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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옥토퍼시(Octopussy)] (감독 존 글렌, 1983년작)
"[007 옥토퍼시(Octopussy)] (감독 존 글렌, 1983년작)" 내용보기
피터 가브리엘의 [In Your Eyes] 뮤직 비디오를 보다 보면 마지막 장면쯤에 피터 가브리엘이 아프리카 민속춤을 추는 부분이 있다. 처음 그걸 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고 괜히 민망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존경하는 ‘백인/남성/이성애자/중산층/지식인’이 ‘미개한’ 아프리카인들을, 그것도 볼썽사납게 ‘춤’을 추는 것이 낯 뜨
"[007 옥토퍼시(Octopussy)] (감독 존 글렌, 1983년작)" 내용보기



피터 가브리엘의 [In Your Eyes] 뮤직 비디오를 보다 보면 마지막 장면쯤에 피터 가브리엘이 아프리카 민속춤을 추는 부분이 있다. 처음 그걸 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고 괜히 민망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존경하는 ‘백인/남성/이성애자/중산층/지식인’이 ‘미개한’ 아프리카인들을, 그것도 볼썽사납게 ‘춤’을 추는 것이 낯 뜨거웠다면 도대체 나의 머리속에 아프리카인들과 춤에 대한 편견을 심어 준 건 또 누구일까. 언뜻 [타잔]과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가 떠올랐다.


물론 언제나 (나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이다. 그런데 [007 옥토퍼시]를 보다가 생각했다. 정말 나에게는 잘못이 없을까? 나는 ‘백인/남성/이성애자/중산층’이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은 상대들에 맞서 활약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그들을 응원한 적은 없을까?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야말로 전형적인 영화의 남자주인공 - 잘생기고 큰 키에 두뇌도 신체도 우수한, 비현실적으로 매력적인 - 이지만 내가 과연 그를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는 걸까?


[007 옥토퍼시]는 철저히 공식을 따르는 007 영화이다. 본드는 여전히 악당들을 무찌르고 세계 평화를 지키며 매력적인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전세계의 각 지역들이 그의 모험의 배경이며 현지인들은 악당이거나 그를 돕는 충실한 하인이거나 그와 잠자리를 기꺼이 함께 하고자 하는 여성들이다. 가끔 본드도 위험에 처하긴 하지만 우리는 그가 결국 승리할 것을, 우리를 지켜 줄 것을 믿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써 나는 본드의 성적인 오만함이 거슬린다. 여자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라서 아무리 매력적인 남자라도 모든 여자를 순식간에 정복(아, 정복이라는 단어 자체도 얼마나 성차별적인지!)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관계 또한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라서 아무리 어떤 부담감도 없이 시작한 관계라도 쉽고 간단하게 끝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본드 시리즈는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이다. ‘백인/남성/이성애자’의 판타지 말이다. 여성과 유색인종을 복종시키고 그 위에 군림하는 판타지. 그런데 우리는 환상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리고 타인의 환상을 보며 유색인종이자 여성인 내가 느끼는 이 쾌락은 뭘까.




어느 책에선가 ‘여성의 성적 환상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political correctness)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했다. 여성의 내밀한 심리를 들여다보면 여성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환경을 사랑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여성과 인간 대 인간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남자와의 참으로 건설적이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남자가 제임스 본드인 것은 결코 아니다. (최소한 로저 무어가 연기하는 007은 아니다. 대니엘 크레이그나 숀 코네리라면 다시 생각해 보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옥토퍼시]를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봤다. 물론 영화가 끝난 후에는 역시나 기억상실증에 걸려 버렸지만.


이런 영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보았으니 나도 무의식적으로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든다. U2도 ‘꿈에서 책임감은 시작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백일몽조차도 위생적이고 검열된 상태라야 한다면 그건 나치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용감하게 오늘도 극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DVD 플레이어의 전원을 켠다. 다른 사람의 환상을 통해 나의 환상을 만들고 보고 난도질하기 위해.


 

y******n 2011.03.09. 신고 공감 0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