가의 원성실성)을 중시하는 문파도 있다.

하다못해 영세를 통해 정화와 개명을 추구하였다는 것까지도 불가의 관정, 요가의 관정과도 같지 않은가?

유대인의 카발라 철학 역시 만물이 일자로부터 분화하였음을 말한다는 측면에서는 보자면 우리의 천부경이나 불가의 법성게와 동일하고 또 변화를 읽고자 하는 노력이었다는 측면만으로는 극동의 역철학과도 같다.

항상 지속되는 기도, 마음의 기도라는 것 또한 불교의 염불과 도가의 진언, 요가의 만트라와 그저 이름만이 다를 뿐이었다.

이들이 희구하는 신적 차원의 황홀이라는 것도 삼매와 다름 아닌 것이다.

글쎄, 서양신비주의에 대해 일천한 나로서는 동서양신비주의에서 차별성을 읽고자 한다해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완독하고도 정말 의아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비주의적 전통을 간직한 서양이 왜 대중적 종교의 측면에서는 신과 인간을 그토록 철저히도 분리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서양인들로서는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미가 축소된다는 위기의식이라도 느꼈던걸까? 

어쨋건 이 책을 통해 서양의 정신문화를 조금은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서양이 다른 면 만큼이나 합일되는 면모 또한 있음을 새삼 느꼈다.

k****t 2006.12.06.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신비주의의 개관
"신비주의의 개관" 내용보기
신비주의에 관심이 있던 터라 인터넷을 통해 이 책을 만났다. 게르하르트 베어는 이 작은 책을 통하여 유럽 신비주의 전체 흐름을 개관하고 있다. 방대한 신비주의를 한 마디로 정의하거나 정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신비주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각양각색이므로 동일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 여하튼 저자는 신비주의
"신비주의의 개관" 내용보기
신비주의에 관심이 있던 터라 인터넷을 통해 이 책을 만났다. 게르하르트 베어는 이 작은 책을 통하여 유럽 신비주의 전체 흐름을 개관하고 있다. 방대한 신비주의를 한 마디로 정의하거나 정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신비주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각양각색이므로 동일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 여하튼 저자는 신비주의에 관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개서를 제시하고 있어서 보다 심도 깊은 방향을 향해 떠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신비주의는 종교뿐아니라 인간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신비적 요소를 제거한다면 삶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언어와 분석 이전의 내면적 세계를 상실한 현대는 점점 삶의 피폐함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여하튼 신비주의의 계보와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기쁜일이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 책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적, 혹은 신학적 용어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여러군데서 발견되는 어색함이 있었지만 특별이 255쪽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서를 /그리스도의 후예/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책의 원본을 본인이 가지고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의 원래 라틴어의 제목을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미 이 책은 너무나 잘 알려진 기독교적 고전인데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아 매우 눈에 거슬린다. 다른 여러 군데에서도 라틴어 번역이나 기독교적 용어로 번역하는데 매끄럽지 못하거나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번역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았음한다. 재판을 찍을 기회가 있다면 이런 부분에 세심한 신경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리뷰 총점 종이책
신의 체험
"신의 체험" 내용보기
초월자란 무엇인가? 초월자란, 눈에 보이는 우리의 삶을 전개해 가는 진정한 주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 밖의 존재이다. 이것은 다소 개념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일 것이다. 유럽의 정신사에서 초월자 혹은 궁극적 실재의 이름은 자주 바뀌어 왔다. 하지만 그 이름(외연)은 달랐을 지언정 뜻하는 바(내포)는 항상 같았던 게 아닐까. 그 이름들 가운데 가장 대
"신의 체험" 내용보기
초월자란 무엇인가? 초월자란, 눈에 보이는 우리의 삶을 전개해 가는 진정한 주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 밖의 존재이다. 이것은 다소 개념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일 것이다. 유럽의 정신사에서 초월자 혹은 궁극적 실재의 이름은 자주 바뀌어 왔다. 하지만 그 이름(외연)은 달랐을 지언정 뜻하는 바(내포)는 항상 같았던 게 아닐까. 그 이름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에 관한 학문은 신학이고, 신의 체험은 바로 신비체험이다. 이 책은, 신비에 관해 신학과 신비체험가들이 알고 있었던 바를 몇 가지 핵심개념으로 추슬러 접근하는, 뛰어난 개론서이다. 개론서이지만, 그 내용이 쉽지만은 않다. 솔직히, 이미 은총을 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은총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중세 어느 신학자/교부의 말이 떠오를 만큼... 항상 어떤 체험을 이해할 듯 말 듯, 하면서도, 어느 만큼은 그 느낌을 예감하는 것 같다. 굳이 신이라고, 기독교의, 외부에서 전래된 이름으로 부를 것은 없다, 신비체험에서는 저자가 말하듯, 모든 형상이 해체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기독교적 신비체험에 관해 관심있는 분들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신비주의의 본질적 요소라 할만한 영적 체험이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일방적으로 교리를 추종하지 않고 체험에 기반한 신성神聖의 인식이라는 길을 알고 있었다. 아달베르트 게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비체험은 언제나 헌신적인 내면화와 결부되어 있다. 이는 종종 무력감을 체험하는 고통스러움에서 발생된 것이다. 신비체험은,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들이 제의와 주도면밀한 사고체계를 통해서 혹은 교회의 제도화된 경건성으로 오히려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신성체험을 가로막으면서도 막상 개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종교가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던 그런 때였다. 오히려 영적으로 빈곤한 시대마다 오히려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신비주의의 발현은 결코 위기를 가중시키는 일 없이, 유럽 기독교사에서 볼 수 있듯이 기성 종교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용을 했다.
k******6 2001.10.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