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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의 『사십세』는 사회 현실과의 팽팽한 대결을 늦추지 않으면서 그것을 일관되고 선명한 주제 의식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진중함을 지니고 있다. 반면 주제를 드러내는 방법상의 문제, 즉 소설 기법의 측면에 있어서는 진부함과 도식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남희 소설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작중 인물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남희가 제시하는 해답은 자기 성찰을 통한 내면 독백의 형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80년대라는 이념적 공간에서 젊음을 보낸 작가는 지난 세월을 되돌아가고 싶은 향수로 회고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이남희 소설은 90년대 초반의 후일담 소설과 구별된다.
젊음의 패기와 열망이 사그라든, "이미 썰물처럼 분노가 빠져나가고 무기력해지고 있는 중"인(「세상 끝의 골목들」) 사십대의 내적 자아가 마주 대하고 있는 현실은 이념의 중심이 상실된 채 다원화된 욕망들이 표류하는 세기말이다. 이와 같은 현실 공간을 지배하는 논리는 '생활'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이젠 정치적 가십조차도 관심 밖이었다. 주로 돈 문제나 남편, 아이 자랑, 시집 식구에 대한 불평들. 예전엔 역사와 인생을 논했던 그들은 이젠 오로지 자식과 차종과 아파트 평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세상 끝의 골목들」) 라는 서술에서 드러나듯이 중년이 바라보는 세상사의 잣대란 사회적인 대의보다는 개인적인 사소함에 있다. 그러나 이남희는 개인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욕망이 해소된다 하더라도 사십세가 결코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남희 소설의 작중인물이 맞는 사십세는 동양적 의미의 불혹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제서야 제대로 이립(而立)하고자 하는 인물들이기에 그들에게는 방황과 시련이 따른다. 그러나 그들의 방황과 시련은 치기어림의 가벼움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이제 이남희 소설에 드러난 기법상의 문제점을 살펴 보자. 우선 서술 방식의 문제점을 짚어보아야 하겠다. 이남희는 서술 방식에 있어서 요약 서술을 즐겨 사용한다. 소설의 서술 방식에 있어서 요약 서술(telling)과 장면 제시(showing)는 각각 그 나름의 기능을 한다. 사건 진행을 신속히 보고함으로써 정보의 양적 밀도를 높이는 요약 서술은 단편 소설보다는 장편 소설 특히 역사 소설에 적합한 서술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남희의 단편 소설에서는 작자의 목소리가 많이 투영된 요약 서술이 자주 나타난다. 특히 「찬성과 반대 사이」가 그러하다. 작가는 '그'가 지닌 '본질주의'적 성향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의 방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화에서도 서술자의 평가나 인식을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은 작가에 의해 창조된 것이므로 어느 정도 작가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인물의 삶은 개성적인 것으로 살아 숨쉬어야 한다고 할 때, 이남희 소설의 인물 특히 「찬성과 반대 사이」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작자의 손에 의해 지배당함으로 인해 소설적 재미를 상실하고 있다. 단편 소설의 미학은 정보의 양적 밀도에 있다기 보다는 정보의 질적 밀도에 있다고 생각된다. 만약 이남희의 단편 소설이 이야기 정황의 생생한 재현으로, 한정된 단위를 세밀히 묘사하는 장면 제시의 방법을 구사했더라면 좀더 독자의 흥미를 오래도록 끌고 갈 수 있는 힘을 얻지 않았을까.
두 번째로 단편적인 의미를 지닌 소재들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먼저 영화의 차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십세」의 서두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러 갔다. 「동사서독(東邪西毒)」이라는 제목이었다." 라는 서술로 출발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화 이야기 혹은 다른 장르에서 영화의 이야기나 이미지를 빌려오는 것은 이젠 보편적인 일이지만, 그것이 과연 장르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생겨나는 탈장르의 가능성을 획득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이남희는 「사십세」에서 「동사서독」을 「세상 끝의 골목들」에서「장미의 이름」이라는 영화 이미지를 빌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남희 소설에서 나타난 영화의 이미지는 표현의 적절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사십세」의 경우 영화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은 "영화관을 나설 때 내게 남은 것은 끝없이 물결치는 사막의 무늬 뿐이었다."는 서술을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세상 끝의 골목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수도사가 주는 중세적 이미지의 유사성을 「장미의 이름」과 관련시키는데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단편적인 의미를 지닌 소재 차용은 조선일보 사설과 한겨레신문 사설의 논쟁에서 대표적으로 반영된다. 「사십세」에서 작가는 '나'의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차이를 나타내는 소재로 신문 사설을 이용하고 있다. "80년대 이후로 아버지는 앵무새처럼 조선일보 사설을 외우다시피 해왔다"면 '나'는 "한겨레신문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버지' 세대와 결코 쉽게 화해할 수 없음의 단적인 예로 한겨레신문 사설과 조선일보 사설의 대결구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소재 차원의 대조가 각 세대간의 차이를 얼마만큼 설득력 있게 담보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이남희가 선택한 방식에는 문제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것으로 '아버지'와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인식하면서 "단지 이해하려는 간절함을 지니고 싶을 뿐"이라는 절박함이 신문 사설의 논쟁 구도에서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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