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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은 종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종교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종교 그 자체를 부인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지 않으면 인류의 불행과 관련된 문제가 덜 하거나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변치 않는 탐욕과 그 수위를 경계한다. 많은 종교들도 이와 비슷한 윤리관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많은 불행이 종교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가 있기 때문에 인류는 불행한가. 종교가 없다면 9·11테러(2001년), 런던 폭탄테러(2005년), 십자군(1095~1270년), 세일럼(Salem)에서 있었던 마녀 사냥(1692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1948년 이후) 등등 그런 끔직한 일이 없었을까. 그런 사건은 단순히 기독교와 무슬림이란 종교적 갈등이 원인인가. 사람들은 착각하는 것 같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불행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탐욕을 정화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지 인간의 복수와 불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은 아니다. 그나마 윤리적인 종교가 없다면 인류가 어떻게 정치, 신념, 민족, 목표가 각기 다른 가운데 연합과 소통을 도모할 꿈을 꿀 수 있을까. 종교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위로와 두려움의 해소를 소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을 달래기 위해 찾는 윤리적인 종교야말로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 ‘신은 없다’ 하는 사람들은 종교의 무용성, 현혹된 이성의 무지를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신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신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종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결코 뿌리 뽑을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한 논증, 확고한 신념, 첨단 과학으로 신과 종교를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일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논증의 주제는 ‘신 존재 증명’보다도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신학의 본질이나 특징이어야 한다. 한 종교가 갖고 있는 신학과 교리에 근거하여 형성된 그 종교적 특징과 정체성이야 말로 인류 불행의 근원이 종교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한 타탕한 변증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비갠(BeGan)이 웰스의 「신학 실종」을 함께 읽고 토론하게 된 것은 그런 차원에서 매우 적절하며 뜻 깊은 일이다. 비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장차 비갠이 세우고 따라야 할 신학의 역할과 내용을 세밀하게 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 93년에 출판된 데이비드 웰스의 「신학 실종」(부흥과개혁사, 2006)은 세상을 향한 기독교 변증이 아니라 개신교의 교회를 향한 목소리다. 그는 교회 안에 만연한 신학의 부재야 말로 거대한 교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나 사실은 초라한 몰골과 형편없는 실력이 전부인 개신교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근본 이유라고 주장한다. 웰스의 이런 주장은 대형 교회들의 지속적인 탄생과 성장을 고려할 때 근거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런 교회들의 탄생과 성장 배경이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배경에는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그 무엇, 신학의 부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전통을 벗어난 신앙과 신학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기독교 신학 용어는 이단이다. 웰스는 현대 교회들, 특히 몇몇 대형 교회들이 이단 교리를 따르는 중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는 현대 몇 교회가 분명히 ‘세상’에 물들어 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지적이 사실이라면 그의 문제 제기는 단순히 교회의 대형화에 대한 이의 제기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세상과 신학 부재에 대해서 그의 설명을 들어야 할 이유다. 그가 말하는 세상이란 자본주의, 민주주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도시화, 포스트모더니즘, 과학 기술의 발달과 같은 요인 속에서 탄생한 세속주의, 세속화, 현대화, 현대성이 버무려진 종합적인 상황을 뜻한다. 이렇게 탄생한 이 ‘세상’이 교회를 그들의 세상 속으로 깊숙하게 끌어들였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도시화와 텔레비전의 발달을 통해 이 세상의 문화를 급속히 형성하고 확산시킨 미국의 현실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웰스는 미국 복음주의는 선한 품성보다도 좋은 느낌에 치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성향의 바탕이 되는 아르미니우스적 성향이 이미 19세기에 등장했다며 개신교 교회에서 신학의 실종이 어떤 식으로 치밀하게 진행되었는지, 왜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추적한다. 그의 이런 작업은 신학의 실종과 교회의 위기가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현실이 되어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미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전통과 분리된 자유와 평등의 개념, 다원화된 문화는 이른바 공통성의 확보를 위해 지극히 개인화될 뿐만 아니라 저급한 수준의 공통 분모만을 찾게 되는 현실에 처해 있음을 고발한다. 그것은 대중주의와 순응이 낳는 오류에 빠지는데 이는 거짓된 동질화, 거짓된 만족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됨을 뜻하며 심리학적 설교에 빠진 목회자들은 파편화된 신앙의 전달자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과 신앙의 파편화 가운데 공동체가 없는 현실은 신학의 실종과 함께 교회의 실종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 된다.
3. 웰스의 이런 비판과 통찰은 미국 교회를 닮으려는 한국 교회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린다. 한국의 크고 작은 교회가 추구하는 교회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명랑하며 밝고 쾌적한 교회인데 그것이 죄의 해결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우리는 치밀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에서 죄의 근본적 해결과 윤리의 통찰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와 신자가 이 세상의 타락과 불의를 자기 문제보다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그런 가운데 ‘부흥보다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웰스의 시각은 교회를 힘들게 할 뿐이다. 예배당의 극장식 구조, 개인 간증과 고백, 따뜻한 분위기, 가족의 소중함이 연출되는 예배 순서와 강단은 하나님만을 드러내고 하나님만을 높이며 찬양하기에는 무엇인가 아쉬울 뿐이다. 웰스는 피니와 같은 설교와 예배 인도를 비판한다. 이런 비판이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야 말로 한편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우리가 익히 경험해 온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와 멀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누가 정통인지, 무엇이 정통인지 진지하게 거듭 물어야 하는 혼란을 겪게 한다. 이에 대한 웰스의 답은 없다. 하긴 이에 대한 답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가 말하는 ‘세상’이 침투하지 않은 교단과 교회, 그것에 옷을 버리지 않은 신자가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꼼꼼하고도 끈질기게 끌어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웰스는 만연해 있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교회의 문화 속에 있는 현대성, 세속성을 집어내어 진단하고 이에 대해 평가하는 수고를 훌륭하게 감당했다. 역사와 상황을 두루 살피며 신학 부재의 근원과 예상되는 결과를 경고한 그의 업적은 정말 귀한 유산이다. 절대적인 것을 부인하고 상실한 삶 속에서 신학을 외면하거나 신학의 일부를 비틀거나 제거한 신앙은 신자를 간혹 춤추게 할 수 있을지라도 신자를 온전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바른 신학의 정립이야말로 속히 교회와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 신학을 통해 시대를 좀 먹는 분열과 갈등에 대한 치유도 기대한다. 현대화에 몰든 교회가 신앙 고백적 전통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반성의 올바름이 무엇인지, 그것이 신앙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최대 과제인 것은 틀림없다. 이 과제는 모든 시대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이며 최고의 가치를 갖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교회가 실천적으로 신학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길이다. 2009. 6. 30. 自我典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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