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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는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본인도 토니의 책은 처음 접했고, 처음 알았다. 무지의 소산일 수도 있고, 그만큼 앞의 사상가들이 대단하기도 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하부구조, 즉 물질적 세계를 강조했고, 베버는 오히려 관념론을 강조한 편이다. 둘을 명확히 대척점에 놓고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하부와 상부로 나누어 이해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기독교를 비판했다는 차원에서 마르크스는 또 다른 종교 공산주의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고, 베버에게는 정신적인 측면이 근대를 발전 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본인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기독교를 사용한다. 책 읽기전에 앞선 역자의 권두는 저자의 크리스찬임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크리스찬이었고, 다음으로 민주주의자였고,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자였다.'라는 표현은 저자에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메시지의 현실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서는 자본주의의 발흥에 기독교가 이바지 했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의 맹아와 태동, 형성, 정착, 절정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대응하면 방식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중세부터 시작해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기독교가 경제의 메카니즘에 서서히 밀리는 모습을 차례대로, 그리서 지역별로 보여준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할에 대한 변화의 분석은 베버가 이야기 한 청교도주의가 자본주의를 발생 및 발전시키는 추진력으로 작용했다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즉, 역사적으로 단계적으로 서서히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그 위세에 기독교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 토니의 주장이다.
중세, 종교개혁, 17세기 등 기독교는 경제에 대해 완고했다. 적어도 경제는 기독교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 속에 그 처리는 가능성으로 전락되고 마지막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오히려 그 무관심 속에서 '이성'이라는 새로운 신은 기독교를 진부한 것으로 골방 속에 처박아 버린다.
사실, 저자는 기독교의 타협, 그리고 타협의 가능성이 있었던 메시지들이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역전 시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의 부당이익을 취하는, 혹은 오로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 등에 대해 정죄 했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인정하듯 그냥 말 뿐 이었던 적이 대부분이었다. 칼뱅의 엄숙주의가 팽배했던 제네바에서의 단기간의 비정상적인 체계는 곧 무너질만한 것이었고, 인간의 욕망이라는 부분을 간헐적으로 언급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러한 욕망이 자본주의의 밑바탕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저자는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대사회적 몰락에 대한 아쉬움이 인간의 욕망을 억압했던 기독교의 모습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리고 저자가 변화는 세계에 대한 무지한 기독교 리더들에 대한 비판은 사실, 비판에 앞서 쉽지 않은 '앎'이었다는 차원에 보다 더 방점이 찍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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