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정감록(鄭鑑錄)>은 예언서(豫言書)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재현해 왔다. 한국인이라면 한번은 들어봤음직한 이름...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미래를 말하는 예언서는 가득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고려비기>로부터 시작되어 정감록이 출현하기 전까지 모두 21종의 예언서가 한반도의 왕실과 저잣거리, 산중암자, 무속, 일반 상민의 집 어디를 막론하고 끊이지 않고 나돌았다. 고통 받던 민중들에겐 유일한 탈출구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한국의 정치적 예언서는 사상적으로 풍수설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풍수설에 관한 기왕의 연구 결과는 이 글의 길잡이가 된다. ...중략... 지금으로서는 17세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정치적 예언서가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20쪽-
34쪽의 도표를 보면 한반도에서 탄생된 여러 국가들이 예언서를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관한 각종 예언서 목록이 나온다. 이 목록을 보면 636년의 고려비기(高麗秘記)에서부터 고려창건의 일화를 간직한 도선대사의 도선비기(道詵秘記), 조선창건을 위해 이성계를 도왔던 무학대사의 도참기(圖讖記)등등, 많은 수의 예언서가 소개되어 있다. 이런 책들이 결국 17~18세기의 정감록을 만드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된 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저자의 판단을 읽으면 예언서의 저자나 발견자, 인용자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천문이나 음양술수를 다루던 특수직 종사자들, 건국을 정당화 시켜야 했던 고급관료들, 권력에서 소외되어 왕조전복을 꿈꾸게 된 재야인사들이 그들이다.
각종 기록에 언급되거나 발견된 예언서의 주요내용 중 첫째는 당연히 왕조의 멸망과 교체에 관한 예언이다.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한 <고려비기>,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탄생을 예고한 <해동고현참기>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수도이전에 대한 것, 쇠락한 왕조를 중흥시킬 묘책에 대한 예언 등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전(崔致遠傳)에 따르면 “계림은 누런 이파리요 곡령(송악)은 푸른 소나무”라는 시구를 고려 태조에게 보냈다고 한다. 계림으로 상징되는 신라가 멸망하고 장차 송악에 중심을 둔 고려가 건국될 것을 예언한 시(詩)로 평가된다. -44쪽-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에는 “나무(목자)에 아들(자)을 붙인 (이가 나라를) 세운다.(建木得子)”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이다. 이 책에서는 “왕(王)씨가 멸망하고 이(李)씨가 일어난다고 하여 앞의 주장을 좀 더 분명히 밝히기도 하였다고 전한다.[태조실록]권 17 -44~45쪽-
2. 정감록의 비극적 상황과 긍정적 생존
알다시피 <정감록>은 한반도를 관통하는 모든 예언사건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후기 일어난 모든 역모사건의 중심에는 <정감록>이 자리하고 있단 얘기다. 심지어는 신종교운동(新宗敎運動)에서조차 정감록을 배제할 수 없었다. 민중들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종교의 모든 테두리안에 정감록 예언의 비밀을 조금씩 감추어두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정감록>이란 글자가 최초로 보인 역사기록은 조선왕조실록, 1739년(영조 15년) 음력 8월 6일, 경진일 기록이다. 관서, 해서, 북관지방(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에서 정감(鄭鑑)이 쓴 예언서가 나돌고 있다는 기록이 그것. 이에 대한 영조의 결정은 백성들을 유교적 이념으로서 교화시킬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는 자책과 함께 관대하게 처리했다.
저자가 얘기하는 정감록 탄생의 배경에는 당연히 민중의 애달픈 사연이 잠재하지만 표면적으로는 16세기 당쟁이 격화된 후 몰락한 양반계층이 정감록 유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주장이다. 유배된 중앙정객이나 중앙권력에서 늘 소외되었던 서북지방의 유력자들이 자신들의 한(恨)을 풀기 위해 일종의 왕조멸망과 교체에 관한 참서(讖書)로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 가설... 즉 출발점은 서북지방(평안도, 함경도)에서 만들어졌다는 추측, 처음 듣는 얘기로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정감록>의 탄생지가 계룡산 골짜기의 충청도나 지리산 자락이 묻어나는 전라도 지방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을 했었기 때문이다.
일본식민시대의 걸출한 종교학자인 이능화는 <정감록>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정감록>은 나라를 원망하는 뜻을 잃은 무리(怨國失志)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쟁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애써 관직을 구하던 선비들이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고자 할 때면 반드시 <정감록>의 예언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84쪽-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정감록>이란 예언서에서 왜 정씨(鄭氏)를 택했냐 하는, 공통적인 인자를 모아 하나의 가설을 세웠는데, 그 얘기가 상당히 흥미롭다. 결론은 14~18세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역모사건의 선두에 선 인물들이 정씨와 매우 관련 깊다는 유관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쳤던 까닭에, 태조 이방원의 사주로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서 무참히 격살(擊殺)당했다고 하는 14세기 말 고려의 대신 정몽주(鄭夢周), 본래 조선 개국의 중심 인물이었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간의 대립에 관여하여 희생된 15세기의 정도전(鄭道傳),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당쟁에 휘말려 들어 끝내 반역자로 일생을 마감하였던 16세기 후반의 정여립(鄭汝立)과 18세기 초의 수수께끼 인물 정희량(鄭希亮, 연대미상)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89쪽-
1728년 무신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조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독살된 경종의 원수를 갚고, 왕위를 찬탈한 영조와 노론정권을 몰아내겠다는 쿠데타사건은 전 소론(少論)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당시 이인좌는 준소(峻少; 소론 강경파)였다. 경종시기 권력을 잡고 있던 소론정권은 완소(緩少; 소론 온건파)였는데 영조즉위 후 탕평책으로 인해 권좌에서 밀려나지는 않았다. 급기야 소론(少論)이 소론을 추포하러 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南人), 그 중에서도 영남지방의 남인들은 쉽게 이인좌의 반란획책에 동조의 눈길을 보냈다. 안동유림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경상도 사람들이 이인좌를 지지했다. 때문에 많은 경상도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분노에 찬 영조는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 남문(南門) 밖에다 “平嶺南碑(영남 반란 평정 기념비)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 박았다.
이인좌의 반란은 조야(朝野)를 초긴장상태로 몰았고 군영(軍營)을 관장하던 총융사 김중기는 영조의 출전명령을 받았으나 무서워 궁궐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당시 소론정권의 병조판서였던 오명항(吳命恒)이 스스로 출전을 자청, 도순무사로 임명되어 이인좌의 난을 진압했다. 이때 영남지방의 병사들을 규합하여 내응하기로 했던 이가 바로 정희량이다.(집안의 족보가 소론과 남인계열이라 이 사건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이 사건은 영조에게 엄청난 충격과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 이 무신란의 실패세력 중 일부가 조선멸망의 예언서였던 <정감록>을 신봉하게 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조선후기, 왕조에 불만을 가진 유랑지식인이나 몰락양반, 서얼과 평민지식인들이 일으키는 역모사건 중심에는 항상 <정감록>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는 <정감록>이 임진, 병자 양란 이후의 후유증으로 인해 탄생했다는 설(說)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18세기에 나타난 정감록관련 역모 사건을 알기 쉽게 나열해보면,
①1733 남원 김원팔 괘서, 반역, 음모사건
②1739 이인좌의 난
③1748 이지서등의 청주 괘서사건(정감록, 도선비기 사건)
④1782 문인방 사건
⑤1785 이율, 양형의 정감록 사건
⑥1787 충청도 제천의 김동익등 역모사건
⑦1812 홍경래의 난, 이진채 역모사건 등이다.
조선후기에 <정감록> 이란 책자를 소지하거나 이를 전파시킨 사람은 법률에 의해 엄히 다스려졌다. 거의 대다수가 유언비어를 퍼뜨린 역적들로 몰려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1739년 이후의 <정감록> 관련사건이 그것이다.
영조도 그러하였겠지만 정조의 놀라움과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록에서 전하는 관련기사는 정조(正祖)의 대분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1785년 정조 9년, 3월에 벌어진 문양해, 이율, 홍복영, 양형의 정감록 역모 사건의 기록을 재구성하면서 당시의 평민지식인들과 그 지하조직에 관해 상세히 서술했다. 특히 홍복영은 정조 초기의 권신이었던 홍국영과는 사촌지간이며 홍복영의 부친은 좌의정을 지낸 권문세가의 자식이다. 이율 또한 서울의 양반가문으로서 이율의 형이 순안현령을 지냈다. 정조는 분노에 치를 떨며 이들을 모두 극형에 처했다.
역모의 무리들 중 함경도 영흥의 주형채는 반란이 성공하면 조선(朝鮮) 북도(北道)의 도원수를 맡게 되어 있던 핵심인물인데 정조는 특히 주형채를 반란군 지도자로 지목하고 그의 죄상을 직접 친국(親鞫)한다. 그런데 주형채라는 인물이 바로 점술에 능한 술사였단 사실이다.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에서 꽤나 이름을 떨치던 점술사였다.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천문역법과 점술(六任), 둔갑술(奇門) 등의 술수를 부려서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민심을 선동했다.”
-204~205쪽-
여기서 저자는 육임을 점술로 분류했다. 물론 넓게 보면 점술의 분류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문을 둔갑술로 표기한다. 기문이 둔갑술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갖다버린 실체다. 아마도 법기문(法奇門)을 뜻하는 것 같은데 둔갑보다는 병법으로서 활용했을 것이다. 화담 서경덕이 창안한 동국기문이 조선 중기이후 전래 되었을테니까... 어쨌든 정조는 울분에 찬 명령을 내렸다. 대역부도한 죄인을 군율에 따라 한강 모래밭에서 목을 베라...
사주팔자란 무엇인가? 바로 혁명의 학문이 아니던가? 말이 좋아 임금이고 상놈이지, 누구나 사주팔자만 잘 받고 태어나면 백정도 임금이 된다는 것이 이 술수의 요체(要諦)란 얘기... 봉건제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역적(逆賊)의 학문인 것이다. 옛날도 그러했는데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사주팔자와 운때가 좋아 대통령이 된 인물도 많지 않은가? 도저히 대통령이 될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시와 때를 잘 만나 한 국가의 통수권자에 오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불온문서(예언서, 운명비결서)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철저히 금기시 하였다.
3. 정감록과 미륵불의 현대적 해석
사람은 살면서 경제적인 고통을 가장 먼저 느낀다. 인생의 가장 절박한 문제가 돈이다. 틀림없는 현실이다. 고통스런 전란이 오거나 전염병이 돌면 미륵불이 나타나 이 땅의 많은 백성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 밀었다. 조그만 마을을 방문해도 아무 돌에다 대충 새겨 넣은 돌미륵을 만나게 된다. 돌미륵은 사람들에게 배고픔을 면해주고 행운을 가져다주며 아들을 점지해 주고 돈을 벌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민중들은 지극정성으로 돌미륵에게 손이 닳도록 빌었다. 이런 신앙은 무속으로도 옮겨가 무가(巫歌)에도 종종 미륵관련 얘기가 나온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미륵에 관한 전설이 전해졌다. 고려시대에 채록된 향가에는 “도솔천”에 관계된 적지 않은 얘기를 볼 수 있는데, 저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미륵부처가 대중들에게 선사할 행운의 징표를 몇 가지로 나누어 놓았다.
①삼국시대 신라에서는 미륵이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②미륵은 천재지변(天災地變)을 해결해 주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③때론 미륵은 정치적 정변의 피해도 최소화 해준다.
④미륵은 국가간 전쟁 상황에서도 나라를 구해주는 전사집단(戰士集團)의
우두머리다.
⑤물질이 지극히 풍족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답고, 누구나 질병으로 고생하는
일 없이 오래 오래 살 수 있는 이상향의 세계가 용화(龍華; 미래에 억만 대중을
구제하기 위하여 세상에 내려올 미륵이 설법하게 될 장소를 상징하는 용화수를
말한다.)이다. -266~284쪽-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미륵불이나 세상을 구원할 정감록의 진인(眞人)이라며 고통 받는 민중들을 현혹, 재물을 탕진하게 만들었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특히 일제 식민시대에 널리 퍼져있었다.
미륵불의 미래사상과 정감록의 결집은 19세기에 탄생된 신종교로 이어졌다. 바로 동학, 증산교, 원불교의 탄생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해도진인(海島眞人)이 출현하여 조선 독립을 이루고 태평성대의 세상을 이룰 것이란 예언이 전국을 떠돌았다. 일본 총독부는 긴장했다. 1919년의 3.1만세 의거는 조선 지배에 커다란 먹구름이었다. 총독부는 <정감록>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세간에 나돌던 각종 참서와 비기들을 모아 처음으로 정감록비결집록(鄭鑑錄秘訣輯錄)을 펴낸 이는 일본인인 '호소이'였다. 그는 <정감록>이 허무맹랑한, 한낱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믿는 조선인은 미개하고 저열한 민족성을 가졌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정감록이 유언비어일지는 모르겠으나 굶주림과 온갖 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 백성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이었으며 밝은 미래였다. 그로 인해 <정감록>을 읽은 수 많은 사람들이 동학으로, 증산교로, 원불교로 모여 들었으며 언젠가 나타날 진인(眞人; 여기서는 수운 최제우,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원빈)이 그들이기를 굳게 믿었다.
4. 예언서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
일제식민 시대에는 <정감록>과 <미륵불>을 미끼로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온갖 세력이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했다. 당시는 <백백교> 사건 같은 사이비 종교사건이 유력신문 사회면을 꽉 채울 정도로 비일비재했는데 이 같은 미래예언서가 창궐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나타내는 바로미터, 즉 무시할 수 없는 사회현상이었던 것이다.
<정감록> 예언이 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정감록> 예언은 시대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질되었고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 재물의 탕진과 더불어 깊은 정신적 고통을 주기도 했다. 그 내용은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았고, 미래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예언이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 각인되어 일생을 바칠 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그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정자들이 자신들만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만을 베풀며 가난한 민중들을 지극히 보살피지 않으면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참서(讖書)의 함정에 쉽게 빠진다. 그 비근한 실례가 신앙을 가장해 이상세계를 구현한다고 속여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재물과 생명을 강요한 종교관련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도 <정감록>를 믿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참서에 나오는 해도진인을 찾아 계룡산에서 일생을 헛되이 보낸 사람도 있다. 현실은 언제나 서민을 옥죄고 있다. 가난한 민중들은 언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이상사회를 만날 것인가? 요원(遙遠)한 일이다.
이 책은 <정감록>이란 희대의 비기(秘記)를 파헤친 역작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정감록>이란 내용의 진실여부를 혹독히 따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참서가 출현하게 된 시대상황과 배경을 조사하고 그 예언이 당시 민중들의 삶에 어떻게 투영(投影)되었는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정독했던 나로서는 미래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감만을 느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