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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주는 느낌은 지상이 아니라 저 세상 어딘가를 지향하는 글인가 했다. 시평론집인데 제목이 너무 시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은, 저자가 시인이니 그럴수밖에 없겠다로 결론지어졌다. 이 책은 지난 학기 현대시론 수업의 부교재로 쓰인 책이다. 리포터를 쓰기 위해 어영부영 읽었고, 뒷장은 흥미로워서 좀 더 꼼꼼하게 읽었는데 그 뒷장(3장)때문에 방학하고 나서 전체적으로 한번 더 읽었다. 수업의 주교재는 김준오의 <시론>이었는데 이 책은 그 <시론>에서 몇발자국쯤 더 앞으로 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수사학에 빠져 있는 사람 같다. 이 책의 목차, 1, 균열의 무늬와 2, 환각과 서정은 주로 시인이 천착한 수사학에 대해 쓰여 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수사학에 이렇게 빠져 있는 사람도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수업 시간에 자신의 책을 가지고 리포터를 써오라니 웃기는 일이야, 하고 조금 삐딱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삐딱했던 마음은 저자의 학문의 깊이와 넓이가 녹아 있는 녹록치 않은 책 내용 때문에 두 손 들고 항복했다. 순하게 머리 숙이고 진정으로 읽어 보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오히려 그 수업을 통해 이런 책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의 깊이가 녹아 있고, 그 깊이를 풀어내는 문장력도 탁월하다. 저자의 조금 어눌한 말투와 달리 책은 아주 달변이다. 거기에다 포스트모던쪽에 조금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나와 통하는 부분도 있는 책이어서 좋았던 것같다.
1부와 2부는 굳이 인색하게 평하자면 그냥 다른데서도 볼 수 있는 평론이지만 정작 내가 매료되었던 것은 '3부, 숭고의 비전'편이다. 3부에는 전통시학을 다루고 있는데 '리와 기의 구도로 본 현대시의 지형도'라든가, '숭고와 동이적 상상력', '동이적 담론과 시의 공간''다친 한울님이 어떻게 참외에 깃드셨는가'등은 아주 흥미롭다. 줄 쳐 가며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다 보면 저자의 사유의 넓이는 또 어디까지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어떻게 철학과 문학을 접목시켜 풀어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했는데 그 답을 조금 얻은것 같기도 하다. 너무나 많은 책들, 너무나 많은 사유들이 떠돌아 다니는 시대에 그 사유를 자기만의 색을 입혀 풀어 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색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또 시평론집이면서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저자가 시인이라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만큼 딱딱하지 않은 평론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문장은 미려하다. 그 진수는 이 책의 머리말에 드러난다. 머리말에는 영천에 있는 시총(시무덤)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표현들이 너무나 시적이다. 가령 '차바퀴에 그 부드러운 몸들이 으깨지는 것이 두려워'라는 표현은 시인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표현이다. 나는 이 시총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난 이후 내내 설레었다. 얼마전 그 시총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시총에 대한 내 짝사랑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총이라는 존재에 홀려 버렸다. 그렇듯 군데군데 드러나는 저자의 미려한 문장은 이 책이 어려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되고 있다.
저자 스스로 한 이 책의 설명을 보자면 '1부는 이 세계의 균열을 눈치 채고 공중정원처럼 존재하는 시에 대해, 2부는 수사학 속에 놓인 서정성, 환각으로서의 서정성을, 3부는 새로운 풍경을 보여 줄 낯설고도 오래된 시각'이라고 했다. '시가 적힌 종이는 썩지만 거기에 한번 적힌 시는 결코 썩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도 시간을 가면서 빛을 더하리라 믿는다
이 책은 올해 문화관광부 지정 우수 학술도서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역시 좋은 책은 세상이 인정해 주는 모양이라고 혼자서 흡족해 했다. 그냥 시만 읽거나 그냥 소설만 읽거나 그냥 수필만 읽는 것보다는 이런 책을 곁들어서 읽어 가다 보면 사유의 깊이가 더해져서 행복하다. 학교에 있는 동안 어떡하든 이 저자와 친해져서 저자가 가지고 있는 학문을 슬쩍슬쩍 훔쳐야겠다는 생각이 늘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