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전까지 대한민국에 내로라 하는 유명학자들이(대부분 인문학과 관련하여) 자신의 책을 통하여 그리고 여러 지면을 통하여 찬양해 마지 아니하던 책이 있으니, 이름하여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개인적으로 조르바를 보면서 불편한 점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였는데, 이 인문학을 제법 한다는 인물들이 자유와 관련하여 조르바를 얼마나 칭송했는지, 나는 나의 책읽기가 무언가 잘못된 것인가 의심을 했다. 그러던 중 석영중 교수의 이 책을 통하여 나와 비슷한 관점에서 조르바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저함없이 이 책을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
| 도스토예프스키. 이 발음하기 어려운 러시아의 대문호는 나에게는 매번 멀리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이 분의 작품을 항상 읽어보고 싶었지만 여러 인물들의 어려운 이름, 두꺼운 분량등은 나를 항상 포기하게 했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킼의 삶에 대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찬찬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작품을 좀 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느다란 길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시간이 나면 한번 더 읽어보아야겠다. |
|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란 무엇일까..우리는 자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더 많은 자유를 갈구 하고 있으며 오늘보다 더 많은 자유를 원하고 있다..그러한 자유들은 점점 더 확장되어 가지만 궁극적으로 나의 자유가 확장되어 갈수록 누군가의 자유를 침범하게 되고 멈추지 않으면 나 스스로 억누르게 되는 그러한 자유의 민낯을 깨닫게 된다..이렇게 자유라는 것을 박탈당하였던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엡스키의 이야기가 책에 담겨져 있으며 도스토엡스키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문학을 재조명하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자유가 박탈되었던 시기는 바로 그의 30대 젊은 청년작가의 시절이었던 1854년이었으며 그는 황제폐하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죄목으로 잡히게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그리고 그는 족쇄를 찬 채 저 멀리 시베리아 유형소로 끌려갔다는 걸 알 수 있으며 그곳에서 4년형을 언도 받고 풀려나게 된다..물론 시베리아에서 풀려난뒤 도스토옙스키는 사병 복무로 5년을 더 하게 되고 그의 30대는 이렇게 자유롭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걸 알수가 있었다..이렇게 자유라는 것이 박탈되었던 도스토옙스키..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자유가 박탈된 그의 인생으로 인하여 그의 문학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엇으며,그의 문학에 담겨진 철학에 대해서 재조명하게 된다.. 그의 문학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자유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되찾는 그 과정을 그려낸 거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려낸 <죽음의 집의 기록 >에서 보여준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라는 주인공의 모습..그가 바로 도스토옙스키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 수 있으며 도스토옙스키는 그에게 자신의 내면의 깊이를 투영하게 된다..이렇게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지에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였던 것보다 더 처절했다는 걸 알 수 있다...영하 40도의 엄동 설한..그리고 그곳까지 가는 그 시간조차 고통이었다는 걸 알수 있으며 갇혀있지 않음에도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삶을 추구하게 된다..그리고 그는 그 고통의 나날을 자신과 함께 하였던 또다른 죄인들을 관찰하는데 시간을 보냈으며 자신의 고통을 사색하고 성찰하는데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읽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하나였다..그 소설 조차도 읽은지 오래 되어서 기억에 가물가물하였던 생각이 났으며 소설 속 등장인물이 나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그럼에도 이 책에 담겨진 이야기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으며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최근 읽었던 <유배, 그 무섭고도 특별한 여행>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자유가 박탈된채 살아갔던 조선인의 삶을 알았기 때문이며, 도스토옙스키는 조선의 유배생활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며,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그렇게 도스토옙스키가 죄인이 되었던 건 바로 그 당시 황제에게 위협적인 러시아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며,그가 추구하였던 문학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에 대해서 한번 더 알게 되었으며 자유가 박탈된 그 시간의 굴레 속에 살았던 도스토옙스키의 십년의 인생을 한번 더 생각해 보았다.. |
|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들이 너무 길어서 읽다가 포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열린책들의 세계문학전집 이북을 갖고 있어 그의 전집을 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인데 죄와벌, 카라마, 지하생활 등을 거의 절반정도 읽다가 멈추고 있는 상태다. 이 책은 그의 작품중 죽음의 집의 기록과 죄와벌에 나타난 그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그의 사형선고, 수형생활과 관련한 사실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좋은 정보를 담고 있다. 그의 수형생활은 이후 그의 문학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로부터 '자유욕' , '신으로의 회귀를 통한 자유' 등으로 여러 작품에 나타난다고 한다. 아마도 죄와벌이 그런 점에서 가장 모범적인 작품이 아닐까 한다. 석영중씨의 필력 또한 매우 훌륭해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또 다른 문학작품을 읽는 듯이 즐거웠다. |
|
자유_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자유에 대한 사색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석영중교수님께 듣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여느 작가와 비교할 수 없는 굴곡진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난 그의 작품들... 극단적인 삶의 이면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위대한 작가가 탄생하기란 쉽지 않음을 느낀다. 어렵지 않으면서.... 심오한 그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온 삶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싶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어떤 목적 없이는,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한 지향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 우리 모두에게 목적은 자유, 그리고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중에서-
고1 즈음 이었던것 같다. '죄와 벌'을 처음 읽었던 때가.... 중고등학교 때 '세계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읽었었다. 우리집 책장에 꽂혀있던 문학전집이 아직 기억난다. 500쪽내외의 두꺼운 책이 세로로 인쇄된 책이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 때는 이 책을 다 읽겠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는 것 외에 거의 남은 게 없는 수박 겉핥기식의 독서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고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내 아이에게 엄마 책장을 물려주고 싶어서 소장가치가 있는 책들은 한 권씩 단행본으로 구매해서 읽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지난 10월 즈음에 산 책이 '죄와 벌'이었고, (상)권을 읽은 후 내용 때문에...편안하지가 않아서 다른 책들을 먼저 읽던 중이다. 주인공이 도끼로 사람을 둘씩이나 죽이는 장면, 그 이후에 심리갈등을 하는 부분을 읽고 있노라니 내 마음까지 불편해져서 잠시 쉬어가던 중이었다. 누군가 삶이 고되고 힘겨울 때 '죄와 벌'을 읽어보라고 하던데... 나는 반대로 심적인 여유가 있을 때 다시 차분하게 읽어야지 싶었다. ...... 그러던 중 만난 <자유>는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게 되었다. 요즘 집중해서 책읽을 여유가 없어서 이 책은 대부분 출퇴근 버스안에서 짬짬히 읽었다. 잠시잠시 글 속에 빠져들다보니 어느새 마지막장이었다. 처음에는 짧막한 글들이 다소 산만하게 여겨졌었는데, 그런 구성이어서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차례 1부 자유의 환영 (감옥 속의 삶, 삶 속의 감옥 / 가짜 자유인들 / 라스콜리니코프, 휴머니스트의 탈을 쓴 도끼 살인범) 2주 자유로의 긴 여정 (다르게 보기 / 광장으로 나가기 / 시간과 함께 살아가기)
사실 문학책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선 공부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유명한 작가들은 그 이름값만큼, 거기서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알고 있으면서 그 작품을 이해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에 맞게 느끼는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작가가 이야기하는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말 그대로 이 책은 자유에 대한 사색을 하게 된다. 어떤 주제에 대해 깊이 사색한 적이 있었던가? 책을 읽으면 ... 그리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책의 도움을 받더라도 자기가 아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듯... 원작이 아닌 작품에 대한 타인의 해설을 먼저 읽는 것은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작품을 읽고 작가나 그 작품이 주는 메세지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하고 배우고 싶다면 다양한 이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문학작품 속에서...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글 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유'에 관한 생각을 석영중교수님의 해설을 통해 쉽게 접해볼 수 있었다.
사형집행 직전에 목숨을 건졌던 사건, 시베리아에서의 유형 생활, 그 생활을 견뎌내고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돌 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원서로는 읽을 수 없어 안타깝지만, 국내에 번역된 그의 작품들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자유(석영중)> 중에서.... 그는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덕분에"나 "......때문에"가 아니라 "......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중략 그가 모르는 것이 또 있다. 사람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버러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결코 버러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모른다. .....그는 스스로를 버러지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노파를 죽이듯이 자신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곧 견뎌낸다는 것이다. ...... 견뎌낸다는 것은 그냥 참는 것이 아니다. ......그 무엇에소 흔들리지 않고 때가 되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고 마침내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견대뎌냄을 이해한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많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은 후라면...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생각에 깊이를 더할 수 있을 듯 하다. |
|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지 옴스크에서 발목에 족쇄를 찬 채 사 년여 동안 옥살이를 했고 육 년간은 사병으로 복무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의 부재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넌덜머리가 나도록 체험한 작가이다. 책 <자유>의 저자 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유론에는 어떤 사상가도 흉내 낼 수 없는 현실감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자유>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삶과 소설 속에서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자유의 의미를 <죽음의 집의 기록>과 <죄와 벌>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수감 생활을 토대로 쓰인 자전적 소설이므로 어떤 소설보다도 더 많이, 더 노골적으로,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자유에 관해 얘기 한다. <죄와 벌>은 <죽음의 집의 기록>의 속편과도 같다. 작가의 유배지 체험은 <죄와 벌>에서 허구의 스토리와 절묘하게 결합하여 예술적으로 재탄생한다. 그의 소설을 통틀어서 <죄와 벌>만큼 인간의 정신이 부자유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여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사용하는 자유라는 개념은 외적인 자유, 시민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가 아닌 개인적이고 내적인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자유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본능으로서의 자유이며 다른 한편으로 토스토예프스키에게 자유는 '자유욕'과는 정반대되는 어떤 것, 본능의 극복과 최고의 도덕적 상태를 향한 지향이다. 자유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동안 인간의 존엄성을 방해하는 탐욕과 공포, 이기주의와 집착, 좌절과 절망, 증오와 분노와 불안을 딛고 일어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거쳐 사랑과 용서와 인정과 나눔과 베풂의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유에 대한 의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독서로 이어졌다. 나는 작가의 삶과 작품의 메시지, 주인공의 의미를 이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자유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러시아 작가들 중에서 자유에 관해 가장 많이, 가장 끈질기게,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쓴 작가다. 자유는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이나 마찬가지다." "자유는 인간 정신이 의식적으로 노력을 통해 가장 숭고한 것, 가장 위대한 것, 가장 고결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치열한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중단 없는 자유에의 지향, 자유라는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한 자유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책의 저자는 제1부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질적인 옥살이와 그것을 바탕으로 쓰인 <죽음의 집의 기록>, 그리고 <죄와 벌>을 중심으로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하는 행위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한다. 저자는 제2부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준 '자유로 가는 길'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 번째는 '다르게 보기'이고, 두 번째는 세상과의 연결이며, 자유로 가는 세 번째 길은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시간을 신의 선물이자 치유의 힘으로 이해할 대에야 우리는 비로소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저자는 자유는 본능이면서 또 동시에 위대한 가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가치로서의 자유 추구는 본능의 충족과는 정반대되는 행위, 요컨대 본능의 억제를 요구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주인이 된다는 것,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자아를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자유란 충족된 욕구, 혹은 조금 높아진 '만족도'와는 다른 차원의 상태이며, 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처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치로서의 자유는 생명에의 의지가 아니라 생명과 맞바꿀 만한 어떤 것,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향해야 하는 위대한 어떤 것이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 부르면서 그것의 의미를 "진정한 자유란 궁극에 가서는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인간이 스스로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도덕적 상태를 획득할 정도로 자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를 극복하는 데 있다."고 요약했다. 자유를 마음껏 발산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지향, 즉 자아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 곧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다. "이 생명에 대한 의지로서의 자유, 즉 '자유욕'의 큰 특징은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선과 악을 적용할 수 없듯이 자유롭다는 것 자체는 선과 악을 초월하며 자유를 열망하는 것 역시 선과 악을 초월한다. 즉 이때의 자유는 생명과 맞먹도록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지만, 그 자체를 숭고한 '가치'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저자가 토스토예프스키의 글을 통해서 자유의 환영인 돈, 도박, 술에 관해 이야기하여 흥미롭다. "감옥에서 자유의 환영을 제공함으로써 죄수들을 영원히 제자리걸음의 노예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크게 돈, 도박, 술 세 가지다. 이 세가지는 각기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하나로 합쳐진다." "돈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찰을 읽다 보니 죄수들이 벌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 돈은 사실상 그보다 더 큰 어떤 것의 환유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돈이 들어갈 자리에 권력을 넣어봐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권력이 제공해준다고 믿어지는 자유 때문에 권력에 목말라 한다. 명성도 마찬가지다. 명성에 집착하는 성향 이면에는 언제나 자유를 향한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면 부와 권력과 명예, 이 세상에서 성공의 잣대로 여겨지는 이것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존재감이다. 현실적인 효용의 단계를 넘어서면 결국 우리가 성공하고자 하는 이유는 존재감 때문이다. 그것들은 존재감을 높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자유의 느낌을 맛보도록 해준다. 그러니까 결국 돈도 권력도 명성도 존재감에 대한 환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저자는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유에 대해 깊이있게 이야기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중으로 불행하다. 첫째, 그는 궁극의 자유를 구가하는 '초인'이고 싶었으나 철저하게 운명의 부림을 당하고 있으며, 그 점을 그 자신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이미 살인을 저지르기 전부터 그는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이 운명의 노예임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있는 진정한 자유의지를 포기해버렸다.(...) 우리는 여기서 자유의지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인정한 자유의지는 멋대로 무엇이든 결정하는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을 토대로 하지 않는 자유의지, 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자유의지는 교만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은 결국 파멸만을 초래할 따름이다. 즉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자유의지는 무제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도덕의 제한을 받는 의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운명에 이끌려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선을 토대로 하지 않는 의지, 도덕의 재가를 받지 않는 의지를 발동시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살인에 대한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있다. 그가 운명적 살인 운운하는 것은 무책임의 다른 표현이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공동생활과 '공동체 정신'을 이야기한다. 공동체 정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훗날 발전시키게 될 사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핵심으로 자리매김된다. 그가 걸어가게 될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길도, 그리고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하게 될 자유의 길도 모두 공동체 정신과 연결된다. 우리에게 공동체 정신이 있을 때, 우리에게 '사랑 속의 자유'가 있을 때 우리는 공동생활에 묻혀 있는 지뢰를 비켜 갈 수 있다. 증오는 첫 번째 지뢰이자 마지막 지뢰이자 지뢰의 모든 것이다. 저자는 증오를 극복할 때 우리의 영적 능력은 비로소 한 단계 성숙한다고 말한다. "대체로 작가와 예술가들은 창조를 위해 종종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간은 절대적으로 고독한 시간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 절대적인 고독의 시간은 단절이 결코 아니다. 그 고독한 시간에는 언제나 끝이 있으며 그 끝에서 창조자는 언제나 더 큰 공감이라는, 그리고 더욱 큰 교감이라는 결실을 선물로 받는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이 아닌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독방 생활을 견뎌냈던 것은 그가 이 점을 그냥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방 생활을, 창조를 위한 절대 고독의 시간으로 돌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립의 시간을 창조의 시간으로 변환시켜 머릿속에서 소설을 썼고 결국 단절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독방에서 지낸 그 시간이 훗날 옴스크에서 맞이하게 될 공동생활보다 오히려 덜 고통스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증오의 족쇄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도 없고 사회의 유대도 없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떻게 증오의 족쇄를 벗어버렸을가. 그로 하여금 통과하고 견뎌내고 이겨내고, 마침내 자유를 찾도록 이끌어준 것은 신과 인간이었다. 다른 말로,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신을 향한 겸허한 지향이 그를 감옥 밖으로 내보내줬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내서 그 기억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봄으로써 증오심을 치유했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증오심을 물리쳤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라스콜리니코프는 시종일관 수동적이다. 둘째, 그에게는 조력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조력자들이 그를 자유의 길로 인도한다. 조력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매춘부 소냐와 예심판사 포르피리다. 이 두 가지 특징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취지를 함축한다. 즉 자유료워진다는 것은 무언가를 행동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도움으로 자아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되찾아가는 과정, 혹은 자아와의 올바른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이다. 내면의 어떤 것을 우리는 '인간성'이라 부를 수도 있고, 양심이라 부를 수도 있고, '선'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내면의 것을 회복하려면 우선 자아를 직시하는 일이 필요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센나야 광장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센나야 광장은 영혼의 빈민굴이고 도덕의 뒷골목이지만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유를 향해 가려면 이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끄럽고 누추하고 속악하고 천박한 삶, 하찮고 무의미하고 추악하고 악취 풍기는 삶, 이 삶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라스콜리니코프가 이 삶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그래도 그는 이 삶과 우선 연결되야 한다. 소냐의 말대로 "어떻게 사람들을 떠나서 살 수 있겠는가". 여기서 연결된다는 것은 그들과 섞이고 시시덕거리고 그들처럼 술 마시고 주정 부리고 도박하고 통곡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그 삶에도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 삶을 인정해야 한다. 가난하고 더러운 삶도 삶이다. 그에게는 그 삶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삶을 인정해야만 그는 삶과 연결되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유를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은 시베리아를 흐르는 이르티시 강이다. 이르티시 강은 죽음과 부활을 가르는 선, 구속과 자유를 가르는 선이다. 이 결단의 경계선에서 그는 부활의 영역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세계와 연결된다. "<죄와 벌>에서 '죄'를 의미하는 러시아 단어 'prestuplenie'는 '넘어가다(prestupit')에서 파생됐다. 이는 영어의 'transgress'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는데, '죄'란 넘어서는 안 되는 어떤 선을 넘어가기라는 뜻이다. 이 때 '넘어가기'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운동이다. 쉽게 말해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로 노파의 정수리를 내리쳤을 때 그는 선을 넘어갔다.(...) 그러나 '넘어가기'는 영성의 영역에서 자유를 향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유로워지려면 감옥의 경계선을 넘어 광장으로 가고, 광장의 경계선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이때의 넘어가기는 자유를 위한 불가피한 조건이다." "자유는 궁극적으로 시간의 문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의 축 위에서 해방돼야 한다. <죄와 벌>의 근원적인 의미, 그 핵심에 있는 자유와 해방의 의미는 시간의 문제와 얽히면서 가장 심오한 차원을 드러내 보인다. 강 건너의 '다른 세상'은 '다른 시간'에 대한 공간적 대체물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신의 시간'은 거의 메시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바라보는 '저 너머'는 시간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그곳에는 엔트로피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구약 시대의 시간이며, 정지된 듯 여겨지는 시간이다. 그곳에서 시간은 더 이상 숫자로 계량화되지 않는다. 시간은 앞만 보고 달리는 괴물이 아니며, 죽음으로 끝나지도 않고, 모든 인간적인 흔적을 집어삼키지도 않는다. 그것은 치유의 시간이며, 희망의 시간이며, 신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신비의 시간이다. 그것은 사악한 시간, 무감각한 시간, 무질서를 향해 돌이킬 수 없이 질주하는 악마의 시간을 쳐부수는 '신의 시간'이다. 인간에게 이 시간은 "지고 가야 하는" 짐이 아니다. 이 시간 자체가 치유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그렇게 시간이 가면 옛 상처가 치유되고 거기에서 새살이 돋는다." 저자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달한 '자유의 시간' 속에서는 숫자로서의 시간, 계량화되는 시간은 무의미하며 시간이 그 사악한 숫자, 기계쩍인 연쇄의 위력을 상실하자마자 그동한 그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기쁨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삶을 산다는 것은 곧 견뎌낸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삶을 살려면 인간은 견뎌낸다는 것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견뎌낸다는 것은 그냥 참는 것이 아니다. 그냥 묵인하는 것도 아니고 용인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단순히 불행이나 어려움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때가 되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고, 마침내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시간의 관게를 경주나 투쟁이 아니라 공존으로 이해할 때 가능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순리에 대한, 그리고 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속에서 가능해지는,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의미한다. 견뎌냄을 이해한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많다."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하찮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하찮은 존재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자유롭지 않은 사람만이 사물을 허접한 것과 위대한 것으로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가격을 매긴다. 오로지 자유롭지 않은 사람만이 인간을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으로, 위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으로,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평가하고 가치를 매긴다. 이제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러한 구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권력에서 오는 기쁨도 아니었고, 이를 악물고 하나씩 둘씩 모아서 쌓아 올린 부와 업적에서 오는 기쁨도 아니었다. 그것은 성공과 명예, 부에서 오는 만족감이 아니라 시간과 하나가 되어 흘러갈 때, 채워진 시간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한 기쁨, 자유와 사랑과 공감에서 오는 지속적인 기쁨이었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걸어가는 자유의 여정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마무리된다. 저자는 주인공이 자유를 '찾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유를 향해 가는 길, 이제까지와는 다른 길,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서 <죄와 벌>은 한마디로 주인공이 자유를 찾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자유에 지향을 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마음의 감독 속에 갇힌 죄수의 삶인가? 아니면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자유인의 삶인가'라는 말로 에필로그의 글을 마쳤다. "자유를 지향하는 삶은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삶,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다르시는 삶이나. 그것은 봅시 어려운 삶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러한 삶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모든 훌륭한 것들, 사랑과 용서, 관용과 자비, 희생과 헌신은 오로지 우리가 자유를 지향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자유 속에서만 지속적이고 고결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삶과 주변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평화로움, 유대와 헌신에서 오는 충일감, 그리고 조건 없이 나누는 사랑에서 오는 잔잔한 기쁨은 자유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자유를 지향하는 삶이야말고 어쩌면 가장 '사는 것답게 하는 삶'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
|
자유 _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책 제목처럼 나는 항상 자유를 꿈꾼다. 지금도 자유롭게 살아가고있지만 항상 자유를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는것같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우는 인생공부법과도 같다. 하지만 철학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인생에 대한,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싶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이라는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서 토스토예프스키의 자유에 대한 열망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여러가지 삶의 측면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 갈 수 있었다. 자유는 여전히 끊임없이 찾고 나아가는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유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나는 자유에 대한 인식이 바뀔수있었다. 그리고 내면이 아닌 광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그의 말을 통해서, 삶은 내면도 중요하지만 자유를 위해 나아가는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솔직히 어느하나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편하고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이 진정 자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유에 대해 다시한번 느끼고 깨닫는 시간, 그리고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사실 이 책은 좀 어렵다. 그래서 자주읽어보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이라는 책도 기회가 되면 꼭 읽어봐야겠다. 그의 생각, 그의 책은 참으로 흥미롭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게 해줘서 유익하다.
|
|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가는 여정. 몇 년전에 석영중 교수가 쓴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예담, 2009)를 읽고 나서 톨스토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안나 카레니나>를 보다 깊이 읽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소설을 좋아하다보니 나라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잘 보는 편이지만 유독 러시아 소설의 지명과 이름, 깊고도 깊은 무게감 때문인지 자주 손길이 가지 않는다. 톨스토이를 시작으로 막심고리키, 투르게네프, 체호프의 작품들을 한 두 작품씩 접했지만 유독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제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때문인지 러시아 소설의 음습하고도 무거운 주제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멀고도 먼 소설가 중 한명이었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통해 톨스토이의 작품을 한층 더 깊이 느꼈던 만큼 석영중 교수의 도움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천착하고 사유했던 주제에 대해 깊이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정의와 그가 살아왔던 삶에 대해 알아본 후에 그가 썼던 많은 작품들을 깊이 있게 바라보고 싶었다. 석영중 교수의 <자유>는 그가 젊은 시절 경험했던 옥살이를 바탕으로 지은 자전적 소설인 <죽음의 집의 기록>과 그의 대표작인 <죄와 벌>을 중심으로 '자유'에 대한 가치와 그에 반대되는 인간을 속박하는 요인과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는 책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얼핏 쉬워 보일 수 있으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끼고 천착한 '자유'라는 개념을 더 깊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자유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본능으로서의 자유다. 그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강아지도 줄에 묶어놓으면 낑낑거린다. 새도 새장에 가둬두면 날아가려고 퍼덕거린다. 자유는 모든 동물이 생존을 위해 가지고 태어나는 본능이다. 자유는 식욕이나 성욕처럼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가장 필수적인 조건, 생존의 조건이다. - p.15 도스토예프스키가 많은 작품을 통해 그가 '자유'라는 의미에 대해 천착했던 이유는 1849년 4월 23일 토요일 새벽에 체포되었던 일을 시작으로 그의 젊은 시절을 모두 암흑기로 보냈다. 그가 체포되었던 이유는 1847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로 불리는 서클에 등장해 금요일날 사회 개혁을 꿈꾸지만 차마 행동으로 내 보일 수 없었고 동지들과 함께 현대의 사건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공간이었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왕 루이가 축출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러시아 황실이 위협을 느껴 모든 감시와 검열이 강화되었다. 그 무렵 그가 몸담아 있던 서클이 분할이 되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두 그룹이 나뉘에 되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강경파의 인물로 비춰져 체포되었다. 그 이후 그는 수감되었고, 가짜 처형식이라는 황제의 이상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생의 끝까지 갔으나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 황제에게는 정치적인 사형수들에게 무서운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다시 살려줌으로서 은혜를 깊이 알라는 뜻으로 생각했지만 그때 수감되어 사형장에 끌려간 이들은 정신 분열을 일으킬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충격을 넘어섰지만 그가 옴스크 감옥에 있으면서부터 그가 경험하고 체감했던 것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느꼈던 충격을 그의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삼십 대를 체포, 수감, 유형으로 소진해버렸다. 그러나 이 십년의 세월이야말로 이후 그가 위대한 작가로 성장하는 데 가장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는 것에 거의 모든 평론가들이 동의한다. 팔 개월간의 독방 생활, 처형 직전에 사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의 징역살이-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하기도 싫은 인생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그는 순수한 이상주의자에서 지옥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근대의 단테로 변신했다. - p.42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자유다. 어떤 자유인가? 법률의 범위 내에서 누구나 동등하게 무엇이든 자기 좋은 짓을 할 수 있는 자유다. 그러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언제인가? 100만 프랑의 재산을 갖고 있을 때다. 그러나 자연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100만 프랑의 재산을 부여해주는가? 아니다. 100만 프랑이 없는 사람은 무엇인가? 100만 프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그 돈을 가진 사람이 하고 싶은 일에 부림을 당하는 인간이다. - p.55 도스토예프스키가 천작하는 자유에 대해서 깊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자유라는 개념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감옥에서 절실히 느꼈던 자유, 인간이 가장 갈구하는 것이며 때로는 그 자유로움이 너무나 도취되어 무절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가장 위대하고 가장 숭고한 가치를 도스토예프스키는 몸소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체감 덕분에 그가 쓴 작품 곳곳에 그의 처절한 속내를 자유의 본질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
|
특정한 책이나 작가에 관한 책보다는 그 작가, 바로 그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올해 도스토예프스키, 까뮈, 헤세, 세익스피어 등의 번역가나 연구자의 강연을 들어본 후 나보다 훨씬 더 그 작품에 깊이 빠지고 고민하신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내 독서에 반영될 때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깨우치게 됨을 알게 되었다.
죄와 벌...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작품을 작년 여름에 읽었던 것 같다. 책이라고는 자기계발서와 전공서적 말고 거의 읽은 기억이 없었는데,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통해 [안나 카레니나]를 어렵게 어렵게 읽고 난 후 '역시 고전은 지루하기 마련'이란 생각과 '그래도 전하는 메세지는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다.
그 후에 내친 김에 [죄와 벌]을 읽었고, 이번엔 안나때와는 달리 "고전도 이렇게 재밌구나"란 생각과 명확하고 축약적으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대단한 작품"이란 생각을 했고,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앞으로 꾸준히 읽어야겠단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죄와벌]을 읽고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이 초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고, 살인을 저지른 후 방황하며, 예심판사와 아슬아슬한 격정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결국 쏘냐로부터의 얻게 되는 구원의 실마리... 어쩌면 (석영중 선생님의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작가의 진짜 의도와는 달리 나는 초인의 의미를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다만 내가 초인이 아닌 이상 평범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위험한 생각에 무게를 뒀던 것 같다.
자유란 무엇인가? 교과서적인 외침-자유는 존중하지만 방종은 안된다는, 그저 학교 운동장에서 조회시간에 듣던 무미건조한 선언으로 끝나는 이유는 아마도 누구도 자유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생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워지기위해 자신의 현재 상황을 달리 볼 줄 알아야하고, 불쌍한 사람들(그저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들을 의미하는 것이아니라 어쩔 수 없는 고민들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과 서로 연대하여 공동체를 이루며, 시간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책에서 지적한대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시간을 앞서가려고 하고, 술에 취하고, 도박에 빠지면 빠질수록 오히려 그 안에 갖혀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죄와 벌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대단한 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깊은 의미는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석영중 선생님의 지적대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래도 눈치 못채는거냐?"라며 작품안에 반복적이고 구체적으로 자유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가지 장치를 설치해 뒀는데도 말이다.
현실의 고통에 막혀버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선사하는 작품들이 필요하고, 그 작품들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또는 자유를 향해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만으로 어렵다면 이 책이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관념적인 것들을 시각화하여 그 의미를 전달해주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려운 작품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심오한 작가라는 사실!!(내 생각이 아니라 석영중 선생님의 말씀이고, 동감한다.)
p.s. 자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최근에 구입했다(아직 읽진 못했다). 그 동안 이 책에 대해 들어온 바로 현재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도 않은 고민은 버리라는 메세지일거라 기대하고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에 따르자면 그마저도 그저 자유의 환영에 다름아니라는 지적이 정신적으로 고달프게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라스꼴리느꼬프처럼 나도 아직 자유를 얻지 못하였고, 그저 자유를 향해 가는 것일뿐이고, 그 것으로 의미있는 일이라는데... 이로써 자유는 방종과 다름을 그저 건조한 선언이 아닌 고통을 수반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다시 한 발 내딛는다.
왠지 독서 이전보다 좀 더 도덕적으로 높아진 듯도 하고, 자유로워진 듯도 하다. |
|
고등학교 시절에 정치경제라는 과목이 있었다. 거기에서 정치와 경제를 배우면서 가장 중요시 하는 항목중 하나가 바로 "자유"라는 항목이라고 생각된다."보이지 않는 손"도 이 자유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또 다른 하나의 자유라는 이름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출반 "자는 자유로운가?",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의미를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구했다고 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 그리고 "죄와 벌" 사실 미드를 좋아하지 않아 "프리즌 브레이크"를 열심히 시청하지도 않았고 "죄와 벌"이라는 책을 읽어 보지도 못했지만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는 정말 심취해서 봤던 기억이 있다. 주인공의 탈출을 기도하면서 잡히지 않고 무사히 탈출하는 그 장면에서 함께 희열을 느꼈다. 정말 그렇게 갇혀 있는 상태에서 "자유"를 갈구하여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 "자유"라는 단어와 의미가 이 직장이라는 곳이 어떻게 보면 감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내 자유의지로 선택을 한 직장이고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곳을 그만두고 다른곳을 찾아갈수 있는 자유도 있지만 실제로 많은 직장인들이 쉽게 직장을 바꾸거나 사직서를 제출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모 광고에서 품에 있는 사직서 대신 열심히 일하겠다고 건강식품을 먹고 힘을 내서 일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이곳이 마치 강력한 고무줄로 묶여 있어 어느 범위까지는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애를 써서 점점 내가 원하는 곳으로 향해 가고 있는듯 하지만 더 힘을쓰면 쓸수록 고무줄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아무리 힘을 써도 끊어질수 없이 다시 처음으로 튕져져서 돌아오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이 책은 그런 자유에 대해서 "자유의 환영"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자유라고 생각하면서 따라가려고 애를쓰고 있는 "자유욕"과 자유의 환영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고 2부에서는 그렇지만 자유라는 것에 가까워지지 위한 나름의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자유의 환영으로 돈과 권력에 대해서 한계효용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현실적인 효용의 단계를 넘어서면 결국 우리가 성공하고자 하는 이유는 존재감 때문이다. 그것들은 존재감을 높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자유의 느낌을 맛보도록 해준다. 그러니까 결국 돈도 권력도 명성도 존재감에 대한 환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물론 돈이 많을수록, 권력이 커질수록, 명성이 높아질수록 존재감은 커진다. 그와 더불어 자유의 느낌도 증가한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질적인 자유의 양은 어느 정도까지만 증가한다.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돈과 권력과 명예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기 시작한다. 그게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어쩌면 지혜인지도 모른다. 최대의 자유란 어쩌면 부족과 넘침 사이의 어느 한 지점, 궁핍과 탐욕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단에 달린 문제인지도 모른다" 존재감과 자유의 관계 그리고 존재감을 높여주는 돈과 권력. 그러나 그 존재감(돈과 권력에 의한)으로 상승시키는 자유는 무한하지가 않고 정해진 양이 있다는 것이다. 최대의 자유라는 것이 그래서 지혜가 필요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나도 사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자유의 환영들만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라는 것이 명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이것이 자유이겠지 하는 생각에 열심히 그것을 따라가고 있는듯 하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찾는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해서 어제와 다른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야기 하는 것은 완벽한 자유인이 아닌 자유에 지향점을 둔 인간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완벽하게 자유인이 될수 없다고 할지라도 자유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것을 위한 의식적인 노력과 스스로를 다스리는 삶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능과 신속하게 욕구와 욕심을 충족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상태에서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나를 증명하기 위해 기를 쓰지 않고 나에 대한 자존감이 자유에 한발짝 다가가는 길이라고 한다. 옛선비들이 추구한 안빈낙도의 삶을 연상시킨다.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내세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힘들어 했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늘 나보다 좋은 조건에 시기하면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나에 대한 자존감 그리고 광장으로 나가 세상과 연결되어 타인을 위하고 타인과 유대와 겸손 헌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면 자유라는 이름의 선물을 받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자유에 도달하는 길은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이 한눈에 봐도 느껴진다. 자유인이라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고 삶의 목표가 자유인에 가까워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떤 삶을 살것인가를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우선 지금 일하고 있는 곳과 지금 생활하고 있는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스스로 좀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하루하루가 사실 자유를 향한 마음 다스림이고 수행이라는 생각으로 자유, 새로운 생활, 감히 죽음으로 부터의 부활이라는 단어가 종교인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인지 약간은 느껴지는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