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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변증법이 다루지 않는 것 ? 주인들의 사회를 결합할 수 있는 연대의 결여는 오래 전에 지적되었다 - 때문에 그를 비판하지 않고서, 나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볼 때 [그 변증법에서] 명백히 증상적인 것으로, 즉 억압의 표지로서, 내게 강렬한 충격을 던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은 정확히 이성의 간계라는 주제인데, 그것의 유혹은 위에서 지적한 오류 때문에 줄어들지 않는다. 헤겔이 말하듯이, 노예가 죽음의 공포에서 주이상스를 포기하면서 수용하는 노동이 바로 노예가 자유를 성취하는 길이다. 정치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이보다 더 명백한 미끼(lure)는 있을 수 없다. 주이상스는 노예에서 쉽게 오고, 주이상스는 노동을 노예의 것으로 둔다(elle laissera le travail serf). 이성의 간교는, 지식인들에게 드물지 않는 구조라고 밝혀진, 강박증자의 잘 알려진 개인적인 신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유혹적이다. 그러나 심지어 그 범주에 속하는 어떤 이가 교수의 나쁜 믿음(la mauvaise foi du professeur)을 피할지라도, 노동이 그에게 주이상스에 접근하도록 허용할 것이라고 그 자신을 쉽게 속일 수는 없다. 헤겔이 쓴 이야기에 진정으로 무의식적인 헌사를 바침으로써, 그는 종종 주인의 죽음에서 그의 알리바이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그가 하는가]? 그는 단순히 [그의 죽음을] 기다린다. 사실상, “자기 의식”에게 죽음은 단지 농담일 뿐인데, 그는 [자기-의식에서] 모든 위험, 특히 마상 창 시합의 위험을 제거하면서, [스스로] 차지하는 대타자의 자리에서 [바로 거기서] 게임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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