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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1844년 4월부터 8월까지 집필하였다고 기록한 <경제학-철학 수고>가 주목받은 이유는 청년 마르크스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구체적인 사회현실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고 이러한 ‘삶’이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의 소외를 통해 어떻게 ‘낯선 삶’으로 전화되며, 이러한 소외의 극복이 어째서 요청되는가를 인식할 수 있다.(228쪽)”라고 번역하신 강유원님은 적고 있습니다. 책은 세 개의 초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초고에서는 노동임금과 자본이윤 그리고 지대를 정의하고 노동이 소외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초고에서는 사유재산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세 번재 초고에서는 사유재산과 노동, 공산주의, 생산과 분업 그리고 화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일반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독일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경우 읽는 호흡이 더디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특히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의 사유의 결과를 정리한 글을 의미를 깨쳐가며 읽어 내려가는 것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책읽기를 마치고서도 청년 마르크스가 전하려는 바에 근접조차 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남습니다.
요즘 같으면 경제학에 관한 책에서는 구체적인 경제활동과 관련된 구체적 자료를 통하여 결론을 이끌어내서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만, 경제학분야의 화두를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접근하고 있어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1844년 당시의 사회구조와 현재의 사회구조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서 현재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먼저 “노동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규정되며, 통상적으로 비천한 인간생활, 다시 말해서 짐승 같은 생존에 부합하는 최저임금이다.(14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당시 장원제도가 무너지면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산업사회가 발달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임금은 노동자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 결정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임금은 자본가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해가면서 다양한 직업들이 생겨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업의 임금은 노동자의 경쟁정도에 따라 결정되므로 노동임금은 점진적으로 상승되어왔을 뿐 아니라 짐승같은 생존에 부합하는 수준이 아니라 노동자들 역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수준의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움직여왔습니다.
노동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본과 노동의 충돌이 격심했던 시기에는 투쟁을 통하여 노동임금이 결정되기도 했습니다만, 요즘에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협상을 통하여 임금을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공장이 수익을 내지 못해 문을 닫게 되면 노동자 역시 실직하여 수입원을 잃게 되기 때문에 적정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분업에 대한 청년 마르크스의 시각은 적절치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업은 인간 사이의 경쟁뿐만 아니라 기계 사이의 경쟁까지도 초래한다. … 이는 과잉생산이 되며, 그로 인해 노동자 대부분이 실직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임금이 가장 비참한 최소임금으로 축소되는 것으로 귀결된다.(19쪽)” 하지만 분업은 노동효율을 전문화하고 극대화시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 과실의 일부는 노동자에게 부여되기 때문에 오히려 임금이 많아지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분업과 유통방식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생산이 증대되면 노동자는 소외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첨예하게 될 것이며, 노동자는 투쟁을 통하여 노동의 가치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이 발전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강도가 약해진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초고에 나오는 사유재산의 관계는 노동과 자본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세 번째 초고에서는 사유재산과 공산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의 현존형태는 “그 자체로서” 지양되어야 할 자본이며, 노동의 특수한 방식이 사유재산과 그것의 인간 소외적인 현존의 해로움의 원천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지양된 사유재산의 적극적 표현이며,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사유재산이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임박한 미래의 필연적인 형태이며 에너지로 충만한 원리이지만,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발전의 목표-인간적 사회의 형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적용하였던 공산주의는 구 소련과 동유럽국가들에서 실행에 옮겨졌지만,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서 붕괴하고 말았으며, 남아있는 나라들에서도 자본주의적 요인을 접목하여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핍진적 삶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그것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위력은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 그런 까닭에 우리는 마르크스를 우리의 사회적 삶과 그것에 배태되어 영위되는 개인의 삶에 관한 통찰의 출발점으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정리한 번역자의 뜻대로 19세기 유럽의 사회구조를 배경으로 탄생한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사유물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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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철학 수고’(칼 마르크스)와 ‘새로운 자본주의가 온다’(스튜어트 L. 하트) 거의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이 둘을 왔다갔다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마르크스의 경우는 완전히 자본주의 밖에서 대안을 생각하고 있고, 다른 한권은 완전히 지금의 자본주의 내에서 대안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경제학-철학 수고를 다시 읽는 독자라면 마르크스 혹은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왜 이상주의자로 불리웠는지를 새삼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른 해설서를 읽는 것과는 달리 적나라하게 마르크스의 강력한 메시지를 육성으로 듣는 효과인 듯 하다.(수고를 옮기는 책의 매력은 삭제된 부분 혹은 작은 메모까지도 번역되어 독자에게 전달하려 함에 있지 않을까. 마치 유명한 작곡가의 오래된, 수기로 음표를 그려넣은 원본 악보를 보는 듯 한 기분이 들어 저자와 더욱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너무도 빠르고 깊게 스며든 자본주의를 뒤짚는 것은 일시적일 가능성이 높고, 혁명 자체가 세를 넓히기에는 세력의 권력계급이 낮았으며(자각 노동자 위주) 자본주의자들과 대립, 갈등구도를 심화시켜 정경유착의 결과인 정치적 대립과 유혈사태라는 더욱 큰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 때문에 최근에는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비관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시민을 양상시키기 쉬웠을 것이다. 이가 지속가능한 사회체계가 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과연 이런 사유와 작은 시도들, 그리고 우려 때문이었는지는 의심은 가지만 이제 자본주의 내에서 기업을 회유하기에 이른 현실적 대안(새로운 자본주의가 온다)들은 제도 내에서 열광을 받는다.(그 많은 유명 자본가와 -자본과 유착되어 있는- 정치계의 추천사들을 보라)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화폐경제를 위주로 하는 대안을 생각하는 이러한 담론들을 보다 열린 기준으로 접할 필요가 있다. 스튜어트 L.하트처럼 화폐경제의 중심에 선 기업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마르크스처럼 화폐경제의 권력인 자본가를 없애는 혁명적 제안을 하는 경우에서조차 지속가능한 좋은 미래를 위한 환경과 체계에 대한 고민과 함께 비판수용해야한다는 것이다. 스튜어트의 경우는 개인적 화폐증대의 목적에 부합하는 척 환경과 세계빈곤 문제에까지 전제에 끄집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회유적이고 윈윈하는 전략으로 옹호받을 수 있었던 듯 하다. 여기에 귀 기울이는 기업이 약간 바보스러워 보이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소비자와 기업의 이익까지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성공적인 전략임에 틀림없기에 동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현 시점에서 '경제학-철학 수고'는 마르크스의 초기작이며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문제점을 통감하는 그 시기에 순간적이고 단호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론이었지 현재 자본주의가 발생시킨 여러 부가적인 자연의 문제들까지를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비롯한 세계사상의 흐름을 공부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는 이후 마르크스 저작과 사상의 기본개념들이 등장하는 저작이므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잠깐 우리는 마르크스를 왜 읽고 독서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모든 독자가 마르크스의 초기(청년기) 와 그 이후 등의 그의 일대기적 사상의 흐름을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마르크스를 교재로 접하기 시작해서 그의 사상을 아는 것은 일종의 교양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자본주의 밖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막시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정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약본 내지는 정확하다고 알려진 백과사전을 뒤적거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의 저작을 읽는다는 것은 각각 개인의 독자에게 주관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세계에 대한 각각 다른 생각과 의견을 탄생시킨다는 데 의미가 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을 비롯해 ‘자본’ 등 그가 비난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늘 살아내고 있는 세계의 주요법칙이기도 하다. 그러한 자본주의가 어떤 관점에서 비난을 받아왔는지 그 비난은 논의와 합의를 거쳐 자본주의를 옳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왔는지를 고민해보는 것은 세계를 향한 비판적 수용자의 태도를 끌어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내놓은 실천대안인 경제학-철학 수고가 그저 공부할 대상만이 아닌 나와 나의 주변을 바탕으로 쓰여진 내용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사적인 독서를 하기를 권하고 싶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필두로 한 주장은 마르크스 이전의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는 철학에서 이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여러 해석들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모든 철학, 아니 모든 학문이 탁상공론이 아닌 실천적 영역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서는 비평계와 제작계의 양립이 아닌,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다양한 세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고찰도 더 활발하게 교류되었으면 좋겠고, 교육자를 양성함에 있어서도 다양한 교육철학과 윤리에 관한 연구와 교육자 양성 측의 결합연구, 또 피교육자와 피교육자의 환경에 대한 연구를 하는 측과의 교류연구와 적용이 더 눈에 띄게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경제학-철학 수고’에서는 자본주의 하에서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극화될 수 밖에 없는 예가 다수 등장한다. 사회가 부유해지면 부유해지는대로 부유한 이들만이 금리로 생활할 수 있으며 사회가 빈곤해지면 빈곤해지는대로 생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고통을 받는 이들은 빈곤한 이들이 된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없는 것 같아서 자본주의 체제에 보다 회의가 들고 GDP의 목표도달 혹은 유지하려는 현 체계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언급을 무시하거나 반박할 수 만은 없을 듯 하다. GDP가 아닌 다른 기준에서의 사회발달, 화폐를 제외한 다른 면에서의 가치창출과 고가치화 등의 인식론적 전환의 계기가 없다면 빈부격차와 빈곤층 확대(스튜어트 L. 하트에 의하면 빈곤한 계층을 위한 말라리아 등의 질병치료제는 그 개발조차 다양성이 제약된다고 한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기업과 산업이 피라미드 상층부의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이기 때문이다.)는 더욱 극화될 것이 확연하다. 이처럼 마르크스를 지금 읽는 것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보다 객관적으로 그리고 보다 극단적으로 진단하고 미래를 예상하고 지금, 바로, 당장 실행을 필요로 한다는 인식의 전환에 고무적이라는 데 의미가 가장 크다.
이 책의 뒷표지를 살며시 펴 보면 짧은 문구가 적혀있다. 출판사의 발간사 정도로 들리는 이 문구는 매우 공감이 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7년 우리가 발간했던 이 <경제학-철학 수고>를 20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발간하는 까닭은, 이 책이 저술되었던 1844년이나, 한국사회에서 처음 발간된 1987년이나, 지금이나, 인간사회의 저 심연에 자리잡고 소멸하지 않는 악마적인 힘, 그 힘이 존재하는 한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는 그 힘과 대결해낼 수 있는 사유의 무기로써 그 역할을 온전히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사람의 형태를 자꾸 떠올리려고 하지만 이는 현체제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추구되었다가 알게 모르게 타인의 삶을 저격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이 짧은 발행사는 <경제학-철학 수고>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가장 예리한 눈이며 사유와 함께 실천을 끄집어낼 수 있는 인식에 쿵!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여전히 유효한 자본주의 대안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좀 뒤로 물러 서서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진화된 공산주의(여성공유등의 개념을 가진 인간의 유적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가 아닌 인간의 자기 소외인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을 통한 완전히 해방을 위한 공산주의) 혁명으로 자본가를 없애는 시스템 변화는 정말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마르크스를 비롯한 지금까지의 사상가들의 의견을 모두 새겨 공부하고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해 충분히 연구한 학자들의 좋은 대안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제 준비된 시민, 실천할 수 있는 시민만 있다면 혁명만큼의 순식간에 뒤짚는 시간적 절약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 가능성은 희망적이다.
자본가도 시간과 화폐를 투자하여 더 많은 화폐를 획득하고 그 결과로 노동자를 고용하는 직업을 가진 이다. 이들의 노동은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신성한 인간존재증명으로서의 노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폐와 상품 뿐 아니라 그 노동에서조차도 소외된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더 이상 노동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동이 아닌 것이 된다. 자본가의 착취를 하나의 노동으로 본다 하더라도 계급간의 화폐 분배의 공평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자본주의는 자본가를 위한(피라미드 소수의 상층부) 사회체계라고 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사유재산과 자본가를 없애야 한다는 그의 의견보다는 그러한 그의 주장이 있었던 논지의 과정이 지금 우리에게는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에 더해서 더 나은 대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극도의 소외된 프롤레타리아는 또 다른 자본주의 혹은 파시스트 계급을 재생산할 우려가 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노동분화를 없애고 노동의 생산물을 노동자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삶에서 그가 예상한대로 자유로운 인간해방이 이루어질지도 의문일 것이다. 확정적인 그의 주장에 거부감이 들수도 있지만 사실 그러한 극단적 실천의 시도가 없는 한 지금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지 그것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구인 모두가 밀어도 움직일랑 말랑 하는 큰 바위처럼 우리는 자본주의에 너무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의 대안에는 진심으로 변화를 원하는 사상가의 신념이 들어있었던 뿐이다. 그 자체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마르크스에게서도 대안의 접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를 해체할 수 있는 정신에 대한 담론은 사실 실천과 다른 측에 있다 하여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 그 실천이 이루어지려면 인식의 ‘거대한 전환’이 필요하고 혁명 이후에도 꼭 옳은 신념과 세계에 대한 해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지속가능한 대안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은 일단, 마르크스의 자본가에 대한 관점이 극단적이며 무작정 비판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믿는 것과 자본주의 내에서 누구의 의견이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시각을 키우는 것,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정신적 발판, 예를 들어 환경과 지속가능한 이타적 삶의 희망에 대한 인식체계의 길을 닦아 나아가는 것, 자본주의 내의 대안과 밖의 대안을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조화시켜 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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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인 강유원씨가 직접 찾아내어 확인, 수정하여 홈페이지에 올린 오역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읽는 이들이 오독하지 않도록 이를 널리 알려달라하시더군요. "우리는 또한 이제 비로소 사유재산이 어떻게 인간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완성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세계사적 위력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우리는 또한 이제 비로소 사유재산이 어떻게 인간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완성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세계사적 위력이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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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청년 시절 현실적인 삶을 계급투쟁의 구도로 삼아 정치경제학적 관점을 철학이라는 아우라 속에서 깊은 사유와 통찰력을 갖고 세 차례에 걸친 초고(草稿)를 통하여 그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보아진다.당초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의 형식으로 전개될 법학과 국가학에 대한 비판을 예고하고 이는 국민경제학 비판초고에 불과함을 적시하고 있다. 첫 번째 초고에서는 노동임금,자본의 이윤,지대,소외된 노동으로 대별하고 있다.노동임금을 보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규정된다고 밝히고 있다.자본가는 노동자가 자본가 없이 생존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노동자 없이 생존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데,노동자들에게 자본,지대,노동의 분리는 치명적으로 보며 인간에 대한 수요는 상품과 동일하게 인간의 생산을 규제한다.노동자는 자본가의 손해와 더불어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며 노동가격은 생활수단의 가격보다 훨씬 더 불변적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자본의 이윤을 살펴 보면 자본은 노동과 생산물에 대한 지배권이며 자본의 이득은 전적으로 사용된 자본의 가치에 따라 규제된다고 한다.부,근면,인구가 증가할수록 금리는 더욱 하락하고,그에 따라 자본가들의 이득도 감소한다.지대에 들어가기 전에 지주의 권리는 약탈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세이),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 수확하고 싶어 하며,토지의 자연적 생산물에 대해서조차 지대를 요구한다.즉 지주는 임차인에게 사용을 임대한 자연력의 산물,토지의 사용에 대하여 지불된 즉 가격 을 간주되는 독점가격이기도 한다. 소외된 노동을 보면 노동자가 상품으로,가장 비참한 상품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노동자의 빈곤은 생산의 힘과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점이다.특히 경쟁의 필연적 결과는 소수의 수중으로 자본의 축적,그에 따라 가공할 만한 독점의 재현이라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두 번째 초고에 들어가면 사유재산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밝히고 있다.사유재산의 관계는 노동,자본의 연관이며 이것들이 경과해야 하는 것은 양자의 직접적 혹은 매개된 통일,양자의 대립,자기 자신에 대한 대립,적대적인 상호대립으로 대별되는데 자본과 노동은 최초엔 하나로 시작했으나 서로 분리되고 낯설어진다해도 서로를 고양시키고 촉진한다고 한다.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에게서 현존을 빼앗으려 하며 예외적이긴 하나 자본가가 노동자로 전락하고 노동자는 자본가로 변신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세 번째 초고에는 사유재산과 노동,사유재산과 공산주의,욕구,생산과 분업,화폐로 대별하고 있다.사유재산의 주체적 본질,대자적으로 존재하는 활동으로서 주체,인격으로서 사유재산은 노동이다(아담 스미스)아 모든 부는 토지와 농경으로 해소된다(케네)고 말하고 있으며 모든 부는 산업적 부,노동의 부가 되었고 산업은 완성된 노동이며 산업 자본은 사유재산의 완성된 객관적 형상이다고 맺고 있다. 사유재산과 공산주의를 보면 사유재산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상존하고 있지만 객관적 측면에서만 보면 노동이 사유재산의 본질이며 자체로서 지양되어야 할 자본이며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적극적 표현이며,무엇보다도 보편적 사유재산이며 정치적 본성을 따르고 인간의 자기 소외인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으로서 인간에 의한,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욕구,생산과 분업을 보면 인간의 본질적 힘의 새로운 실증과 인간적 본질의 새로운 풍부화,사유재산 내부에서 반대의 의미로서 타인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데,타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제하기 위함이고 새로운 의존 속으로 옮겨 놓기 위해서이며,새로운 향유 방식으로 새로운 경제적 파멸의 방식으로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분업에는 아담스미스,세이,스카르벡,밀등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밝히고 있다. 화폐는 모든 것을 구매하는 속성과 자기 소유화의 속성이 있으며 우월성을 띠고 있다.화폐는 본질의 전능성과 전능한 존재로 간주된다.화폐는 욕구와 대상,인간의 생활과 생활수단 사이의 매개물이다.화폐의 본질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는 분은 셰익스피어이다.자신의 존재와 능력은 개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최악에서 최선으로 연결시켜 주는 마법의 24개의 다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에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업적을 철학적 관점에서 경제학을 바라보고 있다.헤겔의 현상학과 논리학에서 전개된 변증법의 상술에 대해 오류를 끄집어 내어 비판하고 있으며 포이어바흐에겐 진정한 유물론과 실재적 학문을 정초했다고 제시한다. 마르크스의 국민경제학을 철학적 관점에서 통찰하고 사유한 그의 초고를 통하여 현존하는 우리의 사회적 삶과 사회적 삶에서 배태되어 영위되는 개인의 삶에 관한 통찰의 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자본(가),노동(가),토지,대지,이윤,이득,욕구,생산,분업등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나가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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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마르크스와 관련 미리 구입하여 읽어 볼 요량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강유원이 번역을 하였고 그의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절판되어 가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와 관련서적들을 절판되기 전에 구입할 목적으로 이번 책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그 얼마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이번 책이 절판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편으론 뿌듯한 마음과 함께 양질의 번역서들은 계속해서 출판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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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당시 프로이센의 입헌군주제를 비판할려다 보니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국가나 법에 대한 진정한 비판은 그것의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한 분석, 즉, 대중의 물질적 삶의 조건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하여 '경제학 철학 수고'를 쓰게 된다. 당시 경제학은 노동자의 궁핍화와 자본의 축적에 대한 현상을 파악할 뿐, 그것의 원인이 되는 '사적소유' 및 이와 관련된 개별적 사태들의 연관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한다.
●헤겔 비판 이전에 잠깐 봤듯이 헤겔의 존재는 "사유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대상화 되는 것이란 사유화 되는것 즉, 물적인게 없어지는 것(=비대상적)을 말한다. 이에 따라 헤겔은 인간을 의식으로 존재하는 "비대상적인 존재"로 간주하여 자기가 되는 과정은 내적인(=의식적인) 외화 (=부딪혀 소멸되는 과정)통해 이루어 진다고 한다. 또한 인간은 노동에서 자기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되, 여기에도 물적 요소(=생존의 필요에 의한것)는 배제되어있다. 반면, 마르크스의 존재는 사유에서 독립해 있는것 즉, "외부와의 관계" 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대상화 되는 것이란 물질적으로 되는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인간은 자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자연에 형태를 만드는 즉, 자연적 존재임을 표명한다. 그렇기에 자연적 욕구를 가지며, 그것의 충족을 위해서는 자기 외부의 자연(자기 외부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자연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노동을 한다.
정리하면,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외화를 통해 완성이 이루어짐은 받아들이지만, 존재성을 내적으로만 규정짓는 부분을 비판한다. 같은 관점에서 노동은 자기완성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현실적인 생존을 위한 작용임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노동을 단지 추상적인 자기 완성의 과정으로만 보는것과 노동에 의한 소외는 간과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소외된 노동 마르크스는 헤겔의 소외 개념을 경제적 관점에 적용하여, 자신의 노동에 대해 낯설어지는것을 "소외된 노동"이라 칭한다. 노동은 인간이 생존과 자기 완성을 위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해졌다. 그러나 노동주체와 생산수단이 분리됨으로 인해 노동을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팔수 밖에 없다보니(노동의 상품화), 생산물의 소유권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있게 되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결과물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즉, 원래 목적이었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노동자는 생산물로 빠져나간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먹어야만 하며, 먹고 생존하기 위해 노동자로서 일해야 한다. 곧, 노동은 자율적인 자기 완성의 과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강제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속에서 불행을 느끼고, 육체는 쇠약해진다. 반면,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때에는 편안하고, 육체를 회복한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인지하며, 노동 속에서는 자신에 대해 낯설음을 느낀다. 이렇게 노동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고 상품화 되어 팔렸기 때문에 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고, 노동자 이외의 다른 인간에게 속하게 된다. 다시말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인해 노동의 소외가 발생되고, 이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사적 소유(사유재산)를 지양함으로써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되찾을수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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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부여에 실패한 사회주의는 자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며 많은 사람들은 우려를 표명했다. 한때 자본주의 체제보다도 우월한 듯한 인상을 풍겼던 사회주의는 이러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어느 순간 무너져 버리고야 말았으니, 각국이 택한 형태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였는지에 대한 고찰보다는 위험한 하나의 시스템을 제거했다는 기쁨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독주를 시작한 자본주의가 마냥 바람직한 형태의 사회만을 건설해온 것은 분명 아니다. 하나의 국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고려해도 심각한 사회 이슈가 될 수 있는 경기 침체, 점점 더 극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등은 이대로 계속 나아가도 좋을까를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게 묻게끔 만든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바로 모두가 소외 당한다는 점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을 부르짖는데, 그들 특권층의 성공도 실은 영원하지가 않다. 그들 역시 언젠가는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고 자신이 소외시켰던 이들의 뒤를 따라 외면당하는 뼈아픈 경험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은 구닥다리 마냥 치부되곤 했던 마르크스가 예측한 많은 내용과 같은 맥락을 하고 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단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대립만이 아니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가장 주목하기 쉬운 소재이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잘 활용된 정도가 크기에 여타 다른 영역보다 부각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에만 매몰되는 것은 어쩌면 우물 안에 갇혀 하늘을 바라보는 개구리와도 같지 않을까 한다. 마르크스의 머리 위에는 그보다 더 넓은 하늘이 존재했었다. 어쩌면 첫 번째 초고는, 전형적인 마르크스의 사상을 연상시키기에,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 아닐까 한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축 간의 긴장, 대립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같을 수가 없는 노동과 자본의 속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하겠다. 왜 노동자들은 절대적으로 수가 많음에도 자본가를 이길 수 없는가. 마르크스는 첫 단락에서부터 이 슬픔의 원인을 명쾌하게 적어나갔다. 노동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규정된다. 자본가들에게 있어 승리의 필연성. 자본가는 노동자가 자본가 없이 생존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노동자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자본가들 사이의 단결은 관습적이고 효과적이지만, 노동자들의 단결은 금지되어 있고 노동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 밖에 지주와 자본가는 그들의 소득에 산업의 이익을 추가할 수 있지만, 노동자는 자신의 근로소득에 지대도 자본의 이자도 추가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격심하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에게 자본, 토지 소유 그리고 노동의 분리는 필연적이고 본질적이면서 파괴적인 분리이다. 자본과 토지 소유는 이러한 추상 속에서 존속할 필요가 없으나, 노동자의 노동은 그렇지 않다. –p13 수요가 생산을 결정짓고 수요와 공급에 의해 상품의 가격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격을 언제라도 변화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닌 무언가로 인식한다. 그러나 노동자의 임금은 불변성이 강하다. 좀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강도의 노동을 행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노동자들의 몫까지 내가 행하는 게 최선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하나같이 이와 같은 생각을 품었다면, 보다 많은 일을 강제시키려 들지 않아도 노동자들은 알아서 극심한 노동강도를 제 어깨에 짊어질 것이다.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이 전세계에서 정당화되어 온 데에는 노동자들의 이와 같은 자발적(?)인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안타깝게도 노동자들이 노동에 더욱 헌신적이 된다 하여 제 노동의 의미에 눈을 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충분히[?] 분업화된 현 사회체제의 특성상 자신이 하는 노동의 주인다운 면모를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즉,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현존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경제나 노동, 한 분야에만 국한되지 아니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들과 그들이 제공한 노동에 대한 일종의 소유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권력을 지니게 된다.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보이는 태도는 노동자들과는 달리 이론적이다. 어쩌면 지난 날 그리고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엿볼 수 있는 정치적인, 색깔론적인 공세는 바로 노동자에 대해 우위를 유지코자 자본가가 보이는 태도와 비슷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승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물질이 중시되는 오늘날을 돌이켜 보면 진정한 승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마르크스 역시 이 사실에 대해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상품화에 대한 기술이었다. 생산은 인간을 상품으로, 인간 상품으로, 상품이라는 규정 속에 있는 인간으로 생산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규정에 대응하여 인간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비인간화된 존재로 생산한다. –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부도덕, 불구, 우둔. – 그것의 생산물은 자기의식적이고 자기 활동적인 상품 … 인간 상품이다 … -p107 자본가들의 승리에 도취된 태도는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마저도 하나의 상품으로 양산해낼 따름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물질만능주의를 연상시킨다. 화폐를 통하여 나에게 존재하는 것, 내가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 다시 말해서 화폐가 구매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 화폐 소유자 자신이다. 화폐의 힘이 크면 클수록 나의 힘도 크다. 화폐의 속성들은 나의-화폐 소유자의-속성들이요 본질력들이다. 따라서 나의 존재와 능력은 결코 나의 개성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못생긴 사람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여자도 사들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추하지 않은데, 추함의 작용, 사람을 겁나게 하는 힘은 화폐에 의해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나 개인의 특성에서 보면-절름발이지만, 화폐는 나에게 24개의 다리를 만들어 준다. 따라서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 나는 사악하고 비열하고 비양심적이고 똑똑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화폐는 존경받으며 따라서 화폐의 소유자도 존경받는다. 화폐는 최고의 선이며 따라서 그 소유자도 선하며, 그 밖에도 화폐는 내가 비열하기 때문에 겪는 곤란에서 나를 벗어나게 한다. 따라서 나는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는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화폐는 모든 사물의 현실적인 정신이니, 어떻게 그 소유자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소유자는 똑똑한 사람들을 살 수 있고, 똑똑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그 사람들보다 똑똑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마음이 갈망하는 모든 것을 화폐를 통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는 인간의 모든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나의 화폐는 나의 모든 무능력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화폐가 나를 인간적 삶에 결합시키고, 사회를 나에게 결합시키고, 나를 자연과 인간에 결합시키는 끈이라면, 화폐는 모든 끈들의 끈이 아니겠는가? 화폐는 모든 끈을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화폐는 보편적인 절연 수단이지 않겠는가? 그것은 사회의 결합 수단이자 화학적 힘인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분리화폐이다. -p176~178 화폐가 제공하는 엄청난 권력의 힘은 익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이다. 전혀 용감하지도 않은 이가 용감한 자로 탈바꿈할 수 있고, 심지어 존경까지도 이끌어낼 수도 있는… 이보다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문장도 없을 듯하다. 안타깝게도 그 권력이 속을 들여다 보면 텅빈 강정과도 같다는 사실에 아직은 많은 이들이 어둡지만 말이다. 1844년, 아직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도 탄생하기 전에 쓰여진 이 책은 이후 마르크스가 걷게 되는 인생을 보여주는 듯했다. 아직도 해결될 길이 요원한, 아니 오히려 더욱 깊어진 소외,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한 세기를 풍미했던 지난 혁명도 이토록 작은 고민으로부터 출발했겠거니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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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역시나 어렵다.
"경제학-철학 수고"를 다 읽었지만... 과연 제대로 읽었는지 의문스럽다. 물론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써내려간 것들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통찰력과 사유들이 한편으로는 부러움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서의 괴로움이 함께했다. 별 수 없지. 그래도 읽어 내려가면서 부분 부분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또 읽고 싶어지겠냐만은... 언젠가는 아마도 다시 읽으리라 생각한다. 맑스의 청년시절에 공부하려고 적어내려갔던 글들을 후에 발견되어서 출판된 것이지만... (내 노트에 적은 글은 죽여도 출판되는 일은 없겠지만) "소외"에 대해서 사유하기 시작한 글이라고 대부분의 사라들은 평가한다.
" 자본론"에서의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입장보다 인간주의 적인 맑스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루카치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경직적인 소련의 맑스주의에 반대해서 "수고"를 기초로 하는 인간주의 적인 맑스주의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했고... 생각보다 중요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맑스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그렇게 열의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약간의 냉소적인 생각도 있다. 나는 맑스의 논의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하게 되는 시각을 가지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또다른 세상에 대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우 리는 자본주의 안에 있고 맑스의 표현대로 "오물을 뒤집어 쓰고" 태어난다. 사용가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알고 인식하고 자본주의 속에서 살며, 자본주의 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지 다른것을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며, 그리 정의롭지도 않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겠다고 말만 하면서 꾸욱~ 참기도 한다. 왜냐면... 무서우니까. 얼간이 같은 정치인들 뽑아두고 망할놈의 세상이라고 욕한다. 혁명을 꿈꾸기 보다는 오늘 내일 별다른 일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환경파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스프레이 사용하고, 죽고싶어서 환장한것도 아닌데도 담배를 피운다. 그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또한 모르면서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벗겨낸다는 것은 오히려 더욱 이데올로기 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아도르노가 말한바와 같이 "모든것은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인정하자는 소리다. 그것도 인정 안하고 모든 대중들은 혁명을 꿈꾸고 있지만 이데올로기가 주입되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꿈같은 소리라고 생각한다. 밤이고 낮이고 "탈영토화"를 외치지만... 그것도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탈영토화"야 말로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이다. 그래야지 "영토화"를 할 수 있으니까. 자본주의는 당신들도 알다시피 끝임없는 증식이기 때문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는 월 스트리트에서 금융업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맑스에 대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였기 때문에... 자 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기업성공 사례나 경영관련 서적들을 참고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그래서이다. 그러한 책들(혁신, CEO 등등)은 오히려 자본주의가 어떠한 것이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본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글을 보면 읽었는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맑스, 니체, 프로이트 등등의 사상가들이 말했던 것들과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에서 우러나온 것들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것은 그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지만... ^^;;; 어쨌던 재미나게 읽어야겠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맑스의 글은 까다로운데...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