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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진보하고 있다. 잠시 주춤하기도 하겠지만 이 또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해당한다. 긴 역사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 말은 옳아 보인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잖다고는 해도 과거와 같은 절대빈곤의 늪에서 벗어난 것만은 사실이기에.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경험을 자주 했다. 자꾸만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 매순간 최선을 다한 이들을 기만하는 듯한 금수저들의 농간,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짓밟는 참사와 그에 대처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지도자들의 태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들이 주장하는 ‘충분히’의 기간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자녀를 앞세운 어느 부모가 더는 슬프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전문 용어로 ‘트라우마’. 스스로를 트라우마의 늪에 가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은 이들은 마치 상처로부터 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지난 경험에 집착할 때가 잦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굳이 상처를 건드려 덧나게 할 필요가 없건만, 왜 도돌이표를 그려가며 특정 시점을 회귀하는지 고개를 젓는다. 당사자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안다. 과거를 내려놓아야 현재와 미래에 더욱 충실할 수 있음을 그들 또한 잘 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그들의 의지가 작동하질 않는다. 무언가에 발목이 잡힌 듯 제자리걸음을 반복한다. ‘세월호의 아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으로부터 이 책은 출발했다. 언론을 통해 대다수가 세월호 사건을 접했다. 정부는 단 한 명도 구하질 못했다. 삼백 명이 넘는 인원이 수장됐다. 비극임이 분명한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누군가는 마치 제 친지가, 아니 자기 자신이 세월호에 탑승한 것 마냥 비통해 했다. 반면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은 이들, 지겨우니 그만하라며 외려 호통을 치는 이들도 존재했다. 옳다와 그르다의 가치판단은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만큼은 아닌 건 아니라고 주장하고픈 마음이 난 강하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기 힘든 상처가 직접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경험한,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소중한 이들과 사별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그리고 사회 전반에 회복이 힘든 상처를 남겼다고 난 생각한다. 애도는 강요에 따라 시작하거나 멈출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곡, 외면 또는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있다. 강한 사람을 선호하는 마음이 너무도 강한 나머지(?)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우린 잘못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충분히 제어 가능한 것. 잊으려 들면 얼마든지 잊을 수 있는 것. 하지만 트라우마는 그런 게 아니다. 기억이란 내가 기억하는 당사자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우리가 기억의 주체로 남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압도해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트라우마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나를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나를 기억하고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정작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나를 기억해서 유령처럼 기습한다. 그 유령은 늘 우리를 쫓아오는 자, 기습하는 자로서 등장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들이 나를 기억하고 끝끝내 날 지배하고야 만다. 트라우마는 그런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꿈속에서도 트라우마는 반복된다고 보았다. 깨어 있는 순간, 잠들어 있는 순간, 즉, 살아 숨 쉬는 동안은 트라우마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보니 결국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만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려 드는 셈이다. 이 경우에 있어 죽음은 곧 성공이다. 그간의 절박함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에겐 죽음인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방법은 트라우마에 지배당하는 것에서 역으로 그 경험의 주인으로 올라서는 일이다. 저자가 권한 건 언어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말을 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제 트라우마에 대해 말함으로써 트라우마를 평가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설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피해자보다 가해자에 친숙함을 표한다. 그러잖아도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과연 트라우마를 떨쳐 내기 위해 제 경험을 말하기 시작할 수 있을지, 아직은 침묵이 더 편해 보인다. 차라리 침묵함으로써 2차적인 공격이나마 피해보고자 하는 게 내 마음이기도 하다. 하나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고구마 넝쿨을 캐듯 점입가경이었던 시간이 벌써 몇 달째 반복 중이다. 현실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자괴감을 느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한 이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우린 운이 좋았다. 원치 않았으나 혼란의 중심에 놓인 이들도 있었으니까. 2014년 4월 16일을 매일 반복해 겪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 분들에게 이번 일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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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이후의 삶 이 책은 이 책은 애도의 글이다. 세월호로 희생된 가여운 넋들을 애도하는 책이다. 애도란 무엇인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슬퍼하는 것일까? 우리 온 국민에게 방송에서 중계하듯 보여준 세월호의 침몰을 슬퍼하는 것이다. 아니 슬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슬픔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혹자는 그 사건을 잊으라 한다. 이제 그만 말하자 한다. 그러나 세월호로 인해 희생된 넋들에 대한 애도가 그리 잘 못된 것일까? 그래서 이 책은 모든 국민이 마땅히 해야 할 애도의 방법중 하나로 트라우마 이후의 삶을 말한다. 이 책의 내용은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 – 혹은 그들이 - 가 겪은 트라우마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게 된다. 트라우마가 어떻게 발생하며, 트라우마가 주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주체가 트라우마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트라우마 이후의 삶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그것도 그저 이론만이 아니다. 세월로 참사를 통해 얻은 트라우마를 통해서 트라우마를 구체적으로 학습하는 것이다. 언어가 현실로 나타날 때 그러나 나에게는 트라우마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책이 세월호 사건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먼저 고백하고 싶다. 세월호는 이미 잊혀진 것일까 그 잊혀짐에 대한 반성으로 저자가 열어준 ‘언어의 장막’에 먼저 주목해 보았다, 침몰, 사고, 몰살, 참사... 저자는 이런 단어들을 먼저 구체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내 보여준다, 그런 단어들이 그저 종이에 써진 글자가 아니라, 현실로 일어났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매일같이 수많은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그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현실을 일일이 확인하며 살아오진 않았다.>(16쪽) <언어는 형언할 수 없는 것과 맞닥뜨리기보다 그것을 덮어주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16쪽) 그래서 우리가 ‘세월호 참사’라는 말에 대하여 저자는 이런 말로 언어의 불충분함을 말한다. <‘참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시신을 장막으로 덮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16쪽) 그래서 저자는 언어의 불충분함에 주목하면서, 말은 하나의 장막이어서 충격적인 현실을 감추면서 그 현실의 흔적이 남도록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는 이러한 언어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기억과 트라우마를 도출해낸다.
잊으려고 하면 잊히지 않고 오히려 기억하려고 하면 잊게 된다는 기억의 역설로부터 트라우마는 나타나기 시작한다. 트라우마는 충격적인 경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그 잔인한 경험 앞으로 다시 불려가는 ‘기억’의 미로를 헤매게 만든다. 저자는 그래서 그런 기억의 잔해로 남게 되는 트라우마의 본질과 실체를 더욱 명확히 규명하고,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책 『트라우마 이후의 삶』은 문자 그대로 트라우마로 인한 시간이 비참한 삶이 되지 않도록, 트라우마 이후의 삶을 새롭게 조명해준다. 트라우마를 넘어, 단순한 생존의 영위나 고통의 해소가 아닌, 삶에 최대한의 가능성을 돌려주는 것, 그런 삶을 살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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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6주기, 트라우마,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지난 4월 16일은 코로나19,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6주기를 간소하게 치렀다. 목포 신항, 흉물스런 세월호 거치대 앞에서, 세월호의 상처를 향한 정신분석의 애도, 이 책은 프로이트라깡칼리지에서 지은이 라깡주의 정신분석가 맹정현 선생이 2014년 5월 19일부터 진행한 ‘트라우마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재구성한 것이다. 강의가 처음 시작된 때는 바로 세월호가 침몰한 그 해 4월 16일에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다. 배의 유리창으로 희미하게 보이던 아이들, 바닷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배의 끝자락, 수색하는 구조선들… 그날 우리가 본 몇 개의 장면들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지위에 절대적 무력감을 느꼈고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할 필요가 있었다. 강의는 그런 시도로 기획되었고, 모든 애도의 출발점이 말하고 쓰는 과정에 있듯 이 책도 그렇게 쓰여졌다. 세월호 참사를 겪기 전까지 트라우마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서 맴도는 말이었지만, 이 비극적 사건 하나로 트라우마의 징후는 더욱 도드라져버렸다. 과연 세월호의 아픔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라깡 정신분석 전문가로 임상을 실천하고 있는 저자는 이러한 고민으로 트라우마의 본질과 실체를 더욱 명확히 규명하고자 했다.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프로이트와 라깡의 논리를 교차시키며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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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6주기, 흉물스런 '세월호' 어둠의 그림자 지난 4월 16일은 코로나19,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6주기를 간소하게 치렀다. 목포 신항, 흉물스런 세월호 거치대 앞에서, 세월호의 상처를 향한 정신분석의 애도, 이 책은 프로이트라깡칼리지에서 2014년 5월 19일부터 진행한 ‘트라우마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재구성한 것이다. 강의가 처음 시작된 때는 바로 세월호가 침몰한 그 해 4월 16일에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다. 배의 유리창으로 희미하게 보이던 아이들, 바닷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배의 끝자락, 수색하는 구조선들… 그날 우리가 본 몇 개의 장면들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지위에 절대적 무력감을 느꼈고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할 필요가 있었다. 강의는 그런 시도로 기획되었고, 모든 애도의 출발점이 말하고 쓰는 과정에 있듯 이 책도 그렇게 쓰여졌다. 세월호 참사를 겪기 전까지 트라우마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서 맴도는 말이었지만, 이 비극적 사건 하나로 트라우마의 징후는 더욱 도드라져버렸다. 과연 세월호의 아픔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라깡 정신분석 전문가로 임상을 실천하고 있는 저자는 이러한 고민으로 트라우마의 본질과 실체를 더욱 명확히 규명하고자 했다.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프로이트와 라깡의 논리를 교차시키며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라깡주의 정신분석가 맹정현의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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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정현 씨의 글은 학문적이다. 포괄적으로 정신분석학을 다루면서 밀도 깊게 글을 쓴다. 맨 처음 이 책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 <세월호 애도>의 책으로 각인이 되어서 관심을 두었다. 이 책은 트라우마의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큰 숲을 조망하면서 대안을 마련해 주는 책이다. 맹정현의 학구열과 지적 열정이 책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어서 읽으면서 많은 배움을 얻었다. 책을 읽다가 든 생각은 어떠한 <트라우마>를 이야기 할 때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아야겠다는 자각이었다. 어떤 상처를 이겨낸다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트라우마는 없어지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광범위한 정신분석서를 이 책 속에서 핵심적인 부분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이 가진 강점이자 매력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고 현재진형형인 "세월호 사건" 그 자체의 심층적 기저를 조망하면서 핵심적으로 알아야 할 심리학의 이론들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나씩 조심스럽게 풀어내 주고 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책의 후반부인 마지막에 가서 트라우마를 대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 내지는 방법적인 부분들이 나오는데 이 책이 단순히 문제제기 뿐만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이다. 우리 사회가 다변화 되고 복잡화되면서 놓치는 것들의 심리적 공백을 이 책은 특정한 사건과 프로이트, 자깡의 이론들을 토대로 하나씩 분석해 풀이해 주고 있다.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은 자기 안에 다른 누구로도 환원될 수 없는 암초를 안고 있다. 트라우마는 그들을 고립시킨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고립시킨다. 트라우마의 치명적인 효과는 자기 자신으롭 터 고립시킴으로써 삶 속에 보이지 않는 벽들을 만드는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를 만들어 그의 삶을, 삶의 가능성들을 쪼그라들게 한다. (중략) 두려운 것은 피하면 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삶은 평온해지겠지만, 이제 그의 삶은 자심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벽 속에 갇혀 거기서 맴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트라우마는 우리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완전히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삶의 가장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핵심적인 내용들이 책 속에 정말 많아서 다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글이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낙관했던 트라우마에 대한 대중의 무지와 오해를 종식시켜 준다. 이 책은 비단 세월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한 트라우마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 중 진실을 대하는 자세와 환상에 깃대어 이야기하는 말이 말을 재생산 해 나가는 쓸데없는 도식들을 다시 한 번 재점검 할 필요가 있음을 이 책을 보며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이 좋은 책을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특히 학교에서나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군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부모들이 읽고 참고하면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다. 트라우마를 겪는 많은 우리 이웃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책은 조용히 되묻는다. 2016년을 이 책으로 열게 되어 기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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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화산이 폭발하는 재난영화를 본 적이 있다. 도시 주변의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도시로 흘러 내리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사람들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방법을 간구하다가 도로차단 콘크리트 벽으로 용암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영화 전반의 압권적인 화면에 비해서 결말이 너무나 싱거웠다. 인간이 만든 조잡한 콘크리트 벽이 용암의 흐름을 바꾸는 부분에서 현실성이 떨어졌다.
세월호 사건때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그 안에 300여명의 사람이 생매장 되자 국민들의 분노는 마치 화산의 용암처럼 폭발했다. 사회가 극도의 공포와 분노 가운데 휩쌓이고, 서로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넘쳐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인가 이 분노의 흐름이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세월호를 버린 선장이나 선원, 구조대, 정부, 세모그룹, 유병언...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분노는 정치라는 벽에 막히고 소멸되어 버렸다. 어떻게 그 거대한 분노가 누군가의 조정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흐르고, 결국에는 콘크리트 벽과 같은 상황에 막혀 사라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물질적인 용암이나 감정적인 분노도 사람이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그것을 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흐름의 물고를 터주는 것일뿐, 원래부터 그것들은 그렇게 방향성을 가지고 한 곳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자리잡게 되었다.
이 책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를 정신분석학 학자가 프로이드적인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15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잡았을 때 한 나절이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와 트라우마 같은 단어들은 익숙한 단어이기에, 또한 평소에 프로이드의 책을 즐겨 읽었기에, 이 정도면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이 책을 읽는데 무려 나흘이나 걸렸다. 그럼에도 아직 이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는 글이 이런 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자는 짧은 문장 속에 온갖 심리학 이론과 사회적 현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가 가져오는 트라우마와 그 트라우마의 속성, 그리고 극복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저자는 트라우마의 원인을 '죽음'과 '성(性)'으로 본다. 사람은 죽음과 성적 현실과 직면할 때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란 죽음과 성을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대면했을 때 생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과 성을 직면하기를 싫어하고 환상을 만들어 내어, 그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그 눈을 가린다. 죽음 사람의 눈과 마주치어, 그 죽음과 직면하기를 외면하는 것이다. 대신 장래식과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등을 말로 전달하면서 죽음을 덮는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성의 실체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여기서는 프로이드적이 생각이 많이 반영된듯 하다. 포로이드적 견해는 성의 근원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 광기 등이 있고, 그것이 근친상간이나 동성애, 또는 가학적인 모습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었을 때는 우리는 그것으로 인한 충격을 받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언어나 환상을 만들어 내어 그 충격을 완화한다.
세월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나 국가에 대해 우리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는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침몰하더라도 국가나 구조시스템이 무사히 사람들을 건져 낼 것이라는 환상, 우리가 위기에 처하면 국가나 타인이 우리를 도와 줄 거라는 환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또는 텔레비젼 영상을 통해 거대한 세월호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보았다. 환상이 아닌 현실과 직면하고 그 현실은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게 된 것이다. 국민적인 집단 트라우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일단 트라우마에 빠지게 되면 그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괴롭힌다.
트라우마에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다시금 환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환상이란 '언어'이다. 일단 어떠한 사건이 언어로 정의되거나 전달되면 그것은 더 이상 그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환상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단어들을 만들어 내고, 타인들에게 사건을 전달하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행위화라는 증상을 통해 자신이라는 주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극단적인 행위화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말과 환상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과 직면하면서 얻는 증오를 타인에게 돌리게 된다. 비겁한 행동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살기 위해 몸부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 세월호에 대한 분노가 용암처럼 굽이치며 대상을 향해 흘러가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결국 그 분노를 사람들이 조정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분노는 스스로 방향성을 가지고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살기위해 그 분노에 순응하며 자신을 맡겼던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물론 저자에 의하면 누구든 조금씩의 트라우마는 겪고 있지만...)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안전하고, 죽음은 멀리 있고, 불행은 나에게 닥치지 않는다는 믿음..... 저자는 이것을 환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깨어지고 현실에 접할 때 우리는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믿는 세상이란 결국 환상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현실과 직면하는 트라우마를 피하기 위해 세상이 말하는 환상 속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영화의 주인공 레오처럼, 우리는 현실을 접하기 싫어 환상의 세계 속에 안주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환상을 깨려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그 환상 속에서 평안한 잠을 자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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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울정신분석포럼 부설 프로이트라깡칼리지의 강의를 옮긴 것이다. 트라우마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다. 트라우마는 우리의 정신에 암초를 만드는데 그 암초를 피하게 되면 삶에는 그만큼 보이지 않는 벽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곳들, 할 수 없는 것들, 누릴 수 없는 것들이 삶에 새겨질수록 삶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된다. 그런데 어떠한 사건이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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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이후의 삶, 부제는 잠든 상처를 찾아가는 정신 분석 이야기다. '세월호의 아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어느 정신분석가(맹정현)의 트라우마 강의록이다. 정신분석이라는 전문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곳곳에 나오는 세월호 사건 때문에 이 책을 쉬이 읽을 수 없었다. 다시 2014년 4월 16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지만, 그럴수록 한 자 한 자 눈에 힘을 주고 읽었다.
왜 트라우마를 입은 자들은 견딜 수 없는 그 고난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우리 삶을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책은 이러한 트라우마의 수수께끼에 접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단순히 트라우마가 무엇인지를 다루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트라우마가 어떻게 우리 삶을 변형시키고 불투명하게 하는지 추적하려 한다. 도대체 트라우마 이후 우리의 삶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 삶에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이것이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이다. 우리는 이 질문들에서 시작해 트라우마의 불투명한 수수께끼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트라우마에 대한 단순한 논의를 넘어 우리가 어떤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탐구가 될 것이다. -p. 8
트라우마의 이후의 삶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읽는 이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죽음을 어떻게 감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에게 삶은 절박하다. 트라우마에 의해 삶이 잠이 되거나, 아니면 불면에 빠져 죽음만이 성공이 되는 삶, 그것이 바로 트라우마 이후의 삶, '비참함'이라는 이름의 삶이다. -p. 138
'비참함'이라는 이름의 삶에 뭐라고 했는가? "이제 그만 좀 해라. 아이들 가지고 한몫 챙기려고 하느냐.", 라는 등의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참 쉽게도 뱉었다. 그 말들은 다시 당사자들에게 상처, 그리고 트라우마가 됐다. 작년 '세월호 의인' 김동수 씨가 자살 시도를 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런 소란도 잠시, 세월호 사건은 말로는 다들 잊지 말자고 해 놓고 정부의 무관심, 세상의 무관심에 점점 잊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저자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치료가 될 수 있고, 가능성이 많았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이 역시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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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부터 마치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세월호의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것이 나의 무능함이었든, 나의 세대가 지켜주지 못하고 멍하니 보기만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든, 아직도 그들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아서였든, 거짓말을 일삼는 정부와 미디어에 대한 불신이었든...... .
어떤 것을 가득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남았다. 그런데 그 자리들을 메워보려 시도조차 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두렵고 겁이 난다. 트라우마가 생겨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트라우마...가 생긴 원인은 무엇일까? 자꾸만 피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면서도 더는 멍하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없는 약속을 하게 되는 것은 왜 일까?
이 책은 나에게 조금 어려웠다. 가끔은 집중 할 수 없었고, 가끔은 금세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원인만을 살피는 전개를 따라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단락에 이르자 트라우마가 생기는 원인부터 알아야 더 깊이 빠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그야말로 맨 몸으로 받아들여야하는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는 것부터가 그것에 대한 치료의 시작인 것이었다. 트라우마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거나 타자에게 돌리거나 하는 것, 언어로 표면위로 내밀어서 잊을 수 있게 하는 회로판을 만드는 것이 죽음을 택하지 않게 하는 방법임을 알았다.
현실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반대로 그렇게 부실한 현실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알 수 있다.p96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이런 것들을 수없이 중복적으로 겪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그들대로, 가족들은 또 그들대로 말이다. 그들이 제발 언어를 통해 트라우마를 재구성하여 덜 아파했으면 좋겠다. 감히 손 댈수 없는 그들의 아픔이 조금씩이라도 모래에 섞여서 날아갔으면 좋겠다.
▦ 책 속 트라우마가 흥분이나 긴장이 자아가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될 때 발생하는 충격이라면, 여기서 문제는 모든 흥분이나 긴장이 아니라 자아가 감당할 수 없는 흥분이나 긴장이다. p.107
(...)그들을 절망 속에서 빠뜨린 것은 무기력한 상태에서 아이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어가는 자들의 시선과 마주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방금전까지 통화하며 목소리를 들었던 아이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은 그들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가는 자의 시선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마주친 시선으로 죽음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떼어내는 것이 어려워졌다. p,36~37
죽음을 어떻게 감히 성공이라고 할수 있을까. 하지만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에게 삶은 절박하다. 트라우마에 의해 삶이 잠이 되거나, 아니면 불면에 빠져 죽음만이 성공이 되는 삶, 그것이 바로 트라우마 이후의 삶, '비참함'이라는 이름의 삶이다. p.122 |