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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노자와 장자의 사상체계를 묶어서 노장사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도교와 연결지어 생각하면서 현실도피적이고 염세주의적 사상으로 배워왔다. 아마 우리가 노자와 장자를 이렇게 이해한데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어 통칭했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그들의 사상을 새롭게 조명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면서 그것이 우리의 오해였음을 이해했다고 하지만 노자와 장자를 구분하기란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저작을 읽다보면 모두 도(道)와 무위(無爲)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일전에 어느 책에선가 노자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려 한 것은 무위지치(無爲之治) 즉, 노자사상의 본령은 통치에 있는 입세간(入世間)의 입장이고, 장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자연과 하나가 되어 소요(逍遙)할 것을 설파한 출세간(出世間)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흔히 출세간이라 함은 속세를 떠나 수행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하고 입세간이란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것을 말할 때, 내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가 이들을 구분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구분하고 비교하는 것은 여전히 모호하기만 했고, 누가 물어본다 치면 뭐라 딱 부러지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 책은 중국학자 양자오가 쓴 ‘중국고전을 읽다’ 시리즈 중 한 권이다. 텍스트 전체의 기본 틀을 드러내고 텍스트와 그것이 탄생한 시대적 관계를 설명하여 중국고전을 읽는 기초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저자의 말에 혹하여 한권씩 찾아 읽고 있다. 일전에 읽은 [묵자를 읽다]와 마찬가지로 [장자]라는 고전을 읽기에 앞서 읽었다면 [장자]를 보다 더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저자는 먼저 ‘연속된 세계관’과 ‘불연속된 세계관’이라는 고대문화를 이해하는 관점에 대해 말한다. ‘연속된 세계관’은 사람과 외부환경 사이에 명확한 구분과 단절이 없다는 것으로 세상만물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본다면 죽음 역시 연속적인 현상 중 한 가지 변화에 불과하게 된다. 고대중국의 상나라, 춘추시대 송나라, 초나라 등 남방지역의 문화가 바로 ‘연속된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들은 귀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그에 반해 ‘불연속된 세계관’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범주를 가른다. 즉, 사람의 영역과 사람이 아닌 것의 영역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있다고 단정한다. 중국에서는 주나라시절부터 ‘불연속된 세계관’이 주류가 되어 ‘연속된 세계관’을 배척하고 억압했다고 한다. 장자가 살았던 기원전 4세기경의 송나라는 ‘연속돤 세계관’이 1000년 이상 전해 내려오던 지역으로, 그래서 장자는 우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표현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말하는 노장, 즉 노자와 장자의 차이도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게끔 해준다. 노자는 주나라 이래 그것을 전승해온 문화의 ‘불연속된 세계관’의 입장에서 인간관계를 바라보았지만, 장자는 주류가 아닌 관점, ‘연속된 세계관’으로 자신이 처한 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도(道)를 이야기하고 자연을 강조하면서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자는 자연의 도리를 인간 세상에 적용하여 안정적이고 강력한 인간의 삶을 장악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했고, 장자는 인간세계의 비좁은 범주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누비며 도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에 중점을 두었다. 장자가 공자에 반대하고 비웃은 것은 바로 이런 ‘불연속된 세계관’을 비웃은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장자는 주나라 문화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는 주나라 문화의 인간세계에 대한 관심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았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비로소 노자와 장자의 차이를 입세간과 출세간으로 보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한서] <예문지>에 실린 텍스트로서의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28편, 잡편 14편에 후대사람이 덧붙인 것이 분명한 해설 3편 등 총 52편이지만, 진나라 곽상이 새로 교정을 한 뒤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등 33편만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온다고 한다. 이처럼 [장자]가 외편, 내편, 잡편으로 나뉘었다는 것은 편집자가 이들 내용이 한사람의 저자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곽상이 <예문지>에 실린 [장자]를 교정하면서 내편 7편을 모두 남긴 것은 이 7편이 본래 장자의 사상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장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 소요유(逍遙遊)과 호접몽(胡蝶夢)일 것이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소요유>와 <제물론(齊物論)> 두 편을 [장자]를 읽는 교재로 삼는다. <소요유>에서 장자는 아무리 큰 것이라도 무한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미물에 불과하고, 아무리 짧은 것이라도 찰나의 시간에서 보면 억겁의 세월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서로 다른 잣대와 크기의 상대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기존의 가치에 대해 지니고 있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만들어 준다. 소요유의 유(遊)는 바로 자기에게 맞는 잣대와 크기 안에서의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마 참된 쓸모를 찾아 무엇인가를 계산하는 분별심을 줄여나가 마음의 온전함과 단순함을 보전하는 것이 소요유라고 말하는 것이지 싶다. <제물론>의 제물은 구별과 편견을 꿰뚫어 보는 것이며,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사물을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호접몽은 바로 <제물론>에 나오는 우화이다. 꿈속에서 나비를 희롱한 장자는 자신이 나비를 희롱한 것인지, 나비가 자신을 희롱한 것인지 알지를 못한다는 우화를 통해,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동양고전을 읽다보면 우리는 저자의 관점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느끼곤 한다. 원문을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나름대로 유추할 수 없기에 전공자들이 쓴 주석과 해설서를 읽지만 각기 주장하는 것과 독자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들이 상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기에 고전을 읽고,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지는 오롯이 읽는 사람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똑같은 텍스트를 두고서도 여러 사람들이 쓴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 책처럼 마음속 의문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는 책도 만난다. 그래서 나만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가게 해주는 것, 바로 이것이 책 읽는 즐거움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저자가 쓴 시리즈 중 또 다른 책인 [노자를 읽다]를 만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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