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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의 시대』라는 제목으로는 이제 더 이상 접할 수가 없게 되었다. 2012년 홉스봄이 세상을 떠나면서 20세기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강연과 에세이를 모은 『파열의 시대』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혁명의 시대』, 『제국의 시대』, 『자본의 시대』를 거쳐, 『극단의 시대』의 시대로 근대 이후의 세계사(물론 당연하게 서구 사회가 중심이다)를 세밀하게 서술한 역사가는 『미완의 시대』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 『...의 시대』가 바로 『파열의 시대』다.
앞에 밝혔듯이 『파열의 시대』는 다른 『...의 시대』와 많이 다른 책이다. 어느 시대에 관해서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일관된 서술을 한 책이 아니다. 여러 글을 모은 책이니 만큼 형식도 조금씩 다르고 소재도, 주제도 일관적이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그가 20세기의 문화와 사회에 대해서 이렇게 전문적인 에세이를 쓴다는 것이 다소 의외이다 싶지만, 다른 책들에서도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폭넓은 지식과 통찰력을 보여준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더욱이 그의 저서 목록에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이라는 제목이 보이는 걸 보면 그의 예술, 나아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역사가로서 그저 일반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파열의 시대』에서도 그는 음악에 대해서, 미술에 대해서, 건축에 대해서,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있지 싶을 정도의 지식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 예술은 부르주아 세계의 문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발생해서, 발전하였으며, 어떻게 쇠퇴해가고 있는가를 솔직하게 적고 있다(물론 그 서술들은 상당히 파편적이다).
그가 보기에 부르주아 세계의 문화와 예술은 모순적이다. 진보적인 이상으로 생겨난 예술이 보수적인 계급의 예술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앞으로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음악은 (특히 고전 음악) 새로운 음악이 연주되고 있지 않으며(무덤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다), 미술은 사진에게 그 양식을 뺏기고 있다. 이런 홉스봄의 지적에 격렬하게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란 건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던 부분이기도 하지 않냐는 것이 나의 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시각을 여기 홉스봄의 파편화된 글에서 처음 접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가장 흥미로운 글은 과학에 관한 몇 꼭지의 글이다. 여기서 비로서 존 데즈먼드 버널(John Desmond Bernal)이라는 분자생물학의 선구자를 알게 되었으며, 조지프 니덤이 어떤 관점에서 중국 과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홉스봄이 보기에 20세기는 모순적인 세기였다. 유지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모순된 현상들이 즐비한 시대였다(지금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런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는 걸 느꼈으리라. 그래서 그런 세계를 바꾸자는 구호를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역사가로서 혁명의 시대, 제국의 시대, 자본의 시대를 조망하였기에 한 시대가 유지되고 변해가는 모습에 자연스러움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숱하게 등장하는 낯선 이름들을 다 쫓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논리가 앞 문장과 뒷 문장이 잘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숱하다.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다른 그의 책에서도 흔치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탓을 해야 할 것은 번역뿐이다. 홉스봄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역자이니 의심이 가는 것은 글쓰기의 문제가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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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에릭 홉스봄의 유작이다. 그는 2012년 타계할때까지 95세로 장수했다. 그는 유대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다이스포라의 삶 속에서 보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견해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역사를 '혁명'(1789~1848), '자본'(1848~75), '제국'(1875~1914), '극단'(1914~91)으로 구분한 역사적 통찰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홉스봄이 말년을 보내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간 자신이 발표한 견해들을 재정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파열의 시대'인 것일까? 그는 1910년대 다다이즘의 신예술 선언과 함께 20세기 들어 부르주아 예술과 문화가 걸어온 궤적을 '파열'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파열의 시대'는 곧 고전적 부르주아 문화가 1914년 이후 점점 주도권을 잃고 조각조각 깨어진 시대를 의미한다. 그 문화는"50년대에 이르러 지구상 80%에서 종언을 고했으며, 60년대에는 나머지 20% 지역에서도 끝났다."
그렇다면 고전적 부르주아 문화가 깨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홉스봄의 통찰력이 빛을 발휘한다. 그는 고전적 부르주아 문화를 떠받친 체제가 평등하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부르주아 문명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변모시키는 생산양식에 토대를 두었으되 그 실제 기능, 제도·정치와 가치체계는 어떤 소수에 의해 그 소수를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체계의 고정, 지배자의 퇴행과 연관되어 이해할 수 있겠다. 고인 물이 썩는다는 말 처럼 특정 지점에 정착하게 되면 으레 고정 관념에 빠지기 마련이다. 곧 부패가 시작되고 쇠락이 이어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한 '고정성의 결여'가 중요한 화두가 된다.
요즘 디아스포라의 삶, 노마드의 문화가 새로운 관점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익숙한 것을 비틀고 낯설게 보는 것은 창조의 기본 정신이다. 홉스봄이 말한 '파열의 시대'는 결국 새로운 창조를 위한. 긍정적인 깨트림을 위한 제언일 것이다.
21세기 들어 부르주아 문화는 다양한 장르와 기법으로 옷을 바꾸어 입고 유행하고 있다. 가령 사진과 영화, 대중소비사회에 호응해 탄생한 새 형태의 예술창작, "교양 전통과 생생한 하위문화 전통을 결합시키는 문체", 뮤지컬과 앤디 워홀과 팝아트, 그리고 프로축구 리그였다.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새로운 창조의 문을 열기 위한 '파열의 시대'를 재해석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홉스봄이 던지는, 세기를 넘나드는 크나큰 통찰력은 시대의 본원을 짚고 큰 줄기를 새롭게 트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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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난삽함이 홉스봄을 무덤에서 일으킬 듯하다. 과연 옮긴이가 저서에 대한 전문성과 애정을 독자들의 눈앞에 펼칠 능력이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해 본다. 또한 저술가로서 기본적 글쓰기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것이 아닌지도 사시해 본다. 혹 시간이 부족했다면 숙성시킬 여유를 가져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