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석에 대한 입장은 거칠게 말해 작가주의, 독자주의, 절충주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너무 거친 구분인 듯 하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작품을 지은 작가에 대해(만일 그가 생존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엄밀히 작가주의적 경향을 가진다해도, 어쩌면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기보다는 내 자신의 의견에 불과한 해석을 마치 작가의 의도인양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다고 해도, 그래서 우리가 그에게 우리가 분석한 작품의 의도에대해 그가 승인했다고 해도, 어쩌면 우리는 그 작가도 잘 알지못하는 작가자신의 무의식에 해당하는 작품경향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작가의 승인이 독자를 기만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주의는 어떠한가? 독자주의? 정말 엄밀한 독자주의는 있을까? 나는 텍스트가 있는 이상 독자주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작가가 의도한 작품의 의도보다 더 많은 정보와 의미를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침윤되어 있는 생활세계의 편린이어서 우리에게 특정한 한계를 벗어난 해석을 가져다 주지 않는 넓은 의미의 제한성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본다. 즉, 엄밀한 독자주의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 이제 남은 것은 절충주의이다. 역사라는 하나의 큰 줄기 안에서 텍스트의 전통과 관련한 해석의 드러남! 이것은 계속적인 텍스트의 의미해석, 해석의 창조로 드러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덕이'라고 하는 텔레비전 프로가 있는데, 이것은 거칠게 말해서 현대판 콩쥐밭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덕이'라는 프로가 아마 절충주의라는 경향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 장애를 일으킨다. 즉 보수주의, 전통의 승리라는..... 그래서 이것은 어쩌면 토마스 쿤이 얘기했던 패러다임 전이와 같은 혁명적 전환에 대한 설명에는 그 힘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결국 전통에 대한 우위라는 보수성에 머물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파시즘과 합칠 때에는 정말 두려운 사고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의 대표자가 하이데거의 줄기에 머물러 있는 가다머가 아닐까? 여기서는 이런 세가지 입장을 대변해주는 불트만 에벨링, 푹스, 베티, 허쉬, 가다머, 아스트 볼프,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등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것은 불트만과 계속적으로 전통과 반성으로 논쟁을 해왔던 하버마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운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개론서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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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하이데거와 가디머의 책 선전으로..
자긴 소개만 할 뿐이니 그 사람들 책 직접 사보라는 얘기밖에 더했나..
225 하이데거는 인간이 언어를 창안했다고 하는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라고 천명한다. 인간은 언어를 창안할 수 없다. 인간이 어덯게 자기 자신을 존재케 해주는 능력을 창안할 수 있는가. 심지어 이름을 짓는 시적인 행위조차도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인 것이다
228 사유는 인간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를 언어 사건으로서 드러나게 하는 행위이다.
359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독자가 일방적으로 텍스트에 질문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 그 배후에 있는 물음, 즉 그 텍스트를 존재케 해주는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해석 해석학은 결국 신을 인정하라는 학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