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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는 다른 시간적 배경의 이 소설을 나는 얼마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만났건만... 왜인지 모르게 시간적 배경만 달라졌을 뿐이지 우리네 삶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곧 느낄 수 있었다.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웃고 울고, 세상살이 모든 것을 돈에 지배당하는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들에게 애정과 연민과 배고픔에 고향을 등진 이의 외로움을, 악함과 함께 동정과 공감을 함께 했다면 이 무슨 복잡한 감정인지...
대홍기 쌀집의 3대의 이야기.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싸우고, 가족이기에 앞서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고 살아남고자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모습들, 증오하면서도 아쉬운 눈물을 흘리고, 그러면서 또 스스로가 악함으로 똘똘 뭉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기에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홍수로 배고픔을 이기고자 기차에 몸을 싣고 대홍기 쌀집에 흘러들어오게 된 우룽, 그곳에서는 밥을 굶지않아도 되고, 자신을 황홀하게 만드는 쌀냄새를 계속 맡을 수 있으니 그곳에 딱이었던 것. 그게 우룽이 순박한 시골청년의 모습을 버리고 누군가를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괴물이 된 시초였던 것 같다. 오직 한가지 이유만으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오직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들과 시간들은 점점 세상의 속임수와 악함과 돈을 배우면서 달라지게 된 것이다. 대홍기 쌀집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된 과정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진지했지만 웃음이 난다. 아마 현실에서 존재한다면 그들의 성격은 매우 솔직한 사람들이었으리라. 좋은 말을 골라서 하는게 아닌 머릿속 말들을 그대로 툭 뱉어내는...그래서 더 그들의 이야기는 투박하게 들려왔고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적응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과 이야기 속에 우리들의 지금 모습 그대로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들을 그렇게 추하고 악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단 한가지다. '돈'.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나 생각해보면 그 이유도 역시 하나. '돈' 때문이 아닐까. 먹고 살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참 많다. 오랫동안 꾸어오던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도, 무언가 못다 이룬 자아를 찾기 위해서도, 세상 속에서 부딪히는 사람들과의 교류 역시도...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고 기본이 되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허기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아침부터 뛰고 있지 않은가. 등굣길 혹은 출근길을 그렇게 말이다. 아침저녁 쌀쌀한 기운이 도는 그 길을 걸으면서 어딘가로 향하는 그 이유가 그리 많지도 크지도 않다는 것을 새삼 말해 무엇하리... 모두가 쫓아가는 그 '돈'을 나도 같이 쫓고 있기에 그 무리들 속에서 나만 다른 생각을 하기에는 무언가가 뒤에서 잡고 있는 듯한...
제목처럼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쌀"은 돈이다. 쌀을 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대홍기 쌀집 앞의 줄을 봐도 그렇고, 쌀 냄새를 맡으며 위안을 삼는 우룽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성공하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남고 싶었던 이유는 그 쌀(돈) 때문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끝은 존재한다. 삶의 끝, 싸움의 끝, 권력의 끝, 그리고 그렇게 쫓았던 돈의 끝이...
뭐, 읽다보면 저절로 알아지겠지만, 그 돈의 모습이 마지막까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을거라 생각된다. 없어도 되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들이 보았던 피와 배신과 증오를 달고 살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문득, 나는(우리는) 돈 앞에서 얼마나 쿨~해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우룽이나 우룽의 가족들의 모습처럼 되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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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글에 나온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소설'이라는 말처럼 정말 한번 읽기 시작하니까 도중에 멈출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도중에 가족들이 불러도 대답하기 싫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는 책인 것 같다. 최근에 처음으로 알게 된 쑤퉁이라는 작가는 독자를 그가 만든 허구의 세계로 완전히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진 것 같다. 몇 개월 동안 읽은 다양한 종류의 책들에서 만난 수많은 작가 중에 가장 뛰어난 글솜씨를 가진 작가라고 소개하고 싶다. 난 비교적 작가들에 대한 칭찬에 인색한 편인데 쑤퉁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싶다. 아마도 난 그의 소설책에 완전히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책이다. 처음에 책 제목만 보았을 때는 농촌소설류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내가 짐작했던 농촌소설은 아니고 쌀 가게를 운영하는 집안의 사람들의 가족사와 관련된 가족사소설로 분류하면 좋을 듯 싶다. 소설은 읽으며 김동인의 소설 '감자'가 떠올랐다. 둘 다 환경 결정론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 제시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어떤 환경에 있냐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는지 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아주 냉정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계열의 소설이라고 말하면 좋을 듯 싶다. 등장인물에 대해서 어떠한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을 전혀 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소름이 돋도록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제시한 또 하나의 세계 속 현실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현실은 실제 우리가 사는 세계보다 더 리얼리티를 띠고 있다. 책 속에는 쌀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쌀가게 사장 그리고 그의 2명의 딸과 그녀들의 남편 우룽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간에 일어나는 갈등과 시련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들 각각이 그려내는 삶은 너무나 불행하다. 가족간에 서로 맹렬하게 미워하고 증오하며 삶을 계속 이어간다. 그리고 그 불행한 삶 속에서 또 다른 가족구성원들은 생겨나고 그리고 또 비참하게 죽어간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 쑤퉁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 만들어낸 허상을 떨쳐내고 '이것이 바로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다'라는 것을 독자에게 알리고자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언제나 모든 일들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소설 속에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해피엔딩 결말은 어디까지나 드라마나 영화 속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환상의 공간이며 실제 세계와는 괴리감이 존재하는 인간들이 꿈꾸는 허구 속 유토피아 같은 공간이다. 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 남자의 불행한 삶에 주목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그의 젊은 시절부터 그가 비참하게 죽기까지 삶이 이 소설에서 중심 줄기를 이루며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하며 점점 잔혹하게 변해가는 우룽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순박했던 한 인간이 주변 환경에 따라 얼마나 악하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작가는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꿈꾸는 데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 누가 자신의 삶이 불행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불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고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으며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해서 그 불행의 고리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소설 속 우룽이 고아로 태어나고 싶어나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가 살던 고향이 수확을 앞두고 갑자기 홍수가 나서 식량난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그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거지같은 처지로 도시로 흘러 들어올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환경에 지배받을 수 밖에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왜 우리의 삶은 불행해지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하는 결론을 내렸다. 알 수 없는 인생의 여러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죽음을 향해 끝없는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수없이 발생하는 우리를 괴롭히는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지켜줄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로부터 우리자신을 보호할 필요성이 있다. 밟을수록 강해지는 잡초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강인한 의지를 갖는다면 우리를 시련에 빠지게 하는 불행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빗겨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에 태어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 주어진 삶 속에서 우리는 즐거움의 요소를 찾아야한다.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희망과 함께 그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꿈을 꾸어야한다. 또한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지배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단련시키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룽과 그의 주변의 인물들처럼 자신의 삶을 불행 속으로 밀어넣게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가슴 속 깊은 공간에 꿈틀대는 꿈을 잃지 않는 한 결코 불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꿈을 이루는 방법이 선할수록 그 꿈은 더욱 더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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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돈과 욕정과 행복을 보장하리라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으로, 아니 죄악의 공간으로.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증오와 분노가 되어 복수의 고통으로 번민하게 한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는 발길질이 먼저 가해지는 곳, 가진 것 없는 영혼에게는 멸시와 모욕을 뱉어내는 곳,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육체는 개 취급도 받기 어려운 곳이란 이해를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의 어두운 내면에는 광포한 분노가 은둔하게 되지 않겠는가?
시커먼 탄가루가 수북한 화물칸에서 뛰어내리다 휘청거리는 시골 청년이 있다. 홍수가 휩쓸고 간 고향을 등지고 살기위해 도시에 발을 내딛은 사람의 몰골은 이미 남루함으로 거지꼴이다. 그가 처음 대면하는 것은 도로가에 웅크린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하나의 육체이고, 굶주림에 본능적으로 향한 곳은 부두가 폭력배들의 술판이다. 고기 한 점은 지독한 모멸의 감수와 집단적인 구타의 댓가라는 잔혹한 도시의 얼굴을 알려준다.
청년에게 쌀(米)은 곧 생존의 안위이고, 고향의 향기이며, 영혼의 어루만짐이다. 굶지 않을 수 있는 생명, 존재의 원천. 부두에서 쌀을 나르는 수레들이 향하는 곳을 정처없이 따라간 곳에는 미곡상회가 있고 얼이 빠진 청년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랬다. 그곳이 그의 영혼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일 밖에. 먹여만 준다면 땅바닥에서 자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공짜로 얻는 노동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쌀집 주인은 청년을 거두고, 엄청난 선심을 베푼 것이라 가진 자의 자기기만을 망각한다. 허나 “연민과 온정은 비 온 후 길바닥에 고인 물처럼 얕고 피상적이며, 바람이 불고 햇볕이 비치면 금방 사라지는 것”임을 청년‘우룽’은 모르지 않는다.
문득 소설의 배경이 되는‘청베이(城北)’ 와장가(街)의 지명이 작가의 다른 작품,『성북(城北)지대』를 떠올리게 한다. 절망과 무기력에 절고 상처받은 사람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갈등과 혼란의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그 시대상의 처연함이 중첩된다. 자신의 몸뚱아리를 과신하는 쌀집의 첫째 딸 쯔윈, 약자에게 거침없는 모욕과 냉소를 보내는 둘째 딸 치윈은 우룽에게 무한의 복수심을 쌓는, 도시의 본성인 증오와 폭력의 정당한 명분을 확신시킬 뿐이다. 화냥질의 댓가로 씨를 알 수 없는 처녀 임신을 한 첫째 딸의 허물을 위장하기 위해 우룽은 쌀집 사위가 되지만, 장인은 사위의 살해를 청부하기까지 한다. 자신들의 허세와 기만을 위한 이용물 이상이 아닌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우룽의 몸 곳곳에 새겨지는 정말의 흉측한 상처들의 여정으로 들어간다. 청부업자가 남긴 발가락 절단, 쯔윈이 물어뜯어 놓은 발, 장인이 쑤셔놓은 실명한 한 쪽 눈, 마침내 죄의 씨앗인 쯔윈의 자식이 망가뜨린 나머지 눈, 그리곤 매독으로 썩어가는 몸통이다. 도시의 사람들이 그에게 상처를 남길 때마다 고집스럽게 집착했던 쌀집이 그의 것이 되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여전한 방황과 혼돈일 뿐이다. "쌀집의 방들도 흔들렸다. 이곳 역시 기차간 하나에 불과했다. 기차가 광야에서 천천히 움직일 때 우룽 자신도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 기차가 날 어디로 데리고 갈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를 버티게 한 분노와 증오, 복수심의 귀착은 무엇이었을까? 잔인함과 포악함으로 부두 폭력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치윈의 시선처럼 “우룽의 영혼이 그 목합 안에서 광폭하게 요동치는 동시에 나지막이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순수한 시골 청년에게 야수의 포악함을 주입했는가? ‘쑤퉁’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이러한 문장을 썼다. “만일 꽃을 키우는 사람이 그 화초들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면 가지와 잎이 자라는 소리와 꽃봉오리가 마음껏 웃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우리가 바로 외면하고 소외시키며, 씻기지 않는 오욕으로 분노를 주입시키는 장본인들 아닌가? 조금만이라도 그들의 작고 힘없는 목소리를 경청한다면 증오와 적대가 아니라 화목과 행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든다. 돈과 욕정이 거칠게 춤추는 죄악의 도시로. 도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오늘 우리들의 연민과 온정이란 것이 고작 어떠한 것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쌀이 수북이 쌓인 화물차에 실려 고향을 향한 마지막 길의 우룽이란 사람의 고독과 외로움, 그만이 간직했던 삶의 비밀들이 아득하게 밀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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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만난 우룽이라는 친구가 있다.
석탄운송열차를 타고 배고픈 고향을 떠나온 친구다.
그러나 우룽을 반긴건 잔혹함과 경멸뿐이었다.
아! 내친구 우룽에게 쌀집 사람들중 단 한사람만이라도 약간의 자비를 배풀었더라면,
아마도 소설의 결말을 확 바뀌었겠지.
도시는 우룽을 동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하고 비열한 사내로 다시 리모델링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정점에서 우룽의 복수는 시작된다.
통속적이지만 눈물이 없는 복수!
그나마 바닥에 남아있던 인간성마저 깡끄리 태워버리고
복수에 또 복수를 다짐하며 세상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불사른다.
세월은 가는 것,
배고픔에 시달리는 순박한 청년에서
어느새 잔혹엽기 스릴러물에나 나올법한 치한으로 변신하는 우룽을
보다보면 처음 내가 만난 그 사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어쩌면 그럴 것이다.
처음부터 꼬이고 이지러진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돌이켜기에도
무엇을 변명하기에도 너무나 늦어버린 후,
생각은 오히려 지옥을 만드는 모진 회초리가 될 뿐이다.
결국 우룽은 죽음을 앞두고
다시 고향가기를 희망하지만
마지막 길을 동행한 둘째 아들에게서마저
그저 썩어가는 쓰레기취급을 받고 만다.
단지 배고픈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와
온갖 세상의 비열함과 잔혹함에 길들여지는 세월을 살다
금으로 만든 틀니마저 자식에게 빼앗기는 가여운 시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우룽,
그 친구는 과연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책을 덮고서야 나는 본다.
우룽을, 단단한 몸의 우룽을, 죽어가는 우룽의 몸을,
차이는 없다.
다만 우리가 마주치는 숱한 평범한 일상들,
그 일상들이 얼마나 힘겨운 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을 놓치지 않고 싶다.
그 것을 놓치지 않을때
우리는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쉽게 조롱하지도, 무시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룽, 그 친구가 내게 온 이유,
그것은 따뜻한 대화와 정당한 대접, 그리고 안아주는 포근함으로
세상 사람들을 모두 안아
더이상 제2의 우룽, 제 3의 우룽이 세상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고향땅까지 잘가라,
굿바이, 우룽. [인상깊은구절] " 난 평생 금붕어와 여자를 좋아했지. 하지만 어느쪽이든 나를 화나게 하면 어항밖으로 던져버리고 말지." ---뤼대감이 아바오와 통정한 쯔윈을 내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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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한 마디로채만식의 『탁류』를 연상시킨다. 소설의 배경이 된 군산이 왜곡된 식민지적 근대화의 핵심이 되는 지역성을 상징하는 지닌 곳이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탁류'에 휩쓸리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보여준다. 대개는 다 무뢰배들인 이들은 원래부터 '인간 말종'이었다기보다는 식민지라는 현실이 그러한 삶을 강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니깐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와 같은 인간의 삶을 강요하는 것이다. 주인공 우룽이 펑양수라는 농촌에서 와장가라는 도시로 온 것으로 작품이 시작되고 결국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 장면으로 작품을 마감하는 것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쌀집’이 상징하는 것이 문명이든 도시든 간에 그곳에서 우룽은 인간성을 상실했다. "고향을 떠난 인간들은 모두 개와 다를 바가 없다." 1세대: 우룽, 쯔윈, 치윈, 쯔윈과 치윈의 아버지인 쌀집 주인 펑 사장, 뤼 대감, 아바오 우룽은 어지럽게 썩여 있는 짐더미와 사람들을 헤치고 역사밖의 거리로 나아갔다. 허기가 극에 달해 마치 뱃속에서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지 벌써 사흘째였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보따리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닿는 딱딱한 것을 한 움큼 집어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한 줌의 쌀이었다. 우룽의 고향인 펑양수에서 재배한 쌀. 우룽은 마지막 남은 생쌀을 씹으며 천천히 도시의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6).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돌다 잠드는 곳이 바로 잠자리였다. 그런 사람들은 심지어 표정조차 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피로에 절어 있는 것이나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 흉악한 몰골을 드러낸 채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 모두가 개와 비슷했다(7). 그는 빨랫줄에 걸려 있는 쌀집 자매의 속옷과 양말을 보며, 바람에 실려 곳간에서 솔솔 풍겨나오는 쌀 향기에 또 다시 매혹되었다. 하얀 눈처럼 수북이 쌓인 쌀, 아리땁고 농염한 여인, 철도와 부두, 도시와 공장, 사람과 재물…… . 이것들은 모두 펑양수 남자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금 우룽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천국의 모습과 아주 가까웠다(33). 우룽은 웃음을 꾹 참고 가게로 돌아왔다. 그의 눈에 비친 쌀집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나약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이런 콩가루 집안은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것은 그의 고향과 와장가의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84). 여러 사건이 일어난 이 겨울에 그는 처음으로 도시와 와장가 생활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차갑고 견고하기만 한 높은 담장에도 몸을 잔뜩 움츠리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은 안 것과 같았다. 우룽은 자신이 쥐새끼처럼 그 구멍을 뚫고 드어가 담장 너머의 쌀들을 모두 먹어치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그를 아이처럼 흥분시켰다. 그가 가게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일꾼들을 향해 ‘찍찍’ 소리를 낸 후 웃음을 터트렸다(84). 그러나 ‘쌀집’과 달리 ‘쌀’이 상징하는 것은 좀더 복합적이다. 하지만 왠지 곳간에서 나가기가 싫었다. 그는 쌀에 기대어 있는 것이 거대한 요람에 누워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쌀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잠을 잘 오게 하는 수면제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쌀은 여자의 육체보다 훨씬 믿을 수 있고 진실된 것이었다. 결국 우룽은 환상 속의 비단 이불을 덮고 자는 것처럼 쌀로 몸을 덮은 채 쌀 향기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113). 하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의 불길이 양쯔강 남쪽까지 번지고, 거리와 부두에서 키가 작고 턱수염을 기른 일본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또다시 쌀집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쌀이야말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삶의 기둥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300). 우룽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것도 바로 쌀이다. 죽음. 그는 쌀더미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음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잠이 싹 달아나는 듯했다. 그는 쌀을 집어 천천히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가 쌀이 자신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평온하고 맑은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그의 몸이 서서히 쌀 속에 파묻혔다. 쌀이 그의 몸에 난 모든 상처와 피고름을 흘리며 썩어가는 피부를 모두 덮어가고 있었다. 쌀이 그의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없애주었다. 그러자 그는 펑양수에서 보낸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렸다(342). 이 작품의 제목이나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인상 깊은 것은 6장의 에피소드이다. 그러면서 우룽의 인간적 변모 과정 등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새로 쌀은 들여온 후, 곳간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쌀자루를 풀었더니 쌀과 함께 죽은 아이가 쏟아져나온 것이다. 아이는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누더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배가 마치 가죽 공처럼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일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쌀더미 속에 반쯤 붇혀 있는 아이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검붉은색으로 변해 있고 몸은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주먹 가득 쌀을 꼭 쥐고 있었다(163). 아이의 입속에는 누렇게 변한 쌀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가 탄력은 없지만 팽팽하게 늘어난 아이의 배를 눌러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생쌀을 먹다 배가 부풀어서 죽은 거야. 적어도 반 가마는 먹었겠군.”(164) “아니, 쌀자루 속에는 어쩌자고 들어간 거야 ” “배가 고프니까 그랬겠지.” 우룽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치윈을 째려보며 말했다. “배가 너무 고프니까 아무 생각도 못 한 거지. 그것도 모르겠어 ” (중략) “넌 배고파본 적이 없어서 아무것도 몰라.” (중략) 그 순간, 우룽은 분노에 사로잡혀 고개를 돌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가 다급해서 그래? 네가 이 아이를 죽인 것도 아니면서 뭐가 다급해서 난리냔 말야. 이 아인 쌀을 먹다 죽은 거야. 쌀을 먹다가. 알아 ” (중략) 그가 마대를 풀고 몇 번 흔들자 자줏빛 얼굴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쌀이 목에 걸려 죽은 아이…… .(164-165) “난 평생 동안 복수하는 법과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웠지.” 우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317). 8장에서 이야기의 국면은 전환된다. 아들을 낳은 쯔윈이 뤼 대감의 집에 들어가면서 우룽은 치윈과 다시 결혼을 하게 되고 그 사이 1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치윈에게 있어 우룽과의 결혼은 원치 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부부생활이 순탄할 리 없다. 그들의 자녀들도 부모를 그대로 닮았다. 뤼 대감 집으로 들어간 쯔윈도 종들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한다. 아들도 그를 어미로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로서 사는 건 정말 재미가 없다.”(201) 이 두 자매에게. 그녀는 재빠르면서도 짜증스러운 손길로 식탁 위에 있는 그릇들을 치웠다. 그녀가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기고 쯔윈에게 물었다. “이 거친 세월을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눈깜짝할 사이에 큰 애가 벌써 열 살이 됐어.”(201) 2세대: 우룽과 치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셩(-쉬에챠오), 샤오완, 차이셩(-나이팡), 아바오와 쯔윈 사이에서 태어난 빠오위. 2세대 역시 1세대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미셩과 쉬에챠오의 대화. “그런 효심은 개한테나 줘버려! 어머니가 언제 즐거워하는 거 봤어? 세상 사람이 다 어머니한테 무슨 큰 빚이라도 진 것처럼 평생 원망만 하시잖아. 아마 우리가 모두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나 보지.”(230) 미셩은 열 살 때 여동생 샤오완을 쌀 곳간에서 질식사시킨다. 쌀더미 속에 넣어. 그리고 아버지인 우룽에게 얻어 맞고 다리를 절게 된다. 부모에 대한 미셩의 미움은 극에 달한다. 차이셩은 놀음에 미쳐 있다. 두 아들 모두 ‘정상’이라고 말할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것이다. 이 형제는 심지어 눈이 시뻘개진 채 도끼를 들고 처참한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첫째 며느리는 바람이 난 뒤 집을 나가고 둘째 며느리는 항상 형제간의 싸움을 부추긴다. 아버지은 우룽은 힘으로 윽박지르거나 침묵으로 일관한다. 우룽 일가에게 있어 가정은 미움과 증오와 복수와 시기가 충만한 곳이다. 숨쉬기도 어려운 지옥처럼 묘사된다. 깊은밤, 또다시 나이팡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터져나왔다. 나이팡은 악을 쓰고 울면서 시집 식구들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옥 바람으로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차이셩을 피해 침대 밑으로 숨으면서 계속 욕을 퍼부었다. “화냥질로 나선 이모에, 걸핏하면 사람이나 죽이는 인간 백정 외눈박이 아버지에, 여동생을 죽이고 절름발이가 된 형을 보면 네놈 집안에 온전한 인간은 아무도 없어.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236-237) 악을 쓰는 둘째 며느리 나이팡이 저주처럼 퍼붓는 말이다. 나이펑이라는 인간의 인간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우룽 일가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더욱 점입가경은 이에 대한 우룽의 반응이다. 침대 밑에서 차이셩에게 질질 끌려나온 나이팡은 우룽의 무시무시하고 시커먼 얼굴과 그의 손에 들린 푸른 빛이 도는 쇳덩이를 보았다. 우룽이 들고 있는 쇳덩이의 절반은 붉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쇳덩이가 바로 모제르 권총이라는 것을 안 나이팡은 두려움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 아직도 악을 쓸 기운이 있느냐 ” 우룽이 나이팡의 머리에 모제르총을 조준하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난 내 맘대로 사람을 죽이는 인간 백정 외눈박이야. 하지만 조준만큼은 누구보다 정확하지. 더 소란을 피웠다간 네년의 아랫도리를 박살내서 고양이에게 던져둘 테니 알아서 해!” 우룽이 천천히 총을 옮겨 희미한 빛을 내고 있는 전등을 겨냥했다. ‘탕’하는 총성이 울려퍼진 것돠 동시에 전등이 산산조각나 사방으로 튀며 방 안이 어둠에 갇혀버렸다. “난 여자들이 질질 짜는 게 제일 싫어. 남자한테 좀 맞는 게 뭐가 대수라고 생지랄들이야 ”(237) 치윈이 우룽에게 외쳤다. “광채가 나타난 것은 길조가 분명해요. 이제 우리 집안이 평안해질지도 모르겠어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지 마! 이 집안에 산 사람이 있는 이상 평안해지기를 바라지 말라고.”(327) 9장에서 우룽은 장년으로 접어들고 그 바닥의 거물이 된다. 부두 조직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펑양수에서 온 촌놈이 이 도시에서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이다(222). 그러나 우룽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대신 기녀들과의 오입질을 일삼는다(222). 복수심과 증오심이야말로 우리가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밑천이지. 네놈의 부모는 잊어버리더라도 그 복수심과 증오심만은 절대 잊지 말거라(241).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 동안 우룽은 무엇이든 경계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그는 자신에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사고에 대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302). 쌀과 금만의 우룽의 삶의 유일한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이다. 우룽은 도시에서 눈과 발가락을 잃었다. 그리고 성병까지 얻게 된다. 그러나 우룽 자신은 그것이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잘 안다. 본인 스스로 도시의 삶을 의존한 결과라는 것을. 그의 모습은 얼핏 보면 평범해 보였지만 다른 사람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는 완전한 육체를 갖고 있지 못했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잃었고, 아무 죄 없는 발가락도 잃었다. 그리고 이제 더러운 성병이 일으키는 고통 속에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암울하고 상처 입은 정신으로 그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잘못을 집어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은 늘 도시와 도시 생활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육체는 언제나 도시의 삶에 의존하며 그것의 유혹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여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자신의 꿈 때문에 망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79). 그에게 있어 도시는 공동묘지이며 어두운 관일 따름이었다. 도시는 치장이 잘 된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밤이 되어 세상이 조용해지면 우룽은 자주 그 생각을 했다. 도시는 원래 죽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란스럽고 붐비는 거리에 몰려드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햇볕에 말라 사라지는 작은 물방울처럼 조용히 도시에서 사라졌다. 살인, 질병, 폭력, 울분, 일본 병사의 총칼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도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관 속과도 같았다. 도시가 관 뚜껑을 열면 공장에서는 검은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여인들의 분냄새와 아랫도리의 은밀한 숨결이 진동을 하며, 눈앞에는 금은보화와 산해진미가 가득 펼쳐진다. 도시는 보이지 않는 억센 손을 내밀어, 길을 따라 배회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끝이 보이지 않는 차가운 품속으로 끌어들였다(341). 따라서 죽을 때는 그가 펑양수를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기 때문에. 쌀이라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고, 생존하기 위해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자신을 닦아세워야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룽도 평범한 농부로 생을 살다 죽는 평범한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럴 수 없었던 건 가난과 너무나 빈번했던 홍수 때문이었고, 도시에서의 삶은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말살시켰다. “내가 젊었을 때 고생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지. 돼지 한 마리에 소 반 마리, 흰쌀밥 열 공기는 거뜬히 해치울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제 먹고살 만해지고 보니 식욕이 안 따라는구나. 겨우 돼지족 하나에 밥 두 공기밖에 먹을 수 없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야. 그렇지 ”(250) 그는 격한 기침이 연상시키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자신이 홍수를 피해 도망쳤던 길을 애써 기억해냈다. 그 길은 시체들과 살인자들로 가득했고, 가난과 약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수북이 쌓인 쌀더미를 찾아 먼 길을 헤맸다. 난 이제 먹어도, 먹어도 남을 만큼 커다란 쌀더미를 찾았는데, 언제까지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이 길은 언제, 어디로 나를 이끌어서 내가 마침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해줄 것인가?(299)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으면 좋을 만한 작품이다. 쑤퉁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자 중국 현대사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작품. |
'중국 문단의 선봉자'이자 '중국 제3세대 문학의 대표자'로 불리는 명실상부한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쑤퉁'. 그의 또 하나의 장편소설 <쌀>이 꽤 임팩트한 매력을 뿜어내며 읽는 내내 강호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기존의 비극적이면서도 통속적 처연한 가족사를 그린 <화씨 비가>와는 완전 차원이 다른, 전혀 착한 구석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이른바 '나쁜 소설'이라 불릴 정도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매우 잔혹하고, 음탕하고, 질퍽하고, 폭력과 불륜이 판을 친다. 그래서 매우 깔끄장한 기분이 괴어오르지만, 그 속에서 또 다른 매력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는 게, 바로 여기 주인공 '우룽'을 통해서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도 또 하나의 가족사다. 그렇다면 과연 이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이야기 속으로 잠시 떠나보자.![]() 여기 '우룽'이라는 젊은 한 남자가 있다. 홍수와 기근으로 난리가 난 고향 땅을 떠나 밤 깊은 석탄화물 열차에 몸을 싣고 어느 한 동네로 기어들어온다. 단지 먹고 살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몇날 며칠을 굶은 그에게 있어 먹는 것은 최대의 화두이자 삶의 목표가 된다. 부두가에서 그렇게 거렁뱅이 신세로 갖은 굴욕을 당하면서도 그는 배고픔을 잊지 못한다. 결국 기어들어간 곳이 그 지역에서 나름 유명한 '대홍기' 쌀집, 쌀이 원없이 있던 그곳에서 이른바 '일꾼'으로 일하게 된다. 배경은 1920~30년대, 현대가 아닌 근대기에 중국 인민들의 삶은 고루하고 비참함의 연속이다. 기근에 시달려 쌀을 사고 파는 풍경이 대홍기 쌀집을 위주로 펼쳐진다. 그속에서 일하게 된 우룽은 펑사장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하지만, 사장이 그렇게 잘 대해주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여기 대홍기 쌀집의 두 처자, 즉 펑사장의 두 딸인 '쯔윈'과 '치윈'이 그를 노예 부리듯 대하며 그를 매 항상 기분 나쁘게 만든다. 특히 치윈이 정도가 심했는데, 하지만 큰 딸 쯔윈과는 나름 잘 지내며 그의 몸종 노릇까지 한다. '쌀'에 애착을 보인 한 남자 '우룽', 그를 통한 잔혹하고 질퍽한 가족사 그런데 쯔윈은 10대 시절부터 남자를 알았던 소위 성에 일찍 눈에 뜬 케이스. 그 지역 유지인 뤼 대감의 첩실로 들어가는 등, 벌써부터 기질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부두 조직의 패거리인 '아바오'라는 놈과 통정을 하고, 심지어 몸종 우룽과도 관계를 갖는 등, 그녀는 그렇게 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결국 쯔윈이 임신하자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뤼 대감을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만 당하고, 우룽을 더욱더 꼬시는데.. 이를 지켜보는 치윈은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 화냥년 같은 언니와는 사이가 가히 좋지 않을 정도로 두 자매는 그렇게 살갑게 굴지 않는다. 결국 쯔윈은 꿩 대신 닭이라고 우룽과 결혼한다. 그렇다고 우룽이 그렇게 반기는 것도 아니었다. 이른바 화냥년을 거두어 줬다는 심정으로 같이 살게 된 것인데, 이때부터 우룽은 그녀를 변태 성욕적으로 대한다. 관계시 좋은 침실을 놔두고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쌀 곳간에 들어가 관계를 맺으면, 그는 그녀의 음부에 쌀을 한 움큼 집어넣는 등, 변태 성욕으로 욕정을 채운다. 정말 나쁜 남자가 아닐 수 없는데.. 하지만 이런 기질은 처제인 치윈에게도 똑같이 굴며, 이 집안에서 점점 한 마리 욕정의 화신인 동물의 수컷처럼 우위를 차지한다. 결국 펑사장은 풍을 맞고 쓰러져 죽게 되고, 죽기 직전 우룽을 불러 무언가 얘기할려다 딸들의 복수인지 우룽의 한쪽 눈을 부지불식간에 찔러 실명케 만들고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우룽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지만, 그렇게 그는 펑사장 대신 대홍기 쌀집의 사장으로 대신하게 되며 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쯔윈이 아이를 낳게 되자 뤼 대감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이로 인해서 우룽은 처제인 치윈과 결혼을 하게 된다. 즉 두 여자와 몸을 섞게 된 것인데, 그래도 치윈은 생활력 강하게 이 막돼먹은 인간 '우룽'과 잘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우룽은 매 항상 걸죽한 욕지거리와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집안을 휘어 잡는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우룽의 식구에게도 가족, 즉 아이들이 생겼다. 큰 아들 '미셩', 작은 아들 '차이셩', 막내 딸 '샤오완'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 세 명의 자식들도 만만치 않은 게, 미셩은 여동생이 말을 안 듣고 아비에게 자신의 죄를 알렸다는 명목으로 쌀 곳간 더미에서 여동생을 질식사 시키고, 미셩은 아비게에 잡혀 한쪽 다리가 부러지는 절름발이 신세가 된다. 그리고 마냥 놀기만 좋아하는 차이셩까지.. 이렇게 우룽의 두 아들은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노랬다. 그러면서 커서 둘다 혼인을 했는데, 미셩의 부인은 '쉬에챠오', 차이셩의 부인은 '나이팡', 이들은 나름 열심히 살려고 했지만, 아비 우룽을 성정을 쏙 빼닮은 미셩은 부인을 매번 차갑게 대하고, 차이셩은 도박에 빠져 집안일에는 등한시한다. 그러다 쯔윈의 아들 '빠오위'와 부절적한 관계를 갖은 쉬에챠오. 결국 그 현장을 차이셩에게 들켜 약점이 잡힌 채, 전전긍긍하더니 우룽네 식구들을 모두 죽일 심산으로 식사 때 국에다 비상을 타고 그냥 도망쳐 버린다. 물론 그 독을 미리 알게 된 우룽네는 먹지 않고 살았지만, 역시 대단한 엽기가족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이들은 쌀집을 운영하며 살아가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살듯 그 그림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 매 항상 전쟁을 치르듯 살얼음 판이었고, 결국 쯔윈마저 뤼 대감 공관이 일본군 공습으로 폭파돼 흔적도 없이 죽게 되고, 빠오위는 정처없이 떠나 일본군과 손을 잡게 되고, 우룽네의 둘째 며느리 '나이팡'은 산달을 앞두고 일본 군인들이 즐겨했다는 살인게임의 희생양으로 잔혹하게 살해되고, 여기 우룽은 이젠 쌀집 운영은 뒷전인 채, 부두 조직의 두목으로 성장, 이마저도 나중에는 와해되고 말았지만 늙어서도 제 버릇 못 준다고 그 성욕을 자랑하듯 잦은 기방 출입으로 덜컥 성병에 걸리고 만다. 그러면서 그의 쇠잔해진 몸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가는데, 이를 지켜보는 치윈마저도 동정은커녕, 또 두 아들도 불쌍하게 아비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서 빨리 죽고 재산이나 물려달라는 심보로 우룽을 겁박한다. 결국, 우룽은 자신의 생애가 다 되었음을 느꼈는지 마지막으로 고향 땅을 밟고 싶다고 가족에게 말한다. 그러면서 여기 와장가에 처음 왔을 때 탔던 그 석탄화물 열차에 몸을 싣는다. 아들 차이셩과 한가득 실은 쌀더미와 함께..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꿈속의 고향을 그리며 서서히 눈을 감고 만다. 황금빛으로 도도하게 출렁이던 고향의 논밭을 기억하며,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 속에서 마치 한 알의 벼이삭처럼, 한 송이 면화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 나쁜 남자 '우룽'의 잔혹하고 질퍽한 가족사,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우룽'의 가족사다. 아니 우룽은 고아 출신이기에 내력은 없다지만, 그가 고향땅을 떠나 먹고 살고자 대홍기 쌀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 이야기로써, 즉 어찌보면 우룽을 통해 본 가열한 가족사를 그려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일반 드라마적으로 잔잔하게 그려낸 것이 절대 아니다. 잔잔하게 아니라, 아니 잔혹할 정도로 인간의 악마적 본성이 매 페이지마다 판을 친다. 폭력과 살인, 음모와 배신, 강간에 근친상간은 물론이요, 빈번하게 등장하는 욕지거리와 성적 묘사는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을 드러내며 매우 깔끄장한 기분을 괴어오르게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기이할 정도로 끄는 매력인 셈인데, 어느 것 하나 정이 안 가는 여기 캐릭터들, 마치 인간의 밑바닥에 배여있는 더러운 성정을 보듯, 그들은 가열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인공 우룽은 어찌보면 '나쁜 남자'의 전형으로 일관하며 두 여자를 변태적 성욕으로 강간하고, 심지어 번갈아 근친으로 결혼하며 대홍기 쌀집을 풍비박산 지경까지 몰고간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살갑게 구는 아비도 아니다. 여동생을 죽게 만든 큰아들을 보란듯이 반송장으로 만들어 절름발이로 만들고, 며느리 한테도 XX년이라며 총을 들이대며 밑구녕을 아작낸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기녀들로 인해 성병에 걸리자 8명을 매몰시켜 버리는 등, 그는 마치 악의에 바친 사람처럼 가열한 폭력으로 일관되게 살아오며 버텨낸다. 마지막 쯔윈의 아들 빠오위한테 심하게 고문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이렇듯 이 소설은 가열한 한 남자 '우룽'의 이야기다. 그가 그렇게 평생의 안식처로 좋아했던 또 사람이 살기 위해서 주된 먹거리인 '쌀'을 통한 매개체로, 그 어떤 생존 본능에 대한 발호로 악마적 본성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가열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깔끄장한 기분이 괴어오를 정도로, 잔혹하고도 꽤 질퍽한 가족사기에 '쌀'의 이야기는 무시로 엄청난 마력을 뿜어낸다. 이른바 착한 소설이 아닌 아주 '나쁜 소설'의 전형 <쌀>, 읽어보면 안다. 여러 말이 필요없이 강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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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퉁을 통해 중국의 다양한 모습들을 만나고 있다.아주 새롭고 재미난 경험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쑤퉁의 소설에선 허구의 냄새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왜냐하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지금 내 옆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착각이 들정도 이기 때문이다.
쑤퉁의 소설 쌀에서 만나게 된 건 중국의 과거의 농촌의 풍경, 가난 그리고 중국전쟁이었지만 조금더 안으로 들어 가 보면 쌀의 화두는 성악설에 대해 저자가 말 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쌀에 등장 하는 인물들은 표면적으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각자 자기가 살기 위해 속이기를 반복하고, 죽이기를 반복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그러한 행동들엔 모두 자신들만의 합리화가 같이 있었다.
환경에 의해 사람들은 변했고, 상황마다에 따라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실제 사람들의 본성이 아닌가 라고 저자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조금 비껴 생각 해 보기로 했다.
누가 누구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시대가.. 세상이 그렇게 사람들을 몰아 갈 수 밖에 없었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우룽처럼 살면 안되는 거라고 내가 말 할 수 있었을까? 나의 상황이 그러하다면... 구박과 무시와 핍박에 굴하지 않고 성공을 해서 원수를 거리낌 없이 사랑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 할 자신이 없다. 쑤퉁 역시 사람의 본성에는 그러한 바탕이 있을 거란 생각을 시작점으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소설의 배경엔 가난과 궁핌함 그리고 전쟁이 있었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성악설이란 화두가 쌀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룽이란 인물의 인생을 같이 따라 가면서 사람의 잔혹성의 출발점은 어디이며 정말 이렇게 까지 비열하고 파렴치한 일 수도 있는가 하고 생각을 하게 되다 보면 그는 어느새 쌀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변하고 있었다. 쑤퉁의 소설에서 인간의 본성에 잔인한 묘사들은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고 이렇게 잔인하고 비열한 인물들은 소설 속에만 존재 하는 것일거라 믿고 싶었지만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도 반복 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장편소설이었음에도 전혀 지루 하지 않았던 쑤퉁의 소설 쌀 화두가 성악설이란 것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사람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만으로도 고마웠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가볍게마는 읽을 수 없는 장편소설이었지만 그의 타고난 언어적 감각들로 인해 단숨에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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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읽으면서 기분이 안 좋았다. 독자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어쨌든 공감했다는 얘기고 작가의 의도 역시 독자를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으니.
읽으면서 동양 사회에서의 남자들, 특히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의 남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국적을 불문하고 변태적이며 가학적이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남자라는 존재들이 지금까지보다 더더욱 경멸스럽게 느껴진다. 설마 작가의 본질이 투영된 것은 아니려나. 남자의 입장에서 본 남자들의 본성이 이런 거라면 남자들에게는 성악설이 맞다. 사춘기를 맞아 제2차 성징이라는 것을 갖게 되면서부터 남자는 모두 본질적으로 악하다. 이것을 크게 인간으로 넓혀볼 수는 없겠느냐 묻는다면 난 "노우" 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남자같은 존재이고 또 하나는 여자같은 존재이다.
작가는 쌀을 무슨 의미로 사용한 것일까. 주인공인 천하의 몹쓸 인간 우룽의 판타지, 이상향... 그런 것? 사람에게 아련히 무엇을 꿈꾸게 하는 그런 것... 못살던 시대에 먹는 쌀이 사람에게 그런 판타지를 꿈꾸게 하는 매개체였다는 것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먹고 사는데 연연하는 짐승과 다를바 없다는 말하자면 돈을 좇는 짐승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그 시대에 이것이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상이라 하더라도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이 과연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털끝만큼이라도 갖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답할 수 없다. 우린 모두 돈을 좇는 짐승들인가....
인간의 모든 극악한 면들을 등장 인물들에게 모두 주입시킨 것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악들을 다 발라놓은 것 같은 모습들이다.
그러면서도 감히 인간이기 바랬던 막연한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을 간직하는 것으로 인간임을 인정받으려고 했던 우룽은 너무 과한 것이 아니었을지.
소설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 힘이 빠진 느낌이다. 엄청난 어찌보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벌여놓고 작가는 슬그머니 여러가지 의문을 남겨놓고 글을 끝내버린 느낌이라 막판에 김이 좀 빠졌다.
어쨌든 만만치 않은 분량에 엄청난 악의 이야기들을 풀어낸 작가의 능력에는 박수를 쳐줄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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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서 "쌀"은 과연 무엇일까? 살아가기 위한 음식일까? 아니면 "부(富)의 상징일까? 옛부터 조상들은 "쌀을 사러간다"고 하지 않고 "쌀을 팔러간다"고 했다. 왜일까? 쌀을 산다와 쌀을 판다의 의미에는 "빈부의 차"가 내포되어 있다. "쌀을 판다"는 것은 쌀이 남아서 팔러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쌀이 남아 판다는 의미는 부(富)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쌀을 화폐로서 사용을 했기에 "쌀을 판다"고 했다. 이 경우에는 돈을 의미했다. 이외에도 여러의견이 있지만, 어째든 "쌀"은 옛날부터 동양사회에서는 삶을 영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곡식이었고, 부의 상징이었다. "쌀"을 읽으면서 어릴적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당시에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친구들 중 여러명은 하루세끼 먹는일이 힘들때였다. 도식락에도 보리밥을 의무적으로 섞어야 했던 그 시절. 나와 절친했던 이웃집 친구의 집을 나는 저녁때면 놀러갔다. 그 친구의 집은 하루가 멀다하고 저녁은 수제비를 먹었기 때문에 수제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저녁마다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의 집은 밥을 해 먹을 쌀이 없었기에, 한달에 한포대씩 나오는 동사무소의 배급밀가루로 수제비를 해 먹었던 것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별식이었던 수제비가 그녀석이나 그녀석의 가족에게는 어쩔수 없는 주식이었음을... 쑤퉁의 작품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아니 자세히 말하면, 그의 전작(국내에 소개된 책중) "이혼 지침서"의 세편을 먼저 읽었으므로 "쌀"은 네번째 작품이 되는 꼴이다. 이미 "이혼 지침서"로 그의 작품세계는 맛을 본 상황에서 이번에 "쌀"이 출간되어 읽게 되었다. 먼저 책이 끌어들이는 흡입력에 놀랐다. 책이라는 것이 처음 몇페이지는 읽히는게 더디고, 이른바 책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쑤퉁의 "쌀"은 첫 페이지부터 빨아들이는 힘을 느꼈다. 왜 쑤퉁의 책이 많은 나라에서 출간을 했고, 중국에서도 영향력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지 다시한번 실감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또한 깔끔한 번역이 마음에 들었다. 읽는내내 편안함을 맛 볼수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작가가 쓴 작품을 읽는 느낌이었다. 역시 좋은 작품은 좋은 번역자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쑤퉁의 "쌀"을 읽는내내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고, 참담하고, 암울하고,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인간(人間)이란 이런 것이란 말인가? 정말로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일까? 순자가 말할대로 인간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악하고, 양보도 없으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남을 해치는 상하게 하는 마음 투성이일까?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순자의 성악설(性惡說)보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쑤퉁의 "쌀"에서 희망을 찾아 볼수가 없다. 오직 불행과 참혹한 현실만이 존재한다.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서 희망이라고는 오로지 죽는것 뿐. 다른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오히려 별것아닌 일상적 말한마디가 오히려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온통 시기와 질투, 배신, 음모가 가득찬 가운데에 "툭"하고 던지는 일상적 한마디가 기쁨이 되어 돌아온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쌀"에서는 한 인간의 끝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바닥에까지 이르는 한 인간의 종말...책을 읽다가 주인공이 그만 생명의 줄을 놓기를 바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주위의 사람이 제발 그 생명에 마침표를 찍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몇번이고 갖게 된다. 아마도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도 되는것처럼.... 결코 좋아질수 없는 희망없는 삶을 사는 그에게 남은것은 오직 "쌀"뿐. "쌀"은 바로 그의 희망이고 이상이고 꿈이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의 고향은 다시 돌아가야할 꿈이고 이상의 도시이다. 비록 그곳에서 희망이 없어 떠나왔지만 결국 그가 다시 돌아가야 할곳은 다른곳이 아닌 바로 그의 고향. 그는 결국 고향으로...... 쑤퉁의 "쌀"을 읽으면서 지금의 내 삶이 행복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따뜻한 말한마디 나눌 가족이 있고, 잠잘 집이 있으며, 하루 세끼를 먹을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오랫만에 좋은 소설 한편 읽었다. 마치 하루동안 참담하고 암울한 공간속에서 헤매이다 나온 느낌이다. 지금 삶이 힘들고 생활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거침없이 쑤퉁의 "쌀"을 펼쳐보길 바란다. 아마도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음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