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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통해야만 나를 볼 수 있다.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비친 모습이 자신이라고 믿기도 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여야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한다. 어쩌면 소설 속 인물도 그러하다. 그들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작가여야 하는데 작가는 독자에게 그것을 넘겨 버린다. 독자라는 거울을 통해 보려는 것이다. 김엄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괜찮은 상태가 아니다. 직장을 잃었거나 미로처럼 출구를 찾지 못한 반복된 일상을 살거나 내밀한 관계를 지닌 상대를 잃은 지 오래다.
고깃집에 취직하여 사장이 추천한 고기를 먹는 일을 하기로 한 삼겹살 마니아 우라라 (「돼지우리」), 아버지와 이복동생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고 세 개의 손가락을 잃어지만 혼자 살아남은 나(「기도와 식도」), 아내가 키우는 개 영철이보다 쓸모가 없는 실직한 남편 영철이(「영철이」), 잃은 직장을 잃고 갚아야 할 빚이 있지만 바다를 보면 괜찮을 거라 믿는 남자(「그의 사정」), 우연한 동창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나(「어느 겨울날」), 계곡이 있는 산을 찾아 떠난 곳에서 계속을 찾지 못하고 맴돌며 사소한 일상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직장 동료와 매일 상사를 욕하면서 회식에 참여하고 휴가를 생각하는 E.(「고산자로12길」)
9편의 이야기 속 인물은 소유보다는 무소유의 상태로 삶을 지속한다. 그래도 그들은 나름대로 괜찮게 살아간다. 아니 변화하려고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하여 누군가는 소설에서라도 좀 신나는 세상을 만나면 안 되냐고 화를 낸다. 그러나 놀라운 건 무기력한 사람들의 일상을 반복해서 묘사하는 김엄지의 탁월한 능력이다.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한 장면만 내세워 보여주는 기법은 불편함과 동시에 궁금증을 불러온다. 그러니까 왜? 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오히려 무의미한 일상을 그리는 문장은 경쾌하고 편안하다. 그것은 오래된 습관처럼 굳어진 누군가의 일상이 우리의 일상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괜찮았다. 그는 자신의 과체중을 생각해 하루 두 시간씩 걸을 정도로 괜찮았다. 그는 하루 종일 누워 있을 만큼 괜찮았다. 그는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을 때마다 괜찮다고 대답할 정도로 괜찮았다. 그는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할 만큼 괜찮았다.’ (그의 사정, 112쪽)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외로움은 어디에도 닿아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과 반대되는 성향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상태였을 것이다.’ (어느 겨울날, 146쪽) 청춘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그들의 자화상을 그린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나를 견디는 일만으로도 힘겨워 제대로 거울을 마주하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 말이다. 김엄지는 독자들이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무슨 존재가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의미 있는 일상이 아닌 무의미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자책하거나 비관하지 말고 그저 살아가도 괜찮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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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이고 뭐고, 너도 이제 네 인생을 살아. (218)
김엄지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를 먼저 읽고는 감상문을 작성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 인상적인 문구만 남겼었다. 이미 그 안에 모든 걸 말하고 있는데 굳이 뭔가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동시에 모든 것이 담배연기처럼 한곳에 강하게 머물다 흩어져 억지로 부여잡고 싶지 않았다. 단지 마음속으로 오른손 엄지를 척 들어 올렸을 뿐이다.
실내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가운데 소설집을 읽었다. 까무룩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더위를 떨쳐낼 수 있었다. 이제 서른이 됐을까 싶은 작가는 참 깜찍하고 도발적으로 세상을 본다. 어떻게 이 어린 작가가 이제야 겨우 감지한 세상의 후미진 부분을 이토록 그러모아놓았는지 우선 놀랍다. 요샛말로 아재 개그라고 할 만한 말장난도 보이고 살면서 스쳐온 사람과 사건, 심정을 되살린다. “묻고 싶지만, 묻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을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함부로 묻고 다니면, 한 번에 묻히는 게 인생이라고, 지혜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63).” 불친절하게 툭툭 내뱉는데도 특정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김엄지의 문체는 주인공이 알파벳 이니셜일 때 기계적인 느낌이 도드라진다. 어떤 데이터를 입력했을 때 나올 법한 말들만 찍어 나오는 듯하다. 굉장히 독특한데 탈 개성화된 인상을 준다.
그는 괜찮았다. 그는 자신의 과체중을 생각해 하루 두 시간씩 걸을 정도로 괜찮았다. 그는 하루 종일 누워 있을 만큼 괜찮았다. 그는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을 때마다 괜찮다고 대답할 정도로 괜찮았다. 그는 그의 이메일 비밀번호를 ‘괜찮아7164’로 해놓을 정도로 괜찮았다. 그는 하루 세끼 괜찮찌개에 밥을 비벼 먹을 정도로 괜찮았다. 그는 바다로 가기로 결심했다. 바다에만 다녀오면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을 것 같았다. (112)
<주말, 출근, 산책>을 먼저 읽었던 터라 미니멀리스트적이고 기존의 인간적인 요소가 박탈된 새로운 인물군상을 창출하는 실험적인 작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편혜영과 한강 작가가 언뜻 언뜻 스쳤다. 인간의 어두운 심리와 내면을 마치 타자기나 빗발처럼 찍어내는 속도감과 심장을 조이는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다. 익히 알고 있던 작가의 특징을 재확인시키는 [고산자로12길]과 [느시]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여러 글쓰기가 가능함을 입증하는 다른 소설들도 읽는 재미를 더했다. 중성적으로 남녀노소 캐릭터를 적절히 살리는 쓰기의 도모도 훌륭하다. 또한 주인공들의 시선이 가닿는 비둘기나 개 같은 반복적인 대상의 출현과 함께 계속해서 메아리쳐오는 문구도 인상적이다.
[고산자로12길]과 [느시]는 상당히 비슷한 맥락이지만 상반된 계절을 살리면서 얼마나 인간이라는 존재가 부속화되기 쉽고 기후와 날씨에 취약하면서 동시에 둔감하고 무심한지를 철저히 묘사해낸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에서 좀전에 말한 편혜영스러운 묘사력을 느꼈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혼자이거나 여행지에서조차 위태롭고 불안한 것이 여간 마음이 가는 게 아니다. 이불 빨래하는데도 큰 결심이 필요하고 결심을 이행하는데 빚어지는 지연과 가까스로 버티는 모습들에서 작가는 어쩌다 이런 마음을 그리게 된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나이가 많거나 반드시 겪었다 해서 그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새삼 작가의 넓은 시야와 과학적인 관찰력에 박수를 치고 싶다.
[돼지우리] 같은 경우에는 솔직히 마음이 가지 않지만 조지 오웰의 우화소설을 연상시키는 섬뜩함과 디스토피아를 예고한다. 오웰스러움에서 고여있지 않고 이십일세기를 사는 젊은 여성의 몸도 시사하여 기괴하면서도 탄탄한 글로 다가온다. [삼뻑의 즐거움]도 김엄지다운 말장난(‘싸다’)이 해학적이면서도 서글프게 투영돼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끌렸던 서사는 [기도와 식도]이다. 지울 수 없는 외상 증후를 너무나 치밀하게 살려놓았다. [영철이]라는 소설 안에 존재하는 인간 김영철과 개영철의 웃픈 설정도 흥미롭지만 앞서 언급한 [삼뻑의 즐거움]에 동명이인이 등장하여 상호텍스트적인 연결고리까지 모색해 읽는 이의 마음에 더한 뿌듯함을 선사한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고독과 그것을 씻겨내고 싶어 무작정 찾아나서는 바다에 대한 환상을 [그의 사정]에서 잘 살렸다. 얼마 전 임성순의 <자기개발의 정석>을 읽고 ‘사정’이라는 단어를 탈탈 털었던 경험이 새삼 떠올랐다. 뭐든 과감하게 넘어설 줄 아는, 그것도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언어로, 그런 그녀가 자꾸 놀랍다. [어느 겨울날]도 [느시]에 등장하는 이름이 유사 이미지로 등장한다. 김엄지는 정신상태가 나날이 나빠지고 위태로운 사람의 마음을 끔찍이 여기는 대신 끔찍하지 않게 완성해낸다.
넌 외로움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Y가 내게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허무랑 비슷한 거 아닐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그 뜻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Y의 허무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외로움은 어디에도 닿아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과 반대되는 성향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상태였을 뿐이었다. 나는 Y에게 잘 설명하지 못했다. (145-146)
은희경 소설가가 [2016 젊은작가수상집] 심사평에서 몇 명을 더 붙이고 싶다하셨는데 김엄지를 염두에 둔 말이 아닐까싶다(<정화된 밤>에 엄지 나와 깜놀ㅋㅋ). 김엄지가 그리는 허무와 공허의 세계가, 그 이미지가 그녀보다 훨씬 많은 밥을 먹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대에 차게 한다는 것을 소설가가 알고 힘겹게 오른 산에서 너무 숨차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허망함의 끝에도 놓지 않았던 아주 가느다란 끈이 결국은 고유한 의미이자 뿌리가 되어줄 테니 ‘그대여 계속 걸으라.’ 폭염의 시작에 물웅덩이에 들어앉아 있는 비둘기 떼를 보았다. 앞으로 비둘기나 건물 틈 사이에서 눈을 밝히는 고양이나 가로등 밑에 선 개를 보면 김엄지라고 이름을 기도문처럼 불러볼 참이다. |
![]() 우연히 알게 된 작가 김엄지. 제가 처음 읽은 그녀의 소설은 <영철이>었습니다. 읽는 내내 어찌나 소름이 끼치던지요. '아,,, 이래서 등단하는구나.' '아,,, 천재구나.' '아,,, 부럽네.' 저는 소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는 너무 좋았다고 그녀에게 팬레터를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고맙다는 답장도 받았고, 그 후로 저는 가끔 생각나면 혹시라도 단행본을 냈는지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잊혀질만할 때쯤(잊혀질만한 작가는 아니지만, 시간적으로 잊혀질만할 때쯤. 아, 중간에 작가와의 만남에도 한 번 갔었군요.) 한 번에 두 권이 나와버렸더군요. 우와~~~ 단편집 한 권과, 장편소설 한 권. 당장에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단편집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첫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를 하나의 단어로 줄여보니 '없음'이더군요. 무엇이 없냐면, 그냥 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친한 친구가 없고, 이성친구가 없고, 간절함도 없고, 종교도 없고, 직장도 없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릅니다. 슬퍼해야 하는데 모든 게 모호합니다. 이런 모습이 요즘 젊은 세대에서 나타는 현상은 아닐지요. '헬조선'이라는 말이 괜히 유행했을까요. '노오오오오오오력'하면 누에가 나방이 아니라 나비가 된다는 어느 독재자의 딸이 하는 말이 들릴리 없는 요즘의 청년들일 것입니다. 이성친구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는, 직장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세대에게 이 세상이 곱게 보일지 의문입니다. 없음은 젊은 세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영철이>에 나오는 영철이에게도 아무것도 없거든요. 영철의 아내는 그에게 '너는 무'라고 말합니다. '채소 무는 먹을 수라도 있지만 너는 먹을 수도 없으니 그냥 무'라고 말합니다. 직장도 없는 영철이와 아내가 키우는 개 영철이. 사람 영철이보다 개 영철이가 더 쓸모있는 세상입니다. 결국 사람 영철이는 인터넷으로 바둑만 두다가 쫒겨납니다. 왜 이세상이 '무(無)'가 됐을까요. 왜 이 세상은 온통 '무'로 가득한 걸까요. 3포세대 더 나아가 5포세대에게 던지는 이 물음에 저는 깊이 고민하게 됐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도 마찬가지로 없더군요. <삼뻑의 즐거움>에서의 영철이도 없습니다. 그도 '무'입니다. 도박판에서 늘 삼뻑을 하는 그에게 있는 건 오로지 뻑 뿐입니다. 흔시 싼다고 하죠. 똥만 싸는 인생 영철이에게도 있는 게 없습니다. 급기야 그는 아들의 트로피로 도박을 하고 씹새에게까지...... ![]()
이 모든 게 김수동 때문입니다. 음,,, 이름에 뭐 특별한 뜻이 있나 해서 검색해보니, 별 거 안 나오더군요. 그래서 나름 생각해본 건 2가지 입니다. 하나는, 전 남친 이름이거나 웬수 이름이다. 하나는, '수동적'에서 수동을 따온 건 아닐까 생각 해봤습니다. Y는 모든 일에 김수동을 갖다 붙입니다.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모든 불운에 김수동을 붙입니다. 수동을 붙이는 Y는 수동적인 사람이라서 수동을 붙이는 걸까요? 어쩌면 부족함 없이 자란 청년 세대를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부모 그늘에서 부모의 말에 따라 부모의 방향대로 살아온 그들은 무엇이든 부모가 결정해주는 대로 자랐기에 핑계가 습관이 된 걸 수도요. 결국 Y에게는 '능동'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기에, 타인이 결정해준 것이기에 타인의 잘못으로만 여기는 Y가 된 건 아닐런지요. 도배를 하지 않아서 여자가 생기지 않는 건지, 여자가 안 생겨서 도배를 하지 않는 건지 고민하는 <그의 사정> 속 그처럼 우리는 자신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모르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ㅇㅇ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ㅇㅇ하는'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이 소설 속에서 저는 핑계를 발견했습니다. 없는 핑계. 없어서 핑계를 대는 사람들. 나. 어쩌면 이 모든 핑계가 3포세대, 아니 5포세대라는 핑계일지도요, 헬조선이라는 핑계일지도요. 이렇게 책리뷰를 마무리 하려고 하니 '나는 왜 좀더 잘 쓰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게 됩니다. 저는 작가에게 이게 모두 김수동 때문이라고 대답을 해주며 글을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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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를 원샷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인다. 이것은 일종의 되새김이고 또한 작가에 대한 만족의 표현이다. 그렇다. 난 이런 류의 소설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문득 1920~50년대 활동한 소설가들의 문체와 묘하게 닮아 있다. 일제강점기, 광복, 한국전쟁, 그 엄청난 역사의 무게감을 견뎌야 했던 이들의 모습, 딱 그 느낌이랄까? 삼포를 넘어 N포세대라 불리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투영된 김엄지의 소설을 백지은 평론가는 '세속의 시간과 무의미의 꾸러미 (p.237)' 라 표현한다. 캬, 커피의 씁쓸하고 시큼한 맛을 느끼고 나니 소설에 등장했던 주인공들의 토로와 생을 통해 느낀 압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것이 어떤 느낌이냐면 말이다. 돼지우리라는 고깃집에 취직해 그저 먹으면 봉급을 받는 (돼지우리), 화투에 미쳐 가정조차 돌보지 않는 인간쓰레기 (삼뻑의 즐거움),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손가락을 잃은 (기도와 식도), 아내로부터 이혼당하고 개와 동급취급당하는 '무' 만도 못한 소심남 (영철이), 보통 누워있고 세상 밖에 나오면 사람들로부터 병신취급받는 소심남2 (그의 사정) 등이다. 한결같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해서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의 모습, 어떤 부분에선 우리의 모습과 한없이 닮아 있기에 가슴이 쓰려 온다. 김엄지 작가는 보통 까페에 나가 소설을 쓴다고 한다. 그래서 책장을 덮고 그녀의 느낌과 소설의 후폭풍을 만끽하고자 나 또한 까페에 나와 이 책만큼 씁쓸한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현실, 그 현실을 신음하며 무력감 속에 사는 이들을 내세워 쓴 이 책은 단연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작품이고. 그녀의 또 다른 작품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상쇄시켜주고도 남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일도 아메리카노를 마실 예정이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나에겐 씁쓸한 일상에 더 씁쓸한 맛을 보태 그저 견디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인정하고, 거기에 취할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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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우리」
주변의 호들갑에 비하여 읽는 재미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근간 나온 다른 한국 소설들과 비교하였을 때 형식적인 유니크함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가 사라진 시대, 혹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모호한 의미마저 사라지거나 왜곡되고 마는 시대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소설의 형태 또한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아직은 글쎄, 다...
김엄지 /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 문학과지성사 / 261쪽 / 2015 (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