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흔히 미국의 입장에서 이슬람은 전쟁과 테러나 하는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한때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던 911 미국 테러사건으로 알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나는 그날 그 소식을 듣고,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문화인 이슬람도 물론 비판했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문화'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흔히 있는 종교들'에 대해서는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슬람도 훌륭한 하나의 종교이자 문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슬람에 대해서 많이 알게 해 준 이 책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한다. 이 책은 나에게 세상에 많은 종교들 중 하나인 이슬람에 대해서 깊이 가르쳐주었고, 앞으로 다른 민족의 아름다운 삶을, 깃들어 있는 종교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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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이슬람 바로 알기 이슬람에 대해 잘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이책을 접해 읽어본 나는 이슬람이 내가 알고있던 잔인하고 폭력적인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마음속에 자리잡은 이슬람문화은 종교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가 우리와 다르기에 배타적인 마음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청솔의 어린이 이슬람바로알기는 이슬람문화에 대해 알아보기에 많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이책은 그들의 종교는 어떤지,우리의 생활과는 어떻게 다른지,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고 사촌끼리 결혼하는지,바쁜현대생활에서 왜 다섯번이나 예배를 들이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해결해줍니다. 어린이 눈높이에서 글을 쓴책이여서인지 아무것도 몰랐던 이슬람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읽어내려갈수있게 만들어 주네요.. 이슬람은 전세계의 반이나되는 13억명이 믿고 있으며 4대 문명의 발상지중 세곳이 이슬람문화권에 속해있다고합니다.[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 이슬람의 문화가 사진으로 첨부되어있어 그들이 사용하고 즐기는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알수있게 해주었습니다. 이슬람이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는 문화인줄 알았는데 이책을 통해 신라시대부터 페르시아 상인들이 신라를 오가며 무역을 했다는사실과 처용이라는사람도 신라시대건너온 아랍상인이였다는사실도 알게 되었네요.. 원유의 70%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며 정보통신산업분야에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이책을 통해 이슬람문화 바로 아는 기회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쉽고 재미있게 이슬람문화를 알아나가다 보니 세계사를 공부한 느낌도 드네요.. 이슬람문화에 대해 알아본 좋은 책읽기 시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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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이슬람 바로알기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 지음 청솔 펴냄
어린이 이슬람 바로알기.. 제가 알고 있는 이슬람은 아주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받았을때 이슬람에 대해 왜 알아야 할까? 부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이슬람이 마냥 신기했습니다
여자들이 왜 베일을 쓰는지 아세요? 맛있는 돼지고기를 왜 안먹을까요 신문에 자주 나오는 텔레반이 뭐에요? 부터 정말 다양한 내용이 가득한데요
베일을 쓰는 이유는 종교적 의무로, 외간 남자들과 무분별한 접촉을 막기 위해서 랍니다. 히잡은 여성을 속박하는 개념이 아닌 남성들의 성희롱과 불필요한 시달림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히잡은 이슬람의 가치를 중시하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확인하는 상징입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돼지고기 속에 여러 가지 해충이 인간의 몸에 해롭고 돼지의 습성이 게으르고 나쁘다는 이유를 듭니다. 특히 돼지고기는 지방질과 병원균이 많아 아무리 좋은 자연 상태에서도 마르지 않고 썩어 버립니다. 동물을 잡아 몇 달 동안 식량으로 사용해야 하는 아랍의 유목민들에게 돼지고기는 쓸모가 없거나 위험한 고기입니다.
사진으로 보는 이슬람의 풍경이나 다양한 문화는 글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쉽고 정확하게 전달해주니 넘 좋았답니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갖고 살았는데요 이 책을 보니 이슬람이 넘 신기하고 잼나고 왠지 우리와 함께 할 것 같아서 더욱 관심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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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500년동안 중국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고 대한민국 건국후 지금까지 미국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다. 한손엔 칼 한손엔 코란이란 말은 서양인들이 아랍을 비방하기 위해 만든 말에 불과할뿐인데 우리는 그걸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도 인식할 때가 지난것 같다. 아랍인들의 생활상과 이제까지 폭력으로만 얼룩진 역사를 가졌다는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잡는 지침서가 아닌가한다. 어린이 이슬람 바로 알기는 아랍을 모르는 어른들이 읽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단지 나는 이슬람에 관한 아니 아랍에 관한 서적을 조금은 미리 보았기에 새로운 내용이 별로 없어 별을 조금주지만 아마 처음 봤었으면 별을 다섯개는 주었을것이다. |
| 이슬람 문화에 관한 책으로 우연히 나에게 들어 온 이 책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면에서 이슬람 문화를 왜곡하고 오해하고 산다. 먼저 이슬람 신자는 13억명으로 기독인구나 불교인구보다 많으며 이슬람은 평화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민족들이나 강대국의 자국의 이익(영국의 이중 계약)으로 영토전쟁을 일으키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작가는 단순히 종교전쟁만은 아니고 어쩌면 이슬람 문화권은 몇몇 강대국의 희생양으로 지금도 그들의 억울함도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같은 약소국끼리라도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 잡았으면 하는 것이 이 책의 전반적 메시지인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체적으로 책이 무척이나 쉽게 쓰여 있으며 마지막 부분은 이슬람 국가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을 다룸으로써 어린이들에게 해박한 지식을 얻게도 하지만 지도자의 꿈을 가지게도 한다. 초등 3년이상이면 한 번 쯤 꼭 읽히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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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테러 후 어느 신문의 어린이 명예기자 중 하나가 "미국이 이기면 좋겠어요. 아프가니스탄이 먼저 잘못했고 또 미국이 우리 나라하고 더 친하니까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솔직히 나 또한 테러 전에는 이슬람 세계에 대해 잘 몰랐고, 이슬람에 대해 알고 싶어도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 나라하고 더 친하니까요'라는 말은 무척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혹시 우리가 미국보다 이슬람 국가들과 교류가 더 많고 친했다면, 그래도 그 학생은 그런 말을 했을까.
한편, 아이들에게 여러 나라의 다양한 정보를 주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 크다는 생각도 들었다.
테러 후 어른들을 위한 '이슬람' 관련 책과 TV프로그램은 그야말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넓은 사고를 가져야 할 어린이들에게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해 걱정했는데, 때마침 이 책 <어린이 이슬람 바로 알기>가 나와 무척이나 반갑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이슬람에 대해 바로 알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책이다. 테러 후 여러 신문과 방송에서 볼 수 있었던 이희수 교수님이 책을 써서 더욱 믿음이 간다. 그다지 쉬운 내용이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이희수 교수님의 쉽고 흥미있는 설명과 풍부한 화보 덕분에 책이 쉽게 잘 읽혔다.
이 책을 통해 어린이들이 이슬람 세계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이슬람 세계와 좀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미국과 더 친하니까 미국이 이겼으면 좋겠다는 식의 말은 하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상깊은구절] 사무엘 헌팅턴이라는 학자는 "21세기에는 문명간의 충돌이 커지고 특히 유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이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여러 가지 다른 생각과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국경과 민족의 경계가 없어지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됩니다. 13억 인구, 55개 국에 달하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야말로 국제화의 중요한 지름길이 되는 셈이지요. 즉, 미래를 살아갈 어린이 여러분에게 '이슬람'이야말로 꼭 알아두어야 할 문화 중의 하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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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란 단어 자체적으로 놓았을 때 우린 강압적, 테러 또는 야만적이라는 선정적인 낱말들만 떠오른다. 이젠 고정관념화 되어버린 것은 테러라는 단어다. 이슬람에 대해 학습한 적도, 여러 매체에서 접한 적도 없는데 왜 이런 것들이 떠오를까? 여기서 우린 문화도 무의식적으로 각인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느낀다. 이슬람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는데 무작정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조합시켜 이것이 당연한 사실인양 내놓는 이런 각인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서 막연하게 야만스럽고 포악하다는 느낌을 받는데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미국의 문화권에 포함되고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면서 이와 대치상황에 놓여 있는 이슬람을 마주보게 된다. 커다란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이슬람은 미국의 경계대상이기도 하다. 즉,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감으로써 미국의 시야로 이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시야를 그대로 답습하고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테러에 이슬람이 관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몇 년전에 발생한 미국의 쌍둥이 빌딩 폭파사건이다. 당시 살아있는 사람들을 태운 채 감행한 테러로 자신들의 이념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 연관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비난을 면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각종 납치 사건에 과격 이슬람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비록, 그들이 전체가 아닌 극소수 폭력주의자들이 벌인 일이지만 인식은 이슬람은 테러라는 고정관념이 생성되어 버린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이슬람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이야기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던 차 만난 이 책은 참으로 반가웠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 생활상들에 대해 자세히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어서 더 좋았다. 먼저 이슬람은 생활에서 종교와 생활을 분리해 놓지 않았다. 대부분의 종교들에서 특정일을 지정하여 예배를 들이는데 반해 이슬람은 언제 어디서나 개인예배를 드리고 집단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씩 10분정도씩 들인다고 한다. 항상 종교는 같이하되 생활리듬에 맞추어서 하게 한다. 그리고 성경과 같은 꾸란이란 책은 다른 말로 번역시 다르게 해석될 것을 염려하여 해설서란 말로 각 나라의 언어로 나타냈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나가 평등해서 성직자의 직위가 없다. 종교 앞에선 왕이나 거지 누구나가 같고 같이 지혜를 나눌 수 있다면 누구나 앞에 설수 있고 주장한다. 그리고 문화 면에서 보면 자급자족이 불가한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들의 삶을 지키지 위해서 사냥과 무역를 해야 하지만 이런 무역도 부족간의 전쟁으로 막혀버리기 때문에 약탈과 침략이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서의 약탈과 침략은 살아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는 더운 날씨상 쉽게 부패해 버리는 돼지고기의 특성 때문이고 이슬람식으로 도살한 초식동물만을 먹는 그들의 문화이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의 보신탕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히잡과 일부다처제란 풍습때문에 여자를 천히 여기나 하는 의심도 있었지만 이것 역시 그 나라의 문화이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이 외출할 때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쓰고 다녔고 대를 잇기 위해서 첩도 들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문화의 다른 이면이지 야만적이다 아니다 라고 판단할 사항이 아니다.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과 유대와 아랍까지 복잡하게 얽힌 고리 속에서 대외적으로 국가라고 인정을 받지 못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에 퍼져 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어져 내려가고 있다. 여지껏 종교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가 거의 중심을 이룬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이슬람교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이슬람을 종교보다는 문화적 측면에서 이해하고 봐야 된다. 우리 문화가 소중하고 다른이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면 다른 문화를 배척해서는 안된다. 내것이 소중하면 다른 이의 것도 소중하다. 점차적으로 세계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이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뿐만이 아닌 세계 여러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우리 것의 소중함은 가슴에 안고서 말이다. 아이들에게 다소 모르던 부분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보여준 책이 고맙고 끝으로 아쉬운 점은 책이 구성이 다소 산만하다는 것이다.. 단편들을 그냥 나열하지 말고 테마별로 엮어서 편집했더라면 더 이해가 빨랐을 것 같다. 그럼에도 다소 생소한 이슬람에 대해서 이렇게 정확한 설명을 해주신 이희수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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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슬람 국가 터키에서 유학한 이슬람 전문가이며 동시에 한국이슬람학회 회장으로서 이슬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슬람은 포교를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그들의 경전 꾸란이 명령하는 칼의 종교이며,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차별하고, 남녀를 차별하는 불평등의 종교로서 21세기에는 맞지않는 중세기 사고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종교로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OIC(이슬람회의기구) 소속 57개 이슬람 국가들은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후진국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나 있는 이슬람의 실상을 미화하고 왜곡한 부분을 몇가지 짚어 보겠다.
12p에 "남성과 여성의 권리는 같지만 각각의 역할이 다르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다.
꾸란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열등하며 남편들은 그들을 때릴 권리를 가지며(꾸란 4:34) 여자들이 남편들에게 불순종하면 지옥에 갈 것 이라고 말한다.(꾸란 66:10) 꾸란은 남자들은 여자들에 우선한다고 말한다.(꾸란 2:228) 꾸란은 유산상속에 있어서 여성의 평등권을 부인할 뿐 아니라(꾸란 4:11-12) 여성들을 바보로 여겨서 여성의 증언만으로는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규정한다.(꾸란 2:282) 이것은 강간당한 여성이 남성 목격자가 없으면 그녀의 강간범을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을 의하는데 이것은 물론 농담이 아니다. 강간범은 목격자가 있는데서 강간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구절은 알라가 무슬림들에게 전쟁에서 잡힌 여자들을 그들이 잡히기 전에 결혼하였어도 강간을 허용하는 부분이다.(꾸란 4:24)(꾸란 4:3)
34p에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는 엄격한 조건을 달아 일부다처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반대로 꾸란은 일부다처제 전체적으로 허용하며 부분적으로 불허하고 있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배려하여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수라 4:3). 이 구절은 이슬람에서 이혼과 축첩이 실제적으로 남자에게 무한한 수의 여성들을 허락하지만 전통적으로 한 남성은 네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이 허락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슬림들은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그 뒤의 구절을 재빨리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공평을 베풀어 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성과 결혼하라.” 공평하게 그 나머지 계속되는 구절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는 너희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여성과 결혼하라”(수라 4:3). 또 다른 구절은 남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최선을 다한다 해도 아내들을 공평하게 할 수 없으리라”(수라 4:129). 일부일처를 옹호하는 무슬림들은 이러한 구절들을 같이 말한다: 꾸란은 한 남자가 모든 자기 아내들을 공평히 대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공평하게 대우할 수 없다면 한 아내와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꾸란이 실제적으로 일부다처를 금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부다처제를 금한다면 아예 전면적으로 금해져야 한다.
72p에서 "특히 이슬람은 민족과 피부색, 언어에 따른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에"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은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을 구별하고 상대적 가치의 계급을 설정한다.
꾸란은 이슬람이 보편적인 형제애에 관한 것이 아니며 믿는 자들의 형제애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믿는 자들은 한 형제라”(49:10)
이슬람 아래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 예를 들어 꾸란 16:75-76에 따르면 노예들과 장애인들은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람들과 평등하지 않다. 꾸란은 “평등의 법”을 도입하는데 이것은 살인에 대한 보복(2:178)과 같은 어떤 문제들을 고려할 때 다른 수준의 인간가치를 설정한다.
무슬림 믿는 자들은 비-무슬림들과 평등하지 않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같을 수 있느뇨?” (39:09)
“장님과 보는 자가 같을 수 있으며 암흑과 빛이 같을 수 있느뇨?” (13:16)
꾸란은 무슬림들이 은혜 받은 종족이고 반면에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사악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무슬림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가장 좋은 공동체이 백성이라 계율을 지키고 악을 배제할 것이며 알라를 믿으라 만일 성서의 백성들이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에게 축복이 더했으리라 그들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사악한 자들이더라”(3:110)
알라는 단지 그들의 불신앙에 근거하여 비-무슬림들을 정죄하는 반면에 내세에 무한한 음식과 술과 섹스(56:12-40)를 포함한 최상의 육체적인 괘락으로 믿는 자들에게 보상한다. 사실 꾸란의 대부분이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을 차별하고 비-무슬림들을 비난하는 부분이다. 꾸란의 첫 번째 장이 이것의 예이다. 이것은 철저한 무슬림들이 매일 되풀이하고 이 말씀으로 끝나는 간단한 기도이다:
“저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1:6-7).
이 구절들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하는지를 무함마드에게 질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그럼 누구인가?” 였다. (Bukhari 56:662). 알라가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 사이에 확실한 구별을 하였기 때문에 비-무슬림들을 대우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무슬림들이 그들의 삶속으로 구체화해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꾸란은 무슬림들이 서로 간에는 자비하고 이교도들에 대하여는 무자비하라고 말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선지자이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마음이 강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정이 오가니라...”(48:29)
알라는 무슬림들이 불신자들에 대하여 승리하도록 해준다:
“알라께서는 그 불신자들이 신앙인들을 지배하도록 두지 아니 하시니라”(4:141)
비-무슬림들이 무슬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길은 이슬람의 지배에 복속되는 것이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9:29; 인두세는 완전한 이슬람 국가에서 비-무슬림들이 그들의 무슬림 지배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이다)
많은 무슬림들에 대한 통상적인 비난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주 거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들이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말한다.
이슬람 연구에 평생을 바친 Ayatollah Khomeini는 비-무슬림들이 “배설물”과 “불결한 음식을 소화하는 낙타의 땀” 사이의 서열위치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이상할 것 없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이 “동물들”과 짐승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인간성을 말살한다:
“성서의 백성들 중에 진리를 거역한 자들과 불신자들은 불지옥에 있게 되리니 그들은 그 안에서 영주하매 가장 사악한 무리들이라”(98:6).
“실로 알라가 보시기에 가장 사악한 동물은 불신하며 믿지 아니하려는 자들이라” (8:55).
7:176 구절은 불신자들의 백치 같은 언행과 값어치 없음에 관하여 그들을 “헐떡거리고 있는 개들”에 비유하고 있다. 7:179 구절은 불신자들이 더 악하게 “짐승”과 같다고 말한다. 5:60 구절은 알라가 과거에 유대인들을 원숭이와 돼지로 변신시켰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7:166과 2:65에 의하여 반복된다. 한 하디스(Bukhari 54:524)는 무함마드는 쥐가 유대인을 닮았다고 믿었다고 말한다(또한 Sahih Muslim 7135와 7136에 의하여 확인된다). 46:29-35 구절은 불신하는 사람은 무함마드를 믿는 마귀보다 더 악하다고까지 말한다. 이슬람법에 따르면 비-무슬림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재산으로 소유될 수 있지만-이슬람이 가장 우월하다는 메시지에 따라서-동료 무슬림들은(그들이 노예상태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면) 재산으로 소유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가운데 한 명을 살해한 형벌이 본의 아니게 한 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상의 3분의 1로 제한함으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꾸란은 알라가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한다고 가르친다. 꾸란은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꾸란은 알라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포한다.
“그분은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30:45)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복종하는 자들만을 사랑한다(적어도 그 알라의 계시를 제공하는 무함마드에 따르면):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에게 순종하라 하였으니 이를 거역하는 자 있다면 알라는 이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3:32).
죄를 미워하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대신에 알라의 분노는 개인들에게 골고루 미친다:
“알라는 배신하며 은혜를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아니하시노라”(22:38).
11:118-199 구절은 알라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어떤 사람은 선택하여 인도하지 않는다:
“알라께로 향하는 길이 있으되 어떤 길은 고르지 못한 길도 있노라 그러나 그분이 원하신다면 너희들 모두를 인도하셨으리라”(16:9).
알라가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불에 타는 것을 포함하여 가장 무서운 영원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나의 계시를 불신하는 자들을 불지옥으로 들여보내니 그들은 그들의 피부가 불에 익어 다른 피부로 변하는 고통을 맛보더라 실로 알라는 전지전능하심이라”(4:56).
“알라는 믿음이 없는 자들의 대적이시라”(2:98)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인데 그는 그들을 아주 많이 미워하여 그들이 죄를 짓도록 인도하기도 하여 실제적으로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서 그들의 운명을 확실하게 만든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알라가 사랑한다는 말이 꾸란 어디에도 없으나 알라가 다른 종교(또는 무신론자)의 사람들의 위하여 준비한 고통을 묘사하는 400개가 넘는 구절들이 있다: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내세에서 패망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3:85).
비-무슬림의 상대적 가치는 그들이 지옥 불에 탈 연료일 뿐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배반한 그들의 재산과 자손이 그들에게 아무런 효용이 되지 못하고 불의 연료가 될 것이라”(3:10 Shakir: "지옥의 땔감“)
그들이 불의 연료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알라의 천사들에 의하여 고통 받을 것이다:
“믿는 자들이여 인간과 돌들이 연료가 되어 타고 있는 불지옥으로부터 너희 자신과 너희 가족을 구하라 불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엄하고 가혹한 천사들이 알라께서 명령한 대로 거역하지 않고 집행할 것이라”(66:6).
불신자들이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는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알라는 그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라를 불신하는 자를 비유하사 저들이 하는 일은 폭풍이 부는 날 폭풍에 휘날리는 재와 같아 저들이 얻은 것을 감수하지 못하고”(14:18).
“알라가 저들의 행위로 손실이 가장 큰 자를 너희에게 일러주리요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선행이라 생각하면서 현세의 삶에만 매달리노라 저들은 알라의 말씀과 만남을 부정하는 자들이니 저들의 일들은 무용지물로 끝날 것이라 심판의 날 알라는 저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으리라 지옥이 저들을 위한 보상이라 이것은 저들이 믿음을 거역하고 알라의 말씀과 선지자들을 조롱하였기 때문이라”(18:103-106).
무함마드는 선지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자기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알라와 선지자들을 불신하며 알라와 선지자들을 이간시키려 하는 자들이 일부는 믿고 일부는 부정하나이다라고 말하며 그 중간의 길을 택하겠다고 하더라 실로 이들이야 말로 불신자들이거늘 알라는 이 불신자들에게 치욕스러운 벌을 준비하여 두셨노라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들을 믿고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선별하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보상이 준비되어 있노라”(4:150-152).
기독교에서 내세의 형벌은 죄와 ‘사악함’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상대적으로 지옥에 관한 말이 거의 없지만 강조하는 있는 것은 이기적이거나 잔혹한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고통이다. 이슬람에서 지옥은 무함마드의 자신에 관한 개인적인 주장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일 뿐이다. 성경과 대조적으로 꾸란은 평균적으로 12번째 구절마다 지옥에 관하여 말하며 불신자들에 대한 알라의 분노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불신하는 자들은 불길에 옷이 찢기며 끓는 물이 저들의 머리 위에 부어지니라 그리하여 저들의 내장과 피부도 녹아내릴 것이라 저들을 벌할 철로 된 회초리도 준비되어 있노라 그로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나 저들은 다시 그 안으로 되돌려와 불의 징벌을 맛볼 것이니라”(22:19-22).
극도로 증오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을 고문할 수 없다. 알라의 불신자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이슬람을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한 무슬림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무슬림들의 개인적인 우월성은 꾸란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려진 대조되는 그림들에 의하여 확인되는데 꾸란에서 무슬림들은 천국에서 가장 큰 육체적인 쾌락으로 보상되며 반대로 불신자들은 동시에 무서운 고통을 받는다(단 하나의 예만 들어서 56장을 보라).
90p에 "꾸란에서는 '힘에 의한 이슬람 전파'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꾸란에서는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는 꾸란에 있는 단 하나의 평화적인 구절은 무함마드가 세력이 약했던 초기 메카 계시이며 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나중에 메디나에서 세력이 강해졌을 때 받은 폭력적인 메디나 계시에 의하여 취소되었음을 저자도 이슬람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같은 페이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세금만 내면 자유와 평등이 주어지는 이슬람으로 자신의 종교를 바꾸었지요"라고 기술하고 있고 91~92p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스페인 등의 유럽까지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칼 때문이 아니라 여러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했던 넉넉한 마음 때문이었읍니다. 기본적으로 종교와 폭력은 함께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를 원하거든요. 종교로서의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종교보다도 평화와 사랑을 강조하고 있읍니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다시 92p에 "그러나 이슬람 교리에서는 평화를 강조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단어 자체가 바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과 경전이 있어도 그것을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모습만을 보고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꾸란은 저자가 주장하듯이 좋은 가르침의 경전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사람들 사이에 폭력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03p에서는 "그러나 이런 무역은 부족간의 전쟁으로 자주 길이 막혀 버리기 때문에 약탈과 침략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살아남기 위한 약탈은 범죄라기 보다는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기술하여 생존을 위하여 약탈과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까지 하고 있다. 176p에서 "애초에 이슬람이 화해와 용서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였던 것처럼 여러 가지 생각과 이상이 함께하는 세상이야말로 이슬람 정신의 진정한 출발점입니다."라고 기술하여 이슬람이 처음부터 평화의 메시지인 것처럼 독자들을 오도하고 있는데 다음의 꾸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슬람은 출현 당시부터 평화의 메시지가 아니었고 지금도 평화의 메시지가 아니다.
꾸란 (2:191-193) - "그들을 발견한 곳에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이 너희들을 추방한 곳으로부터 그들을 추방하라 박해는 살해보다 더 가혹하니라......만약 그들이 싸움을 단념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 것이라 박해가 사라지고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
꾸란 (2:244) - “알라를 위하여 싸우라 알라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라.”
꾸란 (2:216) - “비록 싫어하는 것이지만 너희에게 싸우는 것이 허락되었노라 그러나 너희가 싫어해서 복이 되는 것이 있고 좋아해서 너희에게 악이 되는 것이 있나니 알라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이 구절은 폭력이 미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설정할 뿐 아니라 싸우는 것이 단지 자기 방어에만 한정된다는 통념에도 모순되는데 이 구절을 듣는 자들은 명백히 그 당시에 공격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디스에서 우리는 실제로 이 구절이 무함마드가 약탈물을 얻기 위하여 자기 부하들이 대상들을 공격하도록 자극하고 있을 때 말하여진 것이었다. 꾸란 (3:56) - “불신자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현세가 내세에서 가혹한 징벌을 내릴 것이라 그러나 그들은 구원자를 찾지 못할 것이라.”
꾸란 (3:151) - “알라는 믿음이 없는 자들의 심중에 공포를 불어 넣으리라 이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들을 알라와 비유하려 했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다신교도들에 관하여 말하지만 또한 기독교인들도 포함하는데 그들이 삼위일체설을 믿기 때문이다(무함마드는 ‘알라와 비유’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꾸란 (4:74) - “그로 하여금 알라를 위해 싸우도록 하여 내세를 위해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알라를 위해서 싸우는 자가 살해를 당하건 승리를 거두건 알라는 그에게 커다란 보상을 주실 것이라.” 이슬람의 순교자들은 초기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순종하여 죽었다. 이 무슬림들은 알라를 위하여 살인과 파괴를 하다가 전쟁에서 살해되었다. 여기에 오늘날의 자살폭탄 테러범들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가 있다.
꾸란 (4:76) - “믿는 자들은 알라를 위하여 싸우고...”
꾸란 (4:89) - “그들이 그랬듯이 너희도 불신자가 되기를 원하며 너희가 그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거늘 너희는 그들이 알라의 길로 들어올 때까지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친구로 삼지 말라 그럼에도 그들이 배반한다면 그들을 포획하고 그들을 발견하는 대로 살해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친구나 후원자를 찾지 말라.”
꾸란 (4:95) -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남아있는 믿는 자와 싸움에 출전하여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투사들이 같을 수 없거늘 알라는 남아 있는 자들보다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는 자들에게는 더 큰 은혜를 베푸시며 또한 이 두 부류에게도 알라의 보상이 약속되었노라 알라는 남아 있는 자들보다 싸우는 자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니라.” 이 구절은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을 비방하는데 그들이 알라 앞에서 가치가 적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지하드”가 꾸란에서 성전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영적인 투쟁일 뿐이라는 근대적인 통념을 뒤집는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아랍어 뿐 아니라 이 구절은 명백히 영적인 것에 관련한 것이 아닌데 육체적인 불구자가 싸움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하디스는 이 구절의 배경이 지하드에 가담할 수 없었던 한 맹인의 항의에 대한 대응이었음을 알려주고 이것은 그 구절의 다른 번역에서 반영되었다).
꾸란 (4:104) - “적을 추적할 때 약한 마음을 갖지 말라 너희가 고난을 당할 때 그들도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노라...” 부상당하고 도망치는 적을 추적하는 것이 정말 자기방어의 행위인가?
꾸란 (5:33) - “실로 알라와 선지자에 대항하여 지상에 부정을 퍼트리는 자들은 사형이나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그들의 손발이 서로 다르게 절단되거나 또는 추방을 당할 것이라 이렇듯 그들은 현세에서 치욕을 그리고 내세에서는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라.”
꾸란 (8:12) -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자르고 그들 각자의 손가락을 자르라.” 이 구절을 영적인 투쟁으로 해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꾸란 (8:15-16) -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싸움터에서 불신자들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지 말라 그러한 날에 등을 돌리는 자는 그것이 전쟁을 위한 준비나 어떤 무리에 합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는 분명 알라의 분노를 자아낼 것이며 그의 주거지는 지옥이 되리니 최후가 저주스러우리라.”
꾸란 (8:39) - “무질서가 사라지고 종교가 온전히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까지 싸우라.” 일부 번역은 “무질서”를 “박해”로 번역하지만 이 단어의 전통적 해석은 역사적 배경에 의하여 뒷받침되지 않는다(꾸란 2:293의 주석을 보라). 메카인들은 무함마드가 순례기간동안 그들의 도시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였을 뿐이다. 무함마드가 자신이 쫓겨나기 전에 메카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이후로 다른 무슬림들은 무장하지 않은 조건으로 거기를 여행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메카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방어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우상들을 부수고 무력으로 이슬람을 수립하려는(그는 나중에 그렇게 하였다) 것이 무함마드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비난받을 부분은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까지 싸우라는 부분인데 진정한 폭력의 정당성은 상대방의 불신앙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Sira에 따르면(Ibn Ishaq/Hisham 324) 무함마드는 나아가서 “알라는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꾸란 (8:57) - “그대가 전쟁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두렵게 하라 아마도 그들에게 교훈이 되리라.”
꾸란 (8:59-60) - “불신자들이 나의 벌을 피하였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실로 그들은 피할 수 없노라. 군대와 무기로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으니 그것으로 알라의 적과 너희들의 적을 두렵게 하라.”
꾸란 (8:65) - “선지자여 믿는 자들을 싸우게 하라...”
꾸란 (9:5) -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 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리니...” 이 구절에 따르면 무슬림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다. 예배(salat)와 이슬람 세(zakat)는 이슬람교의 5가지 기둥들에 속한다.
꾸란 (9:14) - “그들과 싸우라 알라는 너희의 손으로 그들에게 벌주어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고...”
꾸란 (9:20) - “믿으며 자신의 집을 떠나 알라의 길에서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자들은 알라 앞에서 가장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니 이들이 승리한 자들이라.” 여기서 “싸우는”으로 말하여진 단어는 지하드(아랍어)이다.
꾸란 (9:29) -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 “성서의 백성”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알라로부터 마지막 “계시들”가운데 하나였고 이 계시는 집요한 군사적 팽창을 추진하여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그 다음 100년 안에 기독교 세계의 3분의 2를 정복하였다. 이슬람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종교를 지배하기를 원한다.
꾸란 (9:30) - “유대인들은 에즈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있노라 이는 이전에 불신한 자들의 말과 유사하니 알라가 그들을 욕되게 하실 것이라 그들이 진실에서 멀리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라!”
꾸란 (9:38-39) - “믿는 자들이여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느뇨 알라를 위해 전쟁에 임하라 하매 너희가 주저하였노라 이는 너희가 내세보다 현세에 만족 하고 있기 때문이라 현세의 삶이 내세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노라 너희가 전쟁에 임하지 아니하였다면 너희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주셨을 것이오 너희 대신에 다른 백성을 선택하셨을 것이라...” 이 구절은 싸우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지옥으로 가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꾸란 (9:41) - “가볍게든 또는 무겁게 무장하여 나아가라 너희의 재산과 너희의 생명을 바쳐 알라를 위해 싸우라 너희가 알고 있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으리라.” 그다음 구절(9:42)을 보면 - “눈에 보이는 이익이 있고 여행이 쉬웠다면 아마 그들은 그대를 따랐을 것이나 거리가 그들에게 멀었도다...”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자기방어를 위해서만 싸웠다는 통념을 반박하는데 이 구절은 전투가 집에서 먼 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다른 나라인 기독교인의 땅을 의미한다).
꾸란 (9:73) - “예언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에게 엄하게 대항하라 지옥이 그들의 안식처이며 종말이 저주스러울 것이라.”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들을 인간성을 말살하며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지옥 불에 탈 화목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을 쉽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은 또한 오늘날의 독실한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안 믿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꾸란 (9:88) - “그러나 선지자와 그리고 그분과 함께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니 그들은 복을 받을 것이요 번성할 것이라.”
꾸란 (9:111) - “알라를 믿는 자 가운데서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재산을 사시고 천국을 주실 것이라 그것은 알라를 위하여 싸우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를 위해 구약과 신약과 꾸란에 약속된 것이라 알라보다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 누구이뇨 너희가 알라와 거래한 것에 기뻐하라 그것이 영광된 승리라.”
꾸란 (9:123) - “믿는 자들이여 너희 가까이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그들로 하여금 너희가 엄함을 알게하라...”
꾸란 (17:16) - “우리들이 한 고을을 멸망코자 했을 때 안이한 생활을 누리던 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노라 그러나 저들은 그 안에서 거역하였기 때문에 이 고을에 대한 그 명령이 진실임을 입증하여 우리들은 그 고을을 완전히 파괴한다.” 범죄는 도덕적인 죄인데 처벌은 “완전한 파괴”라는 것을 주목하라. (9.11공격을 명령하기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은 먼저 미국인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일 것을 발표하였다).
꾸란 (18:65-81) - 이 우화는 명예살인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는데 여기서 가족의 한 구성원이 살해되는데 이유는 그가 배교 또는 도덕적인 추태로 그 가족에게 수치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이 이야기는 유대교 또는 기독교 경전에는 없다)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모세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데 그는 겉으로 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한 일들을 하지만 그 후 나중에 설명에 따라서 정당화된다. 그러한 행동 가운데 하나가 특별한 이유 없이 한 소년을 살해하는 것이다(18:74). 그러나 이 현인은 나중에 그 소년이 “불순종과 배은망덕”으로 자기 부모를 “슬프게” 할 것을 염려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살해되었고 그래서 알라가 그들에게 “더 좋은” 아들을 줄 수 있었다. (주석: 이것이 샤리아 법에 의하여 명예살인이 명령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Reliance of the Traveller (Umdat al-Saliq)는 부모 또는 조부모가 자식들을 죽일 경우 살인에 대한 처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0.1.1-2).)
꾸란 (25:52) - “그러므로 불신자들을 따르지 말고 최대한의 분투함으로 저들과 대적하라” “대적하라”는 지하드인데 분명히 개인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것이 메카 계시라는 것을 아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꾸란 (33:60-61) - “위선자들과 마음이 병든 자들과 그 도시에서 교사하는 자들이 단념하지 않는다면 알라가 그대로 하여금 그들을 지배하도록 하리니 그때 그들은 그 안에서 그대의 이웃이 되지 않을 것이며 체류함이 잠깐 동안에 불과하리라 그들은 가는 곳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며 체포되어 살해 되리라.” 이 구절은 세 그룹에 대하여 살해(다른 번역에서는 “무자비”와 “끔찍한 살인”으로 표현되었다)를 명령하는데 위선자들(“알라를 위해서 싸우기”(3:167)를 거부하고 따라서 무슬림이 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무슬림들)과 “마음이 병든” 자(이것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한다; 5:51-52)와 “소란을 피우는 자들” 또는 무함마드 전기 작가에 따르면 이슬람에 대적하는 말만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교사자들”이다. 희생자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색출되고 이것이 오늘날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구절이 단지 메디나에서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왜 이 구절이 알라의 영원한 말씀에 포함되어 무슬림들에게 세세토록 전해지는지 알 수 없다.
꾸란 (47:3-4) - “알라를 거부하는 자들이 거짓을 따름에 반해 믿는 자들은 알라께서 내려주신 진리를 따르기 때문이라 이렇듯 알라는 비유로서 인간에게 교훈을 내리시니라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를 만났을 때는 저들의 목들을 때리라 너희가 완전히 저들을 제압했을 때는 저들을 포로로 취하고,” 알라를 거부하는 자들은 전투에서 제압되어야한다. 이 구절은 계속해서 알라가 그 더러운 일을 자신이 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무슬림들의 신실함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살인하는 자는 시험에 통과한다. “알라께서 원하셨다면 저들에게 징벌을 내렸을 것이라 그러나 다른 자들에 비유하여 시험코자 하심이라 그러나 알라의 길에서 살해된 자 있다면 알라는 그의 행위가 결코 손실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
꾸란 (47:35) - “휴전을 촉구하는 약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저들 위에 있노라(Shakir: ”더 좋은 손을 가지고 있노라“) 알라가 너희와 함께 하시어,”
꾸란 (48:17) - “장님이나 불구자 그리고 환자가 출전하지 아니함은 죄악이 아니라 알라는 당신과 선지자에게 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로 하여금 강이 흐르는 천국에 들게 하시며 외면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내리시니라.” 현대의 옹호자들은 때로는 지하드가 ‘영적인 투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장님, 불구자, 환자가 왜 면제되는가?
꾸란 (48:29) -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강하고(무자비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자비하니라...” 이슬람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종교적 상태에 근거하여 적용되는 매우 다른 두 개의 기준이 있다.
꾸란 (61:4) - “실로 알라는 당신의 명분을 위하여 싸우는 자들을 사랑하시니라.” 평화의 종교, 정말로! 61:9이 이 구절을 뒤따른다: “선지자를 통하여 복음과 진리의 종교를 보내시고 꾸란을 다른 모든 종교 위에 두신 분이 알라이시라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것을 싫어하더라.”
꾸란 (61:10-12) -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고통스러운 징벌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 거래를 가르쳐 주리라 그것은 너희가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를 믿으며 알라의 사업을 위해 너희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는 것이라 너희가 알고 있다면 그것이 너희를 위한 복이 될 것이라 알라께서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사 강물이 흐르는 천국으로 인도하시어 아름다운 낙원에서 살게 하여 주실 것이라.” 이 구절은 전투에서 주어졌다. 이 구절은 아랍어 지하드를 사용한다.
꾸란 (66:9) - “선지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되 그들에 대하여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이니 그들의 말로가 불행할 것이라.” “지하드”의 어근이 되는 단어가 여기에 사용되었다. 배경은 분명히 성전이며 폭력의 범위는 자신들이 무슬림들이라고 여기나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포함하여 확대된다.
무함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로부터:
부카리 (52:177) - 알라의 사도가 “너희들이 유대인들과 싸우고 유대인이 그 뒤에 숨어있는 바위가 ‘오 무슬림! 내 뒤에 유대인이 숨어있으니 그를 죽여’라고 말할 때까지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부카리 (52:256) - 이교도들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밤에 이교도 전사들을 공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 선지자에게 질문하였다. 선지자는 “그들은(여자들과 아이들) 그들(이교도들)에 속한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명령에서 무함마드는 인지된 적을 죽이는 과정에서 비-전투원을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는 예를 확립하였다. 이것이 많은 이슬람 폭탄 테러범들을 정당화한다.
부카리 (52:220) - 알라의 사도가 “나는 테러로 승리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부 다우드 (14:2526) - 선지자가(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말하였다: 믿음의 근본은 세 가지이다: “알라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자를 죽이지 않는 것과 그가 무슨 죄를 지을 지라도 그를 불신자로 선포하지 않는 것과 그의 어떠한 행동에 대하여도 그를 이슬람에서 제명하지 않는 것이며 알라가 나를 선지자로 보낸 날부터 나의 공동체의 마지막 사람이 Dajjal (Antichrist)과 싸우게 될 때까지 지하드는 계속될 것이다.
아부 다우드 (14:2527) - 선지자가 말하였다: 알라를 위하여 싸우는 것(지하드)은 경건하든 경건하지 안든 모든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들에게 의무이다.
무슬림 (1:33) - 알라의 사도가 말하였다: 나는 그들이 알라만이 하나님이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라고 증언할 때까지 모든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명령받았다.
부카리 (8:387) - 알라의 사도가 “‘그들이 알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경배되어질 권리가 없다’라고 말할 때까지 사람들과 싸우도록 명령받았고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같이 기도하고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며 우리가 살해하는 것같이 살해한다면 그들의 피와 재산이 우리에게 신성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정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무슬림 (1:30) - “알라의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알라를 제외하고는 신이 없다고 사람들이 선언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명령받았다.”
무슬림 (1:149) “Abu Dharr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알라의 사도여,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알라를 믿고 그를 위하여 지하드를 하라....”
무슬림 (19:4321-4323) - 무함마드가 무고한 어린 아이들이 불신자들에 대한 그의 부하들의 공격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무함마드가 어깨를 으쓱했던 세 개의 하디스가 있다: 그의 반응은 “그들이 그들(적을 의미함) 가운데 있었다.”였다.
무슬림 (19:4294) - 알라의 사도(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가 누구든지 군대 또는 파견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할 때 그는 특히 그에게 권고하였다....그가 말하였다: 알라의 이름을 걸고 그리고 알라를 위하여 싸우라. 알라를 믿지 않는 자들과 싸우라. 성전을 하라....다신교도인 너희들의 적들을 만날 때 그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초청하라. 그들이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응대한다면 너희들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어떠한 해악도 행하지 말라.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초청하라; 그들이 너희들에게 응대한다면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에게 이슬람세(Jizya)를 요구하라. 그들이 지불하기로 한다면 그들에게서 이슬람세를 받고 물러서라. 그들이 이슬람세 지불을 거절한다면 알라의 도움을 구하고 그들과 싸우라.
타바리 7:97 Ashraf를 살해한 다음 날 아침에 선지자는 “너희들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살해하라”고 선언하였다. Ashraf는 시인이었는데 이슬람을 비방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부하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여기서 무함마드는 살해하라는 자신의 명령의 범위를 확대한다. 이어서 무고한 유대인 사업가가 단지 무슬림이 아니란 이유로 자신의 무슬림 동료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타바리 9:69 “불신자를 죽이는 것은 우리에게 작은 문제이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이다.
타바리 17:187 “하나님을 두고 말하는데 우리가 떠났던 종교가 이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종교보다 더 낫고 올바르다. 그들의 종교는 피를 흘리며 거리를 끔찍하게 만들며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전에 믿던 종교로 돌아갔다.”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알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폭력과 약탈에 충격을 받은 후 그들의 실수를 알게 된 한 그룹의 기독교인들의 말이다. 평화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결정에 대한 대가는 칼리프 알리에 의하여 남자들은 참수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이븐 이스학/히샴 327: - “알라가 말하였다. ‘선지자는 포로들을 모으기 전에 살해하여야한다. 살해된 적은 땅에서 제거된다. 무함마드, 너는 이 세상의 욕망을 갈망하였다, 세상의 재물들과 포로들의 몸값은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들을 살해하기를 원한다.’”
이븐 이스학/히샴 990: -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면서 누군가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 요즘 시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누구든지 생각한다면 무함마드의 명령에 의하여 바로 그 관습이 생겨났다는 것이 여기에 있으며 무함마드가 입증할 것이다.
이븐 이스학/히샴 992: - “알라를 위하여 모든 사람과 싸우고 알라를 믿지 않는 자들을 살해하라.” 군사적 공격전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준 가르침이다.
추가 설명들: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비-무슬림들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들의 종교가 평화스럽고 관용적인 종교라는 증거로 그들이 내세울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곳(중동과 파키스탄과 같이)에서 종교적 소수집단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잔인한 박해로 고통 받고 있다. 이슬람이 소수집단인 곳(태국 필리핀, 유럽같이)에서는 무슬림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폭력의 위협이 있다. 두 가지 상황은 종교적인 테러리즘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듯하며 이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있어서 집요하고 특징적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며 꾸란에서 시작된다. 종교적 관용과 보편적 형제애에 관한 현대적인 미덕들에 적합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책의 구절들은 거의 없다. 나중에 계시된 구절들에 의하여 명백하게 폐기된 초기 “메카” 계시들이 그러한 구절이었다. 이것이 무슬림 옹호자들이 - 꾸란이 완벽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그들의 “도움”없이 꾸란을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관한 “위험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단지 역사 또는 신학적 구조 개념은 별도로 하고 꾸란의 폭력적인 구절들은 실제 집단학살과 대량학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AD 1000년경부터 시작하여 5세기 동안 Ghazni 왕조 Mahmud의 피비린내 나는 정복으로 수 천 만 명의 힌두교도를 잔인하게 도살한 것을 포함한다. 그와 나중에 Tamerlane(이슬람의 징기스칸)이 단지 자신들의 사원들이 파괴되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에 대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도살하였다. 불교는 인도 땅에서 아주 최근에 제거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일부와 오늘날의 터키를 포함하여 무슬림 군대에게 점령된 지역에서 동일한 운명(비록 보다 느리게 되었지만)을 맞았다. 자랑스러운 페르시아 사람들의 고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는 무슬림들에게 멸시받으며 현대 이란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종교 안에 폭력이 아주 각인되어 이슬람은 다른 종교 또는 이슬람 내부에서 실제로 전쟁하는 것을 절대로 중지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도시를 포위하고 남자들을 집단학살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그들의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취하였던 전쟁 지휘관이었다. 몇 가지 경우에서 그는 포위된 거주자들로부터 항복제안을 거절하고 포로까지 도살하였다. 부하들이 싸우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꼈을 때 그들이 싸운다면 노예들과 전리품을 그들에게 약속하면서 그리고 그들이 싸우지 않으면 지옥으로 그들을 위협하면서 부하들이 전투하도록 실제적으로 선동하였다. 무함마드는 전투에서 포로가 된 상처 입은 여자들을 보통 그들의 남편들과 가족들이 도살된 날에 부하들이 강간하도록 허용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무슬림 군대는 공격적인 작전을 하였고 이슬람의 가장 극적인 군사적인 정복은 무함마드가 죽은 후 수 십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무함마드의 부하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초기의 이슬람의 전쟁 원칙은 도시의 시민들이 저항한다면 그들을 괴멸시키는(남자들은 처형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취하였다) 것이었다. 현대 옹호자들이 무슬림들은 자기방어를 하는 과정에서 공격하였을 뿐이라고 자주 주장하나 이것은 무함마드의 시대로 돌아가서 이슬람 역사가들과 다른 이들의 글에 의하여 분명하게 반박되는 자가당착이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이주한 후 단지 5년 만에 완전히 멸종된 꾸라이자 유대인들의 예를 생각해보자. 꾸라이자 유대인들의 지도자는 무함마드의 치명적인 대상(caravan) 약탈 공격에 대한 보복을 하기위하여 왔던 메카인 군대에게 그들의 도시가 포위되자 중립적인 태도를 선택하였다. 꾸라이자 유대인들은 양측으로 부터 어느 누구도 살해하지 않았고 메카인들이 돌아간 후에 무함마드에게 평화롭게 항복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선지자는 꾸라이자의 모든 남자들을 참수하고 모든 여자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고 무함마드 자신이 포로들 가운데 한명을 강간까지 하였다(무슬림 옹호자들은 이것을 “같은 날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현대 이슬람의 가장 존경받는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세이크 Yusuf al-Qaradawi는 공개적으로 공격적인 지하드를 명령한다: “당신들이 추구하는 지하드에서 당신들은 적을 찾고 적을 침공한다. 이러한 형태의 지하드는 이슬람 국가가 이슬람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것이 가는 길에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국가들을] 침공할 때만 여지가 있다.” 그 밖에 그는 “이슬람은 선제공격을 할 권리가 있다....이슬람은 하나님의 종교이고 이슬람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이슬람은 사회제도와 전통의 형태로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파괴할 권리를 가진다....이슬람은 인간 본성을 왜곡시키고 인간 자유를 제한하는 그들의 치명적인 영향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기 위하여 사회제도들과 전통들을 공격한다. 이슬람 지하드가 단지 이슬람의 본 고장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이슬람 방식의 삶의 위대성을 감소시킨다.”라고 말한다. 후계구도를 분명하게 하지 못한 무함마드의 실수는 그가 죽은 후에 계속적인 내전을 초래하였다. 무함마드를 가장 잘 아는 자들은 처음에 멀리 떨어져 있는 부족들이 이슬람을 떠나서 그들이 좋아하는 종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싸웠다(Ridda 또는 ‘배교 전쟁들’). 이어서 가까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초기에 메카인 개종자들이 나중에 개종한 자들과 싸웠다. 무함마드와 함께 메카로 여행하였던 이주자들과 메디나에서 그들이 정착하도록 도왔던 Ansar 부족 사이에 적대감이 커졌다. 결국은 무함마드 자신의 가족들 안에서 그가 사랑했던 부인과 그가 사랑했던 딸 사이에 폭력적인 전쟁이 있었고-그것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불협화음을 내는 분열로 남아서 오늘날 까지 서로 상대방의 목을 따고 있다. 이슬람에 관하여 말하여 질 수 있는 가장 이상하고 가장 진실이 아닌 것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는 것이다. 서방세계가 심판되고 정죄되는 모든 기준이(노예제도, 제국주의, 불관용, 여성혐오, 성폭력, 전쟁....) 이슬람에 똑같이 적용된다면 판결문은 파괴적일 것이다. 이슬람은 결코 이슬람이 정복한 것들인 종교, 문화, 언어 또는 생활양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결코 사과하지 않으며 도덕적 진보에 맞춘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대화가 막혀 있으며 가장 자기도취적이다. 이슬람은 그 스스로의 완벽함을 확신하지만 잔인할 정도로 자기 검증을 혐오하며 비평을 억압한다. 이것이 꾸란의 폭력에 관한 구절들을 그렇게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꾸란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무게감이 실려 있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그 구절들을 그들의 책에 있는 글자그대로 취하며 지하드 없는 이슬람은 불완전하다고 이해하는 반면에 온건주의자들은 그들을 반박할 것이 거의 없으며 여론의 바깥에 있다. 정말로 그들이 무엇을 가지는가? 평화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을 속이겠지만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책이 열 두 번째 구절마다 비-무슬림에 대한 알라의 증오에 관하여 이야기하거나 비-무슬림들의 죽음, 강제개종, 복속을 요구할 때 비록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의 종교를 해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라도 테러리즘에 대한 공감이 그 공동체에 깊고 넓게 흐르고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슬람의 가장 존경되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Ibn Khaldun와 같은 학자들이 “이슬람의 사명의 보편성과 모든 사람들을 설득으로 또는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의무 때문에 성전은 종교적인 의무”라고 이해하였어도 많은 다른 무슬림들은 보편적인 비폭력을 전파하는 꾸란의 구절이 거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들의 이슬람에 관한 이해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다.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가 성경 신약이 평화, 사랑, 관용의 미덕을 전파하는 기독교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형적인데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고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꾸란의 증거와 이슬람의 피로 점철된 역사가 이것과 아주 많이 모순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아마도 놀라고 당황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폭력성을 받아들인다. 1991년 미국의 팔레스타인 부부가 너무 서구화된다는 이유로 딸을 칼로 찔러 죽인 혐의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가족의 친구가 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나와서 배심원들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그 아버지는 단지 “종교”에 순종하였음을 주장하며 그 부부는 “딸을 훈육하든지 명예를 잃어버리든지” 하여야 했다고 말하였다. 2011년에 분명하게 알라의 이름으로 시민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뉘우치지 않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사우디 왕에 의하여 메카로 호사스러운 “성지순례”를 하였지만 단 한명의 무슬림의 항의도 없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단지 이슬람이 다르고 위험하다는 둘 다의 현존하는 진실을 피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나님에 관한 비평적인 생각을 제물로 삼지 않으려하거나 다른 종교를 비방하기 위한 구실들을 이슬람에서는 찾지 않는 서방세계 자유주의자들이 잘하는 것이다. 꾸란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는 무슬림들이 너무 많이 있고....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하여진 폭력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132p에 "아랍 민족과 유대 민족은 같은 성서의 백성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잠시후에 "그 후 이삭은 유대 민족의 조상으로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고 이스마엘은 아랍족의 조상으로 그 가문에서 무함마드가 탄생했다"는 근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랍 민족 모두가 성서의 백성이며 이스마엘이 무함마드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다음의 자료로 반박된다.
아랍족이 이스마엘의 후손인가?
글쓴이 Dr. Robert A. Morey
서언
중동은 위의 질문이 역사적인 사실에 따라서 정직하게 답변될 때까지 결코 평화가 없을 것이다. 신화와 전설은 어린아이를 위해서는 이야기로서 좋지만 실제 세계에서 우리는 사실과 기록을 가져야한다.
제 1장 아랍인들의 이스라엘 땅에 대한 주장은 전적으로 세 가지 거짓에 의거한다.
거짓 주장들: 1. 모든 아랍족들이 이스마엘을 통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2.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에 포함된다. 3.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스라엘 땅을 포함하기 때문에 아랍족들이 그것을 주장할 합법성을 가진다.
열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
1. 토라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 그는 현재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서쪽으로 갔다.(창 12장) 그는 그 땅에서 천막에서 살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 살고 있었던 땅에 대하여 언약을 했던 곳은 이스라엘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이스마엘과 다른 많은 아들과 딸을 낳은 곳도 이스라엘이었다. 이삭은 하나님에 의하여 언약의 상속자로 선택을 받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에 대한 제물로 드리려고 모리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2. 토라는 거의 모든 점에 있어서 꾸란과 모순된다. 꾸란 2:125-126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이스라엘에서 천막에서 살지 않았고 아라비아 메카에서 살았다. 그들이 함께 카바신전을 재건축하고 벽에 검은 돌을 박았다. 메카로 연례적인 순례의 전통과 마귀에게 돌을 던지는 행사등을 시작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리기 위해 미나산으로 갔다.
3.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의 이름은 느바욧,게달,앗브엘,밉삼,미스마,두마,맛사,하닷,데마,여둘,나비스,게드마이다. 그들은 북아라비아 지역의 사람들과 통혼하여서 이스마엘인이라고 알려진 몇몇 유목부족이 되었다.
4. 이스마엘과 그의 가족이 “모든 형제들이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토라에 예언되어있다.(창 16:12) 그리고 “그들이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현제의 맞은 편에 거하였더라”(창 25:18) 이 경계지역은 앗시리아 왕국을 향한 북 아라비아의 이집트의 동쪽 사막지역이다.
5. 이스마엘인들은 앗수르인들의 기록에서 독특한 부족으로 언급된다. 그들은 나중에 미디안인과 다른 지역부족들과 통혼하여 흡수된다. 창세기 37:25-28; 39:1에서 이스마엘인들이 미디안인으로 불리우며 사사기 8:22-24에서 미디안인들이 이스마엘인으로 불리운다. 그 동일성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6. 아라비아는 아브라함과 또는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오래전에 구스와 셈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창 10:7) 그들의 도시와 사원들은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잘 기록되어있다.
7. 무함마드가 주장하는 대로 모든 아랍족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면 그 모든 원래 아랍족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랍족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스마엘은 누구와 결혼하였는가? 아라비아에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면 누가 메카를 건설하였는가? 이스마엘이 거기에 살았기 때문에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메카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은 스스로 말한다. 이스마엘이 이주하기 전에, 이주하는 동안, 이주한 후에 존재하였던 아랍족은 북아라비아 광야를 방랑하기 시작하였다.
8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수르 광야에서 하윌라의 고대도시까지 북아라비아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미디안인과 같은 지역 부족들에게 흡수되었다(창 37:25-28; 39:1; 삿 8:24). 이스마엘이 남쪽 메카에 가서 아랍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역사적 고고학적 기록은 없다. 일부 현대 아랍 학자들은 무함마드 전에 이스마엘이 아닌 까탄이 아랍민족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9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삭과 그의 후손들에게만 주어졌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되었다.(창 18:18-21)
10.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자손들과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땅에 대하여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데 그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유대인만이 이스라엘 땅에 대한 주장을 가진다.
제 2장
이슬람의 주장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이스라엘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할 권리를 준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이 주장은 두 가지 거짓 억지에 근거한다: 1.모든 아랍족은 이스마엘의 후손이다. 2.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 갔다.
세 가지 역사적 사실들 1. 첫 번째 가정은 이미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아랍민족은 모두가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고 따라서 그들은 족장들과 선지자들과 성서와 이스라엘 땅의 상속자들이 아니다.
2.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 갔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꾸란과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한밤중에 하늘을 여행하여 칠 층 천을 방문하고 예수와 같은 위인들을 만나고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꿈이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자리에 있는 모스크는 무함마드가 그 장소에 서있었다는 거짓말 위에 지어진 날조이다.
3. 꾸란 어디에도 이스마엘이 아랍족의 조상이라는 말은 없다. 그것이 꾸란에 없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한 이슬람 신앙일 수 없다.
결론 아랍민족은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다. 비록 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가정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는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어떠한 부분이라도 가지는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삭이 유일한 아브라함의 언약의 상속자이다. 그러므로 아랍민족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다. 무슬림들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땅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다. 무함마드는 꿈에서 말고는 예루살렘에 간적이 없다. 이스라엘 땅에 대한 영적이며 성경적인 권리를 가지는 유일한 자들은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들이다.
참고문헌
“아라비아 문학은 그 고유의 선사시대적 버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전설적이다”(Encyclopedia Britannica, Vol. 2:176)
“순수한 아랍인들은 현재 아랍인들이 그들의 본래 조상이라고 여기는 욕산 또는 까탄의 후손들이다.....혼합된 아랍인들인 'Arabu ‘'l-Musta’'riba는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이 자랑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일관되게 그들의 가계의 계보로 여기는 선호성과 그들이 그것에 접목한 많은 허구적인 전설을 설명할 것이다.....이스마엘의 역사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서 아랍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것에 상당히 많은 지어낸 이야기를 섞어 넣었다. (A Dictionary of Islam, pgs. 18-19)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의 가계에 관하여 알지 못하였다.”(Encyclopedia of Islam) I: 184. See also pages 544-546.
남쪽과 북쪽 두 방향에서 아랍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있고 창세기 16장12절에서 ”그(이스마엘)가 모든 형제와 대항하여 살리라“는 마치 그것이 대체로 아랍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더 많이 번성할 것이라는 민족적 독립의 예고인 것으로 종종 읽혀진다. 그러나 이 추정은 원래의 히브리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는데 그것은 문자적으로 ”그가 모든 그의 형제들을 마주하고 살 것이다“의미하며 (위에 설명된 관용어법에 따르면 ”마주하고“는 동쪽을 의미한다) 그의 후손들의 거주지는 아브라함의 다른 후손들의 거주지의 ”동쪽“이 될 것이다.... 이 예언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 일반적으로 사라 또는 케두라를 모계로하는 아브라함의 다른 후손들의 동쪽에 자리 잡았던 사실에서 그것이 성취되었음이 발견된다. 그러나 남방 아랍족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 되었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근거가 없으며 아랍족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씨라는 아랍인들의 허구에 의하여 고안된 전통에서 유래된 듯하며 그 허구는 족장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의 전체 역사를 왜곡하고 위조하였고 그러한 사태를 팔레스타인부터 메카까지 미치게 하였다. (McClintock and Strong, Cyclop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 (Vol. I:339)
꾸란에서는 “창세기 21:17-21의 배경이 메카로 나와 있다.” (The Concise Encyclopedia of Islam, p. 193). 꾸란은 남방 아랍인들이 이스마엘이 아닌 까탄의 후손이라고 기록한다(p. 48).
원문보기 http://www.journeytojesus.com/AreTheArabsDescendantsOfIshmael.pdf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인가?
글쓴이 Dr. Rafat Amari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증거로서 무슬림들은 A.D. 770-775년 경에 Ibn Ishak이 쓴 족보를 주장한다. 그가 쓴 것은 진실이 아니다. Ibn Ishak에 따르면 이스마엘 족속들, 특히 무함마드의 조상이라고 여겨지는 느바욧 (Nebaioth) 부족은 시나이 반도와 비옥한 초생달 지대에 살았던 유목민 부족이었다. 이 부족들은 B.C. 7세기 이후 사라졌다.
무함마드의 가문은 예멘의 시바인 집안(Sabaean Yemeni family)이었고 반면에 비옥한 초생달 지대의 광야에 살았던 이스마엘족은 무함마드의 가문이 예멘을 떠나기 여러 세기 이전에 사라졌다.
역사가들은 무함마드의 가문이 시바-예멘에 살았던 가문이었고 말한다. A.D. 5세기에 무함마드의 8대 조상인 Qusayy Bin Kilab이 꾸라이시족으로 구성된 많은 예멘 가문들의 연합체를 결집하였고 그 연합체 안의 부족에서 무함마드가 나왔다. 이 가문들은 단지 A.D. 5세기에 메카를 점령했다. 메카의 시는 A.D. 4세기에 Khuzaa'h 부족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무함마드의 가문은 어떤 이스마엘 부족과도 연결이 안되는데 왜냐하면 무함마드의 가문은 A.D. 5세기 까지 예멘을 떠나지 않았고 그것은 이스마엘족이 사라지고 1,100년 정도가 지난 시기이다. 무함마드의 부족은 역사를 통하여 어느 시점에서도 이스마엘족이 살았던 같은 지역에 살수 없었다.
Ibn-Ishak에 의하여 조작된 족보는 무함마드의 말과도 모순되어서 무함마드는 그의 17대 조상이전의 선조들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Ibn-Ishak은 그의 시대의 무슬림 학자들에 의하여 거짓 족보를 만들고 위조한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i] Ibn Ishak 훨씬 전에 무함마드 시대에 살았던 무슬림들도 또한 무함마드를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시도로 족보를 조작하였다. 무함마드 자신은 이 모든 거짓 족보들을 거부하고 그의 조상들의 족보에 관하여 한계를 두었다. 거짓 족보에 대한 무함마드 자신의 거부에 대하여 Amru bin al-A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함마드는 al-Nather bin Kinaneh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의 조상들에 관하여 스스로 족보를 세었고 그 다음 “다른 주장을 하거나 조상들을 더 이상 더하는 자는 누구든지 거짓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2][ii] 이것에 의하여 무함마드는 자신도 그리고 어느 누구도 al-Nather bin Kinaneh 이상의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모른다고 고백하였다. Nather bin Kinaneh는 무함마드가 진정한 것으로 인정하는 족보에서 17대 조상이다. 하디스라고 불리우는 무함마드의 말 또는 관습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은 무함마드가 Maad 이상으로 계보를 찾는 것을 거부하는데 Maad는 누군가가 주장하기를 al-Nather bin Kinaneh의 4대 조상이었다고 한다.[3][iii] 우리가 무함마드의 조상들을 볼 때 무함마드의 17 조상들의 각 세대에 대하여 30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함마드가 그의 부족들의 족보에 대하여 약 510년 전까지 알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무함마드가 올린 다른 4 조상을 더하기를 원한다면 630년 전까지 갈 수 있다. 진실은 어느 누구도 그 시점 이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Ibn Ishak과 그의 추종자들이 B.C. 2050년 경에 살았던 이스마엘까지 옛날의 족보를 확실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무함마드의 21대 조상과 이스마엘 사이에 대략 2000년의 기간을 준다. Ibn Ishak은 어떻게 이스마엘족이 이 기간 동안 메카에 살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고 무함마드 자신이 17대 또는 21대 조상 이전의 그의 친족들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모른다고 말했을 때 그들의 역사에 관한 구체적인 부분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분명히 증명하였듯이 메카는 이 기간 동안 존재하지도 않았다. Ibn Ishak의 족보는 무함마드가 자신의 17대 조상인 al-Nather bin Kinaneh보다 이전의 조상에 대하여 모른다는 무함마드 자신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
무함마드 당시에 나타났던 모든 족보들은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거짓으로 간주되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로부터 만들어진 무함마드에 관한 하디스의 많은 버전들 모두는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 된다는 것에 반대하였다고 보고한다. 무함마드와 가장 가까운 동시대 사람들과 추종자들은 무함마드 당시에 나타난 족보들이 거짓으로 간주하였다. 그러한 족보에 대하여 무함마드의 반대를 보고하였던 사람들 가운데는 무함마드의 아내인 Aisheh와 무함마드에 관한 하디스의 가장 중요한 보고자들 가운데 한명인 무함마드의 사촌 Ibn Abbas가 있다.[4][iv] Ibn Ishak은 무함마드의 조상들과 이스마엘을 연결시키는 족보를 만듬으로 이 모든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 모순이 되고 있다.
Ibn Ishak은 창세기에 기록된 족보들을 변경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아랍식 이름을 집어넣어 아말렉에 관한 역사에 모순을 만들었다.
조작은 이것을 초월한다. Ibn Ishak과 그 이후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족보는 창세기에 있는 족보에 아랍식 이름들을 집어넣었다. 예를 들면 Ibn Ishak은 “Arab,”이라는 단어에서 유대된 “Ya’rab,”이라는 아랍식 이름을 “ Khahtan.”의 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집어넣었다. Ibn Ishak은 창세기에서 노아의 아들 셈, 셈의 셋째아들 아르박삿, 아르박삿의 손자는 에벨, 에벨의 아들로 언급된 욕단을 까탄(Khahtan)으로 바꾸었다.[5][v] 우리는 “Arab”이라는 용어가 B.C. 10세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아마도 B.C. 5500년경의 노아 직후의 역사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Ibn Ishak은 더 나간다. 그는 셈의 넷째아들 인 룻(Lud)이라는 이름을 루쓰(Luth)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루쓰(Luth)를 아말렉족의 조상인 아말렉(Amalek)으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아말렉과 그의 부족이 메카에 살았다고 주장했고 고대 이집트인들이 또한 아말렉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다음 그는 아말렉을 아랍족에 연결시키기 위해서 아말렉의 원래 이름을 “Arib,”으로 바꾸었다.[6][vi] 이러한 거짓 족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Ibn Ishak은 메카가 노아와 그의 손자 룻의 시대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전에 검토하였던 메카가 A.D. 4세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에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아말렉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의 후손이다. 창세기 36:12은 딤나가 에서의 첫째아들인 엘리바스의 첩이었고 그녀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았다고 말한다. 아말렉은 아말렉족의 조상이 되었고 이들은 원래 남부 요르단에 살았던 에돔족속 이었지만 모세의 시대에 입증된 바와 같이 시나이의 동쪽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아말렉족은 B.C. 10세기 이후 사라졌다. 어떠한 그리스 역사가의 글속에 또는 어떠한 비문들에서도 아말렉에 관한 언급이 없는데 이것은 그 부족이 아라비아의 중앙과 서쪽 또는 북쪽에 살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르흠에 관한 주장 반박
Ibn Ishak은 주르흠(Jurhum) 부족이 메카에서 아브라함 시대부터 살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주르흠이 에벨의 아들 욕단의 손자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나아가서 주르흠의 원래 이름이 “Hathrem” 이었다고 주장하였다.[7][vii] “Hathrem”이라는 이름의 중요성은 그것이 Ibn Ishak 당시인 8세기에 사용되었던 아랍식 이름의 전형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예멘과 북아라비아의 비문에 있는 이름들은 Ibn Ishak의 족보에 있는 이름들의 스타일과 전혀 다른데 Ibn Ishak의 족보는 자신의 세대의 이름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어느 비문도 어느 그리스 또는 로마 역사가도 그리고 아라비아를 방문하였던 어느 지리학자도 주르흠이라 불리우는 부족을 언급한 적이 없다. 또한 예언자라고 주장하였던 무함마드의 외삼촌인 Ummyya bin Abi al-Salet의 시에서 주르흠에 관한 최초의 언급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Ummyya의 것으로 여겨지는 시는 “아드와 주르흠의 주님(the Lord of Ad and Jurhum)”을 이야기한다.[8][viii] 무엇보다도 그 시는 이슬람 도래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우리는 주르흠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이슬람 이전 자힐리야(Jahiliyah;무지의 시대) 시대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 이후에 자힐리야의 많은 시들이 추가되었다는 생각은 유명한 이집트인 학자인 Tah Hussein과 같은 위대한 학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두 번째로 논쟁에 있어서 우리가 그러한 구절이 진실임을 수용하기 원한다하여도 아브라함 시대부터 아라비아에 주르흠이라는 불리우는 민족이 존재하였다는 역사를 그것을 기초로 만들 수 없는데 왜냐하면 Ummyya는 무함마드와 동시대 인물이고 그는 자신의 시대보다 2700년 전에 존재하였던 한 민족에 관한 기록의 출처가 될 수 없다. 당시에 는 오늘날과 같이 파일을 보관하는 방법도 없었고 인쇄술도 없었으므로 전통은 단지 그것이 저작자들로부터 4세기 이내에 기록된 경우만 정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주르흠이 아라비아에 존재하였다면 그것은 기독교 시대 이후 어떤 시기에 나타났던 작은 부족일 수 있다. 존재하였어도 어느 고전 저자도 이 부족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 부족은 중요하지 않다. Ummyyia의 시는 신화로 가득하여서 솔로몬 왕을 방문하였던 사바의 여왕이 자신의 고모라고 주장하는데 그는 예언자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Ummyyia는 마귀의 영과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마귀의 영은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아라비아의 신비한 종교에 속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시가 그에 의하여 저작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의 시대에서 2700년 전까지 소급되는 역사를 정립하기 위하여 그러한 성격의 시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꾸란에는 무수한 역사적 오류들이 존재하고 족보들은 꾸란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슬람 도래 이후에 만들어졌다. 일부 예들은 사무드와 니므롯에 대한 족보이다.
이슬람 족보에는 사무드 부족에 관한 다른 일련의 역사적 오류들이 있다. 사무드는 비문들을 통하여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의 시대에 증명되듯이 8세기에 나타났던 아라비아 부족이다. 나중 A.D. 5세기 경에 사무드는 정치적 힘을 잃었다. 사무드와 아드(사무드 다음에 나타났던 또 다른 아라비아 부족)가 노아 직후에 나타났던 부족들로 기록하고 있는 꾸란에서 언급된 진술들은 이슬람의 족보들을 소급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무드 부족의 선조를 만들었고 그를 “사무드”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노아의 아들인 셈의 손자라고 주장하였다.[9][ix] 이 모든 것이 단지 꾸란의 이야기에 맞추려고 만들어졌다. 꾸란은 사무드 부족이 노아 이후 세 번째 세대라고 주장하고, (꾸란은 아라비아 부족 아드를 노아 세대 이후 두 번째 세대로 사무드를 세 번째 세대로 만들었다, 수라 7:69; 23:31,32;14:8,9를 보라) 그것은 알라에게 바람에 의하여 징벌을 받는 것으로 정죄되었다.(바람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심판을 가져오는 신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또한 엄청난 역사적 오류라는 것을 안다. 사무드가 B.C. 8세기까지 나타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인들의 비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공식적인 역사는 사무드가 B.C. 7세기 동안 계속해서 존재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아라비아에 관한 글을 쓴 다양한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자들에 의한 글도 북부 아라비아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였던 정치적으로 조직된 부족으로 사무드가 A.D. 5세기까지 존재하였다고 말했다. 꾸란이 주장하듯이 어떠한 바람도 그 부족들 멸망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를 믿게 만들기에 충분하지만 이슬람 족보에는 여전히 또 다른 엄청난 역사적 오류들이 있다. 이것은 니므롯과 관계가 있다. 창세기 10:8-11에 따르면 니므롯은 메소포타미아 고대도시들의 최초로 건설한자였다. 그는 구스의 아들이었고 구스는 함의 아들이었고 함은 노아의 아들이었다. 우리는 니므롯이 B.C. 5000과 4500년 사이에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슬람 족보는 니므롯이 구스의 아들이었다고 올바르게 말하지만 그가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다고 잘못 말하고 있다.[10][x] 니므롯에 관한 이 거짓 주장은 꾸란의 오류에 조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꾸란은 니므롯이 아브라함 시대에 살았다고 한다. 꾸란은 니므롯이 아브라함을 핍박해서 그를 불속에 던졌지만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꾸란 21:51-70과 37:95에서 볼 수 있다. 그 꾸란의 이야기는 미드라쉬 랍바(Midrash Rabbah)라는 유대인 책 17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역사를 공부하고 사실들을 꾸란과 이슬람 전통에서 말하여진 것들과 비교하라고 권장한다. 무함마드와 꾸란과 이슬람의 주장들은 명확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비록 그러한 역사적 오류들이 무함마드 시대에 추종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어도 우리는 지금 그것들이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너무나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역사의 공부가 그것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증명하는데 어느 누가 이러한 엄청난 오류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기록된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보다 2,000년 이전에 살았던 한 특별한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후손이 되었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무함마드의 경우 그러한 문서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무함마드의 조상들이 이스마엘의 후손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
나는 A.D. 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무함마드를 이스마엘과 연결시키려고 애쓴 이슬람 족보들을 분석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이미 무함마드의 하디스를 인용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보다 17대 전에 살았던 Nather bin Kinaneh보다 더 소급하여 자신의 조상들을 기술한 어떠한 족보도 금지하였다. 무함마드에 관한 다른 하디스는 무함마드가 Maad 이전으로 족보가 계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일부 사람들은 Maad가 Nather bin Kinaneh의 4대 조상이었다고 말하였다. A.D. 8세기 이후 나타난 많은 족보들은 무함마드의 족보가 무함마드 이전 17대까지로 제한되고 분명히 21대 이상은 아니라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족보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왜 이것이 중요한가? 첫 번째로 무함마드 자신이 17대 이전의 조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고백하였다. 두 번째로 17대 이전에 우리는 그러한 족보들에서 차이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21대 조상 Maad bin Adnan 이전 족보들은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스스로 모순되기 시작하는데 그러한 족보들의 저자들이 그들의 족보들을 만들 자료들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것이 무함마드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17대 조상 이전으로 소급하는 것을 금지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족보를 서로가 다르게 꾸며내었다. 그들의 작업에서 또 다른 흥미 있는 것은 전기 작가들 모두가 8~9세기의 아랍식 이름들을 사용하였지만 그들은 그 이름들을 이스마엘이 살았던 세대에도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Tabari에 의하여 언급된 족보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족보의 저자는 이스마엘의 장자 느바욧(Nebaioth)이 al-Awam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고 al-Awam은 al-Saboh를 낳았다. 아랍식 이름을 주목하라. 족보에서 al-Awam과 al-Saboh라는 이름의 사용은 각자가 그 이름들을 모방하도록 만들었다.[11][xi] 기독교시대 이전 북 아라비아의 비문에서도 이러한 식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이러한 이름들이 A.D. 8세기와 9세기 이후 Umayyad와 Abassid 왕조시대의 이름들과 같은 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Abassid 왕조시대는 A.D. 750에 시작되었다). 그 위에 다른 무슬림 저자들이 최근에 더 많은 것을 만든 Ibn Ishak에 의하여 조작된 족보로 돌아가면 그의 족보가 아랍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말했듯이 Ibn Ishak은 이스마엘의 장자 느바욧의 아들을 Yashjub으로 그의 아들을 Yarob으로 기록하였다. Yarob 그 자체가 Arab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Ibn Ishak은 이스마엘을 아랍인으로 나타나게 만들기 위하여 이렇게 하였다. 우리는 “Arab”이라는 단어가 B.C. 10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Yarob과 Yashjub같은 식의 이름들은 Ibn Ishak이 살았던 A.D. 8세기의 전형적인 것이다. 이 모든 족보들에 있어서 통상적인 성격은 그것들이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고 그들 모두 무함마드와 이스마엘 사이에 제한된 수의 조상들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마엘과 무함마드 사이에 2,670년이 있고 이 장구한 시간은 단지 40세대로 커버될 수 없다는 것이다.
Ibn Ishak은 40명의 조상들을 기록한다. 그가 무함마드의 족보를 조작하였을 때 그는 40명의 조상들이 이스마엘과 무함마드 사이의 장구한 기간을 커버하는데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스마엘은 2050년경에 살았고 무함마드는 A.D. 620년에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마엘과 무함마드 사이에는 약 2,670년이 있다. 이 장구한 기간이 어떻게 단지 40명의 조상들로 커버될 수 있을까? 대조적으로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기록한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예수 사이의 기간이 단지 1,950년 일지라도 42명의 조상들을 찾을 수 있다. 무함마드의 족보는 720년을 더하여 계산하여야 한다. 또 다른 고려할 점은 유대인의 세대는 아랍인의 세대보다 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서 다윗왕까지 이삭의 후손들을 생각해보라. 이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40세 또는 50세가 되었을 때 그들의 장자를 낳았다. 우리는 B.C. 586년 바벨론의 유수와 예수의 탄생 사이에 14세대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그 기간의 유대인 세대가 약 41년 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랍인 세대로 올 때 우리는 각 세대에 41년을 적용할 수 없다. 학자들은 아랍인 세대는 약 20년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왜냐하면 아랍인들은 기후와 그들의 문화적인 환경 때문에 약17-20세에 결혼하였다.
아라비아의 고고학은 아라비아인 세대가 상대적으로 짧았음을 입증하였다.
고고학은 아라비아에서 한 세대의 기간들이 보다 짧았음을 입증한다. 우리가 아라비아에서 즉 북부 아라비아와 예멘에서 일련의 왕들을 연구한다면 이스라엘과 같은 다른 지역의 세대들과 비교하였을 때 아라비아 세대들이 짧았음을 입증하게 된다. 예를 들면 사바(Saba)와 예멘의 힘야르(Himyar)에서 일련의 통치자들은 B.C. 9세기에 Karibil A로 시작하여 그 일련의 통치자 가운데 102번째이며 마지막 통치자인 Himyar의 왕 Maadikarib III까지 간다. Maadikarib III는 A.D. 575-577 사이에 통치하였다. [12][xii] 우리는 약 1,400년의 기간에 102세대의 왕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통치자들 가운데 약간은 같은 세대 안의 다른 왕들의 형제였다는 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75에서 80세대 사이로 간주할 수 있고 아라비아인의 평균 세대는 약 17-20년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아라비아 세대가 짧았다는 것을 고려하여 무함마드 족보에서 각 세대는 20년 이라고 가정하자. 무함마드가 2,670년 전에 아브라함과 이스마엘로부터 분리되었다면 그들 사이에 133세대가 약간 넘어야 한다. 계산을 하여 2,670년을 20년으로 나누면 결과는 133세대와 반 세대로 무함마드의 조상들에 대한 족보를 조작한 Ibn Ishak과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였듯이 35 또는 40세대가 아니다. 우리는 무함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그들이 얼마나 준비가 덜 되었고 현명하지 못하였는지 알 수 있다.
수세기를 걸쳐 성경에 기록된 책에 의하여 문서화된 예수의 족보를 제외하고 역사에서 다른 어느 가문도 2,000년 이상동안 그들의 조상들을 설명한 적이 없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자. 우리가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이 알려졌고 한 세대를 20년이 아닌 25년으로 만든다고 가정하면 21대 조상은 무함마드로부터 525년 소급될 것이다. 이것은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이 A.D. 50-70년 사이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와 이스마엘 사이에 약 2,000년의 기간을 만든다. 예수의 족보를 제외하고 역사의 어느 가문도 2,000년의 기간 이상 그들의 조상들을 입증하지 못하였다. 유다의 왕족의 후손인 요셉의 가문도, 같은 부족의 후손인 성모 마리아의 가문도 그들의 조상들을 아브라함까지 설명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각 세대에 성경의 책들에 기록된 것이 있었고 그 사실들은 거듭해서 입증되었다. 그 책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이어서 메시아의 족보에 관한 거의 모든 구성원들을 확증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만들었던 약속에 대한 증거를 준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모세에 의해서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기록되었듯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이삭과 그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의 아들 유다와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수행되었다. 그 족보는 성경의 많은 다른 책에 계속해서 기록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이 메시아 계보의 계속성을 다윗왕의 조상들 가운데 한명인 보아스를 통하여 룻기에서 확증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세주로서 거룩한 아기의 탄생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그리고 이어서 B.C. 586년경에 바벨론의 포로기에 유다를 통치하였던 마지막 왕에 이를 때까지 많은 다른 왕들에게 확증되었다. 하나님 약속의 확증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계속되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다윗왕의 계보에서 또 다른 통치자인 스룹바벨에게 자신의 약속을 갱신하였는데 스룹바벨은 B.C. 538년경에 유다의 통치자가 되었다. 스룹바벨이 총독이 된 이후 많은 선지자들이 인간의 육신을 입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예언하였다. 계속된 예언들이 말라기 선지자에 이르기 까지 계속되었고 말라기는 B.C. 436년경에 구약의 마지막 책을 썼다. 말라기의 세 번째 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말라기와 모든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구약의 하나님은 그분께서 오심의 표시로 그분을 위하여 길을 준비할 사자를 보낼 것을 말씀하시면서 오실 것을 약속한 그 분이었다. 이 사자는 세례 요한이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던 같은 세대에서 그를 부르셨고 그는 요한복음 1:26,27에서 예수에 관하여 증언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나중에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그가 메시아냐고 물었을 때 마태복음 3:2에서 그는 자신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사야 40:3의 예언을 성취하여 주님이 오시기 전에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온 자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지목하였다.
예수의 메시야 족보에 관한 기록과 역사적 증언들의 완벽한 연속성이 있다.
메시야 족보는 말라기와 예수의 시대 사이에 연속되어 잘 나타나 있다. 사실상 유다의 통치자들은 B.C. 2세기 동안 마카비 왕조시대에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에 이르기 까지 구전으로 감추어졌던 기간은 120-140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문들이 140년 먼저 살았던 그들의 증조할아버지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짧은 기간이었다. 신약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로마 역사가인 요셉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의 저작물과 같은 역사적인 문학작품에서도 그에 관한 증언이 있는 세례 요한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예수의 메시야 족보에 관한 기록들과 역사적 증언들의 완벽한 연속성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이슬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무함마드와 이스마엘 사이의 기록의 부재
반면에 가장 문제가 되는 조상이 무함마드로부터 21대 선조이고 그는 A.D. 1세기에 예멘에 살았던 무함마드의 가문으로 올 때 어떻게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을 그보다 2,000년 전에 시나이에 살았던 이스마엘과 연결할 수 있는가? 무함마드 이전에 기록된 어떠한 아랍의 문서들도 그러한 주장에 대한 암시조차도 없다. 이슬람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메카의 시를 건설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메카는 A.D. 4세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21대 조상과 이스마엘의 시대 사이의 2,000년동안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이 이스마엘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기록문서는 없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의 시대와 무함마드 자신의 시대 사이에 기록된 신빙성 있는 문서도 없다. 만약 이것이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라는 증거에 충분하지 않다면 우리는 많은 다른 부족들에 속하였던 아라비아의 수백의 통치자들에 관하여 말하여주는 수천의 비문들과 연대기들과 고고학적 기록들에 관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비문 또는 기록도 무함마드의 조상들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무함마드의 집안이 예멘의 다른 어떤 가문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이라는 것, 그리고 비록 이슬람 전통이 무함마드의 가문이 메카에서 통치하였다고 주장할지라도 무함마드의 가문은 서부 아라비아의 어떠한 도시에서도 통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지 확증할 수 있다.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이 이스마엘의 후손이 되는 것의 불가능성
무함마드는 평범한 예멘의 가문출신인데 그의 21대 조상이 어떻게 아브라함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에 관한 정보를 가질 수 있을까? 비록 인쇄술이 15세기에 발명되고 그때 이후로 이전 세기들 보다 파일보관과 기록이 더 잘 조직화되고 쉬워졌지만 우리 세대의 어느 가문들도 1,000년 전에 살았던 그들의 조상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렇다면 A.D. 1세기경에 살았던 무함마드의 21대 조상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 보다 2,000년 전에 살았던 한 조상에 관하여 무언가를 알 수 있었을까? B.C. 9세기와 7세기 사이의 앗수르인들의 기록에서 우리는 이스마엘 부족이 시나이와 비옥한 초생달 지대에서 유목민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떠한 비문도 그들이 누군가를 그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계보가 이스마엘과 닿았다는 것을 그들이 몰랐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그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였을 것이고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이 쓴 모든 고대의 책에서 이삭을 그들의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의 일부로 기록한 것과 같이 그들 이후 각 세대에서 이스마엘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부름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의 유일한 역사적 후손들은 그의 아들들로 유래된 12부족들이 있었다. 이어지는 세대들에서 비록 이스마엘과 이러한 부족들 사이의 기간이 단지 약 1,200년(B.C. 9세기와 7세기 사이)이었을지라도 그의 아들들의 후손은 그의 이름을 포함하여 그에 관하여 잊어버렸다. 이것이 이스마엘의 진정한 후손들에 대한 경우인데 어떻게 이스마엘이 살았던 곳과 거리가 먼 예멘에 살았던 사람이 자신보다 2,000년 전에 살았던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스마엘족 자신들이 그들의 조상이 이스마엘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면 누가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에게 그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말해주었는가? 무함마드의 17대 또는 21대 조상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는 증거가 없다. 무함마드 이전에 그러한 주장을 하는 기록된 문서가 없다. 그러한 문서가 존재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이 조상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는 각 세대에 기록된 문서 없이는 자신 보다 2,000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으로부터 후손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이슬람의 주장은 내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살았던 줄리어스 시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진리에서 더 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21대 조상이 줄리어스 시저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지라도 나의 주장을 확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 세대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오늘날 어느 누구도 로마 자체에서도 줄리어스 시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고 1,000년 전에 살았던 어느 이탈리아인도 감히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어떠한 기록된 증거가 없는 1,000년도 그 주장을 조롱거리로 만든다는 것이 이해된다.
예언자임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성경 인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은 무함마드 당시에 아라비아에서 통상적인 관습이었다.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그러한 주장은 정직과 논리를 위반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특히 무함마드 당시에 아라비아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어서 고의적으로 자신들이 성경 인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역사적으로 알려진 인물들 또는 성경에 언급된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무함마드의 외사촌인 Umayya bin abi al-Salt는 예언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솔로몬을 방문하였던 시바의 여왕이 자신의 고모라고 말하였다.[13][xiii] 그는 자신이 그녀의 남자형제의 후손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이것을 말하였다. 또한 Tubb'a(A.D. 410-435년에 통치하였고 메카를 점령한 예멘의 지도자)도 예언자라고 주장하였고 시바의 여왕이 자신의 아주머니라고 주장하였다.[14][xiv]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Umayya bin Abi al-Salt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사람들 위에 예언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순진하고 무지하여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을 하였다. 비록 아라비아의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 보다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담대함을 가졌지만 무함마드는 역사적인 어떤 기록도 없이 자신보다 2,700년 전에 살았던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의 마음은 논리와 역사에 반하는 주장에 대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계속해서 믿는 우리의 무슬림 친구들에로 간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추종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천국에 올라갔고 아브라함을 만났고 자신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카피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무함마드가 어떻게 이스마엘이 자신의 선조라고 주장하는지 보았다. 그는 자신과 이스마엘 사이의 기간이 2,700년이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록된 것이 어느 시기에도 없음에도 이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비역사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보다 더 관련된 것이 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육신적으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카피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아브라함에 연결시켰는데 왜냐하면 그가 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만났고 그 가운데 아브라함도 있었다는 천국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그 당시 영지주의와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많은 종교들과 종파들에 의하여 수용된 사상을 모방하여 천국이 7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 문서는 인간이 하늘 7층의 각층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똑같이 주장하였다.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을 하늘의 7층에[15][xv] 두었는데 거기서 아브라함은 더 많은 일을 하는 성도들을 다스렸고 낮은 층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종교의식을 수행하였다.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무함마드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카피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이 무함마드에게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었을 때 그는 아브라함이 무함마드 자신의 카피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당신의 친구처럼 그와 비슷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고 당신의 친구가 그와 같은 어느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16][xvi] (“친구”는 무함마드 자신을 의미한다.) 무함마드에 관한 하디스의 권위 있는 책 Al-Bukhari는 무함마드가 “나는 아브라함과 가장 닮은 아들이다”라고 말했다고 인용한다.[17][xvii] 무함마드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설득하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카피라고 주장하였다. 이삭은 비록 그가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아브라함의 이복자매였지만 감히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야곱도 또는 아브라함의 시대에 가까이 살았던 아브라함의 어떤 후손들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카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아브라함보다 2,700년 이후에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종교연구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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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i] Halabieh, I, page 93 ; comments on Ibn Hisham, page m [2][ii] Halabieh I, page 36 [3][iii] Masudi, Muruj al-Thahab, Beirut-Lebanon, 1991, II, pages 280-282 [4][iv] Halabieh, I, page 35, 36 [5][v] Tarikh al-Tabari, I , page 127 [6][vi] Tarikh al-Tabari, I, page 127 [7][vii] Tarikh al-Tabari, I, page 127 [8][viii] Diwan Ummiah bin Abi al-Salt, ( Beirut-1938), page 58 [9][ix] Tarikh al-Tabari, I, page 128 [10][x] Tarikh al-Tabari, I, page 128 [11][xi] Tarikh al-Tabari, I, page 516 [12][xii] K.A. Kitchen, Documentation For Ancient Arabia, Part I, pages 90-222 [13][xiii] Diwan Ummiah, page 26 [14][xiv] Tarikh al-Tabari, I, page 429 [15][xv] Sahih al-Bukhari, I, page 92 [16][xvi] Ibn Hisham, 2, page 32; Halabieh, 2, page 91 [17][xvii] Sahih al-Bukhari, 4, page 125
148p에서 1988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이집트 작가 '나기부 마푸즈'를 한 명을 이슬람권에서 나온 대단한 인물로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중세기 방식의 퇴보적 영향으로 이슬람권 출신 노벨 수상자는 이슬람 인구에 대비하여 아주 극소수이다. 다음 자료를 보자.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후진성
이슬람은 모두에게 저주이지만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주요 피해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제목의 2005년 기사에서 파키스탄인 저자 Farrukh Saleem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57개 무슬림 국가들의 연간 GDP 총계가 2조 달러 이하이다. 미국은 혼자서 10.4조 달러의 재화를 생산하며 중국은 5.7조 달러, 일본은 3.5조 달러 그리고 독일은 2.1조 달러를 생산한다. 인도의 GDP도 3조 달러 이상으로 평가된다.(구매력 평가 기준). 원유 자원이 풍부한 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 U.A.E, 쿠웨이트와 카타르는 모두 합하여 4천3백억 달러 가치의 재화(대부분 원유)를 생산하지만 네덜란드 혼자서 더 많은 연간 GDP를 가지고 있으며 불교국가 태국도 4천2백9십억 달러 가치의 재화를 생산한다. 무슬림들은 세계인구의 22%이지만 전 세계 GDP의 5% 이하를 생산한다. 더 염려되는 것은 무슬림 국가들 GDP의 전 세계 GDP에 대한 비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랍 국가들은 특히 악화되고 있다. UN의 아랍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아랍 여성의 절반이 글을 읽을 줄을 모르며 5명 가운데 1명의 아랍인들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며 아랍 인구 가운데 단지 1%만이 개인 컴퓨터를 가지고 있으며 그 1%의 절반만이 인터넷을 사용하며 아랍 노동력의 15%가 실업 상태이고 이 숫자는 2010년까지 2배가 될 것이다. 아랍 세계에서 지난 20년 동안 개인당 소득의 평균증가율은 매년 0.5%였으며 아프리카의 사하라 남쪽을 제외하고 어느 곳보다도 안 좋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은 에티오피아, 시에라리온,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과 모잠비크이다. 적어도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6개 국가가 무슬림이 대다수인 국가들이다. 결론: 세계의 무슬림들은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무슬림들이 대다수인 57개 국가들은 각 나라 당 평균 10개의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합하여 14억 인구에 600개 이하의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인도는 8,407개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고 미국은 5,758개의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다. 14억의 무슬림들 가운데서 Abdus Salam과 Ahmed Zewail가 물리학과 화학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두 명의 무슬림들이다(Salam은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그의 과학적 업적을 수행하였으며 Zewail은 켈리포니아 공대에서 수학하였다). Salam 박사는 자신의 조국에서도 무슬림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과거 105년 동안 14억 무슬림들은 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한 반면에 단지 1400만 유대인들은 167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였다. 14억 무슬림들 가운데 30만 명이 못되는 사람들이 과학자로 분류되며 이것은 무슬림 백만 명당 230명의 과학자가 있는 비율이다. 미국은 110만 명의 과학자들(백만 명당 4,099명)이 있고 일본은 70만 명의의 과학자들(백만 명당 5,095명)이 있다. 사실: 14억 무슬림들 가운데서 8억 명은 문맹이다(10명의 무슬림들 가운데 6명이 읽을 줄을 모른다). 기독교 세계에서 성인들의 문자 해독율은 78%이다. 예를 들어 무슬림들은 세계인구의 22%를 구성하면서 노벨상 수상자들의 1%를 배출한 것을 생각해보라. 유대인들은 세계인구의 0.23%를 구성하는데 노벨상 수상자들의 22%를 배출하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무슬림들은 가난하고 문맹이며 약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올바른 진단에 이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그 대책은 그 진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진단은 단순하다. 이슬람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슬람이다. 한 나라가 더 이슬람화 될수록 그 나라는 더 후진국이 된다.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인 Pervez Hoodbhoy 교수는 이스라엘이 57개 무슬림 국가들을 다 합한 것 보다 거의 2배 더 많은 과학자들을 가지고 있다고 저술하였다. 전 세계인구의 거의 1/5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은 전 세계 과학자들의 1% 이하를 배출하였다.[1]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에서 보스턴의 Brigham and Women's Hospital의 무슬림 의사인 Tariq Ahmad는 독창적인 생각을 가졌다.[2] “나는 절대로 이슬람 또는 무슬림들에 관한 주제의 전문가는 아니다”라는 전제하에 그는 “급진적인 이슬람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 해답은 가장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과격주의 외침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이슬람 내부의 세속적 힘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말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이슬람을 덜 알고 이슬람을 덜 실행하는 사람들의 손에 있다는 말이다. Ahmad 박사가 의술을 가장 잘 시술하는 사람은 의과대학 과정에서 탈락한 사람이라 것을 또한 믿는가? Ahmad가 혼자가 아니다. 그의 생각이 지배적인 생각이다. 1400년 동안 “이슬람을 적게 실천한 무슬림들”은 증오에 가득 찬 이슬람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일단 그들이 꾸란의 권위를 받아들이면 그들은 모든 권력을 진정한 무슬림들-극단주의자들-에게 주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증오에 가득 찬 이슬람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이슬람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은 폭력이 이슬람을 구성한다는 것을 안다. 코메이니는 이슬람을 잘 알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이슬람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슬람이 전쟁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다. 이슬람은 말한다: 불신자들이 당신들을 살해하였듯이 모든 불신자들을 살해하라!.....이슬람은 말한다: 그들을 살해하라, 그들을 칼로 죽이라. 사람들은 칼이 아니고서는 순종하지 않는다.”[3] 코메이니의 관점은 이슬람 경전에 근거하고 모든 무슬림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한다. “덜 무슬림”인 사람들이 좋은 무슬림이 되기로 결심할 때 그들은 지하드 테러리스트가 된다. 숫자는 상관없다. 스스로 “신성한 권위”를 가지는 자는 누구든지 그 마지막 말을 가진다. 이슬람에서 근본주의자들은 항상 이길 것이다. 미지근한 무슬림들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들은 그 문제의 몸통이다. 자신들을 무슬림이라고 여기면서 그들은 꾸란과 그 꾸란을 실천하는 테러리스트들에게 합법성을 준다.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여하지 않은 대다수의 침묵 때문에 수백만이 학살되었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범죄자들에게 합법성을 주었다. 이슬람이 좋은 것이라면 왜 그것이 최소한으로 실천되는가? 이슬람이 나쁜 것이라면 왜 그것이 어째든 실천되는가? 아주 작은 양일지라도 들어온 독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는데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1] Islam and Science, Religious Orthodoxy and the Battle for Rationality. 1991. [2] http://www.nytimes.com/2009/12/5/opinion/05iht-edahmed.html?_r=2 [3] Khomeini: Islam Is Not a Religion of Pacifists (1942)
158p에서 저자는 "그(무함마드)가 종교적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마침내 610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유일신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무함마드에게 계시는 준 존재는 천사 가브리엘이 아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는 어떤 영의 계시를 받았을까?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어떤 영의 계시를 받았느냐고 무슬림들에게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가브리엘(Gabriel) 천사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역사적으로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는 주후 595년 그의 나이 25세 때 여러 차례 결혼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던 40세의 부유한 과부 카디자(Khadija)와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을 한 지 15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종교적인 열심히 있어 히라(Hira)동굴에 가서 명상을 하다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슬람에서 꾸란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는 제 2의 경전인 부카리의 하디스(Hadith)에 의하면 무함마드에게 어느 날 한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목을 조르고 찍어 누르며 괴롭히다가 읽으라고 명하여 “자신은 글을 모른다”고 했더니 다시 찍어 누르면서 너무 고통스러워 신음하는데 버둥거리고 있는데 또 읽으라고 해서 “글을 모른다”고 했더니 또 괴롭히고 이런 경험을 3번 하고 나서 천사가 “응혈(엉긴 피: clot)로 인간을 창조하신 네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하면서 꾸란 96장 1-3절까지를 계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그 사건이 너무 두려워서 집으로 달려가서 아내 카디자에게 “나를 덮어 주오. 내게 악한 일이 생길 것 같소. 너무 두렵소.”라고 하자 그녀는 그를 덮어주고 안심을 시키고는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를 물었단다. 그가 동굴 속의 경험을 말하면서 꼭 무슨 악한 일이 생길 것 같다고 두려워할 때 그의 아내 카디자(Khadija)는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 알라(Allah)께서 절대로 당신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기독교인이었던 자신의 사촌 와라까(Waraqa Ibn Naufal)에게 무함마드와 함께 찾아가서 상담을 청했다. 그 때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와라까는 “조카가 본 것은 무싸(Musa:모세를 말함)에게 계시를 전했던 그 비밀을 간직한 분이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던 그 천사가 누군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이것이 무슨 현상인지 그것이 누구인지를 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꾸란에 보면 그가 메카에서 받았다고 하는 12년 동안의 계시에는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전하는 그 천사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나중에 기독교와 유대교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계시를 내릴 때는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의 천사를 통해서 내린다는 사실을 듣고 메디나에서 계시를 받을 때 두 번 지브이일(Gibriil)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꾸란 2장 98절, 66장 4절) 그러나 성경의 가브리엘 천사는 매우 인격적인 천사로 언제나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천사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또한 성령의 계시는 사람을 죽일 듯이 고문하고 괴롭히면서 임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 임한 영은 그의 목을 조르면서 너무 고통스럽게 했기에 그는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서 절벽에서 뛰어 내리려고 했지만 천사가 말려서 포기했다는 것이다.(P.J.스튜어트, 『펼쳐보는 이슬람』, 김백리 역(서울:풀빛, 2004) p67) 그러므로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렸던 천사는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과는 전혀 다른 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슬람의 하디스 중에는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는 글들이 있다. 이는 그 유명한 악마의 시(Satanic verses)의 구절이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이란의 타바리스탄(지금의 아몰:Amol) 출신의 유명한 이슬람 신학자 타바리(Tabari)는 그가 수집한 하디스(Hadith) 6권 107쪽에서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고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핍박을 받지 않고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 우상 숭배자들과 타협을 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그 당시 알라(Allah)의 딸들이라고 불리는 세 여신들(Al-Lat, Uzza, Manat)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들은 높이 나는 학과 같아서 알라께서는 그들의 중재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했다.(P.J.스튜어트, 『펼쳐보는 이슬람』, 김백리 역(서울:풀빛, 2004) p83) 이 계시가 내리자 메카의 우상 숭배자들은 만족해하면서 무슬림이 되었으며 무함마드와 함께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핍박을 피해 아비씨니아(에디오피아)에 피난 갔던 무슬림들은 이제는 더 이상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뻐하면서 살림을 정리해서 메카로 돌아오고 있는데 무함마드가 그 계시를 취소하는 계시를 다시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 새로운 계시의 내용은 “이 세 여신(라트 웃짜, 마나트)은 알라의 딸들이 아니며 알라께서는 이들에게 아무런 권위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타바리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이전 계시를 취소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나타나서 “너는 왜 내가 네게 주지 않은 계시를 전했느냐? 그것은 네 혀에 악마가 넣어준 계시니라. 그러나 자비로운 알라께서 너를 용서하시느니라.”하면서 아래와 같은 새로운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라트와 웃자와 세 번째 마나트에 대한 말씀이라. 너희들에게는 아들들이 있으며 그분에게는 딸이 있다는 것이냐? 그것은 부당한 분배니라. 그것들은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그렇게 불러왔을 뿐이니라.(꾸란 53장 19-23절) 이 계시로 인하여 한동안 화해 무드로 부드러워졌던 무함마드를 따르는 무슬림들과 메카 주민들과의 관계는 악화 되었고 핍박은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 핍박을 견디지 못해서 무함마드는 622년 드디어 메카를 버리고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슬람의 학자들에 의해서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악마의 계시가 정상적인 계시로 오해되었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이슬람의 역사적 자료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소문이 거의 1000 Km 정도 떨어진 이디오피아 수도까지 전달되어서 그들이 가산을 정리하고 돌아오다가 메카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 그 계시를 취소하고 새로운 계시가 내렸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갔다면 그 기간은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악마의 영에 의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과연 그가 악마의 영의 계시를 받은 것이 이 사건과 관련된 한 번뿐이었을까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전달한 영이 어떤 영이었는지를 몰랐다는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성령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고린도 전서 12장 3절: 꾸란5장17절) 그리고 이슬람의 영은 무함마드에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다고 계시를 했다는 것이다.(꾸란4장157절) 이 부분이야말로 그 영이 성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열어주신 문은 십자가뿐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3장1절) 십자가를 부인하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다.(꾸란4장158절) 예수께서는 죽지 않고 그대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슬람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도 인정하고(꾸란19장20절) 또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꾸란3장49절) 문둥병을 치료하였으며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꾸란5장110절)까지 인정하면서 왜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의 길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사단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기적을 행하신 것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다른 것을 다 인정한다고 해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며(요한복음1장29절)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되고 만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많은 요소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영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며(꾸란5장73절)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한다. 알라(Allah)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꾸란18장4절) 아무리 이슬람 쪽에서 알라(Allah)와 하나님은 같은 신이라고 주장을 해도 이런 핵심적인 부분들이 다르다면 같은 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속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슬람 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슬람은 기독교와 모두 같은데 “예수님을 신으로 받드는 것만 부인한다”고 한다. 즉 99%가 같고 1%만 다르다는 것이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기독교와 많은 점이 똑같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1%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와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성령과는 전혀 다른 영일 것이다. 유명한 이슬람 학자 타바리(Tabari)뿐만 아니라 무함마드의 전기를 쓴 초기 이슬람 신학자들 이븐 이삭(Ibn Ishaq) 및 와키디(Wakidi) 그리고 이븐 싸앋(Ibn Sa'd)도 무함마드가 한 때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그들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Kitab al Tabaqat al Kabir", Volume 1, parts 1 and 2, pages 236 - 239, translated by S. Moinul Haq, published by the Pakistan Historical Society) 꾸란과 하디스 및 여러 가지 증거로 볼 때 그 때 한 번뿐이 아니라 항상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 http://koreairanianchurch.net/bbs/board.php?bo_table=column_1&wr_id=2322&page=4
172p에서 저자는 "이슬람이 표방하고 있는 정치제도는 상당히 민주적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상과 아주 다른 말이다. 다음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슬람은 어떻게 독재와 폭정으로 이르는가
글쓴이 Rafi Aziz
독재정권이 나타나는 이유와 방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슬람이 폭정을 촉진하고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슬람은 그것의 월력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대로 지금도 15세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문화적으로 지성적으로 나머지 세계보다 훨씬 뒤 처져있다. 이것이 이슬람의 영향이 존재하는 곳마다 이슬람이 폭정에 이르는 이유인데 전통이 보다 전근대적일수록 독재가 더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한 증명은 수억의 무슬림들이 칼리프 통치를 원하는데 칼리프는 자기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정죄할 능력을 가진 독재자이고 그것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다. 이슬람은 항상 속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슬람은 서방세계 지성적인 전통에 의하여 거의 독점적으로 개발된 개념인 해방과 자유와 진보에 관한 기만적인 설명으로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 아래 샤리아 법을 그리고 운이 따른다면 칼리프 통치를 적용하려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이슬람이 보다 확장될수록 불안정한 상황이 더 많다. 이슬람이 이렇게 만드는데 이슬람은 심화된 정죄하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끊임없이 당신을 정죄하면서 당신이 “충분히 이슬람적인”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 경찰에게 돌아선다. 당신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당신의 적들이 언제 부당한 “도덕적인 죄” 혐의를 사용할지 모르며 그 형벌은 참혹하다. 이것이 10억 피해자들의 삶을 망가뜨린 이슬람의 폭정이다. 마호멧교는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여자를 돌로 쳐 죽이고 마치 그들이 사악하고 악한 짓을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집으로 가는 사회들을. 당신이 단지 생각한 것 때문에 당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고 당신의 마음이 당신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소유물인 병든 사회를 만들어 내었다. 당신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조종되고 지배되며 끊임없이 정죄된다. 이슬람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검열이 급격히 증가한다. 사실 이란과 같은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웹사이트들에 접속을 막았으며 “국내용” 인터넷을 만드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슬람에 좋은 것이 있는가? 가이드가 독재와 폭정으로 인도하는데 삶에 대한 총체적인 가이드가 무슨 좋은 점이 있는가? 공산주의와 나치도 삶에 대한 가이드였다. 삶에 대한 가이드가 되는 것은 성취가 아니다. 우리가 21세기에 이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우리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중지할 때이다. 이슬람이 그것의 못생긴 머리를 보이는 곳마다 환경이 진부하고 불행하고 비참하다. 지난 10년은 이슬람이 독재와 폭정으로 인도하는 자승자박이라는 것을 의심의 그늘을 벗어버리고 증명하였다.
원문출처 http://www.faithfreedom.org/articles/political-islam/how-islam-leads-to-dictatorship-and-tyranny/
무슬림 사회들의 참상
글쓴이 Ibn Kammuna (Tuesday, 03 July 2012 06:20)
내가 중동에 살고 있을 때 거기에 살고 있는 친구인 미국인 여성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아랍인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서방세계 사람들인 당신들이 생각하는 방식과의 주요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나의 질문이 모호하고 막연하였지만 그것은 그대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랍문화와 정신세계, 서방세계문화와 정신세계에 관하여 그녀의 마음에 무엇이 가장 인상적인지 알기를 원하였다. 그녀가 배운 여성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녀는 나의 질문에 기나긴 대답을 하였고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아랍문화는 비밀의 문화이다. 서방세계 사람들도 그들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것들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한다. 아랍문화는 진실과 개방성이 없는 수치심의 문화이다. 서방세계 문화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문화”가 아닌 “사람들을 돕는 문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직함과 공개된 기록의 문화이다. 아랍문화는 어떠한 생각 없이 개인에게 일들을 “강요하는” 문화이다. 서방세계 문화는 선택의 문화이고 사물들에 대한 비판을 반영하는 문화이다. 그녀는 내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다른 것을 말하였다. 그 당시에 나는 서방세계에 가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말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들이 나의 기억 속에 박혀있는 요점들이다. 내가 서방세계로 와서 여러 해를 산 다음 그녀가 자신의 대답에서 요점을 말하였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중동에서 나의 뇌는 책과 종교적 명령과 꾸란의 구절과 문화적 격언과 신문과 다른 미디어 수단을 통하여 “유대인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유대인 증오”가르침으로 가득 찬 마음은 유대인에 관한 어떠한 관점을 한 가지 마음으로 몰아가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이 놀라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해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인 유대인들을 올바로 아는 데는 내가 서방세계에서 살고 있는 동안 많은 세월이 걸렸다. 정기적인 자원 활동과 자선행위에 참여하며 공공의 유익을 위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많은 유대인들을 만났는데 아랍문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색이다. 서방세계에서 유대인들과 개인적인 만남은 내가 중동에서 자라는 동안 세뇌되고 내가 믿은 어떤 아랍의 문화적 “진실들”에 의문을 품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면 나는 1967년 전쟁은 아랍 국가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도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랍의 문화적 진실로 믿었었다. 나는 이 문제를 믿을만한 출판물들과 중립적 기록물들을 자료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내안에 소위 Thomas Kuhn이 말하는 “사고의 변화”를 일으켰다. 1967전쟁의 주요 도발자는 아랍 국가들이었다. 이 전쟁 발발의 원흉은 이집트 대통령 자말 압둘 나세르였다. 물론 다른 아랍 지도자들은 그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전 아랍세계는 그들이 자랑스럽게 도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아주 작은 나라의 손에 괴멸되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아랍 미디어나 정치를 신용하지 않는다. 나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하여 나 자신의 독립적인 연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글에서 다루어져야할 핵심 문제인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의 절망적인 실상으로 돌아가자. 이슬람 국가들의 절망적인 참상은 삶의 사실들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피하며, 나타내지 않는 것 때문에 초래되었다. 그리고 무슬림들이 그들의 삶의 완벽한 법전으로 받아들인 이슬람이 이슬람 국가들의 이러한 참상을 만들어내는 데 책임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슬람은 개인들과 국민들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이슬람은 진실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 무슬림 사회에 대한 이슬람의 맹목적인 마법은 그들이 진실에 냉담하게 만들고 그들을 무지 속에 있게 만든다. 설명해보겠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진실을 찾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요구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실을 중립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조사하도록 도와주며 필요할 때마다 그것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교정한다. 이 사실은 과학의 발전에 잘 나타나있다. 인간역사의 대부분에서 지구는 평평하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과학적 조사는 지구의 형태에 관한 다른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오래된 진실인 당시의 의견과 다른 것으로 지구가 연속된 둥근 형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수정하였다. 우리는 “시간”의 개념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믿었다. 어떤 현상이 그러한 “진실”에 도전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비판적인 태도로 생각하였고 우리의 시간에 관한 관점을 “상대적인”것으로 바꾸게 이르렀다. 비판적인 사고는 그러므로 진실을 찾는데 필수적이며 그것은 과학적 진보와 발전을 만들어낸다. 이슬람은 인간 사고에 있어서 적어도 어떤 문제들에 있어서 이 비판적인 요소를 파괴한다. 이슬람이 비판적 사고를 허용할지도 모르지만 종교와 무엇이든지 종교와 관련된 문제들에서는 비판적인 사고는 출입금지이다. 서방세계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도덕성을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누군가가 교황의 의도를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누군가가 어떤 규범에 도전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아니다. 무슬림 국가에서 당신이 무함마드가 예언자라는 것 또는 꾸란의 진실성에 문제를 제기하면 당신은 죽은 고기가 될 것이다. 전 무슬림 마크 가브리엘은 알-아즈하르 대학교수였다. 그는 이슬람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였고 이슬람의 근본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꾸란 믿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멸시되었고 알-아즈하르 대학교의 자신의 동료들과 자기 가족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다. 서안지구의 한 대학교 교수가 어떤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여 무함마드의 존재를 문제 삼았다. 그의 학생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하였을까? 그들은 그를 2층 창문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이단이라는 알리 시나의 주장에 저항한다. 그러나 현장의 사실들은 그의 주장이 날이 갈수록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단에 소속된 자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비열한 범죄자로 밝혀지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주 같은 방식으로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비열한 범죄자, 노상강도, 집단살인자, 노예로 만드는 사람, 어린이에 대한 이상 성욕자, 일부다처주의자, 강간범이라는 분명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무시하며 무함마드에게 신성을 주며 오늘날에는 무함마드를 모방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무슬림들이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서 누군가가 꾸란을 태웠다고 들으면 대 혼란이 일어난다. 이단의 정신세계가 작동하고 무슬림들은 광포해진다. 비록 그 주장하는 꾸란 소각이 세상의 아주 먼 구석에서 일어났어도 무슬림들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기독교 수녀들과 선교사들을 살해한다.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유대 성전들과 토라를 태우거나 아흐마디 교단(Ahmadiyya;19세기 말 인도에서 생긴 이슬람 교단) 모스크들을 파괴한다. 이슬람은 그것이 출현한 시대 때문에 큰 성공을 이룬 이단이다. 6세기에 아라비아는 통치하는 정부가 없었고 부족단위의 군대가 그 시기를 통치하였다. 무함마드는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그는 이슬람이라는 “부족”시스템을 찾아냈고 시작하였다. 이 시스템에서는 합류하기는 쉽지만 산채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 까지 배교에 대한 처벌은 죽음이다. 그 들어가는 것은 오픈되어 있고 떠나는 것은 막혀 있는 부족 시스템에서 무함마드는 다른 부족으로부터 모든 범법자들과 배신자들을 끌어들이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약탈물에 대한 탐욕과 강간을 위한 여성 포로들로 그들을 유혹하였고 그것이 먹혀들었다. 약탈물과 여성들에 대한 탐욕으로 무함마드는 들어가는 것은 열려있고 떠나는 것은 막혀있는 성공적인 부족 시스템을 수립하였다. “나는 테러로 승리하게 되었다”그리고 “나는 알라가 나를 위하여 약탈물을 허락한 유일한 예언자이다”와 같은 표현들을 그는 거만하게 말하였다. 이슬람의 근본에 대한 이러한 전형적인 예가 얼마나 끔찍하고 비열하든지간에 이것은 이슬람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문서들에서 모두 분명하지만 21세기의 무슬림들은 그것들이 세계가 모든 시대에 걸쳐서 모방하여야할 거룩한 진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슬림 문화가 비판적 사고와 자기반성의 발달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떠난다면 그들은 살해당한다.” 무슬림들은 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생각해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 남성은 다른 종교(유대교와 기독교)의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된다. 무슬림 여성은 비-무슬림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왜 그렇게 가르쳤는지 질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은 와인 한 잔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좋은 것인데).” 무슬림은 와인을 마시는 것 또는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상 당신의 피부를 태양에 적당히 노출하는 것은 좋은 것인데 무슬림 여성의 몸은 가리어져야 한다. 그것은 뼈의 발달에 필수적인 영양소인 신체 내에 비타민D 생성을 돕는다.” 무슬림은 그러한 가르침에 도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목록은 길다. 무슬림들의 두뇌 사용이 신성한 순나로 여겨지는 이슬람의 가르침이나 무함마드의 행동에 도전한다면 무슬림들이 그들의 두뇌를 비판적인 자세로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미네소타의 한 무슬림 의사는 어떤 형태의 여성할례를 아직도 권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 권위 있는 하디스에서 무함마드가 여성의 성 능력을 파괴하는 그러한 악하고 비도덕적인 짓을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사고를 발달시키기 위하여 사고의 자유와 배우거나 생각에 떠오르는 모든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유가 학교에서 가르쳐져야한다. 진정한 교육은 개인들에게 어떠한 것도 신성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과 배우고 습득한 사실을 질문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한 능력이 무슬림 사회의 어린이들에게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만약에 무슬림 사회 안에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가 어떠한 것이라도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하여 허용된다면 이슬람은 인간의 문명을 초월했던 많은 역사적인 종교들 가운데서 어느 때든지 그것의 바른 목적지를 취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슬람은 그것이 실제로 속했던 아라비아 사막모래 속에 매장될 것이다.
원문출처 http://www.islam-watch.org/authors/59-kammuna/1066-the-plight-of-muslim-societies.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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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책은 이슬람에 대해 바로알리는 책인가? 무슨 의도로 작성된 책인가?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을 이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한국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왜곡되게 의도적으로 저작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저자인 이희수 교수의 이력을 보더라도 그러한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책을 읽을때 정말 조심해야한다. 이슬람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기위해서는 반대입장의 책들도 함께 읽어보기 권한다. 특히 이런내용을 어린이를 위해서 썼다는 것이 심히 걱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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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출판사] 이희수 교수님과 함께 하는 어린이 이슬람 바로알기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이슬람 바로 알기 책이랍니다. 사실 이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요.. 우리 어른의 경우는 세계사에서 배운 것이 다였구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이들 교육을 보면 많은 국가들과 함께 문화들을 유치원때 부터 알려주더라구요... 이 책을 읽으면서 얘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울 못난이랑 이슬람 문화 관련 전시를 봤던 기억이 나더라구요.. 그때 시간적 여유가 있다거나 혹은 교육을 좀 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참 많이 남았었지요... 그러나 이 책을 읽음으로써 좀더 이슬람에 대해 알기 쉽게 아이들에게 알려줘서 그 아쉬움은 좀 사라진거 같아요...
맨처음 이책을 보기 전에는 그냥 이야기로만 단순히 그림으로만 설명되어 있겠지란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나 이 책에 설명과 함게 그림 그리고 실사가 들어 있어서 놀랐지요.... 그 주제에 맞게 실사가 구성이 잘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 안에는 많은 얘기들이 들어 있어요... 제가 생각지 못했던 얘기들이요... 살짝 놀랬던 것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꾸란이 나왔다는 사실이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에 음력 정월 초하룻날 경복궁 경희루에서 문무백관이 있는 가운데 꾸란을 읽었다는 얘기지요... 물론 이슬람 사람들과의 교류가 조선시대에 있었을 테지만.. 이슬람의 성서인 꾸란을 왕실에서 낭독 했다는 것은 유교적 입장에서는 살짝 의아해 했답니다..
이슬람 국가를 움직인 사람들에서 우리가 알만한 인물들도 나와서 그런지 재미나게 읽었네요...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들도 이슬람부터 왔다는 사실에 이슬람이란 문화가 정말 크나큰 문화중 하나란 사실을 실감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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