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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배려하는 소설 윤리
1990년대 들어 소설의 풍경이 내면의 탐색에 치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와 맞물려 진행된 소설의 변화 양상은 소설을 통해 작가들이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새삼 되묻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면의 고백이나, 소소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포착하는 소설의 풍경은 1980년대에 발표된 리얼리즘 소설(노동소설, 역사소설 등)과 비교한다면, 분명 소설의 사회적 지향점을 문학의 내부로 제한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소설이 다만 한 개인의 내면을 토로하는 문학양식으로 한정될 때, 소설이라는 문학양식이 생래적으로 지녔던 사회적 측면은 더 이상 문학적인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 소설의 풍경 밑바탕에 여전히 문학(소설)의 사회적 기능과 관련된 논의가 깔려 있다는 점은, 소설의 사회성이 지닌 끈질긴 생명력을 새삼 증명한다고 하겠다. ‘이야기성’의 개념을 바탕으로 소설과 사회의 관계를 해체하려는 작업이 거듭 시도되고 있는 와중에서도, 사회적 관계망의 측면에서 소설을 사유하려는 일군의 움직임 역시 끊임없이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표출되는 작가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내면을 말하든, 사회를 말하든, 소설은 한 작가의 윤리의식을 드러내는 담론의 장이어야 한다. 윤리의식을 어떻게 의미화해야 할까? ‘삶의 절실함’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추상적일까? 이를테면 이상섭의 소설 「자장가」를 보면, 어머니와 동반 자살하는(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한스런 삶이 고백체의 형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억울해서, 살아온 기 너무 억울해서 악착같이 더 살고 싶었을 뿐입니더”라고 외치던 아들은 왜 어머니와의 동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더 살고 싶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아들의 삶을 보면서 독자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소설의 이야기는 항상 소설 외부의 현실로 뻗어 나간다. 현실사회와 불화의 상태에 빠진 채 죽음을 선택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이미 타락한 현실을 고발하는 동기로 작동한다.
이상섭의 소설집 『그곳에는 눈물이 모인다』(창비, 2007)에 실린 작품들의 윤리의식은 이처럼 작가가 타락한 현실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에 주목함으로써 구현된다. 「바다는 상처를 오래 남기지 않는다」(「바다」)에 등장하는 덕수와 은희가 그렇고, 「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그곳」)에 나타나는 우열과 말순, 시장에서 자리싸움을 치열하게 벌이는 우열의 장모와 새댁 또한 그러하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 하나를 잘리고, 술에 취해 허송세월하는 남편의 폭력을 고스란히 몸으로 감내하며 사는 ‘은희’의 삶을 묘사하며, 또 남편이 죽고 친정 집안마저 IMF 때 파산해 오도가도 못하다 시장으로 흘러든 ‘새댁’의 신산스런 삶을 묘사하며 작가는 이 시대의 가난한 민중들이라면 겪게 될 삶의 고통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번 소설집 전편을 관류하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세상살이의 물살에 떠밀려 도달한 땅의 끝”(「그곳」)이 되었든, “희망이 없어 희망이 된 곳이 섬이었다”(「불어라 바람」)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든, 그들에게는 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이 있다. 자살하지 않는 한, 그들은 그러한 삶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러면 어쩔 것인가?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더 이상 물러날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므로, 그러한 싸움은 “생존의 방식”(「불어라 바람」)이라 명명할 수 있다. 그래서 「바다」에서 덕수의 아내는 자신이 운영하던 구판장 앞에 깨끗한 구판장을 차려 손님을 끌어가는 은희와 한바탕 싸우고, 「그곳」에서 우열의 아내와 장모, 새댁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번갈아가며 싸운다.
이상섭 소설의 윤리의식은 이러한 생존의 방식으로서의 싸움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생성된다. 은희와 아내의 싸움을 보며, 덕수는 그 싸움을 꼭 한번은 겪어야 할 싸움으로 생각한다. 싸워야 앙금이 풀어지고, 그래야 다른 일을 해도 상대방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싸움의 윤리적 형식은 이로써 이상섭 소설의 밑바탕을 이루는 소설적 세계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셈이다.
타자와의 싸움이 윤리적이라는 것은 돌려 말하면, 그 싸움의 밑바탕에 타자를 향한 배려의 정신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어라 바람」의 중심인물들인 그와 여자가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는 “내 배를 탄 사람은 다 행복해야 한다”는 중의적인 말이 의미하는 바도, 실상은 이러한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추밭에 자빠지다」에 등장하는, 딸만 넷 둔 여인이 이혼한 도련님의 어린 아들에게 느끼는 안쓰러운 마음도 타자와 혹은 자신과 겪게 되는 수많은 싸움의 과정에서 잉태된 배려의 정신에서 비롯된다. 이상섭의 소설은 한 개인의 고통에 주목하고, 그리하여 개인적 삶의 윤리(자유)를 소설의 윤리로 제시하는 90년대의 소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민중들의 고통을 가슴 깊이 이해하는 그의 소설은 분명 2000년대 소설의 한 특이점을 형성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은 중산층이라는 응답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괜찮지만 앞으로는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사람들을 숨쉬게 만들던 시절은 그러나, 모든 이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IMF 이후 너무도 먼 옛날처럼 느껴지고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 암울함을 맛본 사람들은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한다. 하지만 삶은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끊임이 없다. 종종 ‘저들에게도 행복이 있을까?’ 싶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하루는 존재한다. 그 세계에 존재해보지 않은 이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럴지라도 그것 역시 ‘삶’이라는 같은 단어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공선옥 님의 소설, <유랑가족>을 읽으며 입안 가득 도는 씁쓸한 맛을 음미했던 적이 있었다. 과거 어느 한 때 있었던 혹은 있을 법한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것마냥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지구상의 80%는 지붕 없는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오늘날이다. 귀 기울여야 비로소 가난이 보이는, 어쩌면 난 너무도 사치스럽게 살아온 듯도 하다. 다시금 그 책을 손에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 두 책의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세울 것이라곤 가난 밖에 없는, 어쩌면 볼품 없는 인생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누가 우위라고 평하기 힘들 듯하다. 그렇게 나는 나와는 전연 다른 세상에 속한 것만 같아 보이는 사람들을 조심스레 엿보기 시작했다. 격하디 격한 사투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맛깔스러움이 아니었다. 이미 술에 반쯤은 꼬여버린 듯한 혀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아픔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과 직접 마주치게 된다면, 얼굴에서부터 느껴지는 수심의 무게 덕에 뒷걸음질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책을 읽기 시작한 이상, 우리에게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의무가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단조로운 ‘아픔’의 색채만을 지닌 듯해 보이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지닌 삶의 굴곡은 풍성하니 말이다. <수평선, 그="" 가깝고도="" 먼="">, <불어라 바람=""> 등 각 글에 달려 있는 제목에서부터 서글픔이 느껴진다. 하지만 누구를 미워하면서도 내심 미안해하는, 거친 겉모습에 가려진 그들의 말랑말랑한 속마음을 읽고 나면 마치 진하게 끓여낸 뚝배기 한 그릇을 먹고 난듯한 기분이 든다. <바다는 상처를="" 오래="" 남기지="" 않는다="">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애틋함에 무기력(?)한 남성을 등장시키는 다소 진부한 방식을 택했다면, 이어지는 이야기인 <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의 경우 ‘이 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똑같다’는 동질감에 호소하는, 어쩌면 작가가 진정 말하고픈 바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작가가 택한 것이 어떤 방식이건 간에, 그들의 삶에 존재하는 갈등은 가난보다 크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마냥 고함을 지르는 여인들의 모습을 향해 작가는 이런 말을 남긴다. “이러지 마래이. 이라몬 우리 전부 다 죽는 기라!”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움켜쥐기만 하면 성공가도를 달릴 줄 알았던 대도시에서의 삶은 한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모든 물건이 갖추어진 천국과도 같은 곳이 자신의 직장일지라도, 비정규직에게는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을 모두 소유할 권력까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비참함이다.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그렇게 시작한 삶은 결국 그렇게 막이 내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억척스럽게 자기를 지킨다.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생존의 숨통을 비틀지라도, 안주 없는 술에 잠시 몸을 맡기고 심지어 자신의 몸을 파는 억척스러움을 발휘해서라도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산다. 어쩌면 그것은 ‘숭고함’의 또 다른 표출일지도 모른다. 가난에 지친 그들의 삶은 피동적으로 살아지는 삶이 아닌 스스로 살아나가는 삶이 지닌 숭고함 말이다.그곳에는>바다는>불어라>수평선,>유랑가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