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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국을 정말 잘아는 것일까 묘하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1949년 이전의 중국과 국교가 수립된 후의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오늘날의 중국의 뿌리인, 1949년 이후의 현대 중국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예컨대 우리는 중국 하면 싸구려 제품, 혹은 짝퉁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억울하다고 한다. 같은 이름의 차(茶)만하더라도 특급, 일급, 이급, 삼급의 품질에 따라 수량과 가격이 달라지는 중국에서 높은 가격이라도 지불하더라도 고품질을 요구하는 일본에게는 고급품을, 단순히 값싼 제품을 요구하는 한국에게는 저급품을 각각 공급해주었는데, 저가의 싸구려 제품을 요구해놓고 왜 고급품이 아니냐고 비난하는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중국인들도 한국의 소위 “바가지 상술”에 따른 저급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많다. 중국인 관광객의 가장 큰 불만은 이른바 ‘싸구려 관광’이다. 관광업체들은 체재비를 줄이고 관광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무료 관광지를 주로 찾고 경기 의정부 등 수도권의 허름한 숙박시설과 값싼 단체 식당을 이용한다. 무리하게 끼워 넣은 쇼핑 일정에 싸구려 음식과 숙박이 겹치면서 중국인 관광객들의 불만이 계속 쌓이는 것. 동아일보와 KOTRA가 올 5월 중국인 관광객 541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관광에서 6000위안(약 108만 원) 이상 쓰겠다는 응답이 31.6%였다. 중국인 관광객은 ‘싸구려 관광’을 선호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관광업계의 잘못된 편견인 셈이다. 실제로 남대문시장이나 롯데백화점, 명동에서 외국인 관광객 중 가장 ‘큰손’은 중국인이다. 곽상섭 한국관광공사 중국팀 차장은 “무엇보다 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사에 대한 정부의 제재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1) 결국 우리는 국교수립 이후 단편적인 만남을 통해 형성된 이미지만 가지고, “중국”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현대 중국 철학을 알아야 하는가 현대 중국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고방식, 즉 오늘날 중국인들을 움직이는 현대 중국 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또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편전쟁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로 서양 문화에 대한 관점이 바뀌면서 일부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공맹지도(孔孟之道)에서 벗어나 점차 서양의 문화, 즉 과학과 민주를 배워야 한다고 외쳤지만, 신해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현대중국철학이라고 불릴만한 철학적 사고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쑨중산[손중산(孫中山), 1866~1925]2)과 더불어 혁명파를 대표하여 개혁파인 캉유웨이[강유위(康有爲), 1858~1927]과 대립했던 동맹회(同盟會)의 장빙린[장병린(章炳麟), 1869~1936]이다. 그는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의 길을 연 후에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반드시 민주공화국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부르주아지 의회 제도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의회의 의원이 “대개 부호의 집안에서 나와 겉으로는 인민을 대표하지만 실상은 정당에 의지하면서 관리와 서로 패거리를 이루어 파벌을 형성한다. 따라서 민생의 이해득실이 아니라 오직 어떻게 사적인 무리의 편의를 봐 줄 것인지만 꾀한다. 그러므로 의원이란 국가가 어리석은 인민을 유혹하여 그 입을 열지 못하게 조이는 자다”라고 지적3)할 정도로 탁월한 통찰력을 가졌지만, 전통 국학자로서 중국의 문화적 유산(遺産)을 고수하는 등 당시 중국 사회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던, 부르주아 주도의 구(舊)민주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한계를 보임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실패 이후 중국 전통의 낡은 문화를 서양의 새로운 문화로 대체하려는 본격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신문화 운동이다. 이 신문화 운동의 창시자로 꼽히는 차이위안페이[채원배(蔡元培), 1868~1940]는 서양의 합리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弱肉强食)’ 논리를 비판하며 진화의 역사적 추세로 본다면 인류가 나아갈 길은 협력이지 경쟁이 아니라고 지적4)하여 신문화 운동이 무비판적인 서양의 문화에 대한 추종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동서양의 문화뿐 아니라 좌우익의 사상에도 적용되어, 흔히 그의 교육이념으로 알려진,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겸용병포(兼容倂包)”의 이념에 따라 좌익(천두슈[陳獨秀])과 우익(후스[호적(胡適), 1891~1962]),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신문화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신문화 운동의 우익을 대표하는 후스[胡適]가 듀이(J.Dewey)의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를 중국에 도입하였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중국철학에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당시로는 혁명적인 <중국철학사 대강(中國哲學史 大綱)>을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중국철학계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는데, 첫째, 그가 기존의 주(注)와 소(疏) 형식의 저술형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장을 큰 글자로, 인용한 경전을 작은 글자로 써 내려가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방식을 도입하였기 때문이고, 둘째, 모든 학파의 사상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철학의 시작을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에서 시작하는, 오늘날 흔히 보는 중국철학사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한편 신문화 운동의 좌익을 이끌었던 천두슈[陳獨秀]는 마르크스주의에 세례를 받았지만, “자본주의가 사회 진화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는 북양군벌이 소멸한 뒤에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양보하여 단독으로 정권을 잡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게 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중국이 비로소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5)는 주장을 완강하게 고수하다가 좌우익 모두의 외면 속에 사라지게 된다. 현대 중국 철학의 두 갈래 흐름 이처럼 과학과 민주로 대표되는 서양 문화를 배우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된 것이 신문화 운동이라면, 장쥔마이[장군려(張君勵), 1887~1969]의 “인생관”이라는 강연을 계기로 촉발된 과학(科學)과 현학(玄學)의 논쟁은 앞으로 중국철학의 방향을 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 논쟁 이후 중국철학은 크게 두 갈래 흐름, 즉 천두슈[진독수(陳獨秀), 1875~1942], 취추바이[구추백(瞿秋白), 1899~1935] 등의 마르크스주의와 량수밍[양수명(梁漱溟), 1893~1988], 펑유란[풍우란(馮友蘭), 1895~1990], 슝스리[웅십력(熊十力), 1885~1968], 머우쭝산[모종삼(牟宗三), 1909~] 등의 현대신유가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중국의 현실에 맞춰 변형시키면서 발전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수용한 리다자오[이대쇠(李大釗), 1889~1927]의 영향이기도 하다. 민족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는, 중국적 마르크스주의를 제시한 리다자오[李大釗]는 중국 현대사에서 빼먹을 수 없는 인물인 마오쩌둥[모택동(毛澤東), 1893~1976]에게 사상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불행하게도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에 군벌(軍閥)인 장쭤린[장작림(張作霖)]에 의해 처형되어 더 이상 중국철학사에 발자취를 남기지 못하였다. 신문화 운동기 이후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은 마오쩌둥[毛澤東]으로 공산혁명과정을 이끌면서 마르크스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끼고, 소위 서양문화의 무비판적 수용인 “전반서화(全般西化)”를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의 특징과 서로 결합하고 일정한 민족적 형식을 거쳐야 비로소 쓰임새 있어지면, 결코 주관적 공식적으로 응용할 수는 없다6)고 하면서 중국적 마르크스주의를 제창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 노력은 <실천론(實踐論)>과 <모순론(矛盾論)> 등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스승과 군주의 지위를 겸하게 된 마오쩌둥[毛澤東]이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제정하여, 정권을 잡은 지 5년 만에 성급하게 반봉건(半封建) 반식민지(半植民地)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가는 과도기로 설정했던 신민주주의 혁명의 단계가 완료되었음을 선언함으로써 군주의 입장에서 좌경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 한편, 현대신유학은 크게 육왕학파(陸王學派) 계열의 신이학(新理學)과 정주학파(程朱學派) 계열의 신리학(新理學)으로 나눠지는데, 신리학(新理學)을 대표하는 학자가 진위에린[금악림(金岳霖), 1895~1984]와 이 책의 저자인 펑유란[馮友蘭]이다. 진위에린[金岳霖]은 수리논리학을 중국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는데, 서양 근대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엄밀성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책 <윤리학>을 기하학의 형식으로7)저술했듯이 진위에린[金岳霖]도 <논도(論道)>를 논리학의 형식으로 저술하여 그 정밀함을 자랑하였다. 펑유란[馮友蘭]은 후스[胡適]의 <중국철학사 대강(中國哲學史 大綱)>에서 출발하였으나 이를 뛰어넘는, 7권으로 된 <중국철학사 신편(中國哲學史 新編)>을 남긴 것만으로도 중국철학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 외에도 성리학의 주요 문제를 근대 논리학의 형식주의와 형이상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새롭게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이학(新理學)의 대표적인 학자이면서 현대신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량수밍[梁漱溟]은 독특한 위치에 있었는데, 전통 학문, 특히 우리가 흔히 양명학(陽明學)이라고 부르는 육왕학파(陸王學派)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도 신문화 운동에 찬성하고 참여하였다. 특히 그가 단순히 과거의 양명학(陽明學)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당시 물밀듯이 유입되는 서양문화에 의한 충격에서 깨어나 서양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과 중국문화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의미 부여/역할 제시를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신이학(新理學)을 대표자로는 슝스리[熊十力]가 있는데, 대승공종(大乘空宗)과 대승유종(大乘有宗)에 담긴 형이상학적 관념론에 성리학적 관념론, 그리고 서양의 변증법 개념을 독창적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존재론을 제시하였다. 비록 현대신유학자들이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의 융합을 통한 중국철학의 현대화를 지향하고 있다지만, 대체적으로 진위에린[金岳霖]와 슝스리[熊十力]가 각각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에 치우친 것에 비해, 펑유란[馮友蘭]은 그 가운데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쓴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 책을 저술하고 마지막 불꽃을 꺼트린 노학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옥의 티 p. 97 제2절 후스는 미국 철학 – 실험주의를 도입했다. ⇒ 제2절 후스는 미국 철학 – 실용주의를 도입했다. (같은 페이지 하단에 “미국 철학의 주류는 바로 실용주의, 즉 프래그머티즘인데~”라고 기술되어 있음) p. 337 장쥔마이(張君 ) 155-161 ⇒ 장쥔마이(張君勵) 155-161 힘쓸 "려(勵)"와 같은 한자는 고등용 한자인데, " "로 표시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편집과정에서의 착오가 아니었을까. --------------------------------------------
1) “[중국, 알아야 전략 세운다]<3> 외교의 사각지대 – 민간외교”, <동아일보> 2010.12.16. 2) 중산[中山]은 쑨원[孫文]이 일본에서 사용하던 가명(假名)이지만, 지금 중국에서는 쑨원[孫文]보다 쑨중산[孫中山]라는 이름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3) 펑유란[馮友蘭], <현대중국철학사>, 정인재 옮김, (이제이북스, 2006), pp. 48~49 4) 펑유란[馮友蘭], 앞의 책, p. 80 5) 펑유란[馮友蘭], 앞의 책, p. 128 6) 펑유란[馮友蘭], 앞의 책, p. 179 7) 펑유란[馮友蘭], 앞의 책, p. 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