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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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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된 역사서를 따진다면 우리나라는 풍요와 빈곤을 왔다갔다한다.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은 동시대의 역사를 동시대인이, 방대하고, 세세한 기록까지 남기고 있는 반면에-조선왕조실록은 중국통사보다도 더 분량이 많다고한다.- , 삼국시대의 역사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삼국시대가 종결된지 500여년이 지난후인 고려시대 중기에 쓰여진 삼국사기에 의존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전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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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된 역사서를 따진다면 우리나라는 풍요와 빈곤을 왔다갔다한다.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은 동시대의 역사를 동시대인이, 방대하고, 세세한 기록까지 남기고 있는 반면에-조선왕조실록은 중국통사보다도 더 분량이 많다고한다.- , 삼국시대의 역사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삼국시대가 종결된지 500여년이 지난후인 고려시대 중기에 쓰여진 삼국사기에 의존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전은 우리가 자체적으로 남긴 기록보다는 위지동이전이나 한서지리지 같은 중국사서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삼국시대에 대한 사서가 부족하여, 삼국시대를 이해하는데 각종 금석문이라든지, 고고학적 유물들이 활발이 이용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데 학자들마다의 분석이 틀려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하다. 그래서 그런지 난 어느시대보다도 더 삼국시대에 관심과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그 결과 또하나의 삼국시대 서적을 사보게 된 것이다.
 
 고대사의 매니아로서, 기성 사학계에 대한 불만은 ‘왜(倭)’라는 존재가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광개토대왕비에도 상당한 비중으로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를 애써 무시 하고 있다는 것과 삼국시대와 거의 동시대에 쓰여진 일본서기의 기록을 우리에게 유리한 것들만 가져오고 불리한 것들은 위서라며 부정하는 2중적인 태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매니아로서도 제기할 수 있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속시원히 해답을 제시한 고대사관련 서적도 드물었다.

 

  이런면에서 볼때 이 책은 가장 우리의 고대사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정직하게 서술해 놓은 책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고 일본서기가 한국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상당히 정직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각자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 삼국간에는 동족의식이 생기기 힘들었으며, 동족의식은 당나라와 항쟁중에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포섭하는 과정에 만들어졌다는 점, 백제시대의 역사서라는 서기가 역사서가 아닐지도 모르는점, 삼국사기에의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서술차이에 대한 의문점이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인해 완전히 해소되고 있다는 점, 왜 그렇게 신라의 왕들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점등,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모순점들을 지적해주고, 미쳐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일깨워주는등 흥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단지 아쉬운점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도 진본이었으면하고 바라는 ‘화랑세기’에 대해서 위서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사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의문부호가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통합이니 통일이라는 문제에대해서 우리가 획일적인 문화를 공유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통합이나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이 아니라, 개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합이나 통일을 위해서 구성원간의 화합과 조화를 중시해야 하고 공도의 가치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이 요구되는 때이다. 이이말로 지방분권 지방자치시대를 위한 역사학이 갖추어야 할 관점이다.

d********u 2008.07.2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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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를 대하는 객관적이고도 새로운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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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역사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밝히며 역사적 사실은 사료나 유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시작하고 있는 책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통념적으로 당연시 하던 우리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여러 시각에서 볼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고대 삼국은 말이 통하였는가라는 흥미로운 주제부터 신라는 당초 삼국을 통일할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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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역사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밝히며 역사적 사실은 사료나 유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시작하고 있는 책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통념적으로 당연시 하던 우리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여러 시각에서 볼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고대 삼국은 말이 통하였는가라는 흥미로운 주제부터 신라는 당초 삼국을 통일할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김춘추의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한 것에서 시초가 되었다는 것을 흥미롭게 제시해 주고 있다. 또 지은이의 전공분야인 일본서기의 기록을 우리의 입맛대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의 기록과 함께 비교, 검증함으로써 더 명확한 역사적 진실을 가려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용중에는 가야의 원래 이름이 각 소국마다 따로 있었고 또한 원래 加耶가 아니라 加羅이었지만 신라와 같은 용어에 대한 반감에 따른 거부감으로 사용치 않게 된 후삼국시대 이후의 인식을 반영한 결과라는 이야기도 귀담아 들을만 하다. 그리고 왕인을 미롯한 오경박사가 백제인이 아니라 사실은 백제에 파견된 양나라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은 이 책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일본 성씨가 대부분 2자인 것이 백제의 영향이었다는 것과 해외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을 것이라는 세간의 주장이 지나친 것이라는 주장들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지은이의 맺음말처럼 침략당한 역사, 동족끼리 싸운 역사, 군사정권시대의 암울했던 과거의 역사에서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배워야 할 지를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우리가 곰곰히 그리고 냉철히 고민해야 할 지엄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는 진실로 우리에게 있었던 생생한 과거가 필요하다. 실속없는 종합선물의 포장이나 백화점의 리본으로 감싼 역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랑스러웠다면 자랑스러운 대로, 어려웠다면 어려운 대로 우리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었다면 우리의 조상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느끼고,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는가는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한 찬란한 문화와 그 문화를 일으킨 조상들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 후손인가를 자기 자신부터 살펴볼 일이다. 나도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아야겠다.  (342~343쪽 중에서)

m*******e 2010.01.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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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았던삼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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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왕국의 풍경, 그리고 새로운 시선. 이 근우 지음, 2006.11.27 인물과 사상사 刊. 부경대 사학과 부교수로 있는 이 근우 씨의 ‘고대사‘를 보는 색다른 시선의 모음집이다. 2007년 봄이다. 입춘이 지났고 氣象도 溫和하다. 시내에 나갔다. 종로거리를 걷다동아일보 구옥을 지나,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질러 서울시립역사박물관에 들어갔다. 애초 고구려시대에 석판에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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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왕국의 풍경, 그리고 새로운 시선.

이 근우 지음, 2006.11.27 인물과 사상사 刊.


부경대 사학과 부교수로 있는 이 근우 씨의 ‘고대사‘를 보는 색다른 시선의 모음집이다.


2007년 봄이다. 입춘이 지났고 氣象도 溫和하다. 시내에 나갔다. 종로거리를 걷다동아일보 구옥을 지나,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질러 서울시립역사박물관에 들어갔다. 애초 고구려시대에 석판에 새겼다 전란중에 대동강에 빠져버렸다는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방성’도 같은 천문도를 전시하고 있다. 밤하늘을 별을 세필로 촘촘히 그 이름을 적어두고, 은하수까지도 마치 한강수 물 흐르듯 정성스럽게 그려놓고 있다. 가만히 치어다보고 있으면 ‘북극성, 북두칠성, 남두육성, 견우성, 직녀성’같은 별들이 깨알 같은 전구를 통하여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이 꼭 야외의 산마루에 누워 별밤을 올려다보는 듯한 아득함을 안겨준다.


그렇고.. 최근에 읽은 고대사 관련 서적들은 새로운 시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점이 신선하다. ‘전쟁의 발견’도 그랬고. 공통적으로 ‘상상력‘의 필요를 강조하고 있는 데, 事記, 書紀류의 축자적 해석만으로는 더 이상 오갈 데 없고, 사료 자체에 작위적 손질의 흔적이 역력한 경우, 결국 그 이면해석의 정확성, 합리성은 연구자 개개의 ’사고반경’의 크기에 좌우될 수 밖 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단정적일 수 없는 부분은 다양한 가능성의 존재를 밝히고 독자의 이해를 구하면 될 것이고 우연이 지배한 사건의 경우에도 전후관계의 소상한 설명을 통하면 저자와 역자는 어느순간 무심결에 ‘相通’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想像力’에 동의한다. ‘이메지나티브‘다.


다음은 개략


1. 불교와 기독교는 심령적 착취도구로 기능했다(한다).

“王卽佛”사상 과 기독교가 요구하는 ‘극락정토’=‘영생’에 대한 믿음은 결국 현세의 고통은 어떤 연유로든 ‘땅란~더’이고 ‘시키는 대로’ 참고 지내면 ‘성불’하는 것이니 ‘까라면 까라’는 것과 다름없지 않는가?


2. 삼국은 원래 다른 종족.


북방기마족, 남방농경족은 당시의 지리적 거리에 비추어 봐도 달라도 한참 다른 족속들이고 말(言語)이고 문화고 같을 이유가 없다. 애초에 별종들이었고 서로를 오랑캐로 비천시 하다 수천년 세월을 통해 동화되고 동질화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울 따름.


3. ‘삼국통일’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 Unintended consequence?

p.73 

(삼국사기)

642년8월, 백제장군 ‘윤충‘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等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 전투를 보복하려하여,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듣고 기둥에 기대어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못하였다. 한참이 지나 “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적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 딸“.


신라의 골품제도상 ‘眞骨’로서의 춘추는 왕이 될 수 없었으나, 결국에는 ‘태종무열왕’이 되고 삼국통일의 기념비적 역사를 이룬 제왕으로 역사에 남았다.


그의 백제멸망에 대한 강한 집념은 ‘딸, 고타랑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서 발로된 것으로 그것은 삼국통일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는 주장.


백제함락후, 당은 다시 북방으로부터 고구려를 치고, 신라에 대하여도 후방에서 고구려를 치라고 종용하지만 김유신과 김춘추의 신라조정은 그에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연개소문이후 그의 세 아들 간 내분으로 인한 자중지란으로 멸망하게 되고, 결국 통일된 한반도의 북방 대부분은 ‘당’의 차지가 되어버린다. 당은 백제지역에 “熊津都督府”를, 고구려 땅에는 “安東都護府”를 설치한다. 이어 벌어진 7년간의 나당전쟁은 경기도 연천 매소성 전투를 끝으로 20만 당 주둔군의 패퇴, 철군으로 막을 내린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도 우리가 오합지졸을 칭할 때 ‘당나라 군대’라며 멸시하는 발언은 아마도 신라군의 대당항쟁의 경험에서 나와 각인된 민족적 프라이드 또는 프로퍼간다일지도 모르겠다.

  

의자왕이 대야성을 함락시키되, “춘추의 딸”을 경주로 돌려보내기만 했어도.      사비성 함락후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 장안까지 끌려가 이국 땅에서 죽어갔다.



4. 백제는 왜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칠지도를 주고 받은 이유는 쌍방의 존재를 필요로 한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기인한다. 고구려에 항시 위협을 받아온 백제로서는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그 대상은 이전부터 친밀한 교류관계를 맺어온 ‘왜’일 수 밖에 없었다.


5. 백제가 문화적 선진국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백제가 왜에 파견한 오경박사, 역박사는 사실 백제인이 아니라 양나라 학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무령왕령 고분의 축조양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구운 벽돌이나 엽전, 진묘수의 존재로 볼 때, 양나라 기술자들이 축조해준 것일 수도 있다.


등등.


ㅈㅣㄴ 

h*****m 2007.03.0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