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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야 하면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를 떠올리는 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기울어가는 스페인 왕조의 카를로스3세, 카를로스4세, 페르난도 7세 시절 궁정화가의 전통을 이은 고전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가이자, 전통적 양식의 회화형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작한 근대적 화가라고도 합니다. 년전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갔을 때, 물론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도 감상했습니다만, 그의 초기작품과 말기 작품을 두로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 연작은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하여 무기력한 스페인 교회와 귀족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폴레옹이 그의 형 조세프를 스페인의 왕으로 세우자 그를 위한 그림을 그렸고, 영국의 웰링턴공이 들어와 나폴레옹을 몰아내자, 역시 그를 위하여 그림을 그렸다고도 합니다.
밀로스 포만과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쓴 <고야의 유령>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로렌조신부와 무역업을 하던 빌바투아 가문의 딸 이네스 빌비투아 등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고야의 삶과 당시의 시대상을 엮었습니다. 영화화할 것으로 고려하여 쓴 소설작품이었으니 영화로 친다면, 로렌조의 비중이 크지만 고야와 투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당시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스페인 교회는 종교재판을 강화하게 되는데, 그를 주도한 로렌조가 오히려 이에스 빌바투아와 엮이면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고야 역시 <옷 벗은 마하> 등의 작품이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를 아끼는 고위층이 돌보아서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티치아노가 샤를 켕 황제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붓을 떨어뜨리자 황제가 붓을 직접 주워주었다거나 티치아노가 교황의 초청으로 로마를 방문할 때 마차의 행렬이 7킬로미터에 달했다거나, 라파엘로가 산책할 때, 추기경들이 곁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목소리를 죽여 안내했다거나, 다빈치는 프랑수와 1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는 등의 회화의 대가들에 얽힌 이야기도 나옵니다.
빌바투아 가문과 로렌조는 고야를 고리로 악연이 엮이게 되는데,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사례들이 모호한 죄목으로 붙들어다가 일상적인 심문이라는 이름의 고문을 가하여 자백을 유도한 것인데, 막 열여덟이 된 어린 여성이 일상적인 심문을 견뎌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렌조가시행한 일상적인 심문을 아네스의 아버지 토마 빌바투아는 로렌조에게 가하는데, 그도 별 수 없이 짜여진 내용을 자백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구명운동이 오히려 로렌조로 하여금 이네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감옥안에서 불미스러운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결과 이네스는 임신을 하고 그녀를 닮은 여자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 토마의 구명운동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결국 로렌조는 종교재판소에서 쫓겨나게 되지만, 프랑스로 달아나서 구명을 하고 오히려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스페인 공략을 도와주고 조제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를 자문하는 역할을 맡아 과거보다 더 많은 권력을 쥐게 되지만, 이네스에게 저지른 악행이 결국은 그의 발목을 잡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고야는 토마 빌바투어의 부탁으로 이네스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그녀에게서 느끼는 독특한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소개로 상황이 꼬여가는 것이 안타깝고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로렌조에 대한 종교재판 결과 사형이 집행되고 그 곳에는 고야를 비롯하여 이네스, 그녀의 딸 알리시아도 참관하게 되는데, 로렌조가 처형된 다음에 고야의 유령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나옵니다. 이네스가 그의 유령이었다는데, 작품을 구상할 때 가다듬었던 이미지들은 작품이 완성되면 망각으로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네스의 경우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들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이런 존재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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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는 문득 이 세상의 주인은 유령인 것 같다는 말을 툭 내뱉었다.. 유령들은 집요하고 끈질기고 더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 더욱 기세등등할 테지... 이 책은 영화를 위한 책으로 집필이 된 책이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고야의 삶과 그 시대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스페인의 역사등을 들여다보기 위하여 선택하게 되었다. <고야>라는 책을 구매를 하긴 했지만 4권이 아닌 아직 1권밖에 소장하지 않아 이것으로 만족하려고 읽기 시작했는데 고야의 삶보다는 종교재판소의 로렌즈 신부와 이단자라고 하여 잡혀 들어가 15년여동안 감옥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갇혀 있던 불쌍하고 안타까운 이네스의 삶이 스페인의 혼란스런 역사와 버무려져 스릴감 있게 읽을 수 있다. 고야는 궁정화가로 왕이나 그외 초상화를 잘 그린다고 소문이나서 부유층들의 그림을 그려주며 살고 있는데 어느날 그의 화실로 로렌즈라는 신부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와서는 고야가 그리고 있던 ’이네스의 초상화’를 보게 된다. 그녀의 18번째 생일선물로 그의 갑부아버지인 상인 토마가 부탁한 초상화를 보는 순간 그들의 운명은 엮이고 만다. 18번째 생일잔치를 집에서 하라는 엄마의 말을 안듣고 오빠들과 처음으로 외출을 하여 시내를 나갔다가 그녀는 이단자라고 몰려 종교재판소에 끌려가게 된다. 그녀가 종교재판소에 들어가면서부터 상인 토마의 집은 쑥대밭처럼 뒤집어진다.많은 재물로 그녀를 구출해내려는 아버지 토마의 계획에도 끄떡없는 로렌즈, 심문에 넘어간 그녀를 생각하며 토마는 로렌즈에게 그와 비슷한 육체의 아픔을 주며 집안에서 심문을 하며 어처구니 없는 각서에 서명을 하게 한다. 고문에 누구나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도 수긍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로렌즈를 비롯한 종교재판소에서는 그녀를 내보낼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그일로 인하여 로렌즈는 수도복을 벗고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때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혼돈의 시대였기에 전쟁속에서 그들의 삶은 한치앞을 내다 볼 수가 없다. 왕이 바뀌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고야는 궁정화가로 자리매김을 하여 그의 위치는 든든하지만 딸 이네스를 종교재판소에 뺏긴 토마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어 그의 아내도 일찍 죽게 되고 그의 오빠도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고 아버지도 급기야 전쟁통에 죽고 만다. 겨우겨우 풀려난 이네스는 정신병을 얻어 그녀가 감옥에서 로렌즈와의 사이에 가지된 딸 ’알리시아’를 찾는다. 내 아기를 찾아 달라는 말에 고야는 그녀의 아기를 찾아 나섰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스페인으로 오게된 로렌즈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의 딸 알리시아도 겨우 만나게 되지만 그들의 질곡의 삶은 파란만장한 역사처럼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엇갈리고 만다. 정신병원에서도 치료가 되지 않은 이네스는 겨우 고야의 집에 머무르며 생활을 해 나가지만 ’아기’에 집착을 한다. 다시 정권은 바뀌고 로렌즈는 역사의 재물이 되어 처형되고 그가 처형되는 순간, 그 장소에는 이네스도 그의 딸인 알리시아도 그리고 그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는 고야도 있었지만 하나로 연결되지는 못한다. 가끔 어떤 얼굴에서는 왠지 설명할 수 없지만 첫눈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의 정물이 아니라 눈앞에 삶의 한 조각으로 나타났다. 그럴 경우 그가 추구하는 것은 형태의 정확성이나 비율이 아니며 유사성조차도 무시되며 오로지 생명 그 자체를 그리려고 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불가능을 구추하고 화폭에 생명을 담으려고 했다. .. 프란시스 고야, 혼돈의 역사 속에서 <진실>을 담아내려 했던 그가 이 소설속에서 표현된 듯 하다. 옆에서 그에게 다른 사람들의 맘을 붙잡도록 그림에 더하거나 거짓으로 그리라는 충고를 했지만 자신만의 믿음으로 사실적으로 그리려 노력하고 그 시대를 잘 반영하듯 전쟁의 잔혹함이나 바닥에 떨어진 인간의 처절한 생명력을 표현해낸 고야, 그의 그림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지만 흥미가 생겼다. 좀더 집중적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졌다. 이 영화도 보지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책이 아닌 영상으로 표현된 <고야의 유령>을 보고 싶다.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라지만 그들이 영상으로 처리하려 했던 표현이 약간 부족한 면도 있지만 역사와 맞물려 있는 로렌즈와 이네스의 삶을 들여다 본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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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직후의 혼란했던 시대. 배경은 스페인이다. 혁명의 여파가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두려워했던 스펜인왕을 비롯한 주변 유럽의 왕정들.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살았던 실존인물이자 유명한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을 중심으로 가공의 인물인 로렌조와 이네스를 내세워 그가 살았던 시대를 극화한 작품이다.
애초에 영화화를 염두에 둔 소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짜임이 단순하고 스토리 전개가 굉장히 빠르다. 인물의 성격과 심리 묘사는 대체로 생략하고, 반면에 사건의 배경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소설적 해석은 그저 소설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전문가 못지않은 시선이 느껴진다. 작가로서 그리고 영화 감독으로서의 통찰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알지 못하는 부분을 체득하게 해준다. 한 사건에서 발생한 사건이 또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는 방식과 영화화를 위해 미리 구성된 듯한 시나리오가 치밀하다. 모든 곳에서 반전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반전이 없다는 것이 또한 반전이다.
고야의 그림이 곳곳에 곁들여졌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림에 대한 설명이 있긴 하지만 불여일견일 것이다. 그랬다면 그림과 사건을 연관 짓는 스릴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아쉬운 점은 영화와 함께 해야할 것 같다. 책과 영화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특별한 경험이 될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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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재구성하여 책으로 엮어내는 것과는 달리 소설 ‘고야의 유령’은 영화작업과 동시에 출판을 염두에 두고 미리 써졌다고 외신은 전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의 전개는 읽기에 막힘이 없다. 영화적 서사를 문학적 서사로 그려내고 있는 공동 저자들의 역량은 탁월하다. 영화 ‘프라하의 봄’, ‘양철북’ 등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최고의 작가 장 클로드 까리에의 문장과 거장 밀로스 포먼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앙상블은 아름답다.
영화와 소설-고야의 유령
책을 읽는 중에 인터넷을 통해 영화 ‘고야의 유령’을 볼 수 있었다. 기대한 대로 영화는 우리의 눈길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하다. 다만 미디어가 전하는 것처럼 고야의 전기를 다룬 영화라기보다는 고야가 살았던 18세기 스페인의 사회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자들은 로렌조 신부와 시대의 비극적 희생양인 아이네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고야가 살았던 시대를 조망한다. 고야의 후기 그림들이 왜 그토록 기괴하고 우울해야만 했는지를 그들을 통해 깨닫도록 해준다.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였다. 또한 도덕과 계몽의 시대였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인간의 존엄을 일깨우는 일대 사건이었다.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은 더 이상 신에게 구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해주었고 무능한 왕들과 사치와 향락에 빠진 귀족들의 전횡은 피폐한 삶에 허덕이는 민초들에게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식민지 개척으로 넓어진 민중들의 시야에는 온갖 부정한 것들이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야가 살던 스페인은 아직 근대의 여명이 동터오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는 여전히 부패한 채로 권력의 중심이었고 무능한 왕정은 간신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실정이었다. 한때 무적함대를 앞세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였던 스페인의 영화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무자비한 폭정과 탄압,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한 유형의 땅이었다.
부패한 (카톨릭)교회는 치부와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이단재판소를 이용하였다. 올바른 신앙을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실상은 불순분자를 색출하여 가두는 마녀사냥터가 곧 이단재판소였다. 주인공 로렌조 신부는 바로 그 이단재판소의 책임자다. 첩자들로 하여금 이교도를 색출하고 심문(고문)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문제는 그가 신심을 가지지 못한 사악한 자라는 것이었고, 하필이면, 단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앞에 잡혀온 아이네스(나탈리 포트만 분)가 너무도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한 고야의 집에서 보았던 아리따운 초상화의 모델이 이교도의 혐의를 받아 잡혀온 것이다. 고문으로 발가벗겨진 그녀의 눈부신 나신 앞에서는 신의 권능도 무용지물인가, 그는 그녀를 범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석방을 위해 로렌조에게 뇌물과 수도원의 복원을 약속하며 탄원한다. 그러나 로렌조는 궤변으로 그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금지옥엽, 딸을 위해서 무슨 짓인들 못할까. (자세한 과정은 독자들의 몫이다)
카메라는 궁정화가로서 왕비와 왕의 가족 등을 그리며 틈틈이 자신의 자화상이나 주문 받은 그림을 그리는 고야의 일상을 쫓는다. 유럽의 패권에 욕심을 낸 나폴레옹의 군대가 해방을 내세우며 스페인을 침공하는 장면들과 그 덕분에 감옥에서 풀려난 아이네스의 미친 문둥이 같은 몰골과 로렌조의 아이를 낳았다는 비사들이 차례로 스크린을 채운다. 또한 사라졌던 로렌조가 프랑스군의 고위직이 되어 교회의 수장을 감금하며 복수하는 반전도 일어난다.
로렌조의 아이를 낳은 감옥에서의 시간에 정신이 멈추어진 아이네스를 위해 고야는 그 존재를 로렌조에게 알리고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러나 야욕에 물든 로렌조에게 그 딸의 존재는 아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수녀원에서 도망친 아이네스의 딸은 알리시아다. 겨우 이름만 알아낸 그 딸이 고야에게 발견된다. 제 어미를 쏙 빼닮은 외모를 고야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운명은 가혹하기만 한 것인지, 그녀는 공원에서 몸을 파는 창녀다. 영화의 서두에서 천사의 얼굴이 꼭 매춘부 같다는 타박이 왜 삽화로 등장하는 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절대 왕정 때나 해방군을 빙자하여 입성한 점령군이나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기는 매 한 가지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저 당하고만 살 수 없다는 민초들의 각성이다. 마침내 민중봉기는 일어나고 페르디난드 7세의 왕정을 거쳐 때마침 나폴레옹의 독주에 위기의식을 느낀 주변국들의 결맹(신성동맹)에 의해 영국군이 포르투갈을 거쳐 스페인으로 진격한다. 프랑스군은 패퇴하고 로렌조 역시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 때만은 신은 있었던지 로렌조는 (죄인들이 쓰던) 뿔모자를 써야만 한다.
붓으로 그린 진실의 역사
프랑스군의 스페인 침공과 귀머거리가 된 후의 고야의 그림들은 일대 전환점을 이룬다. 전쟁과 살육, 교회의 타락과 권력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낀 고야는 고향 근처에 칩거한다. 그 당시 고야가 살았던 고야의 집을 사람들은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렀고 그는 그 집의 벽면에 소위 ‘검은 그림’들이라 불리는 벽화를 그린다. 온통 마녀와 미치광이, 악마의 표정으로 울부짖는 민초들이 장식한 음산한 벽면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고야의 우울한 영혼이다.
무슨 ~주의니 ~ism 같은 범주로 가둘 수 없는 화가 고야는 평생 1,870점이라는 방대한 작품을 그렸다. 로코코 시대의 회화에서부터 왕가와 귀족들의 벽면을 우아하게 장식해주었던 양탄자 데생과 그림, 신의 은총과 구원은 어디에도 없던 부패한 교회와 타락한 성직자, 사악한 인간의 본성과 광기를 고발하고 있는 ‘변덕’ 같은 일련의 동판화집 등등 그의 화풍과 그의 그림이 드러내고자 한 정신을 누구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비록 궁정화가의 신분으로 왕이 주는 연금과 귀족들의 주문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어떤 권위와 상징으로도 강제할 수 없는 자유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여전히 죽은 신의 교리와 가짜 신성에 신음하던 조국 스페인에서 일찍이 이성의 합리와 사유를 신봉한 선각자였다. 그는 (내세의 구원을 앞세운) 신성마저도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억압하는 것이라면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믿은 올곧은 휴머니스트였다.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를 펴낸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대)의 말처럼 “괴물을 쫓아내기 위해 괴물을 그린” 거의 유일한 시대의 반항아였다. 어떤 이념과 이상을 빙자해서도 그 수단이 전쟁과 같은 폭력이라면, 그 시대의 율법과 교리는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여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살육과 부패와 광기로 얼룩진 그 시대의 현장에 늘 있었고 그 참혹한 역사의 얼굴을 그대로 그려내었다. 그의 붓이 역사를 기록한 그 어떤 사관의 펜보다 진실하고 강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야를 알리고 배우기에 이 지면은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영화와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음직한 몇 점의 그림을 소개하는 것마저 생략하자니 그것은 더욱 안타깝다. 고야의 예술은 마치 기다란 심지를 가진 폭죽과 같아서 먼 후대의 예술에 밝은 빛을 뿌렸다. 밀로스 포만이 굳이 ‘고야의 유령’이라 이름 지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는 오늘 역시 타락한 신성과 죽은 이성에 병든 것은 매양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은 아닌지.. 문득 그런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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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영웅성이나 예언적 측면에서 고야의 말년 작에 필적할 만한 동시대 미술 작품은 없을 것이다. 단지 음악에서 베토벤이 말년에 작곡한 4중주만이 아마도 어둠의 탐구에 있어서 유일한 비교의 대상일 될 것 같다."
미술사학자 윌리엄 본은 자신의 저서 『낭만주의 미술』에서 고야에 대해서 이와 같이 평가하였다. 윌리엄 본이 보기에 고야는 질풍노도의 낭만주의 시대의 가장 완벽한 예술가였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고야에 비교할 사람은 오직 음악에 있어서 베토벤 뿐이라는 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두 인물 모두 격렬한 19세기 초반에 세상이 한순간 변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청각을 상실하여 오직 자신만의 세계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는고독한 예술가였다.
고야는 18세기 말 19세기 격변의 유럽에서 전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예술가임에 분명하다. 오직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만이 그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투쟁과 고야의 투쟁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고야는 개인의 불행과 고독 및 스페인과 전유럽을 휩쓴 불행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싸워야했다. 그리고 그는 당당히 싸워서 예술의 위대함을 완성시켰다.
19세기 어떠한 미술가도 고야에 비교할 수 없다. 그의 예술성은 그가 스페인 인이 라는 점 때문에 후대에 과소평가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인물 로서 동시대를 산 프랑스의 자크 루이 다비드를 들 수 있다. 두 예술가 모두 후대가 기억하는 뛰어난 19세기 초반의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두 예술가는 격변 하는 시대에서 전혀 다른 길을 택하였고 그 결과도 전혀 달랐다.
다비드는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제정시기에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철저히 정치적이었던 그는 단숨에 정점의 자리에 올랐으나 또한 너무나 쉽게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권력의 썩은 냄새를 맡으며 이리저리옮겨다닌 그의 개인적 행동에 대한 심판이다. 하지만 고야는 다비드처럼 권력을 쫓은 것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그런 것들에 무관심하였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재능으로 인하여 그는 언제나 권력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봉사한 왕만 하더라도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페르난도 7세, 나폴레옹의 인 조제프에 이를 정도이다. 그는 언제자 궁정의 수석 화가였으며 스페인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궁정의 수석화가라는 것에 대해서 우쭐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듯이.
고야는 또한 그보다 150년 전인 벨라스케스와도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고야를 베토벤이 비교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벨라스케스는 굳이 비교하자면 모차르트에 가깝다. 벨라스케스는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서양미술사의 천재이며, 그의 작품은 밝고 경쾌하며 티치아노, 라파엘로 및 루벤스와 마찬가지로 가장 우아한 화면을 구성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중 누가 더 위대한 가에 대해서 절대로 답을 내릴 수 없듯이, 벨라스케스와 고야 중 누가 더 위대한 가에 대한 대답 역시 내릴 수 없다.
앞의 이야기들을 종합하자면, 고야는 기존의 서양미술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이며, 미술에 있어서 낭만주의 예술가의 유일한 이상형이 되었다. 가깝게는 19세기 중반의 사실주의에 좀 더 멀게는 20세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영향을 끼친 그는 서양미술사의 거장이다.
고야를 이와 같이 평가하는 것은 정리하자면, 개인적 고통과 시대적 고통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며 이를 불굴의 의지로 초월한 점이다. 『고야의 유령』은 고야를 둘러싼 시대적 고통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시기에서 나폴레옹 정부의 몰락에 이르는 약 20여 년의 시간이 이 소설이 담아내고 있는 내용이다. 피레네 산맥 이남에서 유럽과 거리를 두고 스페인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간 왕국은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으로 인하여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나폴레옹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무수한 인명이 살상 당하는 비극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나폴레옹 정부의 몰락과 함께 스페인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이 기존의 역사적 흐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빠르게 변화 하였다시피, 이웃 나라인 스페인 역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빠른 변화에 노출되었다. 카를로스 1세 이후 가톨릭 신앙의 유지를 위해 폐쇄적인 사회로 돌아선 스페인 마저도 이 변화에 동참하도록 강요당한 것이다. 결국에는 스페인을 약 3세기 동안 사로잡았던 가톨릭적 열망도 왕조도 무너졌다.
그리고 그것을 날카로운 눈을 가진 고야의 시선을 통하여 잡아내고 있다. 고야를 둘러싸고 가상의 인물인 로렌조와 이네스 빌바투아가 설정되면서 이 소설은 단순한 개인적 내러티브도 역사소설도 넘어서며 양자를 오가고 있다.
두 주인공이기도 한 로렌조와 이네스는 각 각 스페인의 두 가지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스페인에서 계몽주의가 몰락하듯이, 종교재판소의 일원이었 으나 후에 계몽주의에 의하여 프랑스 정부의 관리가 된 로렌조의 몰락이 이를 상징한다. 반면 운명의 장난의 희생양인 이네스는 결국 저자가 소설의 말미에서 밝히듯이 스페인 그 자체인 셈이다. 종교재판소라는 보수적 기구에 의하여 어의없이 자신과 집안이 몰락 당한 여인은 결국 재판소 내에서 자신의 아이를 뺏기게 된 이후 그 시간에서 완전히 멈추게 되었다. 그녀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게 된 것은 15년 후 그녀가 프랑스 군에 의하여 재판소에서 풀려나오고 자신의 아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아이를 얻게 되었을 때이다. 결국 그녀에게 그 15년이라는 세월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악몽인 셈이다.
이는 마치 페르난도 7세가 부왕인 카를로스 4세의 왕관을 찬탈하고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이 군대를 앞세워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국왕의 자리에 앉히는 스페인과 프랑스군과의 비극적 살생의 상황이 지나가고 아무렇지도 않게 페르난도가 국왕의 자리에 복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정대로 부르봉 가의 카를로스 4세에 이어서 그의 아들인 페르난도가 순리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었다. 그 동안의 혼란은 그저 악몽이고 그 악몽이 종결된 이후 멈추었던 시계는 다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고야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예술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고야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한 시인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은 고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귀가 멀고, 늙었고, 느리고, 쇠약하며,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하지만 너무나 세상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데 모라틴의 이와 같은 진술에 입각하듯 고야는 스페인에서 자행되는 살욕의 비극을 남김없이 스케치로 남긴다. 그에게 세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알고 싶은 존재이며 또 그것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인 자신의 의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고야의 그림이 삽화로 한 점도 실려있지 않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중간 고야의 명작들이 눈 앞에 펼쳐지듯 생생하다. 그가 카를로스 3세 시기에 궁정의 화가로 들어 왔을 때를 서술할 떄는 그의 로코코 스타일의 <파라솔>이 떠오르며, 카를로스 4세 부부의 총애를 받는 최고의 궁정화가로 재직할 때 마리아 왕비의 기마초상이 연상된다. 또한 국왕 부부의 인간적 모습과 페르난도의 비열한 모습이 서술되는 부분에서는 그의 명작 <카를로스 4세 왕실 가족의 초상>이 금방 떠오른다. 그 뿐 아니라 <알바 공작 부인의 초상화>와 <옷을 벗은 마하>와 같은 초상화 작품도 떠오른다. 스페인 사회의 기괴한 풍습이 흉흉할 때는 <카프리초스>와 <마녀의 안식일>이 떠오른다. 또한 스페인과 프랑스의 살육의 현장에서는 <5월 2일>과 같은 작품이 금방 머리에 떠오른다. 또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이네스를 찾으러 간 장면에서는 정신병원 시리즈가 당연히 연상된다.
하지만 그의 어떠한 작품들 보다도 가장 강렬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되는 작품은 1815년에 제작된 그의 자화상이다. 귀가 완전히 멀고 온갖 혼란을 겪은 고야의 모습에는 체념도 달관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무심하게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이 관람자들에게 시선을 던지는 고야의 모습은, 그 자신이 예술가를 넘어서 한 사람의 예수인 것처럼 당돌하게 등장하는 뒤러의 자화상도,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어 귀족의 반열에 진입한 <시녀들> 속의 벨라스케스 모습도 아니다. 오직 모든 걸 달관한 허탈한 웃음을 짓는 렘브란트의 자화상만이 고야의 자화상과 비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모든 세상 풍파를 이겨내고 불굴의 예술 의지로 죽을 때까지 예술의지를 불태운 영웅적인 예술가의 겸허한 모습이 담긴 고야의 자화상만이 계속해서 남아있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은 고야와 그를 둘러싼 실존 인물들과 가상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개인적인 고통과 스페인과 유럽을 둘러싼 역사적 시련 모두를 극복하고자 무력의 힘을 앞세운 영웅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영웅적 인물의 소박하지만 가슴 벅찬 흥분이 가득 찬 이야기이다.
☆ 덧붙이는 말 소설 중간 중간 고유명사들이 매끄럽지 않게 번역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무리오를 스펠링식으로 무릴로로 번역하기도 하였으며, 불어식으로 수르바란을 주르방이라고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를 황제를 스페인 국왕 명으로 카를로스 1세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불어 식인 샤를 깽으로 번역한 점에서 번역가가 좀 더 스페인 문화에 관심이 있었다면 사소한 오류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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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면 고야에 대한 책 같지만 실제로 이 책에서 고야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그래도 비교적 고야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묘사는 뛰어나다. 특히 당시 화가들의 신분적 지위나 적과 아군을 알 수 없는 혼란한 정치판등은 꽤 잘 묘사되어있다. 점수 소재: 6점/10점(베르메르를 시작으로 하여 화가에 대한 소설붐이 일어나고 있는중) 스토리: 6점/10점(평범한 정도) 사실감: 7점/10점(묘사는 나름 멋있다.) 여운 : 6점/10점(평범) 총점: 6.2점 감상평: 읽어볼만한 소설. 남에게 추천까지는 할 수 있으나 남의 반응은 장담할 수 없음. TIPS: 하나, 사지말고 빌려서 볼 것. 둘, 고야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미술책을 사는게 나을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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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의 거장 밀로스 포만, <양철북>의 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레옹>의 매혹적인 킬러 나탈리 포트만을 캐스팅해 영화를 만들기 위해 특별히 하나의 작품을 책으로 출간했다니 이에 귀를 솔깃하지 않을 독자가 있으랴. 그것도 혁명과 혼란과 어둠의 18세기말을 스페인이라는 이국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니 나에게는 더 없는 유혹이랄수 밖에 없다. 360여 페이지에 달하는 한권짜리 책 치고는 제법 두터운 양이지만 18세기의 광기의 역사를 권력을 향한 무자비한 욕망을 지닌 한 남자와 20여년을 무고하게 갇혀 살다 자신이 낳은 아기 때문에 정지되어 버린 시간을 사는 한 여인을 <고야>라는 당대 최고의 화가를 통해 짙은 유화와도 같은 글로써 표현했다.
18세기말 프랑스의 혁명으로 시민운동이 전개되고 혼돈이 유럽을 휩쓸고 있을 무렵 스페인은 종교재판소의 무소불위 권위를 부활시켜 유럽으로부터의 소용돌이에서 스페인을 지켜내려 한다. 단지 돼지고기가 싫어 먹지 않은 한 부유한 상인의 16살 아리따운 딸 <이네스>는 유대교라는 죄를 쓰고 종교재판소에 갇혀 심한 심문을 당하게 된다. 이에 그녀의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 <고야>를 통해 종교재판소의 권력자이자 사제인 <로렌조>를 집으로 초대한다. 아버지 <토마>는 억울한 딸 <이네스>가 부당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한 것이라 하여 <로렌조>신부를 역시 고문하여 종교재판소를 모독하게 하는 자백서를 받아내어 자신의 딸과 바꿀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로렌조>는 <토마>의 요구를 무시하게 되고 <토마>는 <로렌조>의 고해성사를 왕에게 보고하여 <로렌조>는 종교재판소에서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다. 15년이 지나 이제 <이네스>의 집안과 아버지도 오빠들도 비참히 죽고 <이네스>만이 정지된 15년전의 시간과 감옥속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맞아 풀려난다. <로렌조>는 추방되어 프랑스의 혁명정부에서 고위간부가 되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자신이 부활시킨 종교재판소를 재판하는 권위에 오른다. <이네스>를 맞은이는 늙고 청력까지 잃은 고야뿐이다. 놀랍게도 <이네스>는 감옥에서 15년전 출산한 딸을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인다. <이네스>의 딸은 역시 <이네스>가 감옥에 가기전의 16세때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자로 성장하지만 거리의 창녀로 전략되어 있고 <로렌조>는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이네스>의 어린 딸마저 납치하려 하는데...
아주 가끔 스페인과 우리나라는 여러면에서 같은 역사를 공유한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3년간의 동족내란, 36년간의 암흑정치등 많은 고통받은 부분이 다르지가 않아 늘 개인적으로 남과 다르지 않은 느낌의 나라다. 이 18세기말에도 프랑스의 이베리아 반도 진출를 위한 스페인 침공, 그리고 다시 유혈투쟁을 통해 얻은 독립의 과정에서 주인공 <로렌조>는 항상 권력에 빌붙어 살아온 캐릭터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고 프랑스로 추방되어 다시 나폴레옹의 동생이 스페인 왕이 되면서 조국 스페인을 프랑스를 위해 팔아먹는 매국노의 상은 우리의 조선말기와 일제치하 그리고 미국군정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에 매번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권력을 휘두른 위정자들과 다를바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의 암흑속에서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남자와 달리 자신의 아이를 찾아 거리를 헤메는 <이네스>가 보여주는 어머니상은 일제치하와 전쟁의 고통속에서 오직 자식들의 안녕만을 위해 살아온 우리의 어머니와도 다르지 않다. 마지막 전쟁과 죽음속에서 모두가 피난가고 죽음을 피해 도망가는 혼란속에서 딸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이네스>와 어머니의 존재도 모른체 <로렌조>의 부하들에게 잡혀 이끌려가는 딸의 모습에서 이 책의 백미를 느끼고 가슴속 깊은 곳의 피의 진지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다시 한번 영화에서 그 감동을 전해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