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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랑스어로 된 원서를 읽으면서 이 번역서를 참고해보았다. 원서의 문장들이 워낙 긴 경우가 많아서 우선 번역자가 참으로 고생이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부르디외는 프루스트의 문체를 염두에 두면서 문학 작품을 창조하듯이 글을 쓰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의 사회과학자나 인문과학자들이 단순히 이론 서적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이처럼 자신만의 글쓰기를 통해 작품을 생산하고자 고심하기 때문에 부르디외의 저서 같은 읽기 힘든 이론서들이 나오는 것이다. 특히 부르디외의 책들은 아무도 번역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나는 역자의 노력을 먼저 인정해주고 싶다. 번역도 전문 용어들에 관한 문제가 있지만 상당히 잘 되었다고 판단된다. 전문 용어는 다르게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공론장' 같은 경우 원서에 프랑스어로 'espace public'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공적 공간이다. 한국에서 공론장으로 통용된다고 꼭 그렇게 번역해야 하는가? 또 '실천이성개요'라는 용어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문제는 'naturaliser'라는 동사의 과거분사인데 불어에서는 이 동사가 자연화하다는 의미가 없다. 그렇게 유추적 해석은 가능하지만 말이다. 철학자 오스틴을 소설가 오스틴으로 오역한 것은 역자와 출판사의 책임이 있다 하겠다. 원서에 보면 제인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는데, 제인이 들어간 것을 보면 교정에도 문제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영어 번역본을 읽고 이 번역서를 판단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프랑스어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서를 읽기보다는 영어 번역본을 읽는 것이 훨씬 쉬울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어 원서를 보면서 번역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보여진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전문 용어들의 정확한 번역이 미흡하고 역자 주등이 없는 것이 이 번역서의 오점으로 지적될 수는 있겠으나, 번역이 '오역투성이'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상깊은구절] 그리하여 법의 가능한 유일한 토대는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는 분명 모든 종류의 토대를 파괴해버리지만 말이다. 법의 원리에는 임의성(독단성이 포함된 이중의 의미에서), '찬탈의 진실', 정당화되지 않은 폭력 이외에 어떤 다른 것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