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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다. 그 모든 것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온전히 독립적이다.
새삼 감상에 빠질 것도 없이 오늘날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무척이나 낯간지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굳이 말을 건네 뭐하는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모든 대화는 서로에게서 끊임없이 고독을 확인 시켜주는 역할 그 이상이 아니다. 합일? 순간적인 전파의 교환과 영혼과 영혼의 만남? 그건 지나친 욕심. 보라, 저 산만하게 흩어지는 언어들을, 혀끝을 떠나자마자 우주로 빨려들어 먼지처럼 부유하는 언어들을, 설익은 밥처럼 풀기 없는 언어들의 서걱거림을. 이쯤되면 차라리 인간의 구원을 얘기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일 것이다.
세계는 너무 복잡해졌다. 정각 아홉시면 습관처럼 방송을 타는 뉴스를 해독해내는 것만 해도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세상의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건 둘째 치고라도 대략적인 윤곽조차 파악하는 것만 하더라도 무척이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세상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고, 구태여 이 부분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는데만 해도 시간은 충분히 모자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확인하고 그에 맞추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재구성하던 시간들은 우리나라에서 20년 전까지만은 실제적이었던 것 같다.
인간은 혼자서는 결코 자신을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만남 속에서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그러한 피드백을 통해 비로소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매우 그럴 듯한 가르침도 이제는 형이상학적으로 들린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 국내에 나온 게 1999년이다. 그 별 것 없이 감수성만으로 가득찬 소설이 히트를 치면서 시대는 2000년을 지나왔고 개인성, 세계와의 관계없이도 얼마든지 사람들은 '나'가 될 수 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시대의 감수성을 건드렸고 그녀는 이미 십년 전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해왔다.
타인의 느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법(암리타, 438쪽)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달빛 그림자, 174쪽) 한 사람의 인간은 온갖 마음을, 모든 좋은 것과 더럽고 나쁜 것의 혼재를 껴안고, 자기 혼자서 무게를 받치고 가는 것이다 혼자서(티티새 44~45쪽)
오늘날 씨니컬은 차라리 귀여운 포즈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그건 사회와의 긴장 관계에서 나오는 태도와 정서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를 잃고 '나'가 될 때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좋고 싫음의 문제가 더 절실해진다. 이성보다는 감각. 보편보다는 주관. 충만한 감각(sense)과 그에 기반한 극히 개인적인 감수성. 바나나의 소설은 그런 의미, 정치성이 퇴색하는 시대를 잘 읽었다는 데서 여전히 첨단을 주장할 수 있다.
극히 개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울은 거쳐야할 필수 코스이다. 아직 소통에의 열망이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나 전달되지 않는 열망들은 물 먹어 퉁퉁한 눈망울과 끝없이 삼켜야할 외침들로 수렴한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은 막 씨니컬에서 우울로 넘어가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비록 사람이 극히 개인이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우울의 정서는 원래 예술가들의 전매특허인데, 오늘날 우울은 가장 현대적인 정서가 되어버렸다. 세계 3대 발명약 가운데 하나가 우울증치료제다(나머지는 비아그라, 페니실린). 그러나 타인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이 정도면 거의 득도의 경지에 가깝다) 바나나는 우울과는 별 관련이 없다. 순수하게 자신에게만 관심있으며 모든 사라짐에 초연한 그는 이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고 봐야할 것이다. arco는 우울에서 득도로 넘어가는 어느 지점에 위치한다.
arco의 노랫말에는 현대를 사는 이의 무의미와 무기력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distant lies) 언어가 무슨 소용일까.(grey)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랑하는 너에게는 닿을 수가 없네.(flight, driving at night) 이처럼 나와 세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고 이를 노래하는 게 arco다.
arco는 대놓고 우울을 노래한다.(into blue) 우울도 보통 우울이 아니다. 병적일 정도의 상태에 빠져 있다. arco의 '나'는 모든 층위에서 단절을 겪고 있는데 사람들과 나 사이의 단절은 우선 베이스로 깔고 있고, 세계와 단절이 크니 언어가 의미를 잃는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과의 만남은 공포일 뿐이고 사랑? 당연히 사랑도 무의미의 도마 위에 오른다.
사랑이 무의미의 도마 위에 오를 때 이미 사랑이란 이름 뒤의 삶, 그는 사랑뿐이 아닌 삶 자체를 심판하는 순간에 도달한 것이다.
문제는 삶이 정녕 의미가 없다면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데 있다. arco는 삶이 의미가 없는데 그렇다면 노래는 불러서 뭐해, 라는 노래는 부르지 않고 있다. arco의 노래는 차라리 자살병 걸린 아이의 '죽고 싶어(죽음에의 의지를 말하지만 실은 구조요청)'처럼 들린다. 죽고 싶으면 죽으면 되는 거다. 그러나 죽지 않고 괜히 한 마디씩 한다. 죽고 싶어(help me).
coming to terms의 8벅 트랙 grey의 한 부분을 들어보자. nothing these days means what it says 오늘날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어 everything's gone grey 모든 것은 회색이야 이처럼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며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를 노래하는 건 매우 역설적이다. 그렇다면 arco의 가끔씩 지독히도 직설적인 노랫말을 거꾸로 들어야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다. 자살병 걸린 아이의 죽고 싶어는 구조요청과 죽음에의 의지를 동시에 지닌다.
arco의 음악은 무척 담담하게 들린다. 목소리 또한 급격한 호소를 하거나 감정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절망적인 정서를 노래하면서도 이상하게시리 초연하다. 가장 결정적인 건 아름답다는 거다. 처음 이들의 음악을 듣고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아름답고 서정적이고 고독하다. 어느 풍경 좋은 곳에서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고 싶을 때 이 음악을 들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에만 취해 있기엔 가사가 너무 독하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음악은 싸이버공간이다. arco는 머릿 속에 우주를 끌어온다. 광막한 우주에서 우주선을 잃고 지구도 잃고 우주미아가 되어 둥실둥실 하염없이 떠다니는 그러나 공포나 두려움 대신 오직 몽롱함만이 지배하는 떠다니고 떠다니고 떠다니고 떠다니고, 그런 따위 싸이버공간이 머릿 속에 그려진다.
arco가 노래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러한 제3의 공간 만들기에 있다. 현실은 무의미하고 삶도 무의미하고 소통은 할 수 업고 그렇다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의 심연으로 침잠하는 수밖에 없다. arco의 정서는 우울에서 한단계 진화한 정서다. 우울도 이제는 한물간 정서가 아닌가. 애절하게 시작해서 외치거나 광폭한 발산을 찍고 내려오는 그러한 음악적 방법론도 이제는 좀 지치지 않는가. 외침은 전달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arco는 도무지 소통이 의심될 때의 피난, 때로는 공중부양. 그것은 우주미아적 몽롱함, 마침내 득도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마지막 정거장.
arco는 비록 우주로 침잠하지만 아직은 사람과 소통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그래서 가사가 그리도 극단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러한 음악을 들음으로서 다가올 득도의 세기(이미 한참 전부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이상 그리움이 문제 되지 않고 세상에 기대할 것도 없고 온전히 나라는 것 자체로 만족스러운.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다시 덧붙인다.
완벽하다. 그 모든 것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온전히 독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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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여만에 재발매되는 'Arco'의 데뷔앨범 'coming to term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