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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셰익스피어, 생활고에 시달리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몇 차례의 불합격 끝에 22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10년이 되도록 관직에 오르지 못해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당대의 권력자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최충헌을 칭송하는 <천엽류화시(千葉榴花詩)>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사록 겸 장서기(司錄 兼 掌書記)로서 전주목(全州牧)에 부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료가 모함하는 바람에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권력자에 대한 아부로 관직을 시작했으나 이 무렵의 이규보는 순수하고 양심적인 관직자였던 것 같다. 이러한 자세는 <원님 노릇 즐겁다 마오[莫 爲州樂]>라는 시에도 드러나 있다.
원님 노릇 즐겁다 마오
원님 노릇 즐겁다 마오 원님 노릇 도리어 걱정뿐일세. 관아는 장터처럼 시끌시끌하고 판결할 문서는 산더미 같네. 가난한 마을에 세금 부과 차마 못하겠고 감옥에 가득한 죄수들 보니 근심스럽네. 꾹 다문 입엔 웃을 일 없는데 더구나 태평하게 놀러 다닐까. ~ 중략 ~ 원님 노릇 즐겁다 마오 원님 노릇 걱정만 밀려오누나. 따스한 비단옷 입지 못하고 주머니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네. 성난 마누라 얼굴 펴기 어렵고 배고픈 자식 울음을 그치지 않네. 삼 년 뒤에도 그만두지 못한다면 머리털 죄다 백발 되겠네. [pp. 99~100]
백수로 지내던 이규보에게 또 한 차례의 기회가 찾아왔다. 1202년(신종 5년) 신라의 부흥을 외치며 동경(東京: 현재 경북 경주시)의 도령(都領) 이비(利備)와 운문산(雲門山) 일대의 초적(草賊) 패좌(勃左)를 중심으로 한 반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에 그는 농민반란진압군에 자원하여 병마녹사(兵馬綠事) 겸 수제(修製)로 종군하였다.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1년여의 시간 동안 각종 격문(檄文), 상관에의 건의문 등을 쓰면서 활약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무렵 그의 생활고는 <가죽 옷을 전당포에 맡기고[典衣有感示崔君宗藩]>에 잘 드러나 있다.
가죽 옷을 전당포에 맡기고
아내가 가죽 옷 맡기고 돈 꾸려 하기에 처음엔 내 나무라며 말렸네 “추위가 아주 갔다면 남들이 이걸 갖고 뭘 하겠으며 추위가 다시 온다면 오는 겨울에 난 어쩌란 말요?”
아내 대뜸 볼멘소리로 “당신 왜 그리 미련해요 화려하고 고운 옷 아니라도 제 손수 바느질한 것이라 아까운 맘 당신보다 배는 더하답니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더 급한 걸요. 하루에 두 끼니 먹지 않으면 옛사람도 굶주린다 말했답니다. 굶주리면 당장에 죽게 될 텐데 오는 겨울이 다 뭐랍니까.” ~ 중략 ~ 겨울에 애써 지은 옷 하루아침에 거저 버리고도 배고픈 우리 형편엔 어림도 없어 허기진 아이들 죽 늘어섰다니. 젊었을 때 돌아보면 세상 물정 전혀 몰랐네. 수천 권 책만 읽으면 과거 급제 수염 뽑기보다 쉽다 여겼네. 잘난 척 거들먹거리며 좋은 벼슬 쉬 얻을 줄 알았더니 운명이 왜 이다지도 기구해 앞길이 꽉 막혀 슬퍼해야 할까. 가만히 앉아 반성해 보니 어찌 내 잘못 아니겠는가. 술을 거침없이 좋아해 시작하면 천 잔씩이나 퍼마셨고 평소 마음에 쌓아 뒀던 것 취하면 더 참지 못해 죄다 내뱉고 말았을 뿐 비방이 뒤따른 줄 몰랐네. 처신이 이러하니 가난해 굶는 것도 당연하지. 아래로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고 위로는 하늘의 도움 잃었네. 가는 곳마다 흠 잡는 사람들에 하는 일마다 어그러지네. 이는 다 내가 자초한 일 아아! 누굴 원망하랴? [pp. 32~35]
어쩌면 취하면 마음속에 담아 둔 말을 거침없이 퍼붓는 버릇과 <온실을 반대한다[壞土室說]>를 읽으면서 느낀 소위 꼰대 기질 같은 것도 이규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참소당한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권력에 아부하는 보신(保身)주의자가 되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최충헌의 모정(茅亭)에 대해 쓴 <진강후(晉康侯) 모정기(茅亭記)>가 최충헌을 만족시켜 1207년(희종 3년)에 직한림(直翰林)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지만, 부하의 무고로 정직당했다. 그 상태에서 1219년(고종 6년) 최우(崔瑀, ? ~ 1249)와 함께 탄핵되었으나 이규보만 파직되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이 이규보가 보신주의 경향을 드러내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의 행적, 특히 후반기 삶은 최씨 무인정권에서 생존하기 위한 일반적인 문인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비난을 받았던 것에는 그의 능력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 아닐까
예컨대 그는 이인로(李仁老, 1152~1220)로 대표되는 용사론(用事論)을 남의 글을 도둑질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힐난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독창적인 표현을 써야 한다는 신의론(新意論)을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이규보는 조선시대 우리 말과 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국어존중론에 입각한 문학론을 펼친 김만중(金萬重, 1637~1692)과 비슷한 생각을 먼저 얘기하고 실천했던 사람인 것이다.
또한 그는 <이[蝨]와 개에 관한 명상[蝨犬說]>을 통해 직업, 돈, 권력에 따라 목숨 값도 다른 세태를 비판하고, <네놈들은 입이 몇 개기에[聞郡守數人以贓被罪]>와 같은 시를 남기면서 백성에 연민을 느끼는 마음을 드러냈던 사람이다.
네놈들은 입이 몇 개기에
네놈들은 입이 몇 개기에 흉년에 백성들은 빈사(瀕死)지경 앙상하게 뼈와 가죽만 남았는데 몸에 남은 살이 그 얼마나 된다고 남김없이 좌다 긁어내려 하는가.
그대는 보았나 강물을 마시는 두더지도 기껏해야 자기 배를 채울 뿐임을. 묻노니 네놈들은 입이 몇 개기에 백성들의 삶을 그리 게걸스레 뜯어 먹나. [p. 119]
그렇기에 그의 삶이 실제보다 후대에 더 낮은 평가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한때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대일(對日) 혈전선언(血戰宣言)을 했던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변절해서 더 욕을 먹었던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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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는 생각의 꼬투리가 길어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사잠(思箴)을 지어서 끝없는 생각의 갈무리를 정리하려고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생각하되 너무 급히 하지 말라/ 너무 급히 생각하면 어긋남이 많아진다/ 생각하되 너무 깊이 하지 말라/ 너무 깊게 생각하면 의심이 많아진다/ 헤아려서 절충해보건대/ 세 번 정도 생각해보는 게 가장 적절하다”라고 했다. 세 번 이상 생각을 하면 번민에 빠지게 되고 생각이 너무 깊어지면 병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생각의 꼬투리를 잘 갈무리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너무 깊이 그 생각에 빠지다보면 병을 얻게 되고, 너무 성글게 생각을 하면 실수를 해서 두 번 세 번 후회를 하게 된다. 그는 일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야 있겠지만 한 가지 일을 세 번 정도는 생각해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규보가 말한 이 세 번이 도달하는 자리는 결국 근본의 자리이다. 여러 차례 생각을 하고 방황하고 고민하더라도 결국에는 근본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