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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전쟁이 없다 하여 세상이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각국은 여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세상을 움직이는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으며, 경제나 문화 등 폭력적이진 않으나 거부하기 힘든 힘을 구축,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칠 방도를 강구 중이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의 흐름이 일반화된 시대에 국가 간의 물리적 거리를 논하는 것은 다소 무모한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깨끗하다고 보기 힘든 일본과의 관계는 거리상으로 가깝기 때문이라 봐도 어느 정도는 무방할 듯 싶다. 제국주의 열강의 점령 행렬이 유행처럼 전 세계에 퍼져나갔을 때 이를 받아들인 일본의 제1 차 점령 지역이 우리의 영토였던 것 역시 다른 어떠한 요인보다도 물리적 거리의 가까움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매번 껄끄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했으며, 백제 멸망 후 많은 이들이 신라인이 되기 보다는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택했던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자국의 목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 경쟁해야만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위해선 함께 걸어야만 하는 동반자로서, 일본과 우리가 맺어야 하는 관계는 참으로 미묘하다 하겠다.
전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유일한 민족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비록 지금은 경제적으로 일본이 우월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질서가 고착화되기 전까지 문화는 대륙의 것이 우세했으며, 일본은 많은 부분 우리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 역시 적지 않은 부분 중국으로부터 기인했다. 그렇다 하여 우리만의 독창성이 없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일본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존중 없이 막연히 과거에 우리가 높은 문화를 수호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깔보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가 아닐지 싶다. 고려 후기의 왜구 출몰에서부터 저자는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다. 그 전에도 일본과의 교류가 없진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백제가 아니더라도, 발해 역시도 일본과 교류를 했음은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대규모의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한 고려 말기야말로 저자에겐 일본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적기란 판단이 들었던 듯하다. 조선시대로 이야기가 접어들면서 마치 나는 국사책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삼포개항과 익히 알려진 부산포, 염포, 제포의 개항, 임진왜란 그리고 조선통신사. 하지만 국사책의 경우, 문화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우리에게 일본이 간청해 통신사 파견이 행해졌으며, 그렇게 파견된 통신사가 극진한 대접을 받았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이 책에서는 일본에서 파견된 국왕사로 인해 조선의 민중이 고통받았다는 사실도 서술되어 있었다. 국가와 국가로서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행해진 교역, 하지만 이는 한 세력의 일방적인 우위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즉, 교린관계 역시 궁극적으로 자국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기에 일본 못지 않게 조선도 조선에 파견된 일인들을 극신히 대접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후 단절되었던 국교가 정상화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있었던 국서 개작 사건은 필요에 의해 교역이 재개되긴 하였으나 양국간의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완치된 것은 아님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건드리면 언제라도 터질 듯한 이 상처는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에 양국의 각기 다른 선택과 함께 다시금 표면에 드러났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록에 의존해야만 하며, 아무리 많은 기록이 존재한다 하여도 어느 정도 우리의 상상력에 의존해 복원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지난 날의 기록을 통해 일본과 조선, 양국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저자가 밝히고 있는 자신의 의견은 왠지 모르게 역사를 넘어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왜, 이유없이, 자민족의 이익만을 위해 한국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짓밟는 것일까. 과거의 불행을 몇 번씩이나 다시 반복하는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따지고 싶다.(p 227)라는 저자의 생각이 만약 우리 자신의 보편적인 관점이라면, 이어 저자가 바란 대로, 한일 양국 모두가 믿음과 의리에 기반한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다소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