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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사람끼리 어색한 분위기를 깰 때 물어보는 것 중 하나가 "어디 사세요?" "고향이 어디세요?" 등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또는 살았던 장소를 물어보는 것이다. "전 황산벌로 유명한 충남 논산이 고향이에요. 대전 노은동에서 학교를 나왔고, 지금도 본가가 그곳에 있어요. 지금은 서울 논현동에 직장이 있고, 일산 장항동에 살면서 출퇴근해요."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삶과 정체성이 뿌리내린 공간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삶과 관련이 깊은 지명들은 '외운다'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이, 당연히 살기 위해서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서로 같은 지명을 부르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살지 않았음에도 반가움을 느끼면서 그때도 그 장소가 있었는지 서로 물어보기도 한다. 이처럼 지명이란 단순히 장소의 이름을 암기하는 의미없는 결합이 아니라, 사람들의 장소 정체성과 관련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수많은 사람들의 지명들을 한 자리에 모으면, 수천, 수만가지의 지명 데이터가 나올 것이다. 이 지명들은 서로 관계가 있을까? 지명들 간의 유래는 일반화할 수 있을까? 내 지명은 글자 그 자체의 관계를 생각지 않고도 알지만, 남의 지명은 그저 '암기'의 대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지명 암기의 대상이 등장하는 학교 지리 수업은 지루해지기 쉽다. 나 역시도 지명을 학교에서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동기유발을 하는 것이 참 어렵다. 제법 유명하고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 있는 경우(금강 곰나루 전설, 대전이 원래는 한밭이라는 시골동네였음 등)면 몰라도, 그 외에는 어쩔 수 없이 주요 지명들은 암기를 해야 한다고 역설할 뿐이었다. ![]() 금강 곰나루 전설과 관련한 곰 석상. 정말 암곰과 인간 남자의 슬픈 사랑이 이곳에서 있어서, 곰강-금강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으로 관광객을 끌어모으기도 한다. 출처 : http://cfile229.uf.daum.net/R400x0/176922534DDF30EA04B6A6 하지만 서로 관계없을 것만 같던 우리 고유의 지명들의 유래를 추적하면, 사실은 서로 관계가 깊어 계통적으로 분류가 가능한 점이 있었다. 국문과 출신 기자로서 지명을 오랜 기간 연구한 저자는, 우리 고유의 지명들의 공통 주제어를 밝혀서 묶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수많은 지명들의 유래를 추적하다 보면, 언어학적, 역사지리적으로 관계가 깊은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의 여러 모습을 부르는 일반명사가 파생되어 그 지역 사람들이 부르는 지명이 되는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지명이 약간씩 달라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혀 관계없던 것으로 생각하던 지명들도 알고보니 관계가 깊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래 중에서 잘못된 것도 많았다. 그 이유는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 변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고유 지명을 한자로 차용하는 과정에서 뜻을 차용하였냐 음을 차용하였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지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우리 지명의 유래를 추적 및 분류화하였다. 앞서 얘기한 논산, 황산벌, 노은동, 논현동, 장항동 등의 지명들은 사실 같은 분류에 속하는 지명들이다. 우리나라는 흔히 산이 70%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산들은 엄청 높고 험준한 산도 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역 주변의 산은 낮고 완만하게 죽 이어진 저산성 산지, 구릉지이다. 우리나라 서남부 평야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이다. 낮은 산이 죽 '늘어진' 지형에서 유래된 것이다. 늘어진-누런-논-노은-노루 등으로 파생되고, 누런(누를 황, 황산벌), 논(논산, 논현동), 노은(노은동), 노루(노루 장, 장항동) 등으로 각 지역 사람들이 지명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변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전혀 관계없는 지명들의 나열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현상을 지명화한 것이었다. 각 지명들이 전국에서 비슷하게 관찰된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 대전 유성구 노은동 항공뷰 (출처 네이버지도) 낮은 산이 죽 늘어진 모습에서 늘어진-논/노은으로 변했고 이를 한자로 바꾸면서 노은(老隱)이 된다. 노은 이라는 한자 뜻 그대로 보고 '늙은 선비들이 은거한다'는 식으로 일반적으로 보는데, (http://news.donga.com/3/all/20071116/8512509/1) 이는 지명의 유래와 계통성을 생각하지 않은 해석으로 볼 수 있다.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위성지도(출처 네이버지도) 역시 낮은 산이 죽 늘어진 곳에 펼쳐진 벌판이란 뜻에서 늘어진-누런 벌이 고유 지명이었고, 이를 한자로 바꾸면서 누를 황 자를 써서 황산(黃山)벌이 된 것이다. 논산시라는 지명 역시 같은 유래이다. 낮은 산이 늘어진 형태라는 것과 비슷한 것이 또 있었다. 옛부터 우리 민족들은 산이 주변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분지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렇게 산지가 주위를 휘감고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산지가 주위를 둘렀다'고 해서 '두름-둠-두마-두모' 등으로 변했다. 두문산, 도라산, 도마동, 대둔산 등이 다 같은 계열의 지명인 것이다. 게다가 두름-두루미(학)로 변하면서 학산, 문학산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학산-하우산-와우산 등 소 우(牛)자가 붙은 산지 지명도 더러 보인다. 학과 두루미는 모두 두모 계통이었던 것이다. ![]() 서울 마포구 홍대 뒤편 와우산은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서 와우산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두모-두룸-학(鶴)-하우-와우 의 형태로 변했을 것으로 본다. 저자는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는 해석은 억지 해석이라고 본다. 우리 민족은 산을 오랫동안 숭배한 민족으로, '높은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지명도 많이 있었다. '말'계 지명, '수리'계 지명, '벼루'계 지명, '달'계 지명 등이 모두 높다는 의미와 관련이 깊었다. 마산, 말바위, 말티고개, 마리산(마니산) 등 '말'계 지명은 말의 형태를 딴 지명이 아니라, 크다, 신성하다, 으뜸가다 라는 뜻의 중세국어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말벌의 말도 '큰 벌'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니... 전국의 말을 딴 산, 바위들은 말의 생김새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었다. 비슷한 것으로 '수리'계 지명도 있다. 수리 역시 높다는 뜻이 담겨 있다. 머리 꼭대기를 '정수리'라고 하는 것이 같은 어원이다. 수리산, 수락산, 소래산, 싸리재 등으로 변하는 것이 있다. 또한 수리-술-설- 눈 설(雪)로 변해서 설악산, 설봉산 등이 되거나, 수리-수리 취(鷲)가 되어 취봉, 매 응(鷹)으로 변해서 응봉산, 수레 차(車)를 써서 차령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또한 '벼랑'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벼랑-벼루-비리-비로봉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전국에 높은 산 정상 봉우리 이름 중 비로봉이 많은 이유도 여기 있었다. 또 높은 산을 마치 하늘의 달과 비슷해서 '달'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달-다리-달 월(月)-닭 계(鷄) 등으로 파생되면서 달천, 다리재, 월출산, 월악산, 계룡산, 계족산 등의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지명들은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같은 음이면서 뜻이 좋은 한자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오해가 생겼던 것이다. 설악산은 눈이 많이 쌓여 있는 산, 응봉은 매처럼 생긴 봉우리, 비로봉에서 기도를 하면(빌면) 이루어진다, 계룡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닭 벼슬을 지닌 용 모양의 산이라 명당이다 등의 이야기 말이다. ![]() 오대산, 치악산, 속리산, 소백산 정상의 비로봉 중에서 어디서 빌면 소원이 잘 이루어질까? 아니면 각 봉우리가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의 '비리'계 지명이라는 점을 포착하는 것이 좋을까? 출처 네이버지도
![]() 닭의 벼슬을 한 용 모양의 산이라 계룡산이 아니라, 사실은 높다는 의미의 '달'이 '닭'으로 변했고 지명의 세련화 과정에서 용이 추가되어 계룡산이 된 것이다. 출처 : http://www.goodmorningcc.com/news/photo/201312/13282_17150_213.jpg 이처럼 저자는 수많은 지명의 유래를 추적 및 분류화하여, 각 지역에 아무 의미없이 흩어진 지명들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오랜 기간 우리 땅을 부르는 말들이 변화했을 뿐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지명은 우리의 자연환경과 선조들의 삶이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고 본다. 지명에는 알고보니 수많은 우리의 자연환경과 문화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한글이 생겨나기 전 한자 차용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변형되기는 했지만, 그 과정조차도 우리의 문화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지명을 제대로 바라보아서,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하여 지명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저자의 해석은 종종 우리가 지역에 대해 알고있는 스토리텔링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지명의 계통성을 생각하면 억지 해석과 이야기를 붙이면 안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실제 유래와 다른 스토리텔링이라 할지라도,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지역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이야기라면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금강의 곰나루 이야기 등은 보존가치가 있다고 본다. 전설과 같은 스토리텔링도 보존하면서, 지명의 계통성에 대한 설명도 추가하면 이야깃거리가 더 풍성해지는 장점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지명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땅 위에 의미없이 흩어진 지명을 남들보다 조금 더 암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새삼 깨달았다. 저자가 말한 지명의 계통성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우리 땅의 모습, 우리 민족의 문화를 더욱 제대로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 대부분의 지명을 총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지역의 사람들이 읽어도 자신이 사는 동네가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이 사는 동네의 지명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느끼고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명의 이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에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