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오르규의 25시... 고발문학, 전쟁문학이라고 학창시절 배웠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읽어봤던 25시는 축약되어 있었던 것이었기에 완역된 것을 읽어보니 그때의 느낌과는 좀 다른 느낌.. 더 심화된 감정이라고 할까? 뭐 그러한 것이 느껴졌다. 주인공 요한 모리츠... 루마니아의 농부였지만 미국으로 돈벌러가기 위한 희망도 깨지고, 아내와 살다가 유대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수용소에 감금된 생활을 하고, 다시 헝가리로 도망치고 나서는 루마니아 첩자라고 오해받아 고문당하고, 그 이후엔 독일장교로 활동하는 등 거의 12년 간을 수용소생활을 하게 된다. 순박한 시골농부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자신의 의지가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이데올로기와 민족 간의 전쟁 속에서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당했던 것이다. 번역된 내용이 마치 하나의 그림을 보는 듯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고, 그 안에 담겨진 의미가 다시금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어서 그의 작품이 왜 필독서가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 독주의 시대이지만 이 작품이 씌여진 시대적 배경은 미소냉전체제였었다. 철저히 인간의 존엄성은 무시되고, 오로지 국가적 이념에만 사로잡혀 인간을 기계취급을 하고, 모쓰게 되면 없애버리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면 이리 저리 돌리면서 사용하게 되는.... 책 제목 참으로 잘 지어진 것 같다. 절망의 시간 ''25시'', 인간부재의 시간 ''25시''.... ''25시''는 인간적인 가치가 상실된 냉전체제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타고난 권리인 인간존엄성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어야 한다. ㅎ ㅎ 윤리책에 그리 나왔었던 것 같다. 요한 모리츠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은 인간존엄성에 대해 존중을 받지 못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책을 읽고 나서 게오르규라는 작가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었다. 루마니아 태생, 자원이 풍부한 나라를 망친 폭군들에 대해 작품을 쓰고, 자신의 경험담을 가지고 저항시를 쓴 작가.. 마치 우리 나라의 일제시대 때 활동한 저항시인과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오르규.. 글 참 멋있고, 잘 쓴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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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중반부까지 챠페크의 평범한 인생을 읽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아름답고 따스하며 온화한 온기를 느끼게 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게 도를 넘는다. 작가 게오르규의 나라 루마니아는 참 재수 없는 나라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36년간 침탈당한 것 이상으로 운수 없는 나라다. 이웃나라 모두에게 침략당하고 패전국으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약소국의 수치를 있는 대로 모두 뒤집어 쓴 나라다. 25시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의 망가지는 과정은 참으로 처참하다. 그러나 게오르규는 인간이 전쟁 앞에서 얼마나 쉽고 비참하게 망가지느냐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서구문명사회의 과학화로 인한 획일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에 깔아 놓고 소설을 쓴다. 우리는 과학문명의 해악을 다방면의 교육과 사회비판에 의하여 수많이 들어 왔지만 25시 만큼 확실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정확한 해설을 보지 못했다. 다만 어렴프시 그럴 것이란 묵시적 암시만 받아 왔다. 그런데 25시는 그 정확하고 확실한 해답을 소설을 통하여 보여준다. 자넨 베틀에 걸려있는 실오라기와 같아. 일단 물려 들어가기 시작하면 잡아 당겨 빼내기는 불가능해. 다른 실 가닥과 한데 짜여서 저절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달리 도리가 없어. 기계는 정확한 거야.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해. 자네는 지금 기계 한 가운데에 있어.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없어.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해. 기계는 귀머거리야. 듣지도 보지도 못하지. 그저 일만 해. 그것도 훌륭한 솜씨로 말이야. 인간은 꿈도 꾸지 못할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지. 기다리면 반드시 차례가 돌아올 거야. 기계는 인간처럼 잊어버리는 일이 없거든. 기계는 틀림이 없어. 내 말 알아듣겠나 이는 찰리 채플린의 반대 방향에서 바라본 모던 타임스가 아닌가. 현대 기계화된 세상에서 인간 소외를 채플린이 보여 주었다면 게오르규는 과학이라는 기계의 직조 속에 통합 획일화되는 인간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25시 속에 노자의 시 한 편이 소개된다. 서구 과학화로 황폐화 되어 가는 현대의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의 동양의 사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승리 안에 아름다움이란 없으니 승리를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살육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니라. 그리고 살육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는 자는 세상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이룰 수 없느니라. 이는 조선을 건국하려는 이성계가 적을 쏘아 사살하려할 때 퉁두란이 한 나라를 다스릴 사람은 살인을 하면 통치할 자격을 상실하니 당신은 적의 투구를 고정하는 끈을 쏘아 잘라내 투구를 벗겨라 내가 적장의 머리를 쏘아 죽게 하리라는 고사와 일치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유태인으로 많은 재산을 몽땅 투자해 자신의 유태인이란 흔적을 지웠지만 유태인으로서 체포되고 구속당해 온갖 수모를 겪으며 살아남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구애하는 미국인 병사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구혼을 거절한다. 당신들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를 하나님이나 자연이 창조한 단 한 권뿐인 책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에 관한 한 재판 발행이란 있을 수 없는데도 말이죠. 당신들 나라에서는 인간을 대량생산하고 있어요. 그러니 당신 눈에는 모든 여자들이 똑같이 보일 거예요. ………… … …… …… …… … … …… … … …… … … …… …… …… … … …… …… …… … … …… …… … 우리 사회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다른 어떤 여자로도 그 여인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살하는 사람이 빈번히 생겨나는 거죠.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다른 어떤 사랑으로 대체할 수 없어요. 이 한 마디로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은 물론 과학화로 획일화 된 이 현대사회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 주지 않는가. 세계 2차 대전 후 소련과 서구의 냉전에 대하여 소련은 서구 기계문명에서 뻗어 나온 가장 굵은 가지로 서양식 이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해서 똑같은 과학에 의한 일관성과 획일성에 의한 서양과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내부 투쟁이며 내부 혁명이라고 말한다. 에필로그에서 요한 모리츠는 그가 섬기던 사제와 그의 아들이 구치소에서 살해되는 것을 모두 보았으며 평생 가장 훌륭한 인간으로 모시던 분의 며느리이며 아내인 여자를 만나는 장면 “트라인안 코루카를 아세요?” 에서 고여 있던 눈물을 왈칵 쏟아 놓게 한다. 이 장면에서 누가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게 된 동기는 병원에서 손등에 바코드를 붙여 주는 간호사에게 인간에게 어떻게 바코드를 붙이느냐 항의하자 “이름표로 생각 하세요. 죄송합니다.” 하면서 갑자기 중학생 때 읽은 25시가 생각나 섬뜩 하는 군요. 이상하게 다른 소설에 비해 잘 알려지지도 않고 일반에 회유된 적도 없는 책인 것 같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세계문학전집에 끼어 있던 것인데 요즘엔 별로인 것 같다. 이 정도의 소설이라면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되는 것 아닐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을 읽는 재미를 만끽했을 뿐만 아니라 40여 년간 불확실했던 서구사상의 허구성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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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쉰들러리스트>를 보았을 때도, 얼마 전 <책도둑>을 보았을때도. |
| 책소개를 처음에 접하고는 사실 이 책는 딱딱한 이야기들로 전개될거라고.. 섣부른 판단을 했었다. 하지만 첫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고 마지막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을때까지 정말 한시도 눈을 땔 수 없는 흡입력에 놀랐다. 그러나..... 읽으면서 어렵구나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게오르규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들을 전부 다 이해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25시가 말하고자 하는 기본적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인권이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것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그냥 평범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루마니아의 농부로 등장한다. 그의 비극은 유태인으로 오해를 받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유태인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지만.. 그곳에서 아무리 자기가 루마니아인임을 밝혀도 그 누구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없이 헝가리로 가게되지만 거기에서는 그가 루마니아인이라는 이유로 갖은 고문을 하고..결국은 독일로 보내진다. 독일로 보내진 그는 또한 독일군이 되지만, 군인이 된 그가 프랑스 포로를 구출하여 미군 진영에 이르자 그들은 처음에는 연합군을 위한 영웅 대접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적성국가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가둔다. 그리하여 무려 13년간이나 여러수용소를 거치면서 수난의 날들이 이어진다. 석방과.억류의 계속되는 처절한 요한 모리츠의 행보. 이것이 소설의 전반적인 줄거리이다. 25시....... “구원을 위한 온갖 시도가 소용 없게 되는 순간이지. 구세주의 왕림도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순간이야. 이건 최후의 시간도 아니야. 최후의 시간에서 이미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이지. 서구 사회가 처해 있는 정확한 시간, 지금 이 시간, 바로 이 시간이야.” 모리츠라는 한사람에 관한 비인간적이고 처절한 인권유린화. 그말이 딱 맞는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인권이 얼마나 필요한거인가? 게오르규는 모리츠를 통해서 말한다....서구문명의 발달이....기계화가 인간을 얼마나 바닥까지 치닫게 하는지를~ 그 속에서 인간으로 대접이라는것을 받고 살아남아가는것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보여준다. 기술 노예라는 단어...문명의 이기가 가져오는 것들에 대한 질타.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우린 정말 25시안에 살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구원받을 수 없는 그 처절한 시간. 지금 이 시간속에서 허우적되면서..살아가는 우리도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고....인권을 보호 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있는가? 인간은 기술을 지배하고 살고 있지만 사실은 기술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호되게 꾸짖어주는 듯한 게오르규의 시선. 어려웠지만....조금은 따라가면서 느낄 수있었던것 같다. 무엇이 소중한것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것들이 무엇인지..... 인권이랑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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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기독교도인 농부이다. 하지만 독일 침공과 나치 등 타의에 의해서 유대인 혹은 헝가리인, 나치 독일의 군인으로 오해를 받으며 수용소를 전전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30~40년대의 루마니아는 나치의 독일과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한 소련 사이에 위치하여 수많은 외세의 압력을 받았으며 그 와중에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유대인으로 오해를 받고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그런 와중에 적국 헝가리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내 그는 이내 잡혀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다시 독일로 노동자로 팔려나간다. 하지만 운이 좋게 순수한 게르만 족 혈통인 '영웅족'의 표본으로서 독일 포로 수용소의 경비병이 된다. 그리고 다시 독일의 적국 프랑스로 탈출했지만 적국의 시민으로서 다시 수용소에 끌려다니다 13년만에 석방이 된다.
이 와중에 요한 모리츠의 마을의 신부 코루가 사제의 아들 트라이안은 이러한 상황을 인간이 기계 부품화되고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는 최후의 때를 뜻하는 25시라는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정교회 신자인 게오르규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 말살, 탈 기독교 사회로 나아가는 유럽 사회에 대한 한탄 등을 담고 있다. 게오르규는 이러한 문제를 유물론과 전체주의 혹은 민족주의, 산업화에 의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수용소의 생활이라던가 당시의 상황은 다른 작품 혹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라서 아주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수용소의 생활에 대한 부분은 흥미를 끌었고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시대의 희생양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구시대의 유물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여 흥미로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