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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었습니다-이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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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덕규열일곱 살 여름이었습니다 이슥한 밤마실을 다녀오는 어둠 속이었는데요 그날따라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칠흑의 허공을 더듬으며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요눈감고도 찾아가던 집이었는데요아무리 가도 집은 나오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는데요냇가 쪽 같기도 하고 이미 동네를 벗어나 들판으로 접어든 것 같기도 했는데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방향을 수십 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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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규


열일곱 살 여름이었습니다 이슥한 밤마실을 다녀오는 어둠 속이었는데요 그날따라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칠흑의 허공을 더듬으며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요

눈감고도 찾아가던 집이었는데요

아무리 가도 집은 나오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는데요

냇가 쪽 같기도 하고 이미 동네를 벗어나 들판으로 접어든 것 같기도 했는데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방향을 수십 번 다시 잡았으나

집은 갈수록 멀어지는 듯했는데요 어느 순간

발을 헛디뎌 어떤 허구렁 속으로 까마득 굴러떨어졌는데요 그 때 그 어둔 허구렁 속에서

누군가 내미는 손을 무심코 잡고 일어서다 소스라치게 놀라 물러섰는데요

놈이었습니다

깜깜한 놈,

어둠 속에서 나를 환히 내다보는 놈,

놈의 손을 잡는 순간 손끝을 통해

놈의 엄청 시커먼 마음이 내 몸속으로 고압 전류처럼 까무룩 흘러들어왔는데요

그순간 나는 유정(油井)처럼 캄캄하게 깊어졌는데요

어둠이 깊어질수록 환하게 눈뜨는 놈에 이끌려 밤새 뒷산을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와보니,

남향집이었던 집이 감쪽같이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요

등 뒤로 해가 뜨고 지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어둠 속의 일들이 대낮처럼 환히 다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놈의 일거수일투족도 한눈에 들어왔는데요

으슥한 어둠 속에 숨어 다디단 죄를 짓기 시작한 그때 놈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는데요


내 손을 잡아 이끌고 빛으로 데려온 건 어둠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웃지도 않고 근심 있는 척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집의 방향이 바뀌고 익숙한 것이 낯설게 보이는 것입니다. 쓸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세상이 그런 것이려니 체념했습니다. 나이 열일곱 살의 깨달음 치고는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두워지다가도 환히 보이는 순간이 있고 목욕탕에 올라온 곰팡이가 다음날 사라지는 마술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잘못 본 것일까, 곰팡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착각하며 성장하는 우리는 모두 놈이었습니다. 


여름

-이덕규


무성한 풀을 베었다


푸른 깃발을 들고 인해 전술처럼 밀려오는 녹색당 젊은 기수들을 무참히 제거했다


초록 피비린내가 낭자했으나,


초록은 끝내 초록의 배후를 발설하지 않았다


온종일 초록을 헤쳐 베어도 속속들이 초록 일색일 뿐,


그 어디에도 초록을 틈타 초록을 건너려는 초록의 수뇌부는 보이지 않는다


누굴까,


이 염천 땡볕 속 캄캄한 밀실에 숨어 이토록 완벽하게 초록 혁명을 완수하는 자!


민들레 홀씨가 날아다니는 산책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비가 그치면 여름. 여름 시작에는 비. 짝을 지어오는 비와 여름. 꽃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초록으로 무장한 싱그러움이 몰려옵니다. 태양 빛에 반짝이는 초록 혁명군의 정체는 비밀이었습니다.


한 통에 이천 원

-이덕규


뒤늦은 재혼

단체 맞선 자리처럼

재래시장 모퉁이 노점에

일령횡대로 정색하고 늘어선 끝물

수박통들,

꼭지가 말라 비틀린

그 시들시들한 얼굴들을

이리저리

굴려보던 중년의 여자들이

얼결에, 무작위로

황혼의 짝을 찾아들고 가듯이


덜렁덜렁


소복이 부은

손아귀를 파고드는

나일론 끝에 매달려가는 머리통이

문득, 면목 없다


한 통에 이천 원이면 싸지요, 수박. 싸서라기보다 끝물이라고 떼 지어 나와 있는 것들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사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입니다. 싸다고 싫어하려나, 이런 거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주저하는 마음 때문에 사기가 망설여 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양 손에 가득 수박 덩이들을 들고 가는 용기를 보여주면 상대도 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려나요. 그제 마트에서 본 수박은 50프로 할인 만이천 원이었습니다. 아직은 기다려야 하나봐요. 수박을 먹기까지. 



s*****m 2018.05.28. 신고 공감 3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