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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바깥에서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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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내 이야기 먼저I-1. 두(2)개의 좋은 방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 일한지가 일년이 훌쩍 넘었다. 일하는 중에 힘든 부분이 있었다면 오피스문제였다. 빛과 소리에 특히 민감한 나였기에 창문도 없고, 여러 사람이 들락 달락 하면서 부산한 느낌의 오피스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특히 보스의 방과 바로 붙어있어 그 안에서 하는 말들이 다 들리는 것도 때론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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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이야기 먼저
I-1.
(2)개의 좋은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 일한지가 일년이 훌쩍 넘었다. 일하는 중에 힘든 부분이 있었다면 오피스문제였다. 빛과 소리에 특히 민감한 나였기에 창문도 없고, 여러 사람이 들락 달락 하면서 부산한 느낌의 오피스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는 힘들게 느껴졌다. 특히 보스의 방과 바로 붙어있어 안에서 하는 말들이 들리는 것도 때론 힘들었다.  같이 일하던 다른 직장동료와 함께 오피스 재정비에 대해 보스에게 요구를 보았다. 왜냐하면,  바로 건물에 보스의 이름만 걸려있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보스의 다른 오피스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곳을 나와 동료의 오피스로 있을까 해서였다. 보스는 두개의 좋은 방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보스의 번째 방은 계속 빈방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나는 지나다니면서 빈방이 눈에 보일 때마다 '욕심'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혜택이나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조금 떼어주기를 힘들어 하는 같았다. 혹시나 나중에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해서 일까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욕심'이란 확신이 들었다. 여하튼 분명히 이것은 나의 보스에 대한 불만이었고 보스에 대한 객관적평가라고 생각했다.

I-2.
두개의 좋은 모니터
나는 보스와 같은 오피스에서 주로 일하긴 하지만 실험할 일이 있으면 건물에 있는 실험실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피스 말고 실험실 안에도 나를 위한 조그만 책상과 컴퓨터를 따로 두었다. 그러나 실험실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라 실험할 때가 아니면 곳에 앉아 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도, 매일 실험실에 상주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쓰고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만큼 제법 좋은 모니터를 챙겨 실험실의 컴퓨터에 설치해 두었다. 가끔이라도 일이 있으니 모니터를 챙겨 두는 좋을 같았다. 오피스에서도 매일 사용하는 제법 좋은 모니터가 있으니, 나는 두개의 좋은 모니터를 두고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I-3.
유유상종
내가 보스에게 불만을 품고, 두개의 오피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지 않은 것마저 사람들에게 허용하지 못하는 것을 욕심일 것이라고 적나라하게 지칭했을 , 어렴풋하게 그것은 보스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한개는 별로 쓰지도 않으면서 두개의 좋은 모니터를 양쪽으로 챙기고 있는 나의 모습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보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분명히 욕심일 있었는데, 왜냐하면 바로 오피스의 옆자리에 앉아서 달간 일해오고 있는 동료는 오래되고 작은 모니터를 매일 8시간씩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나의 행동은 욕심으로 부터가 아니라 그렇게 밖에 없었음을 정당화할 있는 이유들을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는 있다. 옆에서 작은 모니터를 일하는 동료 직원은 작은 모니터의 불편을 전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위해 좋은 컴퓨터 환경이 필요한 것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작은 모니터를 업그레이드해줄 생각을 하지 않는 보스의 책임이지 나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의 다양한 이유들을 생각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피스 방에 관한 보스의 결정도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의 '정당'하다는 것은 궁여지책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의 양심은 알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욕심이었다. 많은 인원과 제한된 자원사이에서의 내가 선취할 있는 것은 선취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숨겨진 이런 욕심을 어쩌면 남의 욕심을 통해 거울처럼 들여다 있었던 것일 뿐이다.  

II.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기
II-1.
두개의 믿음-( 깊게 생각하기)
사람들은 '진보 (발전)' 대해 대부분 긍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기술의 발전으로 삶은 예전보다 윤택해지고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무지의 장막을 넘어서 끝이 어딘지 모르게 넓어져만 가고 있다. 좋은 물건, 좋은 의약품, 좋은 이론을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의 진보는 있을 있다. 그러나인간의 조건 대한 진보는 이것과 별개이다. 인간이 자신의 도덕성, 자신의 부패성까지도 뛰어넘어 나은 자아를 만들어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 진보의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현대사상은 개인의 존엄성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존엄성을 강조하다보니 부패성을 가진 인간의 조건에 관해서는 전부 잊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자기스스로 나아질 없는 존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창피하지만 이것이 내가 매일 경험하는 (위의 "파트 I . 이야기" 참조) 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아질 있는 가능성은 인간으로부터는 나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믿음도 있다. 예를 들어 베이컨, 민주주의의 선구자 루소,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성의 바탕에는 이데올로기든지 경제적인 것이든지 모든 외부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우를 이길 있는 힘과 합리성과 선함이 깔려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공리주의자들은 집단적 이기성에서 덕이 나올 있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혁신의 꿈을 꾸게 했으며 인류의 역사를 통해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구속받는 사람들에게 세상과 삶을 이해하는 관점을 재구성하게 주었다. 과거에 절대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생각된 규범들과 가치들은 근거가 되었던 신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현대사상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진리라는 개념은 이상 외부적으로부터의 근거가 아니라 오직 재화 생산의 효율성과 자기의 직관 주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다. 모든 사상의 흐름은 근대 역사를 거쳐 매우 급변 적이었고 어디로 귀결되고 있다기보다는 도리어 해체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느껴진다. 궁극적관심사가 신이 주관했던 역사로부터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로 대체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현대사상의 변동의 결정요인은 사람들이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II-2.
하나의 선택 
사람은 저마다 이해하는 통로(관점) 있다. 인간본성에 대해서, 역사에 관해, 삶의 의미에 관해, 인생의 궁극적 목표에 관해서 이해하는 방식이 있다. 현대사회는 우리의 손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너무 많은 정보, 책임, 변화, 선택, 상황의 파도 속을 살아가는 경험을 하게 한다. 현대성이 만든 도시화가 만들어 공적인 환경은 안에 비인격적인 구조로 형성된 사고방식 그리고 인간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사회의 재편성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해 서로 다른 가치가 지배하는 개의 영역을 만들고 있다. 하나의 세계는 개인적인 가치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세계는 자본주의 구조 가운데 감당하고 있는 역할과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 안에서 개인이 지니는 중요성은 그들의 됨됨이나 그들이 가지는 가치들과 신앙이 아니라 개인이 행하는 효율성이다. 현대의 공공생활은 정당성과 삶과 방향을 오로지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에서만 찾게 만들고, 그나마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가치와 신념마저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붙잡을 있게 만드는 것은 내적인 경험과 인식인데, 기꺼이 자신의 내적 경험이나 인식을 참된 실재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런 인식마저 없다면 참된 실재는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이런 현상은 진리란 것은 사적이고 사유화된 진리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가치의 상대화 (다원주의) 우리 마음속에 심어 주었다. 그러나 진리는 개인적인 통찰도 아니고, 개인의 직관도 아니다. 진리는 삐뚤어진 인간본성의 자아 안에서 추구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것이며 역사를 통해 확인되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근거야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계시가 들어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관점으로의 회복을 나는 선택한다. 내가 이쪽을 선택할 있었던 것은 어쩌면 현대사상에 대한 나의 불신앙이다. 두개의 믿음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흑백논리처럼 비하될 문제는 아니다. 이미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신의 믿음이 어느 쪽의 믿음인지 되살펴 보게 되는 뿐이다.

III.
마무리하기
책의 공감되는 부분적 이야기들을 나의 경험과 함께 보았다.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 내용은 간결하지만 저자가 다루려고 했던 내용은 많다. 특히 복음주의의 교회가 어떻게 현대사상으로 인해 변해가고 있는가에 대해 중점을 많이 두었다. 교회마저 세속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이상 어떤 초월적인 질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전망과 가치를 말한다. 세속화는 이와 같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공인해 주는 현대화과정을 말한다. 현대의 공공생활은 정당성과 삶의 의미를 오로지 자신에게 찾게 만들고, 그런 영향은 교회의 구성원들조차 참된 신학을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모두 직감적이고 주관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로 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요한 전통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사안일에 빠진 교회 안에서 먼저 회복이 일어나야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저자가 지적했던 방향으로의 회복이, 신앙인들마저 이미 물질만능사회에 길들여져 있는 시대에, 일어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희망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YES마니아 : 로얄 b*******m 2007.12.14.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이제야 읽다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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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은 종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종교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종교 그 자체를 부인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지 않으면 인류의 불행과 관련된 문제가 덜 하거나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변치 않는 탐욕과 그 수위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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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은 종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종교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종교 그 자체를 부인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지 않으면 인류의 불행과 관련된 문제가 덜 하거나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변치 않는 탐욕과 그 수위를 경계한다. 많은 종교들도 이와 비슷한 윤리관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많은 불행이 종교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가 있기 때문에 인류는 불행한가.

종교가 없다면 9·11테러(2001년), 런던 폭탄테러(2005년), 십자군(1095~1270년), 세일럼(Salem)에서 있었던 마녀 사냥(1692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1948년 이후) 등등 그런 끔직한 일이 없었을까. 그런 사건은 단순히 기독교와 무슬림이란 종교적 갈등이 원인인가.

사람들은 착각하는 것 같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불행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탐욕을 정화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지 인간의 복수와 불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은 아니다. 그나마 윤리적인 종교가 없다면 인류가 어떻게 정치, 신념, 민족, 목표가 각기 다른 가운데 연합과 소통을 도모할 꿈을 꿀 수 있을까.

종교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위로와 두려움의 해소를 소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을 달래기 위해 찾는 윤리적인 종교야말로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

‘신은 없다’ 하는 사람들은 종교의 무용성, 현혹된 이성의 무지를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신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신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종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결코 뿌리 뽑을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한 논증, 확고한 신념, 첨단 과학으로 신과 종교를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일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논증의 주제는 ‘신 존재 증명’보다도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신학의 본질이나 특징이어야 한다. 한 종교가 갖고 있는 신학과 교리에 근거하여 형성된 그 종교적 특징과 정체성이야 말로 인류 불행의 근원이 종교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한 타탕한 변증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비갠(BeGan)이 웰스의 「신학 실종」을 함께 읽고 토론하게 된 것은 그런 차원에서 매우 적절하며 뜻 깊은 일이다. 비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장차 비갠이 세우고 따라야 할 신학의 역할과 내용을 세밀하게 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

93년에 출판된 데이비드 웰스의 「신학 실종」(부흥과개혁사, 2006)은 세상을 향한 기독교 변증이 아니라 개신교의 교회를 향한 목소리다. 그는 교회 안에 만연한 신학의 부재야 말로 거대한 교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나 사실은 초라한 몰골과 형편없는 실력이 전부인 개신교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근본 이유라고 주장한다. 웰스의 이런 주장은 대형 교회들의 지속적인 탄생과 성장을 고려할 때 근거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런 교회들의 탄생과 성장 배경이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배경에는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그 무엇, 신학의 부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전통을 벗어난 신앙과 신학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기독교 신학 용어는 이단이다.

웰스는 현대 교회들, 특히 몇몇 대형 교회들이 이단 교리를 따르는 중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는 현대 몇 교회가 분명히 ‘세상’에 물들어 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지적이 사실이라면 그의 문제 제기는 단순히 교회의 대형화에 대한 이의 제기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세상과 신학 부재에 대해서 그의 설명을 들어야 할 이유다.

그가 말하는 세상이란 자본주의, 민주주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도시화, 포스트모더니즘, 과학 기술의 발달과 같은 요인 속에서 탄생한 세속주의, 세속화, 현대화, 현대성이 버무려진 종합적인 상황을 뜻한다. 이렇게 탄생한 이 ‘세상’이 교회를 그들의 세상 속으로 깊숙하게 끌어들였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도시화와 텔레비전의 발달을 통해 이 세상의 문화를 급속히 형성하고 확산시킨 미국의 현실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웰스는 미국 복음주의는 선한 품성보다도 좋은 느낌에 치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성향의 바탕이 되는 아르미니우스적 성향이 이미 19세기에 등장했다며 개신교 교회에서 신학의 실종이 어떤 식으로 치밀하게 진행되었는지, 왜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추적한다. 그의 이런 작업은 신학의 실종과 교회의 위기가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현실이 되어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미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전통과 분리된 자유와 평등의 개념, 다원화된 문화는 이른바 공통성의 확보를 위해 지극히 개인화될 뿐만 아니라 저급한 수준의 공통 분모만을 찾게 되는 현실에 처해 있음을 고발한다. 그것은 대중주의와 순응이 낳는 오류에 빠지는데 이는 거짓된 동질화, 거짓된 만족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됨을 뜻하며 심리학적 설교에 빠진 목회자들은 파편화된 신앙의 전달자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과 신앙의 파편화 가운데 공동체가 없는 현실은 신학의 실종과 함께 교회의 실종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 된다.

 

 

3.

웰스의 이런 비판과 통찰은 미국 교회를 닮으려는 한국 교회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린다. 한국의 크고 작은 교회가 추구하는 교회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명랑하며 밝고 쾌적한 교회인데 그것이 죄의 해결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우리는 치밀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에서 죄의 근본적 해결과 윤리의 통찰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와 신자가 이 세상의 타락과 불의를 자기 문제보다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그런 가운데 ‘부흥보다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웰스의 시각은 교회를 힘들게 할 뿐이다. 예배당의 극장식 구조, 개인 간증과 고백, 따뜻한 분위기, 가족의 소중함이 연출되는 예배 순서와 강단은 하나님만을 드러내고 하나님만을 높이며 찬양하기에는 무엇인가 아쉬울 뿐이다.

웰스는 피니와 같은 설교와 예배 인도를 비판한다. 이런 비판이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야 말로 한편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우리가 익히 경험해 온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와 멀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누가 정통인지, 무엇이 정통인지 진지하게 거듭 물어야 하는 혼란을 겪게 한다. 이에 대한 웰스의 답은 없다. 하긴 이에 대한 답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가 말하는 ‘세상’이 침투하지 않은 교단과 교회, 그것에 옷을 버리지 않은 신자가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꼼꼼하고도 끈질기게 끌어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웰스는 만연해 있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교회의 문화 속에 있는 현대성, 세속성을 집어내어 진단하고 이에 대해 평가하는 수고를 훌륭하게 감당했다. 역사와 상황을 두루 살피며 신학 부재의 근원과 예상되는 결과를 경고한 그의 업적은 정말 귀한 유산이다.

절대적인 것을 부인하고 상실한 삶 속에서 신학을 외면하거나 신학의 일부를 비틀거나 제거한 신앙은 신자를 간혹 춤추게 할 수 있을지라도 신자를 온전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바른 신학의 정립이야말로 속히 교회와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 신학을 통해 시대를 좀 먹는 분열과 갈등에 대한 치유도 기대한다.

현대화에 몰든 교회가 신앙 고백적 전통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반성의 올바름이 무엇인지, 그것이 신앙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최대 과제인 것은 틀림없다. 이 과제는 모든 시대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이며 최고의 가치를 갖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교회가 실천적으로 신학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길이다.                   2009. 6. 30. 自我典據

 

http://cafe.naver.com/rainoff/69

m****k 2009.07.01.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