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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마지막에 당도해 작가는 독자에게 묻는 듯 하다. 당신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느냐고?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곱씹으며 소설을 읽는다. 그러나 명확히 그 `오래된 정원'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쉽게 답할 수 없다. 어쩌면 그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토일까? 유토피아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들의 희망봉이다. 도달할 순 없을테지만, 동경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다. 우리안의 현실이 척박할수록 말이다.
황석영은 장편 소설 <장길산>, <무기의 그늘> 이후, 15년만에 새롭게 이 작품을 세상에 내 놓는다. 15년이란 세월동안 작가는 80년의 광주 이후의 풍경, 6.29 선언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구권의 사회주의 해체, 89년 방북과 오랜 감금, 그리고 9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거품과 파산을 지켜보았으리라. 황석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 했다. 그렇다면, 이 15년간의 체험 이후 발표된 소설 <오래된 정원>은 이 모두를 아우르려는 시도이자 결국 거시 역사의 파노라마 아닌가? 그러나 이 역사의 파노라마는 정치와 권력, 세계와 변혁에 맞춰진 거대담론을 큰틀로 하면서도 역사의 주체인 개인과 그 삶의 미세한 영역들을 포괄한다. 이 소설을 견고하게 받침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연애의 감정이다.
오현우는 70년대 말 군사정권의 탄압과 80년대 초 광주 사건에 연루돼 수배자가 되어 유랑길에 오른다. 갈뫼라는 시골에서 고등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만나 그의 보호아래 수배생활을 이어간다. 그 둘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훗날 오현우는 구속되고 무기형을 선고받는다. 남겨진 것은 평범한 교사이자 여성에서 수배자의 보호자를 자청하며 무기수의 약혼자가 돼 은결이란 그의 아이까지 가지게 된, 한윤희. 오현우는 독재권력에 맞서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꿈꾼 반체제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반면 한윤희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오염되지 않은 그 시대의 관찰자에 가깝다. 한윤희의 곁에는 물론 80년대 투쟁의 막바지에 헌신하는 친구, 송영태가 있다. 또 송영태의 곁에는 대학생에서 노동현장의 투사로 그리고 결국에는 분신으로 생을 마감하는 최미경이 존재한다.
이 모든 인물들을 엮고 있는 것은 시대적 상황의 험난함이다. 허나, 밑바탕에는 개인과 개인의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그들을 묶고 있다. 그래 약혼자인 윤희에 영태가 연애의 감정을 느낀다면 미경이란 대학 후배는 영태라는 투쟁가를 짝사랑하는 설정이 이 소설의 주요한 애정구도다. 그럼에도 그들은 본분에 충실하다. 송영태가 결국엔 이상적인 사회를 갈망하는 과정에서 남쪽 권력에 맞서 투쟁하다 결국 북한행에 오르고, 최미경이 자본주의 권력에 맞서 노동현장의 조직화와 노조결성에 헌신하다 분신하는 것처럼, 그들의 마지막은 개인보다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사용한다.
"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 <오래된 정원>, 하 308p
소설의 시작은 무기형을 선고받은 오현우가 18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윤희와 자신의 거처인 갈뫼를 찾으면서 시작된다. 갈뫼는 변했고, 윤희는 암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곳을 윤희는 그대로 보존해놓고 있었다. 방 한켠을 차지하는 노트들을 뒤적이자, 윤희가 써내려간 18년간의 기록이 세세히 들어나고, 소설은 그 기록을 그대로 옮겨놓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투쟁의 전면에서가 아니라 투쟁가의 곁에서 좌와 우로 치우지지 않는 균형적인 시각으로 그려낸 18년의 기록은, 한편의 아름다운 연애소설이며 시대에 대한 헌신의 기록이자, 그대로 20세기 말 한국 민주화 운동 과정을 그대로 담아 낸다.
오현우가 18년이란 세월을 캄캄한 벽에 유폐된채 자신의 이념과 투쟁하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밖의 세계는 변했다. 세상에 되돌아와 밖의 세상을 살아냈을 윤희의 삶을 그려보며, 현우는 어떤 회환의 감정에 휩싸일까? 18년간 정치범으로 단 한 차례의 면회도 허락받지 못했던 그 두 연인이었기에, 딸 은결이의 존재는 미궁이었다.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와 오랜 시간 아버지를 알지 못했던 딸 아이와 마주앉은 그를 통해 작가는 소리없이 많은 말을 내뱉고 있다. 이 모두가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 내야 했던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고? 그러나, 그같은 개인들의 반동적인 투쟁때문에 세상은 이만큼 변했고 이만큼 살기 나아졌다고 작가가 이야기 하려 했다 볼 수 있는건가?
작가가 첫장에 옮겨적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구는 이 인물들이 거쳐온 시련이 헛된 것이 아니길 소망하는 듯 하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세상의 이야기속에 빠져드는 건 의미 있다. 과거 민주화 운동만큼 치열한 현실이 우리앞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난제들이 있다. 오현우가 세상에 나와서 흘려보냈던 시간들에 대해 회한의 감정을 품는 건 과거 무엇을 위해 자신이 삶을 바쳤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물론 그것은 세상이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는 반성이기도 하다. 그래 그 고민의 종류가 달라졌을 뿐 여전히 세상엔 그 무엇에 대한 투쟁이 필요하다. 오래된 정원에 이르는 길은 진행형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요, 미래의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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