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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블룸의 『선악의 진화 심리학』에 대한 리뷰를 썼지만(http://blog.yes24.com/document/8508159), 또 하나의 리뷰를 쓴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이지만, 전혀 두 가지의 다른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폴 블룸의 인간 도덕성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이 책을 번역한 이덕하씨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이 리뷰는 폴 블룸이 쓴 책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번역가 이덕하 씨의 번역에 대한 것이다. (책 내용과 번역을 따로 분리해서 보고 평할 수 밖에 없다)
이덕하씨가 자신의 블로그(http://cafe.naver.com/evopsy2014)에서도
밝혔듯이 참으로 요란스런 역자 후기를 남기고 있다: “한국 번역계에 대한 항의”. 우선 지금까지 나온 과학 관련 서적의 번역에 오역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뭐,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다. 안
그렇겠는가? 그리고, 번역은 가독성중심 번역보다 원문중심 번역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것도 인정한다. 번역 스타일의 문제며, 순서를 따지자면 그것을 먼저 배우는 것이 맞기도 한 것 같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 책을 번역 교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런데 이 책이 과연 번역 교본으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우선 스스로 오역을 10개 이하에 도전하겠다고 하고 있다. 원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오역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그것을 찾아내겠다고 나설 이유도 없고, 시간도 없다. 또한
그럴 능력도 없다. (아주 쉽게 찾은 것은 있다. ‘후박사
연구원’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런 말은 없다. ‘박사후 연구원’이지.
p.244))
그런데 오역을 줄이는 방편, 혹은 번역 교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쓴 방법이 좀 그렇다. 애매한 번역 부분에 영어를 병기하고, 또
다른 번역 용어를 쓰는 것이나, 역자 주에 이것은 이런 의미로 쓴 것 같기도 하고 저런 의미를 쓴 것
같기도 하다는 식으로 쓰는 것이나, 우리말로 번역해 놓고는 그 원문을 역자 주에 그대로 써놓는 것을
통해서 오역을 줄이겠다고 하는 것은 좀 반칙이지 싶다. 또한 영어의 오자를 지적하고는 다른 단어의 오자로
보인다며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정말로 그런 것인지 확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번역문을 읽는 데 큰 애로는 없었다. 번역 때문에 완전히 책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지만 이 책의 번역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번역에 들인 이덕하 씨의 노력은 인정한다. 그런데, 이
책의 번역을 통해서 ‘번역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줄 만큼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그가 오역을 피하는 방법은 (그렇게 밖에 보여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전혀 매끄럽지 않으며, 독자에게 부담을 주는 방식이다. 오만하게 보이며, 반감만 살 뿐이다. 아무리 그가 주장하는 게 옳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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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심리학은 그 강력한 설명력 때문에 오히려 비판을 받는다. 진화 심리학은 인간이나 동물을 비롯한 생명체의 모든 행동을 사후적으로 (ad hoc) 진화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는 만능 도구처럼 보인다. 그래서 실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늘 그런 것이니), 그런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또한 과도한 설명의 힘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남녀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진화 심리학은 그럴싸함 때문에 종종 남용되고, 또 반발을 가져온다. 그래서 진화 심리학은 오히려 호사가들의 그럴 듯한 이야기 소재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고, 진지한 과학의 분야에서 제외되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진화 심리학은 과학도 아니라는 식의, 혹은 성차별주의, 나아가 인종주의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동의를 할 수 없다. 진화학의 한 분과로서 진화 심리학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를 이해하기 위한 한 분과이며, 종종 정교한 실험적 장치를 통해서 가설을 입증하는, 과학의 방법론을 버리지 않으며, 그 결과가 성차별이나 인종주의로 나아가지 않는 결과가 더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연구 결과에 대해서 언론이나 대중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접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 내부에서도 치열한 토론을 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 』의 저자이자, 엣지(www.edge.org)의 주요 멤버인 폴 블룸은 인간의 도덕성(즉, 선악)을 이해하기 위해 주로 아기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 방법, 혹은 해석 방법은 당연히 진화 심리학이다(달리 무엇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덕성은 참 어려운 주제이다. 옳은 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생각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울 것인가 싶지만, 그 옳은 것만을 행하지도 못하고, 분명히 그르다 여겨지는 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도덕성이 과연 어떤 것인지 헷갈린다. 또한 과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남들도 옳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답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도덕성은 쉽지 않은 주제다. 나아가 옳고 그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사회에 대한 인식 능력이 생기고 난 후부터 갖추게 되는 것인지(즉, 후천적인 것인지) 역시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아기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아기들은 자신들이 생각을 (거의)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아기가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되는지 알기란 참 어려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진화 심리학은 그 주제에 도전한다. 그래서 여러 방법을 고안하고(이를 테면 아기들이 얼마나 시선을 오래 멈추는지 등을 측정한다거나), 각종 대상과 각종 사례들을 통해서 인류의 도덕성의 기원을 찾고자 노력한다. 그 성과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게 바로 이 책이다.
폴 블룸은 도덕성을 나누고 있다. 즉 생물학적 적응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인형을 같은 수로 가지고 논다든가 하는 공평성은 생물학적 적응으로 보이지만, 근친상간이나, 동성애, 수간 등을 향한 도덕적 분노는 생물학적 적응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 그런 행동을 하더라도 어떤 생물학적 이득도 없으며, 그런 비난을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더 성공적인 증거도 없다. 즉, 생물학적 우연이라는 얘기다. 다른 생물학적 적응에 결합되어 나온 것이고, 그것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반응하게 되면서 고착화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기를 통해서 도덕성을 보았을 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낯선 사람을 인식하는 기준이 달라지거나 하는 것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기는 대체로는 사회적 활동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시기로 도덕성이 대체로 선천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는 어떤 맹아(萌芽)일 뿐, 분명한 것은 아니며 사회적인 접촉을 통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폴 블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구분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출발하지만, 구분을 정확히 어떻게 할지 알려주는 것은 환경이다.” (138쪽)
가장 재미있거나 새로운 부분은 ‘역겨움’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5장이다. 이 5장의 제목이 ‘몸’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역겨움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나와 남, 우리와 타 집단을 구분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더 심도 깊게 연구해야 하는 주제가 아닌가 싶다. 이 역겨움의 대상이나 정도가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을 볼 때, 도덕성의 근저에 역겨움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그것의 발현은 환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종주의나 동성애에 대한 혐오 같은 것은, 무엇에 대한 혐오라는 점에서 생물학적이지만, 그것이 다른 인종을 향한 것이라거나 동성애자를 향한 것이라거나 하는 것은 생물학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했을 대 진화 심리학은 오용(誤用)될 수 있는 여지가 많지만, 정확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도덕적 존재다. 요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살해에 대한 뉴스가 뒤덮고 있어서 그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한 우리는 분명 도덕적 존재다. 그 도덕성이 어디서 오는지(인간 본성이라는 점)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할수록 더 도덕적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지만,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하지는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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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자마자 구입해서 바로 읽은 책. 번역가가 이덕하 씨라 관심이 더 끌린것도 사실이다. 나도 몇 년 동안 번역을 해왔지만, 과학번역에서는 그를 따라갈 자가 아직 없어보인다. 그리고 번역에 대한 그의 성실하고 꼼꼼한 태도는 본받을만 하다.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밤을 새게 만든 이 책은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에 대한 해묵은 논쟁, 그러나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인간 도덕성에 대한 궁금증을 마치 외과의사가 수술실에서 집도하듯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미와 깊이가 살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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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 폴 블룸 선악의 판단은 원래 있는것인가 아니면 태어나서 갖게 되는것인가? 성선설, 성악설 등 인간의 선악에 대한 기준은 많은 논란과 이야기의 중심 과제 였다. 이 책을 통해서 선악에 대한 판단이 아기때부터 있어 왔다는 모습을 조금? 많이 보여주는것 같다. 이 책을 읽기전에는 궁금했었다.선악에 대한 판단 또는 도덕이라는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있는것인가? 과연 아기부터 그런 판단 기준이 있는것인가? 아니면 그냥 태어나면서 자동으로 갖추고 있는 것인가? 그런 궁금증에 대해서 어느정도 판단의 기준을 제공해주어서 재미있게 읽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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