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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품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주옥같은 단편집이다. 많이 알려진 "베네치아에서의 죽음","토니오 크뢰거" 뿐만 아니라, 일전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몇편의 작품을 한데 묶어 깊이 있는 통찰과 해학, 반어, 상징주의를 교묘히 직조해내어,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로 이르게 한, 감히 토마스 만 최고의 작품집이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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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에 꼭 들어오는 한 권의 책! 깔끔한 제본이 보기 좋다. 그 안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실로 겁부터 먹게 생겼다. 빡빡한 글씨로 가득차서 덜컹 읽고 싶은 마음이 달아날 수 있겠다 싶을 정도이다. 그래도 관심이 생긴만큼 읽어보자 결심했던 11월의 문학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다. 중단편집으로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책 구성 뒷편에 작가와 작품세계에 대한 명료한 제시가 책을 읽는 내내 도움을 주었다. 관심을 갖고 처음 읽는 나같은 사람에게 좋은 팁이 되었고 드디어 조금이나마 작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소설이 좋았지만 제목처럼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남부 독일 뮌헨에 살고 있는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저명하고 존경받는 작가이면서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일상에서의 탈피를 모색하고 여행을 계획한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세계는 긴장된 관계속에 있다. 19XX년도 습기많은 5월에 그는 베네치아로 향한다.
그 자신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 이는 탈출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새로운 것과 먼 곳에 대한 동경, 자유, 구원, 망각에 대한 이러한 욕구는 곧 작품에서 벗어나고픈, 경직되고 차가우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일상생활의 작업장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이었다. <본문 p233>
여행의 동기는 위대한 작가나 평범한 사람이나 같은 것 같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마음, 계획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옮겨가고 머무르고 싶은 마음 아닐까! 한창 자신만의 성숙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던 그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인 듯 보인다.
토마스 만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지는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 아센바흐도 예외는 아니다. 토마스 만이 태어난 곳은 북독일 뤼벡이지만 활동구역이 남독일 뮌헨이다. 북독일의 개방적인 분위기와 남독일의 폐쇄적인 분위기가 그의 정신속에서 충돌하는 경향이 작품속에 자주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베네치아에 도착한 아센바흐는 그곳에서 많은 여행객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의 한 폴란드 가족에게 눈길이 간다. 창백한 얼굴의 잘 차려입은 소년 <타치오>에게 향한 그의 시선은 여행 내내 그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생동감있고 에너지 넘치는 타치오의 행동은 곧 삶의 경이로움이지만 언제나 창백한 그의 여린 모습은 죽음의 그림자로도 보인다. 아센바흐가 도착한 곳, 베네치아의 광경을 상상해본다. 검은 곤돌라, 죽음으로 가는 교통편이 바로 그런 것일까? 그를 그 곳으로 오게 한 힘, 해골의 모습으로 그를 지켜보는 한 사내의 시선속에서 죽음을 보게된다.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처음 타보거나 오랜만에 다시 타보는 경우 일시적인 전율, 은밀한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담대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담시 (譚詩)가 유행했던 시절부터 하나도 변치않고 그대로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다른 물건들하고 있으면 그냥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도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물이 찰싹거리는 밤에 소리 없이 저질러지는 범죄적인 모험을 생각나게 할 뿐더러, 더욱이 죽음 그 자체, 관대와 음울한 장례식, 말없이 떠나는 마지막 여행을 생각나게 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거룻배의 좌석, 관처럼 검게 래커칠이 되어 있고 검은 쿠션이 들어있는 팔걸이 안락의자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사치스러우며 가장 졸리게 만드는 좌석이라는 것을 알아챈 사람이 있을까? <본문 p.249>
일생동안 동성애에 대한 유혹과 고민에서 방황했던 토마스 만, 음악가로는 구스타프 말러, 벤자민 브리튼이 동성애에 집착했다고 한다. 실제 작품속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미묘한 인물들과의 관계와 간섭으로 본능적인 감정에 빠지게 만든다. 젊음에 대한 부러움, 다른 이의 시선에 대한 질투심, 자기모멸감, 혐오감이 교차하는 미묘한 사랑, 그런 사랑을 하는 아센바흐, 생의 끝뜨머리에서 그가 느끼는 생생함이란...
눈으로만 서로를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관계보다 더 이상하고 미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날이면 날마다, 아니 매 시간마다 서로 우연히 만나고 보면서도 무관심하게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행동하며, 인습이나 자신의 변덕스런 기분 때문에 인사도 말도 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불안감과 지나친 호기심을 경험하고, 인식 욕구와 교환 욕구가 불만족스럽게 억압되고 생겨난 히스테리, 말하자면 일종의 긴장된 상호 존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할 수 없는 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며, 그리움이란 인식이 불충분해서 생기기 마련이다. <본문 p284>
누구도 인정하지 못할 그런 사랑을 하는 아센바흐는 억눌린 가슴속의 말을 하게 된다. " 너를 사랑해." 구원 받지 못할 말, 우스꽝스러운 말, 그래도 성스럽다고 했던가, 정말 그런가?
인습의 차이, 도덕성의 문제, 관능과 정결함에 고통받는 슬픈 영혼, 찰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흔들림이 생물학적인 상상을 뛰어넘게 한다. 야릇한 감정에 사무쳐 아센바흐는 베네치아에서 생을 마감한다. 다음날 신문의 헤드라인은 그의 죽음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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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만의 나이 37세에 쓰여진 이 단편은 그의 20대에 가졌던 동성애적 경험과 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로 살게 될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조망을 보여준다. 성공이라는 것, 존경과 자신의 분야에서의 권력. 그 때 예술가는 결국 그의 생에 결함되어있는 어떤 것 때문에 길을 떠난다. 괴테의 이탈리아로...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그리스 로마적 아름다움의 이상. 걸어다니는 하얀 조각상과 같은 미소년. 작가는 짝사랑에 빠지고 그 아름다움을 지상의 것으로 구현하다 콜레라로 죽음으로 이끄는 소년의 배웅을 받으며 죽음을 맞는다. 작가에 의해 [품위손상의 노벨레적 비극]이라 불린 이 작품은 이성의 세계를 조명하는역할을 담당해온 예술가에게 죽음으로 맞바꿀 수 있는 감정과 비극의 영역이 존재함을 보인다. 그는 이것이 더 행복했고 그가 평생 쌓아온 세계보다 더 큰 희열을 안겨준다고 느꼈다. 결과는 죽음이다.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바쿠스)적 세계의 충돌에서 그 중간에 섰던 자는 아센바흐처럼 재가 되어버린 바쿠스가 될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세계에서 예술만이 구원이라고, 니체는 비극만이 아폴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의 진정한 예술이라고 불렀다. 어떤 불륜은 감정의 쓰나미에서, 일상의 지겨움에서 비롯된다. 그 때 추문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잊혀지고 인간은 과감히 죽음으로 치닫는다. 고도로 계산된 예술기법들과 감정을 건드리는 상황설정들. 우리 시대의 이런 예술적 바그너와, 현재의 세상이 아름답고 균형있으며 품위롭고 따뜻란 것임을 세뇌시키는 주위의 많은 프리드리히 황제에 대한 역겨움은 이해하지만 과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라면 이런 선택을 할까? 마취되어진 바쿠스의 축제도, 세상이란 아무 탈 없는 곳이라 출세만 하면 성공한다는 성공시대의 가식도 진정 자신을 신의 자녀로 여기는 사람에게 또다른 야바위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이 일탈과 동일시되고 이성이 기득권의 안정과 혼동된다면 이런 착각은 여전히 끝나지 않을 듯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