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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2023, 창비). 시인이 바라보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그가 주로 다루는 대상들은 보일러공으로서의 일, 가족, 자연과 생명 등. 도시에 살면서 광활한 자연을 꿈꾸는 시인. 뭇생명체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얻는 시인이다. 그러나 도시 생활을 버리지 못하는 노동자,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 그에게 얹혀진 삶의 무게만큼이나 시는 고달픈 일상을 전해준다. 그러나 고달픈 일상에서도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버리지 않으며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었다. -61쪽
--> 밤에 한 남자가 운다. 남들 몰래, 남들이 다 잘 때 놀이터에서 운다. 화자는 울음소리의 진원지를 찾아간다. 어머니를 부르며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묵묵히 바라보다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그 울음소리를 자신만이 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꿈이었을까 의심한다다. 그러나 그 남자를 위로해주고 싶었던 마음을 팔뚝의 소름이 기억한다. 아침에 찾아가 보니 그 사내가 머리 처박고 울던 자리가 동그마니 패어 있다. 남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과 동시에 사내의 처지가 곧 자신의 처지와 같음을 제목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로 드러낸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누군가의 아들인 사내와 자신의 힘겨운 처지가 오버랩되어 슬프면서도 따뜻함을 전해준다.
어젯밤 아무 일 없었다
물탱크 점검차 올라간 옥상 난간 아래 꽁초 소복하다 간밤 누군가 여기 서서 한갑 담배 다 피워낸 거다 나는 그이가 무슨 마음을 짓고 허물며 연기를 들이켜고 뱉었는진 몰라도 바로 여기 서서 십오층 난간 저쪽 거대한 도시 불빛을 아주 오래 지켜보았던 것은 안다 그리고 끝내 주먹 불끈 쥐고, 입 꽉 다물고, 엘리베이터 타고 땅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 잠그는 일 그날 저녁부터 새로 늘어났다. -64쪽
--> 누구나 타인의 불행에 대해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불행은 살펴봐주기 힘들다. 십오층 난간에 서서 담배 한갑을 다 피워냈을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화자가 있다. 타인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이 아니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다행히 끝내 주먹 쥐고 입 꽉 다물고 땅으로 내려왔을 누군가의 목숨을 위해 옥상 문을 잠그려 한다. 타인의 불행에 대한 깊은 공감은 같은 처지가 아니면 어려울 것이다. 화자는 옥상 난간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을 누군가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어떻게든 그의 삶이 이어지기를 응원하고 있다.
가을 저녁
퇴근길 버스정류장 가는 길 뒹구는 후박나무 잎새에 가만히 발 겹쳐보네 구두보다 길고 내 쪽배처럼 생긴 누런 잎 한 발로 딛고 남몰래 휘청거리네
그렇지, 물 위에 딛는 첫발은 늘 마음 먼저 출렁이지 그때 이맘때 이른 저녁 먹고 빈방에 불 켜두고 만삭인 아내 쪽배에 태워 노을 속으로 힘껏 저어 가 잠시 밝은 호수 가운데 두런두런 하노라면 물결이 쪽배를 오두막 가까이 되돌려주었지
그 쪽배 지금 호수 바닥에서 혼자 서늘하겠네 그때 우리 노 놓고 무릎 맞대 무슨 말 주고받았던가 하나도 기억 못하네 가을 저녁, 버스는 더디 오고 호수 쪽 하늘에 자꾸 눈길 빼앗기네 - 8쪽
--> 가을 저녁 퇴근길, 잎이 두껍고 뾰족하고 털이 없는 후박나무 잎이 떨어졌다. 후박나무 잎의 모양이 쪽배와 닮았다. 그 잎새를 바라보며 아내와 쪽배를 타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잎이 휘청거리는 모습은 쪽배에 오르며 물 위에 첫발을 디딜 때의 출렁거림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신혼 초 출렁거리던 마음을 기억해낸다. ‘첫발은 늘 마음 먼저 출렁이지’라고 한다. 누구나 처음은 떨리는 법이다. 그때 아내는 만삭이었다. 호숫가 집에서 아내와 살던 행복했던 출렁거림을 생각한다. 이제 기억마저 가물거리는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거미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내 바람 소긍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맘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아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10, 11쪽
--> 거미는 자신의 배에서 실을 뽑아 거미줄을 만든다. 거미줄은 알을 낳아 놓거나 다른 동물을 잡기 위한 수단이다.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몸의 일부를 밖으로 내어 놓는다. 거미줄은 거미에게 삶 자체이다. 잠자리가 걸려 거미줄이 숲 전체를 흔들어 놓듯이 거미 자신의 삶도 흔들린다. 흔들리면서도 자기 몸을 희생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의 모습을 거미에 투영한 것이다.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외로움이 화자 자신의 처지와 같기에 차마 거미줄을 밀어내지 못한다. 단지 허리 굽혀 일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필사의 그물짜기와 같은 일 속으로 묵묵히 묵묵히 들어간다.
골짜기의 포장도로
생은 하나씩 왕국이다 모든 왕국의 아름다움을 나는 믿는다 언젠가 여름 풀숲 고슴도치 한껏 자신을 즐기는 걸 보았다 눈 맞추자 놈은 방송이 되며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버스 정류장 가까이 장난기 서린 첫 만남 뒤 이슬과 애기또움, 칡덩굴 무성한 왕국의 주인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안개 자욱한 구월 아침 무엇이 서둘러 떠나게 했던 것일까
등에 지거나 가슴 또는 망막에 여기를 담아 생은 때때로 더 먼 곳을 꿈꾸며 서늘한 난간에 선다 그때 놈은 일찍이 맞닥뜨린 적 없는 거대한 적과 마주쳤다 야트막한 경계석을 넘자마자 맨드라미처럼 짓이겨졌다 촘촘한 가시로 무장된 빛나던 왕국은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깨져버렸다 그 순간 전 생애의 가시를 꼿꼿이 세워 우주의 저 캄캄한 무게를 놈은 외롭게 견뎌내야 했던 거다
구월 아침 골짜기 안개 속에선 사람, 포장도로, 죽은 고슴도치도 축축이 숨쉰다 고집처럼 여전히 날카로운 가시 끝으로 무겁게 들어올려 작은 구덩이 속으로 넣는다 붉은빛 공포와 열망을 몇줌 풀잎으로 덮는다 그때 가시를 타고 무언가 건너왔던가 나는 갑자기 추워져 으스스 진저리쳤다 검은 바퀴들 시속 백킬로미터로 질주하는 곳 살아서 고슴도치 아름다웠던 골짜기를 일별하며 -12, 13쪽
--> ‘생은 하나씩 왕국이다’. ‘모든 왕국의 아름다움을 나는 믿는다’. 누구든 사는 동안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모든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화자는 여름 풀숲에서 고슴도치와 눈을 맞췄다. 고슴도치는 이슬과 애기똥풀, 칡덩굴 무성한 아름다운 왕국의 주인이었다. 그러다 어느 구월 포장도로에서 짓이겨져 있었다. 고슴도치의 왕국이 깨져버린 것이다. 가시를 꼿꼿이 세워 우주의 캄캄한 무게를 외롭게 견디며 죽어 있었다. 그 가시를 들어 땅에 묻어주자 가시를 타고 올라오는 무언가에 전율한다. 생명이 다하던 순간의 공포와 열망, 그리고 마지막의 절망과 슬픔까지 느끼게 된 것이다. 고슴도치가 살았던 아름다운 왕국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삶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한계와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천시장
나무 되고 싶은 날은 저녁 숲처럼 술렁이는 노천시장 간다 거기 나무 되어 서성대는 이들 많다 팔 길게 가지 뻗어 좌판 할머니 귤탑 쓰러뜨리고 젊은 아저씨 얼음 풀린 동태도 꿰어 올리는 노천시장에선 구겨진 천원권도 한몫이다 그리고 사람이 내민 손 다른 사람이 잡아주는 곳 깎아라, 말아라, 에이 덤이다 생을 서로 팽팽히 당겨주는 일은, 저녁 숲 바람에 언뜻 포개지는 나무 그림자 닮았다 새들이 입에서 튀어나와 지저귀고 포르르릉 날다가 장바구니에, 검정 비닐봉지에 깃들면 가지 끝에 매달고 총총 돌아오는 길 가지 끝에 매달고 총총 돌아오는 길 사람의 그림자, 나무처럼 길다. -26쪽
--> 화자는 ‘나무’가 되고 싶어 노천시장에 간다고 한다. 저녁 숲처럼 술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녁 숲은 바람에 나무 그림자들이 포개지고 새들이 날다가 가지 끝에 스며드는 곳이다. 나무가 되는 일은 타인과 부딪히며 생을 서로 팽팽히 당겨주는 일이다. 천원권 한 장 사람이 내민 손 다른 사람이 잡아주는 곳이다. 돌아오는 길은 사람 그림자가 나무처럼 길어지며 사람과 나무가 동일시된다. 노천시장의 흥성스러움을 이토록 자연친화적으로 그려낸 시가 또 있을까. 삶을 위한 악다구니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시인에게 모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예찬의 대상이 되는 듯하다.
행복
집 가족 직업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초원의 한 소녀, 카메라를 향해 말한다 그 다음 양떼를 찾아야 한다며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맨발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 집과 가족과 직업이 있는 사내의 일요일 아침 창 밖 벚나무 가지에 새가 찾아와 울어주니 잠깜 행복했다 그러나 소녀여 너는 방금 지평선과 맞닿은 거대한 뗏장구름 쪽으로 갔다 발바닥 콕콕 찌르는 풀들을 하낫 둘, 하낫 둘, 밟고 갔다 달아난 양떼를 그 속에 감추고 있는 중앙아시아를 걸어갔다 - 84쪽
-->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는 시다. 행복의 조건은 상대적이어서 누구다 다를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갖게 되는 삶의 지향점이 다 다를 테니까. 초원의 한 소녀는 집, 가족, 직업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한다. 소녀에겐 행복의 조건이 물질에 있다. 집, 가족, 직업 모두 있는 화자는 행복한가? 물질적 조건이 채워졌더라도 창밖 벚나무 가지에 새가 찾아와 울어주는 것에 잠깐의 행복을 느낀다. 자연과 만난 잠깐 동안의 행복을 생각하면 초원의 소녀 앞에 펼쳐진 대자연 앞에서의 행복감은 굉장히 클 것 같다. 지평선과 맞닿은 중앙아시아의 풀밭을 맨발로 걸어가고 있는 소녀를 부러워하고 있다. 화자에게 행복의 조건은 물질적 소유가 아닌 아름다운 대자연 속 자유가 아닐까.
저녁길
치켜 든 외국인 노동자의 손바닥은 묵은 쌀빛, 가락이 길어 슬퍼 보이는 손을 본다 지금 난 그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한다 다만 눈치챌 수 있다 진눈깨비 희끗한 이 저녁, 한 사내가 다른 사내에게 온몸으로 묻고 있는 것은 환하고 따듯한 방으로 뻗은 길, 아마 그런 것일 게다 내 진작 찾지 못하여 이슥토록 헤매던 길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뻗은 저녁길엔 지름길이 없다, 라고 멀어져가는 그의 등에 또박또박 쓴다 진눈깨비와 어둠에 녹아 안 보일 때까지 -77쪽
--> 보일러공인 시인에게 가난이 늘 따라다닌다. 환하고 따듯한 방이 기다리는 곳,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뻗은 저녁길엔 지름길이 없다고 했다. 쉬운 길을 찾거나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가야 한다. 비록 풍족하진 않더라도 자신의 노동으로 정당하게 벌어 가족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을 것이다. 진눈깨비 희끗한, 추운 저녁 길에서 더디가더라도 꿋꿋이 길을 가는 가장의 책임감이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