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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교회사 강의를 들었던 것들을 기억해 내면서, 교회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역사는 과거에는 ‘피의 역사’라는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현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과거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많은 폭력과 전쟁이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피흘림의 역사에는 항상 지배계급(힘과 권력을 가진 자)이 피지배계급(힘이나 권력이 없는 자)의 신앙생활을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이 가장 참다운 기독교의 모습이라는 전제 하에 자신과 신앙과 생각이 갖지 않은 사람들을 없애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와 국가권력이 결합하여 단순한 신앙의 문제를 넘어서 정치적인 문제와 권력다툼에까지 발전된 경우도 많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은 기독교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 불변의 성경을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고, 하나님은 변화하시지 않는 분이라고 믿지만, 기독교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변화 (이것이 항상 진보의 형태, 즉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함에 따라 기독교의 역사도 같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들에는 교리의 변화도 있고 (특히 초기 기독교사에서 이단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교부들에 의해 많은 교리들의 정리가 필요했고), 교회의 지리적인 이동 혹은 확장의 역사가 있고 (예루살렘과 소아시아, 로마 교회로부터 유럽을 거쳐, 전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기독교에서 주도적인 입장을 차지하는 나라들도 변화하고 있다(현재엔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남반구의 기독교 인구가 북반구 인구를 넘어섰다고 한다). 현재까지의 역사를 보면, 앞으로도 이런 변화들은 계속될 거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또 한가지는 사항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앙의 자유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타종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 나라에서 선교에 의해서 새롭게 기독교를 믿는 신앙의 자유 뿐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나라들에서도 국가와 기독교가 분리가 되지 않아 개인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을 찾을 수 없고, 군주와 국가교회의 영향력 아래 그들이 정해주는 신앙 노선을 따라야 했었던 것이 새삼 놀랍다. 동일 국가 내에서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종교의 자유가 1600년 이후에야 나타났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교파주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가 너무나 많은 교파로 분리되어 있는 것에 대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가졌었는데, 이 ‘교파주의’가 어떻게 보면 신앙의 자유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전에는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 권력이나 교회가 힘으로 눌러서 강제로 통합시켰다면, 종교 개혁 이후에는 자신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리나 신앙관에 따라 여러 분파로 나누어 작은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기독교 내의 통합의 운동을 다시 벌이고 있지만, 여러 교파가 나뉘기 시작할 때는 사람들 안에 그러한 열망이 있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도 기독교의 모습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도 많은 교파들이 존재하여 서로의 신앙의 색깔들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었고, 나라마다, 또 대륙마다 그들의 기질이나 문화가 다르듯이 예배의 모습이나 교회의 모습도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나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친구를 따라간 개혁교회 (Reformed Church)의 모습은 말이 안 통함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여자들은 모두 치마를 입고 머리엔 모자를 썼으며 목사는 아주 높은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했는데 예배시간에 다른 성도의 참여는 전혀 없고 말하는 사람은 목사뿐이었다. 찬양은 시편으로 된 찬양만 그것도 오르간의 연주에 따라 부르고 예배 중에 성도들은 한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 문을 나와서는 모두 다같이 모여서 담배를 피며 성도간의 교제를 나눴다. (^^) 내 친구의 말에 의하면 High Reformed Church는 Reformed Church보다 더 심하다고 해서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었다. 이렇듯 모습은 다 다르지만 이 또한 기독교 내에서의 다양성이라 생각하고 각자의 모습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기독교사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새로운 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루터나 칼빈, 재세례파의 종교 개혁은 물론이고 경건주의, 대각성 운동, 부흥 운동, 오순절 운동 등의 자발적 운동 등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항상 영적인 갈망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의 체재에 만족하지 않고 말씀에 비추어 보아 좀 더 성경적인, 좀 더 최초의 기독교적인, 좀 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 열심과 노력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운동들을 이끌어 간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목숨을 내어 놓으면서도 지키려고 했던 그들의 믿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새로운 운동들은 과거에 그러했듯이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기독교가 원래의 모습을 잃어갈 즈음 계속해서 일어날 것 같다. 세계 선교에 대한 시각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지금까지는 서양 기독교 제국들의 식민지화와 함께 한 선교의 움직임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만 생각하였으나, 어떻게 보면 그것도 복음이 제 3세계에 퍼져 나가는데 사용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약국을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착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나 기독교 역사에서 그것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 같다. 선교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계속해서 논란이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 누가(어느 나라 사람이) 가서 전하느냐에 따라 복음을 담는 그릇의 모습은 변해야 될 것이다. 교회의 사회참여 부분도 역시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교회의 진정한 본분과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와, 그렇지만 교회의 세상에 대한 소명과 책임을 잊지 않는 것이 균형을 맞추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계속 발견해 나가고 세상에서 적용해 나가야 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소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처럼 말이다.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바람직하고 올바른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교회 중에, 또한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기독교의 수만 가지의 모습 중에 마음에 드시는 모습의 교회가 있을지, 어떤 교회가 가장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일지... 모든 민족과 방언 중에 찬양을 받기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아마 우리의 다양성을 인정하시어 이런 여러 가지의 모습들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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